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엔 빛이 가시지 앉지만, 새벽 3시쯤엔 인적이 드뭅니다. 늘 걷던 거리여도 인적 없는 어둔 길을 걸을 땐,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거슬리고,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조명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라도, 어둔 시간에 다니는 건 꺼려집니다.
어둔 시간에 예수를 찾아온 이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합니다. 밤을 타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빛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21)” 찾아온 니고데모를 내치진 않지만, 떳떳하지 않은 니고데모를 책망하는 투로 들립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누구나 볼만한 빛으로 옵니다. 빛은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주위를 밝힙니다. 빛을 닮은 사람은 누구에게도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빛을 닮은 사람은 투명하게 자기 일상을 뒤집어 보입니다. 빛을 닮은 사람은 은밀하게 꾀하지 않고 소신을 밝힙니다. 빛을 닮은 사람은 틀린 데를 예리하게 쏘면서 아픈 데를 따뜻하게 감쌉니다.
옛날 바리새인은 속을 감추고 겉을 꾸미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조항에 집착하는 것으로 자기 양심의 어둠을 꾸미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에 속합니다. 예수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한 건 훌륭하나,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밤에 찾아온 건 그의 한계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출구를 찾았지만, 굴 밖으로 나서는 게 두려워 오히려 더 깊은 어둠으로 숨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동료 바리새인들보다 더 깊은 어둠으로 자신의 한계를 감추려할지 모릅니다.
바리새인과 동시대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은 단단한 껍데기로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이라는 그럴듯한 장치와 제의 시스템으로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사두개인입니다. 자신의 겉을 꾸며 외식(外飾)하는 바리새인보다 더 두터운 외벽을 구축한 이들이 사두개인입니다.
예수 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는 외식, 자기의 한계를 가리는 외벽에 집중하는 건,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허물과 한계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흠 많은 인간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을, 예수께서 빛이라 부르십니다. 예수께서 빛이라 부르신 사람들은 빤한 사람들입니다. 소유한 재산도 빤한 사람들, 배운 학력도 빤한 사람들, 이룬 경력도 빤한 사람들을 예수께서 빛이라 부르십니다. 그런 빤한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십니다.
새벽 3시에 잠들지 못한다면 애써 눕지 말고 해가 솟을 무렵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요. 재산, 학력, 경력이 다 드러나는 시간, 부끄럽지만 외식하지 않고 한스럽지만 외벽치지 않고, 차가운 빛을 쬐면, 따뜻한 빛이 되는 신비가 열립니다.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우리를 빛이라 부르시는 건,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기보다, 소박한 내 일상마저 긍정하시는 겁니다. 빤한 내 인생, 괜찮습니다. 투명한 빛이라, 빤히 보이는 겁니다.
글/ 민들레교회 김영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