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 (롬12:2)
서언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첫째부분은 1장-11장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구원의 진리를 다루고 12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후반부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가치관,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는 다른 원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여 구주로 믿고 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바로 변화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의 본질부터 시작하여 인생의 전체적인 지대한 변화를 갖게 됩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가장 유명한 보수적 설교자의 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교회를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나온 사람도, 아직 변화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자기의 경험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 이 분은 의사였습니다. 이 분은 때어날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성장해선 직분도 맡아 봉사를 했습니다. 매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교회를 나서면, 다음 주일 아침 교회에 올 때까지 주님은 거의 잊어버리고 삽니다. 주님을 찾지도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은 귀에 때가 안도록 들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적도 없었고, 문제를 만났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 본 적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죄의 문제로 고민 해본적도, 마음 아파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삶에 한 터럭만큼의 변화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 삶에 있어서 왕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변화받지 못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삶의 근본적 변화, 예수님은 나의 왕이 되시고 나는 그의 종이 되는 근본적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으로 완전한 변화를 받을 수 있을까요?
롬12:2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 입니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받는다”는 라는 단어 ‘쉬스케마티조‘는 '비슷하게 꾸미다', 즉 같은 모양으로 '만들다'(상징적으로),일치하다, ~에 따라 자신을 꾸미다(본받다)의 뜻입니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들이 본 받아서는 안 될 이 세상 풍조란 어떤 것들일까요?
1) 세상의 풍조는 절대적인 가치 혹은 진리가 없다는 듯이 삽니다.
절대적인 윤리도,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는 상대주의가 점차 우리의 삶 속에 깊은 영향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나 윤리가 무너지면서 도덕적 혼란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판단기준이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이 없습니다. 상대주의의 물결이 세대를 휩쓸어가고 있습니다.
2) 이 세상의 풍조는 즉흥적인 만족을 우선으로하는 문화입니다.
즉각적인 해답,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즉각 즉각 해답이 주어져야만 만족하는 문화입니다. 인생의 행복도 즉각적인, 순간의 쾌락에서 찾다가보니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고, 쾌락주의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이 대한민국이 이제는 마약 청정국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법무부에 의하면 ,인구 10만 명당 연간 마약사범 20명, 인구 5천만명 기준으로는 만명 이하인 국가를 '마약 청정국'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1만 명을 초과했기 때문에 그 지위를 상실했다고 표현했습니다.
3) 이 세상의 풍조는 물질만능주의 입니다.
인간이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돈이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되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4) 이 세상의 풍조는 개인이기주의입니다.
개인을 존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삶의 길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지면 주변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마음이 새롭게 변화 받아야 합니다.
변화의 본질은 근본이 달라지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근본적 변화 체험을 기초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우선 사람이 새로워져야 다른 모든 부분의 변화가 가능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가장 큰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입니다
1)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즉 내면세계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씀묵상이 필수적입니다. 말씀을 묵상할수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분해되고 소화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룹니다. 히브리서4장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쩌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변화가 시작됩니다(히4:12)
2)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면 스스로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가 가능해 집니다.
사무엘상에서는 마음을 ‘중심’(삼상16:7)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이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중심은 우리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 할 때 말하는 변화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감정이나 행동수정, 또는 환경개선 수준이 아닙니다. 속사람의 근본적인 갱신을 뜻합니다. 중심이 새로워짐을 말합니다.
성경주석가 핸드릭슨은 오늘 본문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의 말씀을 이렇게 명확히 해석해줍니다. 첫째, 현재 시제입니다. 성경은 계속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단회적 변화로 멈추지 않고, 발전적 변화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둘째, 명령형입니다. 변화는 옵션,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변화를 받아야만 합니다. 명령형이란 권고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변화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셋째, 수동태입니다. 우리에게 변화시키라 하지 않고, 변화를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수동태는 변화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변화의 동력은 하나님입니다. 변화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사도바울도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으려고 자기를 치면서까지 기도에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엎드려 기도할수록 속사람의 본질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굴복시키기 위해 엎드려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결론
현재 미국 켄터기 주에 위치한 에즈베리 부흥운동이 한창입니다. 2월 6일에 채풀 시간에 시작된 부흥은 당시 <겸손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떠나지 말세요> 라는 설교를 듣고 20여명의 학생이 머물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을 느끼고 거기서 한사람이 나와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자가하여 지금까지 기도와 찬양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나요? 바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내가 변화되지 아니하면 어떤 것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물이 소생되는 이 봄을 맞이하여 새롭고 근본적인 변화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 길은 오직 변화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