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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수필과 비평』(통권 137호) p.p.231-241
수필가가 감동한 명수필 ③ 박규환의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가장 오래 남는 향기
최 원 현(nulsaem@hanmail.net)
봄이란 자연 질서 가운데 가장 반갑고 신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은 듯 까맣게 변해버렸던 땅이며 나무가 어떻게 봄이 된 것을 알고 싹을 틔워 올릴 생각을 하고 언 땅을 녹여서 생명들을 불러내는지 신기하고 가상하다.
꽤 오래전 시골에 과일나무 몇 그루를 심었었는데 다음해 봄 장모님께서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과일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과일나무에 꽃이 핀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저러시나 생각하고 있는데 장모님은 그냥 꽃이 핀 것이 아니라 제가 어찌 사과나무이고 복숭아나무인지를 알고 사과꽃, 복숭아꽃을 피웠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피는 것이 아니라 제가 피워야 할 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그 꽃을 피워낸 나무가 기특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린 일상에서 주어지고 되어지는 일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고맙다거나 신기해하지도 않는다. 귀하다거나 감사히 생각도 않으며 그래서 늘 하찮게 여긴다. 그렇게 어제 한 약속까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들이니 저 하찮아 보이는 나무가 그것도 길고 긴 겨울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까맣게 변해있던 것이 어떻게 이맘때쯤이라 하여 후닥닥 싹을 틔워내고 꽃을 피워내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봄 자체가 기적이다. 봄이라 입 속으로 되뇌기만 해도 풀 향기 꽃향기가 입 안 가득 고이고 어디선가 벌 나비가 날아드는 환상에 젖을 만큼 봄은 신비롭고 놀랍다. 그런데 박규환 선생의 봄은 안 그랬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나도 내 삶의 마지막 봄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아무리 봄이 희망이고 생명이라도 그 봄을 마지막으로 맞는다면 그게 어찌 희망이고 생명이랴. 그래서 선생의 수필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안타까움 가득 선생의 심정이 더욱 잘 이해가 된다.
박규환 선생은 이 시대가 낳은 참 수필가다. 이만한 공감과 감동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필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있는가.
선생의 호는 모헌(慕軒)이다. 1916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후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후학을 길러내다가 1982년 전남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은 영문학자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던 선생이 왜 영문학자로 변신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의 수필 작품들을 보면서 문학지향적 취향과 기질이 경제학자보단 영문학자 쪽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매원 박연구 선생이 어느 날 박규환 선생의 수필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셨다. 책을 보내주셔서 읽었다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시며 “수필 좋지?”하셨다. 웬만해선 좋다고 안 하시는 매원 선생인데 모헌 선생의 수필엔 “좋다.”를 연발하셨다.
모헌 선생은 평생 병치레를 하셔서인지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매원 선생이 좋다 좋다 하는 그런 수필을 쓰면서도 모헌 선생은 늘 ‘어쩌다 쓴 글장난’이라며 자신의 수필을 희필(戱筆)로 여겼다. 글을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겸손하셨다. 그런 그분에게 1993년 제6회 현대수필문학상 대상이 주어졌다. 웬만한 수필가들도 박규환이란 수필가를 아는 이가 드물 때였다. 그런데 그냥 수필문학상도 아닌 대상이었다. 이 대상은 1977년 제1회 금아 피천득 선생이 받으신 것을 시작으로 16년이 되는 그때까지 단 5명(피천득, 이희승, 김소운, 김태길, 차주환) 밖에 수상하지 못한 권위있는 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을 박규환 선생이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몇 편만 읽고 나면 금방 당연히 받을 만한 분이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1990년 선생은 아내와 사별을 한다. 서울 불광천변의 10년 중 3년을 아내와 함께한 상태였다. 그런데 선생의 수필은 그 후 더 중후해진다. 노인, 고독, 삶, 죽음 등 빤한 내용들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데도 전혀 가볍거나 식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격이 있는 수필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자연의 질서와 삶의 질서를 하나로 보며 세상의 질서도 거기에 합류하길 바라는 선생의 철학과 인생관이 담긴 내용이다. 피고 지는 꽃들의 섭리, 오고 가는 생명의 질서, 태어나고 죽는 삶의 철학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하게 그려진다. 지난한 삶을 살아온 자만의 달관한 느낌이며 아쉬움이며 반성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순명이다. 아름다운 받아들임과 때를 앎이다. 내가 아는 때, 너희도 알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그런 선생의 수필을 읽는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찼다. 난 편지를 드렸다.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에서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로 끝나버리지 않도록 <다시 봄을 기다리며>를 쓰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신에게 몇 번의 봄이 남아있건 주어진 삶에 순명코자 하셨다.
저는 나이도 많고 오랜 병고(病苦)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제가 쓰는 수필이란 것도 할 일 없으니까 세월 보내는 방편(方便)으로 간혹 희필(戱筆)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누구에게 편지 쓰는 셈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수필다운 글이 나올 리 없습니다. (1996. 1. 23. 편지 중)
선생은 그렇게 겸손하셨고 어떤 욕심도 갖지 않으셨다.
선생은 2003년 세상을 뜨셨다. 2003년 12월 23일 돌아가시어 성탄절 날 발인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름답게 퍼지는 그 축복의 날에 선생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88세. 미수(米壽)였다. 그즈음 난 가장 바쁜 때이기도 했지만 선생의 부음을 듣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되어 얼마나 죄송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돌아가시기 3개월여 전 통화를 했었다. 2003년 9월 말경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으로 나온 <숨어있는 향기>란 선집을 보내드렸는데 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집으로 전화를 하셨던가 보다. 책 잘 받았다고 꼭 전해 달라고 하셨단다. 저녁에 들어와서 전해 듣고도 너무 늦어서 전화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다음 날 또 전화를 하셨더란다. 아무래도 전해달라고 하는 것도 인사가 아닌 것 같아 직접 통화라고 하려고 다시 하셨단다. 그러나 그 전화도 내가 받지는 못 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조금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또 전화가 왔다.
선생께선 숨이 가빠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이 몇 자라도 펜으로 써서 축하와 감사를 해야 도리인데 병중에 누워 있어서 그러지 못해 목소리로라도 직접 축하를 하고자 하셨단다. 그러면서 일어날 수도 없어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여 누워서 전화를 하고 있는데 이해해 달라고 하셨다. 너무나도 죄송하고 감사하고 부끄러웠다. 아들 벌의 후배 수필가인데 그토록 병고 속에서도 치하를 해 주시려는 그 마음은 ‘너도 이렇게 해라.’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다.
수필은 품격의 글이요 인격의 글이다. 모헌 선생의 그런 삶의 자세, 글을 쓰는 이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배려는 선생의 수필이 바로 그런 결정체였다. 작품 속에 작가의 인격이 투영되거나 녹아나는 수필, 특히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 보면 선생이 살아오신 삶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며 보여진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은 이런 때, 이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일 것 같다. 조금은 길고 사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작품이지만 난 선생의 이 수필을 읽고 있으면 다정하게 편지를 써서 보내 주시고 아픈 중에도 전화를 걸어 격려를 해 주시는 선생의 인품 곧 ‘사람됨’이 선연히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좋다.
한 편의 수필이 읽는 이에게 전해지는 것은 가슴에서 가슴으로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고 있으면 그분 삶의 순간들이 자란자란 전해져 온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씀이 되어 ‘그리 살아라.’고 말한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너희는 더 늦기 전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도 들린다. 좋은 수필의 힘이다. 선생은 그렇게 가장 오래 남는 향기로 수필 <다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남기셨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착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월간 한국수필 주간,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상록수문예대상 수상 외. 수필집 : <날마다 좋은 날>, <문학에게 길을 묻다> 등 20권.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박규환
여러 해 전에 나는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라는 어설픈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라고 내가 무슨 봄을 기다려 애탈 만큼 염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때도 이미 칠순을 넘긴 노인이었으니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을 빌자면 “종량제 쓰레기 봉지에 담긴 채 대문 앞에서 쓰레기차가 오거나 기다릴 푼수였고 따라서 봄이 온대서 내 젊음이 되살아난다거나 일찍이 품어본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던, 젊은이라면 으레 가져야 된다고 할 말에 궁한 훈장이 자주 차용(借用)하는 그 ‘야망’의 새싹이 뒤늦게 눈틀 기적을 기다려서도 아니었다.
늙었으므로 봄이 오면 그냥 날씨가 따뜻해서 좋고 요란(搖亂)한 백화(百花)가 싫을 리 없으며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실눈을 감으면 멀리 잊혀진 젊은 날의 추억이 졸음이 오듯 다녀가기도 하는 그런 봄을 난들 싫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은 내가 오랜 세월 봄을 기다리며 살아 온 이유의 대부분이 오랜 병석에 누웠을 때 누군가의 봄이 오면 차차 나을 것이란 예언 비슷한 말이 내 병약한 심신에 위안과 기대를 주었고 또 지금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내가 희망도 없는 병석에 누워있을 때 나 스스로도 믿지 않는 같은 말을 신비로운 봄의 힘에 우의(寓意)를 담아 열심히 타이르던 그 말이 바로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라는 조잡한 내용의 글이었다.
봄은 원래 찬란한 희망의 계절이라 가을을 위해 씨를 뿌리는 계절이요 햇볕 따사로와 새싹 돋아나고 검은 대지의 조화(造化)가 빚어내는 색채 다양한 꽃들의 경염(競艶), 검은 어미의 자식인데 검은 꽃이 없음은 날로 세상에 피어나는 악(惡)의 검은 꽃만으론 안 된다고 설교함일까!
어찌 됐건 그땐 여러 가지 뜻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끌어안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아내를 생각할 때 지금 더 엷은 눈물이 안구(眼球)를 덮는다. 내가 병석에 눕기 전 한때 꽃 가꾸는 취미를 가진 적이 있었다. 2백 개 3백 개의 화분을 매만지면서 지나다보면 어느새 봄은 신록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상춘(賞春)이라는 말을 잊은 채 한 계절의 세월을 허송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상춘이지 봄맞이의 기쁨이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때는 봄을 기다려야 할만치 내게도 희망이라느니 기대라느니 그런 것도 있었고 죽음이란 말은 아직 배우지 못한 채 젊음을 보냈고 내가 칠순을 넘기고 나서도 자유롭지 못한 보행에다 앓고 눕는 것이 나의 본업쯤일 때도 죽음 같은 건 별로 생각지도 않았었다. 젊었을 때 몇 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대담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 항시 건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 온 탓으로 사람 사는 것이란 모두 이런 것쯤으로 알았던 착각이 죽음은 아직도 내게서 멀다는 또 다른 착각을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던 나인데 아내가 죽고 나서 갑자기 늙어짐을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남녀유별의 옛날 부부란 게 다정했으면 얼마나 다정했으랴만 그 중에도 나는 언제나 아내에 대해선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장부된 체면이나 권위인 걸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옛 어른들이 그랬듯이…) 이제 생각하면 그건 나의 애정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뿐임을 깨달은 지금은 내가 사는 동안에 회한이 있다면, 혹은 죽은 뒤에라도 내게 뉘우침이 있을 양이면 별것도 아닌 권위의식에 우쭐댔던 나의 협량(狹量)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권위를 뽐낼 대상이 없어졌으니 이제 나는 봄 같은 건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 엉뚱한 핑계를 대곤 한다. 뽐내는 것과 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련만 그게 어느 편에서 생각하면 일종의 추모일 수도 있고 이제 참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인데도 이다지 길게 느껴지는 모순은 나의 하찮은 권위를 달래줄 상대가 없어진 고독의 탓으로 돌릴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어찌 됐건 나는 이제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잃어가고 있다.
봄이 오면 햇볕 다사롭고 꽃피고 새 우는 자연의 반복을 80년 가까이 경험했으니 되풀이 두세 번도 싫증날 일이 적잖은데 그래도 모자랄 것이 무엇이며 언제나 그게 그것 아니던가! 이런 생각이 바로 내게서 봄 기다림을 앗아간 이유인 듯 싶다. 무슨 희망이 있고 기대가 있다거나 하다못해 다정한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기는 겨울이나 다를 게 없는데 이제 봄을 기다릴 흥미가 있을 턱이 없다. 젊기라도 해서 봄이 오면 특별히 해야 될 일이 있다거나 약속된 기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봄이 어느새 여름으로 바뀌고 나면 나의 남은 세월에서 한 해 4분의 1을 앗아간 꼴이고 보니 봄이 영광일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거기다 나의 주변에 봄이 와 주기를 바라는 요건이 모두 없어지면서 봄 기다리는 마음에 이변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의 앞날이 머지않아 이렇게나마 살아갈 날이 몇 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는데다 날로 달라져 가는 육체적 정신적 시들어가는 변화에 부딪치면서 봄 기다리는 화사한 꿈을 어떻게 제대로 간직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는다. 그땐 서울이란 곳이 우리나라 수도란 것밖에 모르는 나로선 관청에 잡아다 놓은 촌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는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갈 곳도 없었으며 설혹 갈 곳이 있었대야 이 현란한 서울의 거리에 나는 한 마리 길 잃어 허둥대는 개미에 불과했다. 이럭저럭 지나는 동안 우리 마을이 불광천 변임을 알게 되고 이 불광천 냇물이 우리 마을과 건너편 마을을 갈라놓고 있는데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어서 사람이나 차량의 교통에 지장을 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서울에 온 게 늦가을이었으므로 죽은 듯이 한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자 남들처럼 이른 새벽에 산책을 나다니기도 하고 차차 통이 커져서 다리 건너 마을 앞 8차선 도로의 인도(人道)를 따라 이 애잔한 건강을 위한답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보(蔓步) 걷기를 시도하곤 했었다. 거기서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고 며칠이고 눈에 띄지 않으면 기다려지기도 하는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매일 새벽 불광천 언덕을 걸으면서도 그 기나긴 언덕을 뒤덮은 얽히고설킨 가시덤불 같은 게 무슨 나무인가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3월이 다해갈 무렵 잎 새도 싹트기 전에 노란 꽃망울들이 터지더니 마침내는 끝없는 냇물의 양편 언덕이 노란빛 천막을 덮어씌운 듯, 푹신한 노란 이불을 깔아 놓은 듯 온통 꽃으로 덮여 있는데 그 꽃이란 것의 하나하나는 호롱불보다도 클 것 없는 적은 꽃잎의 모듬이었다. 이른바 그게 남 먼저 초봄을 알리고 이내 저버리는 개나리 꽃숲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열 번의 봄을 이 개나리의 꽃숲을 헤맨 셈인데 잠깐 피었다 이내 저버리는 이 단명(短命)한 꽃은 화무십일홍인데 겨울을 빼곤 끊임없이 피어 궁한 줄 모르는 무궁화를 국화(國花)로 정한 조상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나 화들짝 피었다 사라지는 개나리도 어차피 순간의 영화를 즐기고 끝날 세상의 상징으론 밉지 않다. 그러나 이 꽃이 나를 열 번 즐겁게 한 것 이상으로 나를 아쉽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10년 동안의 3분의 1은 혈압으로 쓰러졌던 아내와 동반이었다. 죽음이 멀지 않은 자의 눈에도 꽃은 기쁨이었던 듯 아내는 꽃잎을 만지느라 자주 불편한 다리를 멈추곤 했다. 그 뒤 얼마지 않아 아내는 다음해 개나리꽃을 다시 보지 못한 채 결국은 갈 곳으로 가버리고 그 뒤론 처음 내가 발견했던 그 개나리 언덕을 또다시 나 혼자 걷기를 4년째가 넘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내가 가버린 뒤의 개나리 언덕은 내겐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했고 언덕에 개나리가 필 무렵이면 아예 그곳에 나타나지 않고 아침 산책의 코스를 바꾼 게 두 해나 된다. 꽃이 다 진 뒤에 다시 그곳에 나타나면 꽃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지난 해 가을 노인에게 자주 있을 수 있는 낙상(落傷)을 입어 겨울 내내 산책은 그만두고 외출마저 하지 못하다가 요즘 부드러워진 바람에 이끌려 얼마 전에 냇가에 나가보았더니 내가 겪은 10년의 강산이 변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이 천변을 통과하게 된다는 듯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는 물론 언덕을 온통 뒤덮었던 개나리 숲은 땅을 파고 고르는 기계에 의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쇠기둥 같은 철재(鐵材)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더러는 쇠기둥을 세우고 철판(鐵板)을 깔아 이 불광천변의 일부가 복개(覆蓋)되고 있었다. 이건 개나리 따위가 피고 지는 것이 아닌 천지개벽이었다. 나는 사라져버린 개나리숲에 대한 회고(懷古)의 아픔과 함께 실오리보다도 연약한 심술궂은 안도(安堵)가 싹트는 뜻을 모르지 않는다. (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으면 꽃잎을 만지는 아내의 추억에서 해방될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해서 개나리꽃 언덕에 개나리가 종적을 감추고 이 길이 연명(延命)의 행로(行路)란 신념으로 눈비 가리지 않던 첫새벽의 소요객들이 지금은 모두 어느 곳으로 산책길을 바꾸었는지 내가 나가지 못하고 그들이 나오지 않으니 이젠 만날 길이 없다. 이대로 다시 산책길이 뚫려서 옛날 모습으로 환원한다 치더라도 늙고 병든 이의 희망과 기대의 그 길에서 옛날의 그 얼굴을 몇 사람이나 찾아볼 수 있을지 아마 그들과의 재회는 이걸로 끝나기 쉬울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여기 개나리꽃처럼 이미 사라졌기 쉽고 아니면 내가 그들보다 먼저 지는 개나리일지도 모르니 그들과 나와의 관계는 잠시 옷깃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뿐으로 가슴 어딘가에 아픔만이 남는다.
지루한 탈선으로 처음 의도했던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속된 수필관의 일례(一例)가 되고 말았다. 80회의 봄을 맞이한다는 일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그건 이 어려운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아왔다는 증좌이긴 하니 그 중 어느 한 봄도 이렇단 기억을 찾아낼 수 없으니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이었음이 자명하다. 봄이 어디 오늘 왔다가 다음날 가버리는 단명한 계절인가! 달수로는 적어도 석 달을 끈다. 그러니 240달의 봄을 맞고 보낸 셈인데 그 많은 봄들의 어느 한 봄의 기억의 편린이나마 더듬을 수 없으니 이제 내겐 아무 쓸모도 없는 봄을 더 기다리기가 부끄러울 노릇이다.
불광천변의 개나리꽃도 꽃상여처럼 다시는 되돌아볼 수 없이 되고 내가 생애를 두고 매만져 왔던 화분들은 이젠 내 힘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깨지고 빈 화분만 담장 아래 무더기로 쌓이고 있다. 아니 올 사람을 기다림도 이젠 헛되고 이용가치가 없어진 나를 찾는 사람도 이젠 드물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노인에게서 잠시 외로움을 달래고자 걸려오는 전화를 더러 받는 게 전부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도 봄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거기다 들려오는 문 밖 소식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요, 따라서 한 핏줄이요, 동포요, 언어가 같고 얼굴 생김이 같으며 온후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천성이 개결(介潔)한 백의(白衣)의 순결은 통일에만 적용되지 않는 자랑인가!
통일의 희망이 믿어지지 않는 나라에 꽃피는 봄이 얼마나 영광된 일일 것이며 만나야 될 사람을 끝내 만나지 못하는 봄도 마찬가지다. 늙은 사람에게 기다릴 시간은 이젠 없다. 돈이면 그만이니 그걸 위해서라면 따로 생각하고 망설일 이유란 없겠으니 해서 부끄러운 일이 하나도 없는 세상, 나중엔 아비의 목에 칼을 꽂는 봄이고 보면 햇볕 다사롭고 꽃망울이 이쁘고 향기에 취하고 싶어 봄을 기다릴 유유한한(悠悠閑閑)이 이제 다 살아버린 늙은 나에게도 있다면 그건 기적일 뿐일 게다. 내가 앓았을 때 봄이 오면 나을 것이라던 예언 같은 위로를 믿고 기다렸던 봄이나 아내의 숙환(宿患)의 치유를 위해 애달프게 기다리던 봄은 이젠 내겐 없다. 내가 만일 봄을 기다린다면 이젠 내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으니 봄도, 믿기 어려운 통일도 그 밖에 일체의 기다림에서의 해탈이 나의 기원일 뿐이다.
봄 그 자체만은 영원히 찬란한 계절일 테지만 거기 희망을 건다거나 기다린다거나 한다는 것은 지구에 기생하는 각자의 조건에 따르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
박규환
일 년에 봄이 두 번쯤 있어 주거나 일 년 내내 봄이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나는 자주 하곤 한다. 뭐 봄이라는 계절을 내가 특별히 좋아해서가 아니라 오래 병상에 시달리는 아내에게 봄을 빙자한 위로의 말로 아픔을 달래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위로의 말이 실제로 육체의 아픔을 덜어 주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에 희망을 줌으로써 잠시나마 그렇게도 열망하는 삶에의 기대를 잃지 않으리란 생각에서다.
70여성상인 생애의 반 이상을 병고에 시달려왔고 완전히 기동불능의 상태에서 병상에 누운 채 이래 저래 10수년의 세월을 보낸 경험이 있는 나는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앓고 누웠던 처음 몇 해 동안은 일가친척을 비롯해서 친구며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문병을 오곤 했다.
문병객이 찾아왔을 때 뜰에 내려서 그들을 맞이할 수 없고 그들과 같이 담소할 수 없으니 나는 누웠고 그들은 머리맡에 앉아서 마치 임종이나 지키는 자리처럼 숙연한 분위기가 내겐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하기도 했고 묘방(妙方) 한두 가지쯤 들려주는 것이 예사였지만 그냥 앉아있기 힘들어서 해보는 이야기같이 들리곤 했다. 그런데 문병객들의 더러는 봄이 되면 좋아질 것이라는 예언과 위로의 말을 내게 들려주곤 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니 어떤 약보다도 자연의 위대한 힘에 의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봄이 오면 좋아지리라”는 말에 마음이 끌리곤 했다. 그래 한겨울 두터운 이불을 덮고, 덧문 까지 닫은 채 앓고 누워 있는 주제에 어드메쯤 오고 있는지 가늠되지 않는 봄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나의 남아있는 전 삶의 뜻이었다. 그러나 봄이 열 번도 넘어 왔다가 가고 뜰아래 목련이며 철쭉이 열 번을 피고 또 지곤 했지만 나는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봄이 올 때마다 이 봄이 어쩌면 내게 줄지도 모를 건강에다 동면한 개구리가 봄되어 튀어나오듯 나도 10년 병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은 희미하지만 찬란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병상에서 빠져나온 건 봄이 아니라 여름이었다. 아니 여름의 짙은 녹음은 봄에 눈튼 새싹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니 결국 봄의 소생력이 여름에 결실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루에 따사로이 비쳐드는 봄 햇살을 받으며 방문턱을 넘어 기어 나와 앉았기도 하고 건강했을 때 담 밑에 심어 두었던 옥매화의 이르게 피는 꽃을 깊숙이 꺼진 눈으로 바라다 볼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유지했을 뿐인데 초여름엔 지팡이를 짚고 어렵사리 뜰아래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봄의 저력이 여름 들어 열매 맺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이런 걸 일러 신의 섭리라 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자유롭지도 건강하지도 못하지만 아직도 나는 여명(餘命)을 이어가고는 있다. 그런 체험을 갖은 나인데 하루아침에 아내가 병상에 누운 지 두 번째 봄을 맞고 보냈다. 40년 병부(病夫)를 보살펴서 가냘픈 오늘의 명맥이나마 유지시켜 준, 내겐 고마움 아내인데 지병인 고혈압이며 당뇨로 어느 날 자고 난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나 또한 본인 못지않게 당황했었다. 소위 중풍의 일종이어서 그에 따른 양 한방(洋漢方)의 좋다는 치료 방법은 거의 거친 셈인데 아내는 아직도 그대로이다. 정밀한 사진 촬영에 의하면 일과성(一過性) 혈전증(血栓症)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인데 말과는 달리 회복할 기미는 아직은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아내는 나의 이러한 기록을 볼 기회는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 환자에 대해서 삼가야 될 말이나 생각을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아내를 격리하는 비정(非情)을 느끼게 한다.
아내와 나는 나이의 차이가 적지 않은 9년의 세월이고 보니 내가 먼저 죽어야 될 일이고 또 젊어서부터 병고에 시달려만 온 나야말로 아내가 너무 젊은 나이에 망부(亡夫)의 변을 당할게 걱정이었는데 이제 나의 나이도 70도 몇 해를 넘기고 아내 또한 회갑을 지난 지 여러 해이고 보니 망년의 세월이 그렇게 다를 것도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처음은 아내의 병이 그렇게 오래 끌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중풍의 일종이겠지만 증상이 그렇게 심한 것 같지 않았고 또 의사들도 결과에 대해서 낙관하는 편이어서 그 방면에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선 의사의 낙관이 전염되어 의약과 세월이 주효하리란 기대를 잃지 않은 셈이다.
아내가 앓아누운 것이 겨울이어서 나는 아내를 위로할 때 언제나 봄이 오고 있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유가의 전통 속에서 자라온 나는 외견상 아내에게 다정함이나 친절 같은 걸 표시할 줄 모르는 성격이 되어 있어서 그 말도 아마 상냥한 표정으로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봄’을 미끼로 아내를 위로코자 함은 지난날 내가 앓고 누웠을 때 그렇게도 휘황했던 기대를 이젠 아내에게 심어주고자하는 나의 노력이요 처방인 셈이다.
따스한 햇볕에 대지를 녹이고 새싹이 돋으며 개나리 진달래가 피는 소생의 봄이 오면 사람도 또한 자연의 일부인데 어찌 그대로일 수가 있겠느냐는 게 위로의 요지였다. 마치 봄이면 아무도 죽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설득하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해 봄은 그 간절한 기대와 희망을 배반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이면 거의 흉내는 내본 셈인데 결국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다. 그건 희망과 기대가 차츰 희박해졌다는 반증이고 보면 나의 차지는 맥 빠진 허탈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은 싫다. 그러나 싫대서 피할 수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건 죽고 사는 게 사람의 뜻이 아니란 것 아니겠는가. 자살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그도 죽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죽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야 된다는 것이 거룩한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는 실제로 죽는다는 걸 그렇게 의식한 적이 없다.
죽음의 두려움을 몰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체념의 상태에서 긴 세월을 병상에 누웠었을 뿐이다. 죽기를 기다린 건 아니지마는 죽어질 시간을 망연히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나서 구차한 삶이지만 고희(古稀)를 넘기고도 아직 여명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점에서 나와 다르다. 삶에 대한 집념이 지나치게 강한 것 같다.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어려운 일이기야 하지만) 삶 같은 건 의식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고 ‘마음을 비웠을 때’ 병은 저도 모르게 기적처럼 물러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내는 그게 아니다. 아내는 40년 천주교인이지만, 그리고 조석으로 기도는 드리지만 속욕(俗慾)이나 기복(祈福)의 대상일 뿐임을 나는 안다. 그의 신심(信心)을 욕되게 하자는 게 아닌, 나 또한 그 범주(範疇)를 벗어나지 못하는 속물(俗物)이기에 이런 마음의 속삭임을 적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일동일전이 삶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일반적인 동작이야 반드시 삶을 의식하고서의 일이 아님이 보통인데 아내는 무릇 모든 행동이 삶의 의식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아내가 병상에서 빠져나오자 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될 만치 보는 눈이 아프도록 처절하다.
어찌됐건 병상에서 맞는 첫봄에의 기대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로 끝나고 말았지만 다시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고 나야 봄이 올 터인데 그 영원처럼 긴 시간을 다시 기다려야 될 걸 생각하면 아득한 일이었다. 물론 병이란 봄에만 낫는다는 법은 없겠지만 겨울 속에 웅크린 삶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래 기다리던 봄이 다시 왔다 갔지만 아내에게는 변동이 없다.
이제 봄을 기다리자는 이야기를 다시는 더할 수 없게 되었다. 아내는 원래 개성이 강한, 자기 판단을 굽힐줄 모르는 이른바 고집불통이라 이를만해서 나같은 우유부단하고 언제나 용기를 결한 남편에겐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배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가 약해져서 도움을 필요로 할 형편일 땐 일단 그런 삶의 태도는 달라져야 할 터인데 아내는 남의 동정을 사는데 많은 결함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이 잘못은 아닐 듯하다. 하룻밤 사이에 낫는 병이 아닌데 날마다 초조하고 날마다 목마른 기다림과 그 기다림이 채워지지 않을 땐 짜증밖에 올 것이 없다.
이제 나는 아내에게 ‘봄이 오기를 기다리자’는 간곡한 위로를 입 밖에 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요즈음은 죽고 사는 것이 사람의 뜻이 아니고 다 하늘의 뜻이겠으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기다려야 될 뿐이라고, 또 우리가 건강을 되찾아서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느냐, 그게 일 년일는지 5년일는지 앞날이 그다지 멀지 않은데 한 해를 더 살면 뭣할 것이며 또 한 해를 덜 산대서 얼마나 아쉬울 일이 있겠느냐고.
지금 우리가 건강을 되찾는대야 이미 7순을 넘긴 나는 물론 7순을 몇 해 앞둔 아내가 혹시나 되찾을 건강이 젊은 날 우리가 가졌던 건강과 같은 것인 줄 환상하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늙은 사람의 기쁨에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병들지 않고 건강해도 이미 사양의 인생에겐 우리가 환상하는 젊은 날의 영광은 돌아오지는 않는다고 아내에게가 아니고 차라리 내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봄을 기다리던 그 화려했던 꿈은 무참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에 역점을 두는 위로일 수밖에 없게 되고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한 체념이거나 달관을 심어줄 수 있을까하는 그 자체가 슬픔이지만 이미 봄에의 기대가 헛된 마당에 어쨌으면 하겠는가.
누군가가 무엇인가의 욕망을 호소해왔을 때 그 소망을 들어주지 못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은 쉽사리는 잊을 수 없는 마음에 찌꺼기를 남기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라면 육친이 생사의 기로에서 바라는 절실한 생(生)에의 호소를 24시간 듣고도 못들은 체하는 고통도 전생의 업보치곤 가혹한 편일 듯싶다.
설혹 아내가 건강한 노인이라 치더라도 그에게 남은 봄이 몇 번일 것이며 그나마 아내의 꿈 속에 잠재하는 젊은 날의 봄일 순 이제 없는데 병상의 환자는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만나면 그대로 20대 30대의 봄이 되돌아오는 걸로 착각하는 그 것이 진짜 병일 수도 있고 ,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가련한 꿈이 아내를 병상에서 놓아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이로 보더라도 나는 아내보다 월등히 많고 병력(病歷)으로도 아내는 나를 따르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아내보다는 훨씬 먼저 죽는 게 순서라고 생각해왔고 또 그러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최근의 나는 그 생각을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게끔 되어가고 있다. 그건 내가 오래 살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내가 먼저 죽는 게 순리인데 그 순리에 따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내의 유달리 까다로운 성품을 아는 나로선 나 아닌 누구에게도 아내를 보살필 괴로움을 떠넘기고 싶지 않은 내 나름의 충정에서이다.
내가 죽을 땐 아무에게도 폐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단언할 순 없는 일이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긴 하다.
앞으로 나는 또 봄을 기다려야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는 봄을 기다릴 필요도 없을런지 나로선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