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叛徒)들이 살인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급상(汲桑) 때부터였다. 그는 천 근의 무게를 들 만큼 힘이 좋았는데, 더운 여름에 갖옷을 겹으로 입고서 부채질을 시키고는 시원하지 않다고 역정을 내어 부채질한 사람을 죽였다. 시체가 날로 앞에 쌓이더니 끝내 그도 남의 손에 죽었다. 하지만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에 비하면 포학한 것도 아니다. 또 이자성이 비록 포학하지만 장헌충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이자성은 사람 배를 갈라 말구유를 만드는 등 살인을 낙으로 삼았고, 장헌충은 사람을 죽일 때에는 반드시 그 살가죽을 벗겼는데 다 벗기기 전에 죽으면 그 살가죽 벗기던 사람의 살가죽마저 벗겼다. 온 촉나라 사람들이 살가죽이 벗겨져 죽어 나가고 심지어는 장수들까지도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살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니 반도들이 생긴 이후로 들어 보지 못한 얘기다. 사람을 양식으로 먹는 일은 한(漢)나라 말기에 이미 있었는데, 수나라 주찬(朱粲)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심하였고 당송(唐宋) 때에 극에 달했다. 황소(黃巢)의 용마채(舂磨寨)와 양주(揚州)의 양고양(兩股羊), 봉상(鳳翔)에서 사람이 병들자 죽기도 전에 살부터 발라 가는 등 사람이 단지 개와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살인의 풍조가 이와 같았으니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그런 역사를 볼 때마다 기가 질린다.
[주D-001]급상(汲桑) : 서진(西晉) 평양(平陽) 사람으로, 회제(懷帝) 때 반란군을 일으켜 스스로 대장군이라 칭하였다. 업성(鄴城)을 함락하고 신채왕(新蔡王) 사마등(司馬騰)을 살해하는 위세를 떨쳤으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휘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하였다. 《晉書 卷5 孝懷帝紀》 [주D-002]이자성(李自成) : 명나라 말기에 농민 반란군의 괴수로 틈왕(闖王)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숭정 16년(1643)에 서안(西安)을 점거하고 이듬해 북경을 함락하여 명나라를 패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청군이 밀고 들어오자 북경에서 밀려나 하남(河南), 섬서(陝西)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구궁산(九宮山)에서 피살당하였다. 《明史 卷309 李自成列傳》 [주D-003]장헌충(張獻忠) : 명나라 말기에 농민 반란군을 이끌어 양양(襄陽), 무창(武昌) 등지에서 관군을 대파하고는 사천(四川) 지방에 대서국(大西國)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였다. 그러나 3년 만인 순치(順治) 3년(1646)에 남하한 청군에 의해 패망하였다. 《明史 卷309 張獻忠列傳》 [주D-004]황소(黃巢)의 용마채(舂磨寨) : 당나라 희종(僖宗) 광명(廣明) 원년(880)에 황소가 낙양과 장안을 점거하고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였는데, 곧 이극용(李克用)에게 쫓겨 후퇴하였다. 용마채는 그가 진주(陳州) 근처에서 장기전을 벌이며 허(許), 여(汝) 등 부근 10여 주(州)의 사람들을 잡아다 뼈째로 맷돌에 갈아 병사에게 음식으로 공급하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新唐書 卷225 黃巢列傳》 [주D-005]양주(揚州)의 양고양(兩股羊) : 남송(南宋) 소흥(紹興) 계축년(1133)에 등주(登州) 사람 범온(范溫)이 사람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서 천자가 있는 전당(錢唐)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서로 잡아먹으면서 식량으로 충당하고는 노파와 남자아이는 요파화(饒把火), 부인과 여자아이는 하갱양(下羹羊), 어린아이는 화골란(火骨爛)이라 부르고 통칭하여 양각양(兩脚羊)이라 하였다. 《說郛 卷27》
죽음을 앞둔 자들의 집인 마더테레사 하우스 앞에서 경찰간부에게 마더테레사 하우스의 위치를 물었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바로 여기'라고 손가락질 해준다. 나는 과장된 몸짓과 말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내가 짜이(인도식 홍차) 한잔 대접할 수 있을까요?"
딱히 할 일 없이 무료하던 경찰간부 만달(mandal)은 나를 따라나선다. 진저티(생강차)와 짜이를 주문하고 담배를 권했다. 인도인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국적부터 시작해 직업, 나이, 가족관계, 심지어 월수입까지 묻는다. 주변에 20여 명이 몰려들어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한다.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훈수를 두기도 한다. 친구로 지내자며 전화번호까지 교환했다.
▲ 친구가 된 경찰간부 만달은 칼리사원에서의 사진촬영을 도와주었다.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만달.
사실 나는 마더테레사 하우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목적이 따로 있었다. 마더테레사 하우스와 맞붙어 있는 칼리사원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좀 얍삽한 방법이지만 인도 경찰의 도움이 필요했다. 인도 사원 중 일부는 이교도와 외국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거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이를 무시했다가 목숨까지 잃는 사례도 있다.
외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바라나시 황금사원도 들어가 보았고 화장터인 버닝가트에서 사진촬영까지 감행(자칫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했던 터라 조금은 호기가 발동했다. 따라 오란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상인들에게 친구라며 나를 소개한다. 나는 졸지에 만달의 오랜 친구 행세를 해야 했다.
산사람의 목을 잘라 제물로 바쳤던 칼리사원
캘커타의 칼리사원에서는 100여 년 전까지 사람이 산 채로 제물로 바쳐졌다. 가난을 천형으로 안고 사는 수드라 계급은 자신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 다른 자식을 먹이기 위해 자식을 부자들에게 팔았다. 하리잔(불가촉천민)은 생명을 팔 자격조차 없었다. 그들의 피는 신전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제물로 팔린 사람은 환각상태에서 목이 잘려 그 피와 몸을 칼리신전에 바쳤다.
▲ 목 잘리기 전의 염소 제관이 갠지스강물을 머리에 뿌리고 있고 옆에 목을 자를 녹슨 칼을 든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인신공양은 영국 식민지 시절 엄격히 금지되었다. 한참을 비밀리에 음성적으로 진행되다가 점차 부의 정도에 따라 염소나 닭, 곡식 같은 것으로 대체되었다.
사실 인신공양을 고대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행해지던 원시적 종교의 특징으로 알고 있는데 고대 유대교나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으로 양이나 닭과 같은 가축들을 잡아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 그러나 구약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는 자신의 외동딸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늙은 숫양으로 대체되었지만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이 희생될 뻔한 사건도 있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번제라 함은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다. 끔찍한 인신공양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매일 칼리신을 위한 피의 향연이 벌어지는 캘커타의 칼리사원 앞에 제물을 바치려는 참배객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선덕대왕신종에 아이를 산채로 집어넣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치수용으로 지어진 대형 보의 토목공사에 아이들이 제물로 바쳤다는 전설이 심심찮게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왕이나 권력자가 죽었을 때 아내나 종들을 같이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도 부여와 가야시대까지 있었다.
피의 신인 칼리신은 두르가라는 이름 외에 파르바티 우마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파르바티나 우마는 자애로운 어머니이지만 두르가나 칼리가 되면 파괴와 피의 신이 된다. 특히 칼리의 사원에는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에 하루 종일 비린 피 냄새가 진동한다.
칼리사원 앞에 이르자 평일인데도 제물을 마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구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염소들이 앞으로 닥칠 운명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신전에서 나온 꽃잎들을 주워 먹고 있었다.
▲ 칼리사원 앞에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묶여 있는 양들이 아무것도 모른채 풀을 뜯고 있다.
차례가 되면 도살장 앞에는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고 제관은 갠지스강물을 염소의 머리에 뿌린다. 염소 목에는 붉은색 꽃목걸이가 걸린다. 여전히 염소는 거쳐 간 다른 염소들의 피 위에 뿌려진 꽃잎을 배가 터지도록 뜯어 먹는다.
이윽고 새총 모양의 갈고리에 염소의 목이 걸리고 한 사람이 뒷다리를 잡아당겨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자 붉게 녹슨 칼날이 내리쳐진다. 시뻘건 핏물이 제단에 물들고 염소의 몸은 바닥에 내던져져 바들거린다. 머리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눈을 깜빡거린다. 붉게 물든 제단의 흙을 찍어 이마에 바르고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개들이 몰려와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바닥에 뿌려진 피를 핥아먹는다. 개 눈이 푸르게 빛난다. 살기다.
칼리신은 시바신의 아내로 6세기 베다에 아수라와의 전쟁에서 등장하는데 두르가 여신이 화가 나면 얼굴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이마에서 튀어나온다. 사람의 해골로 관을 썼으며 호랑이 가죽을 입고 두개골로 장식된 무기를 써서 우주의 안정성을 해치는 아수라를 무찌른다. 칼리신은 윤회를 끊고 시간을 파괴하는 징벌의 신이다.
베다를 보면 인도의 남성 신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데 반해 여성 신들은 변화하고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경우가 많다. 여성적인 샥티(에너지)는 활동과 창조, 생식을 주도하고 남성 신들에게 활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들의 영역이고 힌두교에 있어서 카스트제도와 남녀차별은 공존한다.
연신 셔터를 누르는 내 모습에 제관이 '부정 탄다'며 소리를 버럭 지른다. 만달이 없었다면 몰매를 맞을 일이다. 만달이 친구라며 사람들을 진정시키자 사람들이 입을 다문다. 항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기운이 역력하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당황한 만달이 나를 잡아끈다.
▲ 하리잔(불가촉천민들)과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대중공양을 해 죄를 씻으려는 부자들이 점심식사를 나눠주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신전 앞에는 부자들이 가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대중공양이 행해진다. 밥이 얼마 남아있지 않자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노인들을 밀치고 새치기를 하다가 걸렸다. 밥을 나누어 주던 30대 청년이 벌떡 일어나 냅다 뺨을 서너 대 후려갈기고 욕설을 퍼붙는다. 한마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다. 만달은 모른 채 지나친다. 그가 잘못한 것도 있지만 낮은 계급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카스트제도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지막 쉼터 마더테레사 하우스에 들어가 보았다. 50여 개의 침상에 30대 청년에서부터 70대 노인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의식도 없이 가는 수액 줄기에 생명을 의탁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멍하니 앉아 창문 너머 풍경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극히 한가롭고 평화로웠으나 우울했다.
인도인들에게 마더테레사는 이교도나 수녀가 아니라 신적 존재다. 캘커타의 힌두교도들은 마더테레사를 그리워하고 자신들의 신에게 하듯이 그녀를 향해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한다. 사상이나 종교, 인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피와 생명을 먹고사는 칼리신의 사원과 마더테레사 하우스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맞닿아 있다. 무서운 어머니와 자애로운 어머니가 공존한다. 그녀는 수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칼리사원 옆에 죽어가는 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정했을까? 사람을 대신한 염소와 닭의 목을 따는 칼리신의 피의 살육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녀의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자신의 신을 끝까지 안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귀의할 신 곁에서 마지막을 안식하도록 배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칼리신이든 시바신이든, 부처든, 여호와든, 알라든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미의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어미의 마음속에 그 자식이 어떤 모습이건 모두 아픈 열 손가락이다. 신의 마음 또한 그리했으면 좋겠다.
서장(西藏)은 본래 여러 강융(羗戎 서방(西方) 오랑캐를 가리킴) 지방의 부락(部落)으로서 토번(吐蕃)이라고도 하는데, 당(唐) 나라 정관(貞觀 태종(太宗)의 연호) 연간에 토번의 농찬(弄贊)이란 자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서장은 사천(四川)ㆍ운남(雲南) 지방의 변두리에 있는데,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거리는 6천 4백여 리이고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거리는 6천 5백여 리이다. 동쪽으로는 사천 경계에 이르고 동남쪽으로는 운남 경계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서역(西域) 회부(回部) 지방의 대사막(大沙漠)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청해(靑海) 경계에 이르는데,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1만 4천여 리가 된다. 조공(朝貢)하는 도로는 사천을 경유한다. 납살성(拉薩城)은 타전로(打箭鑪) 서북쪽 3천 4백 80리 거리에 있는데, 바로 당(唐) 나라 때 토번에 건아(建牙)한 곳으로 지금은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 곳이다. 그리고 찰십륜포(札什倫布)의 박성(博城)은 납살성 서남쪽 5백 60리 거리에 있다. 처음에는 장파십(藏巴什)이 여기에 살았는데, 지금은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 곳이 되었다.” 하였다. 그들이 말한 황교(黃敎)와 홍교(紅敎)란 것은 전장(前藏)과 후장(後藏) 지방에서 비롯되었는데, 실은 대(大)ㆍ소(小) 두 법왕(法王)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당초에 토파(土波)의 여자가 새벽에 나와 물을 긷다가 수건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갈고리로 건져서 차고 다녔는데, 오래되자 수건이 점점 응지(凝脂)로 변화하여 특이한 향취가 풍겼고 먹어보니 맛이 달콤하더니만, 마침내 남녀(男女)가 교접한 느낌이 있은 후 파사팔(巴思八)을 낳았다. 파사팔은 태어났을 때부터 바로 신성(神聖)하여 총명한 지혜는 이치를 깨닫고 법신(法身)에서 온통 향기가 풍기며, 걸음걸이는 천신(天神)에 부합되고 음성(音聲)은 종(鐘)ㆍ여(呂)에 맞아, 어려서부터 《능가경(楞伽經)》 등 1만 권을 외었다. 그때 원 세조(元世祖)가 사막(沙漠) 지방에 있다가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맞아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보듯이 하였다. 그는 해성(諧聲)에도 능하여 몽고(蒙古)의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원 세조는 그에게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지금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를 대보법왕이라 칭하는 것은 그 호를 인습하여 사용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반선은 바로 장리불(藏理佛)이라 하니, 이른바 삼장(三藏)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선액이덕니는 서장의 말인데, 광명신지법승(光明神智法僧)이란 것과 같다. 반선액이덕니는 스스로 말하기를 ‘전신(前身)은 파사팔인데, 대대로 전생(轉生)하여 청(淸) 나라 건륭(乾隆) 경자(庚子)까지 파사팔이 14대째 전신(轉身)하였다.’고 하였다. 청 고종(淸高宗) 건륭 경자년에는 반선액이덕니를 연경(燕京)으로 맞아들인 다음 그가 살던 찰십륜포(札什倫布)를 본받아 열하산장(熱河山莊)에다 광미복수묘(廣彌福壽廟)를 지어 거처하도록 하였다. 내가 중국으로 사신갔을 적에 참견(參見)하였는데, 그는 신체가 매우 크고 얼굴에는 황금색을 띠었다. 그가 신해(辛亥)에 천연두(天然痘)에 걸려 죽자, 금탑(金塔)에 넣어 돌려 보냈다. 대개 서번(西蕃) 지방은 천연두에 걸리면 반드시 죽고 만다. 그러므로 이미 천연두를 앓은 자를 열신(熱身)이라 하고 아직 앓지 않은 자를 생신(生身)이라 하는데, 생신은 내륙 지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찰십륜포는 서장의 말로 ‘대승(大僧)의 거처’라 한다.” 하였다. 명(明) 나라 하객(霞客) 서굉조(徐宏祖)의 《유기(遊記)》에는 “토번국(吐蕃國)에 법왕(法王)과 인왕(人王)이 있다. 인왕은 병혁(兵革)에 대한 일을 주관하는데 처음에는 넷이다가 지금은 하나로 통합되었고, 법왕은 불교를 주관하는데 역시 둘이 있다. 인왕은 나라의 소출로 법왕만을 받들 뿐 중국이 있는 줄은 모르며, 법왕은 인왕을 대신하여 인민들을 교화시켜 조정(朝廷)의 명을 따르도록 한다. 그 교(敎)는 대법왕(大法王)과 이법왕(二法王)이 서로 교대해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대법왕이 죽을 무렵에는 바로 이법왕에게, 자신이 다시 태어나게 될 곳을 먼저 말하여 준다. 이법왕은 그 말대로 가서 찾아보면 반드시 다시 태어난 아이를 얻게 된다. 그러면 바로 그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길러서 대법왕으로 삼아 도(道)를 전하여 준다. 그 아이는 안고 돌아올 때에 나이가 매우 어리지만 전생(前生)에 있었던 일을 마치 양 호(羊祜)가 금환(金環)을 찾아 내듯이 분명히 말하여 틀리지 않는다. 이법왕도 죽을 무렵에 다시 태어날 곳을 대법왕에게 먼저 말해 주어, 대법왕이 그 말대로 가서 찾아가지고 안고 돌아와 교(敎)를 전하여 주기를 역시 전날 대법왕의 예와 똑같이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태어난 가정과는 거리도 그리 멀지 않다. 그들은 모태(母胎)만 빌렸을 뿐이지 과보(果報)는 바뀌지 않고, 대법왕과 이법왕도 서로 스승과 제자의 연원(淵源)만 되었을 뿐이지 왕위는 변경되지 않는다.” 하였다. 진정(陳鼎)의 《전검기유(滇黔紀遊)》에는 “여강(麗江)에서 설산(雪山)까지 3~4일 거리가 되는데 그곳에는 다 라마(喇嘛)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중인도(中印度)까지는 불교의 풍속을 지켜 모두들 홍모(紅帽)를 쓴다. 서장에서는 황모(黃帽)를 쓴 중을 대보법왕(大寶法王)이라 칭하고 홍모를 쓴 중을 이보법왕(二寶法王)이라 칭하는데 환술(幻術)을 지녀 변화를 일으키고, 대보법왕은 죽을 무렵에 72상(相)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서장 사람들은 놀라 활불(活佛)이라 했다.” 하였다. 이상은 대ㆍ소 법왕에 대하여 증거가 될 만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서는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 있고 서장에서는 홍교(紅敎)와 황교(黃敎)가 있는데, 황교는 전장(前藏)의 종객파(宗喀巴)에게서부터 전해 온 것이다.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몽고(蒙古) 사람 경순미(敬旬彌) 가 말하기를 ‘서장은 옛날 삼위(三危) 땅인데, 순(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내쫓았다는 곳이 바로 그 땅이다. 그 나라가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衛)로서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烏斯藏)이요, 하나는 장(藏)으로서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에도 ‘장’이라 했고, 하나는 객목(喀木)으로서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에 강국(康國)이라 하였다. 그 땅들은 사천(四川) 마호(馬湖) 지방의 서쪽에 있어, 남쪽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쪽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는데, 당(唐) 나라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삼장(三藏)으로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그 땅이다. 현장법사가 들어갈 적에는 그 땅에 사람이 없고 큰 물만 흘렀었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물은 말라버리고 촌락(村落)이 생겼었다. 그 후 당(唐) 나라 중엽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토번(吐蕃)이란 큰 나라가 생겨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숭상할 줄 모르다가 원(元) 나라 초엽에 불교가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 서장에 중이 생기게 되었으니, 그가 파사파(巴斯巴) -파(巴)는 팔(八)과 음이 같으니, 바로 파사팔(巴思八)이다-.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별호이지 이름은 아니다. 그는 큰 신통력(神通力)을 갖추어 원 나라 초엽에 제사 대보법왕(帝師大寶法王)에 봉해졌고,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조카로 대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초엽에 여러 법왕들이 중국으로 조회왔을 적에 성조(成祖)가 당 나라의 전례를 거울삼아 모두 우대하였는데, 그 중들도 다 환술(幻術)을 부릴 줄 알아 더욱 존대를 받았다. 지금의 라마(喇嘛)는 대략 명 나라 중엽에 비롯된 것으로, 그 중에 종객파(宗喀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 그 역시 머나먼 지방에서 서장으로 들어갔는데, 이상한 술법을 지닌 까닭에 그를 한번 보면 누구나 감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남의 태중(胎中)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도 있어, 모든 법왕들은 다 그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의 반열에 물러 앉은 것을 달게 여겼다. 종객파는 두 제자에게 그 교(敎)를 전하였는데, 맏이는 달뢰라마(達賴喇嘛)이고 다음은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이다. 달뢰라마는 지금까지 7대째 남의 태중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났고, 반선라마는 4대째 남의 태중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본조(本朝) 천총(天聰 청 태종(淸太宗) 연호) 연간에 반선이 큰 사막(沙漠)을 넘어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이때 동방에 성인(聖人 청 태종을 이름)이 탄생한 것을 안 그는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강희(康熙) 때에는 성조(聖祖)가 그를 중국으로 입조(入朝)시키려 하였으나 한 번도 오지 않다가, 지난해 -본주(本註)에는 바로 금년이라고 하였다-. 만수절(萬壽節)에야 자청하여 들어와 조회하므로 그를 우대하여 주었다. 대체로 그 교가 중 이름을 띠었지만 실지는 도교(道敎)이다. 그의 사상ㆍ술법ㆍ주문 등이 도교와 비슷하고 그 글이 많고 심오하여 과장해 말하는 것도 도교보다 더하다. 달뢰라마와 반선액이덕니 이 두 사람 외에도 호도(胡圖)와 극도(克圖)란 자가 있는데, 모두 종객파의 제자들이다. 그들 역시 5~6대째 남의 태중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난 자가 많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스승으로서 신통력은 없고 선리(禪理)만을 잘 말할 뿐이다.’ 했다.” 하였다. 자세한 것은 대소(大小) 법왕의 연기설(緣起說)에 나타나 있다. 청 태종(靑太宗) 숭덕(崇德) 7년에 달뢰라마(達賴喇嘛)와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가 만리 길을 통관하여 수년 만에야 중국에 도달하였고,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 연호) 경자년(庚子年)에는 황육자(皇六子)를 서장으로 보내 반선을 맞아 왔으니, 그는 바로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서 황교(黃敎)의 교주이다. 그가 열하산장(熱河山莊)의 광미복수묘(廣彌福壽廟)에서 시적(示寂 입적(入寂)과 같음)하자, 그 이듬해 신축에 발인(發靷)하여 서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가 중국에 들어왔을 적에 기이한 행적이 많아 성승(聖僧)ㆍ활불(活佛)로 불리었다. 그리고 홍교(紅敎)는 후장(後藏)의 다이제(多爾濟)에게서 전해 온 것으로 방술(方術)로 이름이 났다. 홍교는 그들 도(道) 중에서 진작 사도(邪道)로 지적되었는데, 노사고달이당(魯思古達爾黨)으로 도량(道場)을 삼고 색단파(色丹巴)로 개조(開祖)를 삼으며 찰달극(札達克) 저주(詛呪)하는 방술ㆍ분포이(奔布爾) 살육(殺戮)하는 방술를 범행(梵行)이라고까지 하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황교보다 더욱 혹심하였다. 그러나 촉침(促侵) 옛 이름은 대금천(大金川)ㆍ잠랍(撍拉) 옛 이름은 소금천(小金川) 지방의 추장(酋長)이나 대중들은 모두 라마(喇嘛) 중국 말로는 번승(番僧)이다 .에게 명령을 받았다. 당(唐) 나라 때 회홀(回鶻 서역(西域)의 부족 이름)의 가한(可汗 회홀 부족의 임금 칭호)은 마늘을 먹는 마니교(摩尼敎 파사(波斯)의 마니가 만든 종교)와 한 나라 안에 공존하였는데, 이 교가 홍교보다 훨씬 낫다. 홍교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참으로 황교의 본래 종지(宗旨)에 틀릴 뿐더러, 하는 짓 역시 황교에서 하지 않는 짓을 하였다. 그들은 탐욕도 내고 성도 내어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살해하다가 패망(敗亡)을 자초하여, 그 경(經)이 소각당하고 족속도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전경루(轉經樓)ㆍ연설벽(演揲壁)ㆍ라마사(喇嘛寺)의 동ㆍ서 벽에 모두 남녀가 성교하는 불상(佛像)을 만들어 놓고 환희불(歡喜佛)이라 하였는데, 그 뒤에 청(淸) 나라 군사가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병졸을 주둔시켜 지키도록 하였으니, 《달사랍경(達思拉經)》홍교가 소지한 경 이름이다이 보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강희(康熙) 52년에 준갈이(準噶爾)의 책망아라포탄(策妄阿喇布坦)이란 자가 군사를 일으켜 서장을 침공하여 서장의 왕을 살해하고 사원(寺院)을 소각, 중들을 쫓아버렸다. 그러자 58년에는 성조(聖祖)가 서장으로 대병(大兵)을 파견, 그들을 토벌하여 평정시켰고 세종(世宗)이 즉위하여서는 패자(貝子) 강제내(康濟鼐)로 하여금 그 지방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옹정(雍正) 5년에 서장의 갈륭(噶隆) 아이포파(阿爾布巴)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제내를 살해하자, 세종이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무찌르게 한바, 이듬해에 아이포파 등이 처형되고 파라내(頗羅鼐)를 고산패자(固山貝子)로 봉하였다.” 하였다. 오성란(吳省蘭)의 《주어존고(奏御存稿)》에는 “당초에 촉침(促浸) 부족의 토사(土司) 낭잡내(狼卡鼐)가 잠랍(撍拉)의 추장(酋長) 택왕(澤旺)을 구금(拘禁)해 놓고 왕명(王命)을 거역하다가, 건륭(乾隆) 13년에 부항(傅恒)이 먼저 그 도당(徒黨)들을 불러 처형하니, 낭잡내는 마침내 항복을 청원하고 자기의 딸로 잠랍의 토사(土舍) 승 격상(僧格桑)에게 시집보냈다. 그 뒤 건륭 35년에는 잠랍이 악극십(卾克什)을 침공하여 웅거하고, 아울러 명정(明正)ㆍ목평(木坪)도 침공하였다. 이때부터 잠랍과 촉침(促浸)이 더욱 제멋대로 날뛰므로 사천 총독(四川總督)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꾸짖어도 명에 순종하지 않고 반하였다. 그래서 37년에는 청(淸) 나라 군사가 미락(美諾)을 쳐 이기었고, 41년에는 두 금천(金川)도 모두 평정되었다. 이때에 험고한 지형을 이용하여 공적을 이룩하였는데, 주로 불[火]로 공격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촉침과 잠랍이 서로 죽인 증거가 될 만한 것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는 “청(淸) 나라 학성(郝成)이 말하기를 ‘건륭 40년에 내각학사(內閣學士) 영귀(永貴)가 황육자(皇六子)를 배행하여 법가(法駕)의 의장(儀仗)을 갖추고 활불(活佛)을 맞아 왔는데, 활불은 황제의 귀한 신하가 자기를 맞아가려고 북경(北京)을 떠난 날짜와 귀한 신하의 이름이 누구라는 것까지도 벌써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백성 중에 그 부모에게 불효한 자가 있었는데, 활불을 한 번 보고는 갑자기 자비심(慈悲心)이 생겼다. 그 아버지가 기괴한 병에 걸리자, 칼로 자기의 왼쪽 옆구리를 째고 간(肝) 한 조각을 베내어 구워 드리니, 그 아버지의 병이 바로 낫고 그의 왼쪽 옆구리도 바로 아물어 효자로 전환되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주도록 명하였다. 또 산서(山西)지방에 어느 한 구두쇠는 형세는 거부(巨富)이면서도 평생에 인색하여 한 푼 돈도 아끼더니 길에서 활불과 마주 본 다음에는 갑자기 자비심이 생겨, 마침내 10만 금을 들여 부도(浮圖) 일좌(一座)를 세웠다. 이는 활불 공덕(功德)의 대략이다. 활불은 물을 건널 적에는 교량이나 배를 이용하지 않고 맨발로 물을 밟아 건너도 물결이 발목을 넘지 않고 저쪽 강언덕에 먼저 가 있곤 하였다. 또 큰 범 한 마리가 길 가운데 엎드려 꼬리를 흔들고 있자, 황자(皇子)가 화살을 뽑아 쏘려고 하니, 활불이 그리 못하게 하고 수레에서 내려와 범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범은 그의 옷자락을 물고서 무슨 호소할 일이 있는 것처럼 곧장 남쪽으로 갔다. 활불이 따라가 보니, 큰 바위굴 속에서 암범이 막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데, 머리가 둘 달린 큰 뱀이 범 굴을 둘러 싸고 그 새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뱀 머리 하나는 젖먹이는 암범과 겨루고 다른 머리 하나는수범과 겨루는데, 범은 어금니로 대항하여도 막을 도리가 없어 슬피 울다가 기진하여 버렸다. 이때에 활불이 지팡이를 짚고 주문(呪文)을 외자, 머리 둘 달린 뱀이 저절로 돌에 부딪쳐 죽었다. 그 뱀 머리 속에서는 모두 큰 구슬이 한 개씩 나왔는데 밤중에도 빛이 났다. 그래서 한 개는 황자(皇子)에게 바치고 또 한 개는 학사(學士)에게 주었다. 그후 그 범은 열흘 동안이나 활불의 수레를 호위하여 매우 공손하므로, 황자가 범을 우리 속에 잡아 넣어 함께 데리고 가려 하였다. 그러나 활불이 이를 불가하다고 하여 바로 중지시키고 나서 범을 주의시키는 듯이 무슨 말을 해 주니, 범은 머리를 조아린 다음 바로 가버렸다. 이는 그의 법술이 신통한 까닭이다. 그 두 개의 구슬은 임금의 수레에 쓰일 물건으로 바쳤는데, 홍수ㆍ가뭄ㆍ역질(疫疾) 등에도 비폐(祕弊)로 사용하면 모두 영험이 있었다. 어느 날 활불이 황제와 함께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찬물을 뿌리자, 황제가 놀라서 그 까닭을 물었다. 활불은 「방금 7백 리 밖에서 큰불이 나서 1만 호나 되는 인가가 불타는 것이 보이기에, 조금 비를 보내 불을 끄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과연 그 이튿날 부신(部臣)이 아뢰기를 「정양문(正陽門) 밖에 있는 유리창(琉璃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성문(城門)의 초루(譙樓)까지 잇달아 불이 붙어 불길이 너무 커서 인력으로는 도저히 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마침 한낮으로 하늘이 맑아 구름이 한 점도 없었는데, 갑자기 큰비가 동북쪽에서 몰아와 즉각 불을 꺼 주었습니다.」고 체주(遞奏)하였다. 대개 찬물을 뿌려 비를 보낸 시간이 화재가 발생한 시간과 꼭 맞았다. 활불은 또 신통한 법술이 있어 사람의 장부(臟腑)를 환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보경(寶鏡) 하나를 걸어 두었는데, 사람이 간음(姦淫)할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푸른 빛으로 비치고 사람이 탐심이나 적심을 품으면 반드시 검은 빛으로 비치며, 사람이 위험하고 재앙스러운 마음을 지니면 반드시 흰 빛으로 비치고, 성행이 충효(忠孝)스럽고 일심으로 부처를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붉은 아지랑이에 누른 빛을 띠어 마치 경운(慶雲)ㆍ담화(曇華) 같은 상서가 거울 속에 서리게 되니, 이 오색경(五色鏡)이야말로 무서운 존재였다. 혹은 화제경(火齊鏡)이라고 한다.’ 했다.” 하였으니, 이는 반선(班禪)의 영이(靈異)한 자취이다. 《건륭어제집(乾隆御製集)》에는 “서장의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범승(梵僧) 중에서 도(道)가 높은 중이다. 명년(明年)이 나이 70세 만수(萬壽)라 하여 중국에 와서 축수(祝壽)를 올리려고 하니, 이는 억지로 초빙해 올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요청을 승낙하여 사람을 보내 맞아 오도록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그가 만수절(萬壽節)에 앞서 이르러 열하산장(熱河山莊)에서 피서(避暑)하자, 몽고(蒙古)의 왕공(王公)으로 하여금 모두 문안(問安) 드리는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인연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서장의 달뢰라마와 반선액이덕니는 종객파(宗喀巴)의 훌륭한 제자이다. 그는 세상에 다시 환생(還生)하여 황교(黃敎)를 관장(管掌)하는 사람으로, 예(禮)가 매우 존엄하여 그의 뜻에 맞아야만 모든 허락이 내린다. 작년에 그는 마침내 2만 리를 발섭(跋涉)하여 경사(京師)로 와서 조회하였다. 그는 작년 7월 21일에 이르러 열하산장에서 피서하였고, 11월 초2일에 입적(入寂)하였으니, 손꼽아 보면 꼭 1백 일이 된다. 그리고 입적한 날로부터 금년 2월 13일 발인(發靷)까지 또 1백 일이 되니, 이런 인연(因緣)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다. 금년은 신축년(辛丑年)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경자년(庚子年)에 반선액이덕니가 축수를 올리려고 중국에 와서 조회하였다. 그는 열하산장에서 북경(北京)으로 돌아왔고, 다음에 다시 덕수사(德壽寺)에 이르러 나를 알현(謁見)하였으며, 그 해 겨울에 입적하였다. 지금이 임인년(壬寅年)이니, 벌써 3년이 되었다. 반선을 필이한(畢爾罕)이라 부르는 것은, 이른바 도세화신자(度世化身者)라는 뜻인데 아직 세상에 태어났다는 보고를 접하지 못하니, 기대가 퍽 간절하다.” 하였다. 강덕량(江德量)이 반건액이덕니(班虔額爾德尼)에 대하여 기록한 사적이 《광우초신지(廣虞初新志)》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건액이덕니는 서장의 기이(奇異)한 중인데, 서장에서 이른바 활불(活佛)이다. 건륭(乾隆) 경자년(庚子年)에 그가 경사(京師)로 조회를 왔는데, 신체는 풍후하고 턱은 이중이었으며 입은 네모지고 귀는 드리워져, 세상에서 이른바 미륵(彌勒)의 모양을 닮았었다. 때는 무더운 여름인데, 그가 탄 수레에는 언제나 조각 구름이 그 위를 덮어 주었다. 혹 그에게 기우(祈雨)를 요청하면, 주문(呪文)을 욈에 따라 구름이 일어 비가 내리므로, 남녀들이 즐비하게 길을 막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그가 북경(北京)으로 와 옹화궁(雍和宮)에 거처할 적에도 뵈러 온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그들이 꿇어앉아 계(戒)를 내려주기를 요청하면, 그는 일일이 웃으면서 그들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여러 중들이 참례(參禮)할 때는 높은 좌석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승(南僧) 달천(達天)이란 분이 석장(錫杖)을 짚고 찾아가자, 그는 갑자기 달천을 맞이하여 매우 공경하였다. 달천은 석장을 땅에 쿵하고 울리면서 ‘네가 오지 않아야 할 곳을 왔다. 아마 한 짝의 신[隻履]을 들고 서장에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자, 반건액이덕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를 본 여러 사람은 대단히 의아스럽게 여겼는데, 그 뒤에 그가 과연 북경에서 열반(涅槃)하자, 임금의 뜻을 받들어 그의 유해를 금탑(金塔) 속에 넣어 서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를 따른 자가 이르기를 ‘달천도 서장의 중인데, 세상에 나와 중국으로 들어왔다.’ 하였다.” 오성란(吳省蘭)의 《주어존고(奏御存稿)》에 “서장은 황교(黃敎)를 신봉하는데, 그 교주가 도장(道藏)을 세운 곳을 □상(□牀)이라 한다. 송(宋) 나라 정사초 소남(鄭思肖所南 소남은 자임)의 《심사(心史)》에 그 대의(大義)가 대략 갖추어져 있으니, 대개 원(元) 나라 풍속을 서술한 것이다. 그들이 부처에게 공양할 적에는 소나 말을 도살하여 피를 가져다 부처 입술에 발라 놓고 부처를 기쁘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중을 대접할 적에는 중의 아내가 모두 오는데 다 중처럼 삭발하고 중 옷을 입으며, 인가(人家)에서 중을 초빙하여 불경(佛經)을 욀 적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장만하여 그가 실컷 먹고 돌아가는 것을 공덕(功德)이 있다고 여긴다. 유주(幽州)에 진국사(鎭國寺)를 짓고 부설로 궁려(穹廬)를 설치하였는데, 그 곁에 불모전(佛母殿)이 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불상(佛像)은 발가벗은 채로 가운데 서서 사특하게 곁눈질로 요녀(妖女)를 바라보고 있으며 요녀도 발가벗은 채 곁눈질로 금불상을 손가락질하며 바라보고 있다. 그 곁에는 흙으로 만든 불상이 발가벗고 요녀와 성교를 하는 등 갖가지 음란한 모양이 들보와 벽 사이에 두루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 행랑간에는 흙으로 만든 요승(妖僧)이 혹은 어린아이를 산 채로 씹어 먹고, 또는 큰 뱀을 산 채로 씹어 먹는 등 갖가지 해괴한 짓을 하고 있다. 그 뒤에는 또 흙으로 만든 요승 하나가 푸른 얼굴에 발가벗은 채로 서서 발가벗겨 피가 흐르는 어린아이 하나를 오른손으로 치켜들고 두 발로는 어느 발가벗은 부인의 목을 밟고 있으며, 또 왼쪽 손에는 어린아이 해골 두어 개를 꿰어 들고 있는데, 이를 마후라(摩睺羅)라 하여 이 교를 전해 왔다. 이 요승은 가끔 사람을 죽여 부처에게 제사지낸 다음 수지(手指)ㆍ인지(人指)의 골절(骨節)에서 나온 수주(數珠)를 먹는다. 이 요승은 곧 서장 사람으로 서장 외도(外道)의 사특한 법을 전해 주었는데, 달주(韃主)는 참람하게도 그에게 제사(帝師)란 호를 내려 주었다. 해마다 4월 불탄일(佛誕日)과 2월 사타태자(邪吒太子) 탄일에는 불모전(佛母殿) 네 모퉁이에 커다란 은항아리 네 개를 설치하여 동남(童男)ㆍ동녀(童女)들의 피를 담아 놓고, 전각(殿角)에는 흙으로 만든 발가벗은 불상을 세워 둔 다음 달주는 칼을 빼들고 은항아리 속에 담겨진 피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 요승은 발가벗은 몸으로 주문(呪文)을 외면서 부처에게 기도를 드리고 피를 가져다 부처의 입술에 발라 제사를 지낸 다음 달주와 함께 차례대로 은항아리의 피를 나누어 마신다. 이에 앞서 나이가 젊고 하얀 살갗에 곧 출산하게 될 임신부를 구해다가 발가벗긴 몸으로 가운데 앉혀 놓고서, 요승이 주수(呪水)로 작법(作法)하여 물 속에 오색(五色)의 광채가 비치는 호광(豪光)을 형성시키고 그 임신부의 혼백(魂魄)을 주문으로 현혹시킨 다음 임신부에게 기특한 광채를 보았느냐고 물으면, 임신부는 그 말을 한 번 듣자마자 바로 보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여러 사람들이 그 임신부의 두 손을 잡아묶은 다음 요승이 손톱칼 두 자루를 가지고 두 유방(乳房)을 찔러 놓으면, 달주가 금이나 은으로 된 대롱을 가지고 임신부의 유방 구멍에 꽂아 놓고 생피[生血]를 빨아 마시면서, 임신부가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는 부처가 기뻐서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여긴다. 임신부가 점점 피가 말라 숨이 끊어지면 살갗이 더욱 눈처럼 하얗게 되는데, 그들은 임신부의 배를 째고 살점을 잘게 저며서 먹고, 머리는 두었다가 살점을 발라낸 다음 발우(鉢盂)를 만들어 칠(漆)을 바르고 도금(鍍金)하여 서로들 음식 그릇으로 사용한다. 심지어는 임신부의 심장(心臟)의 피 한 방울을 가져다 부처의 입술에 발라 놓고 제사지내며, 임신부 뱃속에 든 영아(嬰兒)도 꺼내어 살점을 잘게 썰어 먹는다. 그런 다음에는 그 모자(母子)의 해골(骸骨)마저 차례대로 자져다 발라먹고 나서, 각각 유향(乳香)에 섞어 큰 향로(香罏) 속에 넣고 구워 재가 되면, 그 재를 다투어 가져다가 상자 속에 간직해 가지고 요승(妖僧)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요승은 주수(呪水)로 요술을 부려 달주(韃主)와 여러 추장(酋長)들로 하여금 눈을 씻고 자세히 보도록 하는데, 그 임신부 모자가 채색 구름을 타고 가는 것이 보인다 한다. 그리고 4월 초 8일 밤에는 요승을 궁려(穹廬)에 유숙시키는데 노주(虜主)가 분향(焚香)하고 나서 무릎꿇고 예를 올리면, 요승은 비로소 노주의 아내와 동침(同寢)하고 나머지 여러 요승들은 달주의 여러 부인들과 동침하며, 심지어는 금불상(金佛像)의 음경(陰莖)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기도 하여 못할 짓이 없이 하면서 ‘이것은 불종(佛種)을 심는 것이다.’고 말한다. 또 요승은 낭주(郞主)를 현혹시켜 ‘낭주와 낭주의 부인 및 낭주의 자녀들도 다 나의 몸처럼 부처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달주는 그 말에 현혹되어 참으로 그런 것으로 여기고 요승을 공경하고 믿기를 진불(眞佛)보다 더하여, 부처를 낳아 자식 삼기를 원한다. 이리하여 불모전(佛母殿)을 지은 것이다.” 하였다. 주이준(朱彝尊)의 《일하구문(日下舊聞)》에 “대선전(大善殿)에 옛날에는 흙으로 만든 불상이 여러 들보 위에 놓여 있어 갖가지 음란한 모양이 갖추어져 있었고, 또 불골(佛骨) 수만 개가 그 안에 돌과 섞여 있었다. 세종(世宗)이 그런 것들을 일체 불태워버리고 별도로 자녕궁(慈寧宮)을 신축하였다.” 하였다. 이는 바로 원(元) 나라 때 연설술(演揲術)인데, 지금 서장의 홍교(紅敎)가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러므로 함께 언급하여 널히 상고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둔다. 파사팔(巴思八)의 사적과 반선(班禪)의 역사에 대하여 그래도 미진한 곳이 있다. 그래서 옛날 책들을 상고하여 몇 가지 조목을 홍교와 황교의 연기(緣起) 끝에 보충하여 널리 섭렵(涉獵)하는 데 자료로 삼는다. 원 세조(元世祖)는 파사팔을 맞아 보고 대단히 기뻐하였고, 당시 요(姚)ㆍ사(史)와 같은 여러 어진이들도 모두 스스로 파사팔의 총혜(聰慧)를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원 세조는 그에게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호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존호이지 국토를 가진 왕의 작위는 아니다. 그러나 법왕의 호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황천지하일인지상 선문대성지덕진지대원제사(皇天之下一人之上宣文大聖至德眞智大元帝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산(繖)을 청하여 마귀를 제압하는 놀이가 생겨, 병졸 수만 명을 내어 비단 바지와 수놓은 도포를 입고, 수레ㆍ깃발ㆍ일산 등도 모두 금주(金珠)ㆍ보옥(寶玉)ㆍ능라금수(綾羅錦繡)로 장식하여 황성(皇城)을 에워싸 사문(四門)을 두루 돌아다닌 다음 다시 서장과 중국 음악으로 인도하여 산(繖)을 맞아 궁중으로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파사팔교(巴思八敎)라 한다. 그러나 이 교는 벌써 본래의 교와는 뜻이 크게 틀려 분잡하고 괴상하여 마귀를 부리는 술법까지 뒤섞여 있다. 황제 및 후비와 공주들이 모두 소식(素食)을 하고서 산을 맞아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억조 창생들을 위하여 복을 빈다. 이것이 이른바 타사가아(打斯哥兒)가 파사팔을 만나는 날의 놀이로, 심지어는 가산(家産)을 기울여 만리 길을 와서 구경하는 자도 있었다. 원 나라가 망할 무렵까지 해마다 연례행사로 삼아 파사팔교를 숭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파사팔 당시에 담파(澹巴)가 있었고 또 가린진(珈璘眞)이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서장의 중으로서 신비한 술법에 능하였다. 그러나 파사팔과는 아주 달라서, 다른 사람의 속셈을 환히 꿰뚫어보는 것은 물론, 황제의 마음까지도 알아맞힌다고 하므로 황제가 이들을 모두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투태 탈사(投胎脫舍 투태와 탈사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는 뜻)의 설은 없었다. 명(明) 나라 홍무(洪武 태조(太祖)의 연호) 초년에 서번(西蕃) 여러 나라에 두루 칙서(勅書)를 내려 효유하므로 오사장(烏斯藏)에서 맨 먼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해 왔다. 그 왕(王)은 난파가장복(蘭巴伽藏卜)이라는 중[僧] -《청일통지(淸一統志)》에 “명 홍무 6년에 섭제사(攝帝師) 남가파장복(喃加巴藏卜)으로 치성불보국사(熾盛佛寶國師)를 삼았다” 하였다.- 인데, 끝내 제사(帝師)라 자칭하였다. 그 당시 여러 번국(蕃國)에 있는 제사나 대보법왕(大寶法王)은 한 나라 왕(王)의 칭호로 되어 있어 마치 한당(漢唐) 시대의 선우(單于)ㆍ가한(可汗)의 칭호와 같았다. 이에 황제는 제사라는 칭호를 모두 고쳐 국사(國師)라 칭하고 옥인(玉印)을 하사했는데, 황제가 옥의 품질을 손수 골라 가장 좋은 것으로 만들었고 거기에서 출천행지선문대성(出天行地宣文大聖) 등의 칭호가 새겨졌다. 사가(史家)는 이 사실을 생략해 버렸지만, 그 옥인은 옥새(玉璽)와 비슷하여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뒤얽힌 모습이 새겨지기도 하였다. 그 뒤로 서번 여러 나라에서는, 법왕(法王)이니 제사이니 하는 자들이 계속 사신을 보내어 그 이름을 천자의 궁정(宮庭)에 알린 수효가 무려 수십 나라나 되었고 황제는 그들을 모두 국사, 혹은 대국사(大國師)로 고쳐 봉(封)하여 극진히 대우해 주었다. 명 나라 성조(成祖) 시대에는 부마(駙馬)를 시켜 서번의 중 탑립마(嗒立麻)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법가(法駕)까지 하사하였는데, 그 의장(儀仗)이 거의 천자의 것과 같아 매우 참람스러웠고 하사된 금은 보화와 비단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이에 고제(高帝)와 고후(高后)를 위하여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는데, 경운(卿雲)ㆍ감로(甘露)의 상서와 조수(鳥獸)ㆍ화과(花果)의 길조가 몽땅 나타나자 성조가 크게 기뻐하여 탑립마를, 만행구족시방최승등여래대보법왕(萬行俱足十方最勝等如來大寶法王)에 봉하고 금으로 짠 데다 구슬로 장식한 가사(袈裟)를 하사했으며 그의 일행도 다 대국사에 봉하였다. 그가 지닌 불가(佛家)의 신통한 비법은 거의 환술(幻術)과도 같아 조그만 귀신을 마음대로 구사(驅使)하였다. 만리 밖에 있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잠깐 사이에 가져 오는 등 그 술법이 현란하고 괴이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당시 서장(西藏) 각지에는 대승(大乘)이니 대자(大慈)니 하는 법왕의 칭호를 얻은 자도 많았고 또 천교(闡敎)ㆍ천화(闡化) 등의 다섯 교왕(敎王)이 있었는데, 이 다섯 교왕의 조공(朝貢)을 대행하는 사신들이 서녕(西寧)ㆍ조황(洮潢) 사이에 끊일 새 없었으므로 중국에서도 여기에 소모되는 많은 경비를 괴롭게 여겨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에게 두둑한 대접을 베풀어 멍청이로 만들고 푸짐한 봉호(封號)를 내려 제각기 조공하게 함으로써 그 세력을 은연중에 분산시켰건만, 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주는 상품만을 탐내어 조공하는 것을 도리어 큰 이득으로 여겨 왔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시대에는 중관(中官)을 보내어 오사장의 활불(活佛)을 맞아 올 때 내탕(內帑)에 든 황금을 몽땅 털어 공구(供具)를 마련하였고 황후와 비빈ㆍ공주는 서로 앞을 다투어 염폐(奩幣)ㆍ머리꽂이ㆍ주배(珠琲) 같은 것을 내놓아 당(幢)과 일산[繖]을 마련하였으니, 그 경비가 몇 만금으로 셀 만하였다. 그들은 십년 만에 되돌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기한이 다 되자 활불은 어디로 숨어버려 찾아볼 수도 없었고 일행은 가졌던 보옥(寶玉)을 모두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갔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시대에는 신승(神僧) 쇄란견조(鎖蘭堅錯)라는 자가 있었는데, 역시 중국에 들어와 활불로 일컬어졌다. 이것이 서번의 이승(異僧)들에 대한 간추린 이야기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한림(翰林) 왕씨(王氏)는 대대로 서쪽 지방 관리로 이름은 성(晟)인데, 어려서부터 오사장의 내력을 나름대로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파사팔을 비롯하여 중국에 들어온 자들 가운데 어진 자도, 혹은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지만 활불이란 칭호는 있지 않았다. 활불의 칭호는 명 나라 중반기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들 명칭은 비록 승왕(僧王)이지만 모두 처자를 거느렸고 그 아들로 대(代)를 계승하곤 하였다. 그들 승왕은 아내에 대한 봉호(封號)를 중국에 요청한 적이 한 차례도 없었고 중국에서도 그들의 아내에게만은 예우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의 신분이 다 중인 때문이다. 그런데 오사장에서만은 법승(法僧)들이 서로 계승하여 스스로 그 지방의 왕이 되었고, 명 나라 중반기 이후로는 중국으로부터 봉호를 받는 번거로움이 없이 그냥 대법왕(大法王)ㆍ소법왕(小法王) 두 품계를 두었다. 대법왕이 죽을 적에는 소법왕에게 「아무곳 아무개의 집에 아이가 태어날 때 이상한 향내가 날 것이니 그 아이는 바로 나이다.」고 부탁해 둔다. 대법왕이 죽은 뒤에 아무곳에서는 과연 그런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고, 소법왕은 그 아이의 피부에서 나는 향내를 확인하고는 즉시 당번(旛幡)ㆍ보개(寶蓋)ㆍ주산(珠繖)ㆍ옥련(玉輦)ㆍ금여(金輿) 등 의장을 갖추어 가지고 가서 그 아이를 향내 나는 수건[香帕]에 싸서 맞아오니, 이는 애당초 파사팔이 향내 나는 수건에 감응되어 태어났다는 것 때문이다. 그 아이를 길러 소법왕으로 삼고 이전의 소법왕은 대법왕이 되곤 하였으니, 지금의 반선(班禪)은 바로 대보법왕(大寶法王)으로 14대째 투태(投胎)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명(元明)시대에 있었던 신승(神僧)들은 다 그의 후신(後身)인 셈이다. 반선은 도중에 원 나라 시대에 타사가아가 파사팔의 교(敎)를 맞이할 때의 고사를 역력히 이야기하고는 이어 「이번에 나를 맞이하는 데 간소한 의장이나 고취(鼓吹 북 치고 피리 부는 것)로는 그 위의를 형성할 수 없다 하여, 운휘사(雲麾使)의 난의(鑾儀)와 십이사(十二司)의 가장(駕仗)에 태상법악(太常法樂)ㆍ청진악(淸眞樂)과 흑룡강고취(黑龍江鼓吹)ㆍ성경고취(盛京鼓吹) 등을 모두 동원시켜 교외까지 나와 맞이했다.」고 하였는데, 청진악은 회자(回子 회교도(回敎徒))들이 뜯는 70줄의 대슬(大瑟)이요, 흑룡강고취는 12구멍이 뚫린 용적(龍笛)이며, 운휘사의 난의는 순상(馴象)ㆍ순마(馴馬)ㆍ정편(靜鞭)ㆍ골타(骨朶)ㆍ종천(椶薦)ㆍ비두(篦頭)ㆍ선수(扇手)ㆍ반검(班劍) 등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 ‘반선은 도중에 「조왕(趙王)이 보운전(寶雲殿) 동편 곁채[廂]에서 나를 위해 《금강경(金剛經)」을 쓰기 시작하여 겨우 29자를 쓰던 중 가경문(嘉慶門)에 불이 붙었다. 조왕이 놀라서 다시 쓰지는 못했으나 그 글씨는 천하의 보물이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어느 학사(學士)가 나름대로 전해주더라.》고 내각(內閣)에 대한 이야기도 하였다. 조왕은 조맹부(趙孟頫)를 말하며, 패다라엽(貝多羅葉)에 옻으로 씌어진 그 29자에 대해 세상에서는 왜 29자만 되어 있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 글씨가 처음에는 성안사(聖安寺) 불신(佛身)의 뱃속에 비장되어 있었는데 명 나라 천계(天啓 희종(熹宗)의 연호)시대에 강남의 큰 장사치 축(祝)씨가 불신을 개조하다가 그 글씨를 발견하여 몰래 가져 갔었고 본조(本朝)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시대에는 황제가 남방을 순행할 때 늙은 선비 이과(李果)가 다시 가져다 바침으로써 드디어 비부(祕府)에 간직되었으며, 무근전(懋勤殿)에는 황제가 그 글씨를 모사(摹寫)한 것이 간직되어 있다. 반선이 창정(蒼亭)에 당도하여 글씨를 구경할 때 탑본(搨本)을 보였더니 「아니다. 처음 쓴 것은 패다라엽이다.」 하므로, 패다라엽에 쓰인 진적(眞蹟)을 보였더니 매우 기뻐하며 「이는 진짜이다.」 하였다. 반선은 또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천자가 나와 함께 영곡사(靈谷寺)에서 분향(焚香)할 적에 천자의 수염이 매우 아름다웠다. 천자가 수염을 거둬 품속으로 넣다가 영락(瓔珞)을 건드려 구슬 두 개가 떨어져 없어지자 노(怒)하여 태감(太監) 위방정(魏芳庭)을 힐책하였다. 그때 유리국사(琉璃國師)가 흰 코끼리를 타고 뒤따라 당도하여 육환장(六環杖)으로 사문(寺門) 앞에 세워진 호법신(護法神)을 후려쳤다. 호법신은 무서워하며 눈물을 흘리니 국사가 손바닥으로 그 눈물을 받자 눈물 속에서 그 구슬 두 개가 도로 나왔다. 태감은 이로써 죄책을 면하게 되었는데, 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였다. 이는 유걸(劉傑)의 《오운비기(五雲祕記)》에 기록된 사실이다. 역대의 좋은 일, 궂은 일과 제왕들의 수요(壽夭)를 모두 점사(占辭)처럼 예언한 이 책은 나라의 금서(禁書)로 되어, 민간에서는 취급할 수 없고 비부(祕府)에만 간직되어 있을 뿐인데, 반선이 어떻게 이 사실을 목격했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반선은 또 「정덕(正德) 천자가 나를 상방(象房)에서 만났다.」 하였는데, 정덕 때에는 이른바 환불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한 증거는 옛사람의 전기(傳記)에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수 백년 동안이나 그들의 왕래가 끊겼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리숭한 일이다. 이로써 반선을 파사팔이나 탑립마의 후신(後身)이니, 혹은 전대(前代)에 있었던 활불도 다 반선의 윤회환생(輪廻還生)이니 하는데, 그 진부(眞否)는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다.’ 하였다. 어느 중국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서번은 옛날 토번(吐蕃) 땅으로 장교(藏敎)를 숭상하여 그것을 황교(黃敎)라고도 불렀으니, 본시 그 지방의 풍속이 그러한 것이요, 중[僧]이란 명칭을 따로 붙인 것이 아니다. 중국 사람들이 호칭하는 중은 그 사실과 크게 다르다.’ 하였는데, 불교는 지금 중국에서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하였다. 또 《열하일기》에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찰십륜포(札什倫布)에 거처하였다. 찰십륜포는 서번 말로, 대승(大僧)의 처소란 뜻이다.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궁성(宮城)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반추산(盤捶山)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10여 리를 더 가서 열하(熱河)를 건너면 산을 의지하여 하나의 동산이 형성되어 있다. 뚫린 언덕과 깎인 기슭에 산의 능선이 환히 드러났고, 천형(天形)으로 된 가파른 비탈과 험준한 절벽에 암석이 착락(錯落)하여 마치 십주(十洲)나 삼산(三山)과 같아, 짐승이 입을 벌리고 새가 날개를 펴며 구름이 덮이고 천둥이 몰아치는 듯하였다. 공중에는 다섯 개의 홍교(虹橋)가 놓였고 홍교의 위는 다 층계로 되었는데, 그 평면(平面)에는 모두 용봉(龍鳳)이 새겨지고 층계 가에는 굴곡진 백석(白石) 난간이 문(門)에까지 닿았다. 또 두 개의 각문(角門)에는 몽고(蒙古) 군사가 지키고 있었고 그 문에 들어서면 바닥에 벽돌을 깔아 세 군데의 층계가 만들어졌다. 난간에는 모두 구름과 용을 새겼고 세 군데의 층계는 결국 한 군데의 홍교로 합쳐졌다. 홍교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있고 대(坮)의 높이는 다섯 길이나 되며 대 주위에는 화문석(花文石)으로 된 난간이 둘렀고 난간에는 해마(海馬)ㆍ천록(天祿)과 각단(角端)을 새겼는데, 그 비늘과 뿔, 그리고 갈기와 발굽들을 모두 화문석의 빛깔을 따라서 했다. 대 위에는 전각(殿閣) 둘이 있는데 모두 이중으로 된 처마에 황금으로 된 기와였고, 그 옥상에는 여섯 마리의 걸어 다니는 용의 모습이 만들어졌는데 몸뚱이가 모두 황금으로 되었다. 원형(圓形)의 정(亭)에 곡형(曲形)의 사(榭)와 포개어진 누(樓)에 이중으로 된 각(閣)이며 드높은 추녀에 층으로 된 행랑들은 모두 초록과 자주 등 빛깔로 된 유리 기와를 이어 천 억만금의 경비를 들였다. 찬란한 단청(丹靑)은 신기루(蜃氣樓)를 능가하고 조각 솜씨는 귀신도 능히 탄복할 만하며 허령(虛靈)하기가 천둥을 몰아치는 듯하고 묘연(渺然)하기가 황혼(黃昏)이나 새벽녘 분위기와 같았다. 동산 가운데 갓 심은 어린 소나무는 산골짜기까지 연결되었는데, 모두 곧은 줄기에 높이가 한 길 이상이었고 그중에 표지가 달린 나무는 이전에 심은 것들이었다. 뒤섞여 심어진 기화(奇花)ㆍ이초(異草)는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그 이름도 알 수 없었는데, 마침 죽도화(竹桃花)도 만발해 있었다. 라마(喇嘛) 수천 명이 모두 붉은 선의(禪衣)와 누른 좌계관(左髻冠) 차림에 팔뚝을 드러내고 맨발로 걸어서 문이 꽉 메이도록 몰려드는데, 마치 칼로 깎아서 만든 듯한 얼굴은 빛깔이 검붉고 우뚝한 코에 움푹한 눈과 넓은 턱에 곱슬 수염이며 손과 발에는 쇠사슬을 채웠고 귀에는 금고리를 달고 팔뚝에는 용무늬를 수놓았다. 전각 안 북쪽 벽 밑에는 침향목(沈香木)으로 사람의 어깨에 닿을 만한 높이로 만든 연향탑(蓮香榻)이 놓였고 그 위에는 반선이 남쪽을 향하여 가부좌(跏趺坐)로 앉았는데, 황색 우단으로 만든 갓은 털이 말의 갈기처럼 달리고 가죽신과 같은 모양에 높이가 두 자 남짓 되었으며, 금으로 짠 선의(禪衣)는 소매가 없이 왼쪽 어깨에 걸쳐서 온 몸을 둘렀고, 오른편 겨드랑 옷깃 밑으로 길고 굵기가 다리만하고 금빛나는 오른 팔뚝을 드러냈으며, 짙은 황색 얼굴은 예닐곱 뼘이나 되는 둘레에 수염난 자국이 없고, 쓸개를 달아맨 것 같은 코에 눈썹이 두어 치나 되고 흰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음침하고 컴컴하게 보였다. 왼쪽에 놓인 나지막한 상(床) 두 개에 무릎을 나란히 하고 앉은 두 몽고왕(蒙古王)은 얼굴 빛은 모두 검붉으나 하나는 뾰족한 코에 이마가 높고 수염이 없으며, 하나는 깎아놓은 듯한 얼굴과 구부러진 수염에 누른 옷을 입었는데, 서로 마주보며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머리를 들고 무엇을 듣는 듯했다. 라마 두 명은 오른편에 시립(侍立)해 있고 군기대신(軍機大臣)은 두 라마의 밑자리에 서 있다. 군기대신이 황제를 모실 적에는 누른 옷을 입었는데 반선을 모실 적에는 라마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내가 조금 전에 햇빛이 번쩍이는 황금 기와를 보고 다시 이 전각 안에 들어와 보니, 방안이 침침한 데다 그가 입은 옷도 모두 금으로 짠 것이어서 살갗이 샛노랗게 변하여 마치 황달병에 걸린 사람과 같았다. 아무튼 황금빛만 그럴싸할 뿐, 무슨 뚱뚱한 물체가 바보스럽게 꿈틀거리는 듯한 그는 살만 많이 쪘기 때문에 청명하고 영특한 기질이 없으므로 아무리 그 몸뚱이가 온 방안에 꽉 들어찼어도 아무 위엄도 없고 마치 수신(水神)이나 해약(海若 바다의 귀신)의 그림에 다를 바 없었다. 이어 황제가 내무관(內務官)에게 5색 비단 한 필을 주어 보내어 반선을 면회하게 하자 내무관이 이르러 비단을 손수 셋으로 나누어 사신(使臣)에게 건네 주었다. 이는 이른바 합달(哈達)이란 것이다. 즉 반선의 말에 의하며, 자기의 전신(前身)은 파사팔이며 파사팔은 그 어머니가 향내 나는 수건을 물고 낳은 때문에 반선을 면회하는 이는 반드시 수건을 갖는 것이 예절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황제도 반선을 면회할 적마다 누른 수건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군기대신이 사신에게 ‘지금 황제를 위시하여 황육자도, 화석(和碩)ㆍ액부(額駙 부마(駙馬))도 다 머리를 조아리게 되니 이번에 사신도 마땅히 그를 찾아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하였다. 사신은 이미 조회 때에 ‘절하고 머리 조아리는 것은 천자에게 드리는 예절인데 어찌 천자에 대한 예절을 번승(番僧)에게 쓸 수 있느냐.’며 예부(禮部)에 항의했고 예부에서는 ‘황제도 그를 스승의 예로 대우하니 사신은 황제의 조칙을 받든 이상, 마땅히 똑같은 예로 대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끝내 가지 않고 항의만 하자 예부 상서 덕보(德保)가 노(怒)하여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큰소리로 ‘빨리 가라, 빨리 가라.’며 손으로 사신을 밀어 냈다. 이때 군기대신이 무슨 말을 했으나 사신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제독(提督)이 사신을 안내하여 반선의 앞에까지 나아갔다. 그제야 군기대신이 서서 두 손으로 수건을 받들어 사신에게 건네 주었다. 사신이 고개를 들고 수건을 받아 반선에게 주자 반선이 앉은 채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수건을 받아 무릎 앞에 놓으니 수건이 좌탑(坐榻) 아래까지 늘어졌다. 반선이 차례로 수건을 다 받은 다음 다시 군기대신에게 주자 군기대신이 수건을 받들고 반선의 오른편에 시립(侍立)하였다. 이어 사신이 막 돌아서려는 사이에 군기대신이 오림포(烏林哺)에게 눈짓하여 중지시켰다. 이는 사신으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하려는 모양인데, 사신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머뭇머뭇 물러나서 검은 비단에 수놓은 방석 위에 앉은 몽고왕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그는 앉을 때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옷소매를 든 채 앉았는데, 군기대신은 표정이 당황해 보였으나 그가 이미 앉아 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는지라 숫제 못본 체 하였다. 제독은 수건을 나누어 받을 때 마침 남은 수건이 한 자 남짓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반선에게 올리면서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고, 오림포 등 이하도 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차[茶]가 몇 차례 돌아간 뒤에 반선이 큰 소리로 사신이 온 이유를 물었는데 그 목소리가 온 전각 안을 울려 마치 독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그는 이어 빙그레 웃고 고개를 숙여 좌우를 두루 둘러보는데, 미간(眉間)을 찌푸리고 눈동자를 눈 속에서 반쯤 드러내어 눈을 가늘게 뜨고 속으로 굴리는 품이 시력이 나쁜 사람 같았다. 눈동자가 더욱 희어지고 흐릿하여 정광(精光)이 없었다. 라마는 말을 받아서 몽고왕에게 전하고 몽고왕은 군기대신에게 전하고 군기대신은 오림포에게 전하고 오림포는 우리 역관(譯官)에게 전했으니, 이는 오중(五重)의 통역이 된다. 상판사(上判事) 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을 뽐내며 ‘만고에 흉인(凶人)이다. 반드시 좋게 죽을 리 없다’고 반선을 욕하기에 내가 그에게 눈짓했다. 라마 수십 명이 홍록색의 모직과 성홍색(猩紅色)의 전방석과 서장(西藏)의 향(香)과 조그만 금불상(金佛像)을 메고 와서 등급에 따라 나누어 주는데, 군기대신은 받들고 있던 수건으로 불상을 쌌다. 그 다음에 사신은 이내 물러나왔고 군기대신은 반선에게서 받은 모든 물건을 기록해 가지고 황제에게 아뢰기 위하여 말을 달려 나갔다. 사신은 거기서 나와 50~60보쯤 되는 거리에 산기슭을 등지고 소나무 그늘이 진 모래밭에 이르러 일행과 둘러 앉아 밥을 들면서 ‘우리가 번승을 만나 본바 예절이 너무 소홀하고 거만스럽기에 예부(禮部)의 지시대로 거행하지 않았지만 그는 만승천자의 스승이므로 앞으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가 준 선물을 물리친다면 불공(不恭)하다 할 것이요, 받자고 해도 명목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고 의논하였다. 이때의 사정이 하도 창졸간이어서 선물을 받고 사양하는 것이 당연한지의 여부를 따져 볼 겨를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황제의 조서에 의한 일인 데다 저들의 행사가 번개 치고 별 흐르듯 삽시간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우리 사신의 진퇴(進退)와 좌립(坐立)이 저들의 지시에만 따라야 할 뿐, 흙을 이기고 나무를 깎아서 만든 등신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또한 통역도 중역(重譯)이어서 피차의 역관(譯官)이 도리어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마치 벌판에서 갑자기 괴상한 귀신이라도 만난 듯 어떻다고 측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신이 아무리 교묘한 언변과 익숙한 동작을 가졌으나 장황스레 굴 수가 없었고 저들 역시 차분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도 그 사세가 그러한 때문이었다. 정사(正使)가 ‘지금 우리가 유숙하는 곳은 태학관(太學館)이다. 불상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리 역관을 시켜 불상 둘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이때 번인(番人)ㆍ한인(韓人)할 것 없이 구경꾼이 마치 성(城)처럼 둘러쌌으므로 군뇌(軍牢)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쫓았으나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곤 하였다. 그 가운데는 모자에 수정구슬을 단 자와 푸른 깃[翠羽]을 꽂은 궁중의 근신(近臣)들까지 끼어 서서, 내관(內官)이 몰래 염탐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돌(永突)이 큰 소리로 나를 불러 ‘지금 사신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오랫동안 한데에 나앉아 잘잘못을 의논하며 수군대고 있으니, 공연히 저들의 의심만 사지 않을까.’ 하기에 얼른 뒤를 돌아다보니 조금 전에 황제의 칙명을 전하던 소림(素林)이 나의 등 뒤에 서 있다가 여러 사람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가 말에 올라 달려갔다. 또 여러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가기에 자세히 보니 모두 환관 나부랑이들이었다. 원래 박불화(朴不花)가 원 나라에 들어간 뒤부터 원의 내시들이 많이 고려의 말을 배웠고 명 나라 시대에도 얼굴 잘생긴 우리나라의 고자를 시켜 내시들에게 조선의 말을 가르쳤으니, 지금 우리를 엿보고 간 두 사람도 어찌 조선 말을 배우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소림(素林)이 푸른 깃을 꽂은 자와 함께 다시 와서 말을 세우고 자못 오랫동안 있다가 갔는데, 그 왕래가 하도 빨라서 마치 나는 제비와 같았다. 사신과 역관들은 이 자들이 와서 엿보았던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나 반선에게 받은 불상도 미처 처치하지 못했으므로 자리를 파하지도 못하고 모두 묵묵히 앉았는 사이에 황제가 어원(御苑)에서 매화포(梅花砲)를 터뜨리고 사신을 불러 인견(引見)시켰다. 전각은 처마가 겹으로 되고 뜰에는 노란 장막을 쳤으며 전각 위에는 일월(日月)과 용봉(龍鳳)이 그려진 병풍과 진열된 도끼가 수놓아진 병풍이 매우 장엄하였다. 1천 관리들이 차서대로 시립한 가운데 반선 혼자 맨 먼저 이르러 탑(榻) 위에 앉으니 일품 보국공(一品輔國公)과 기타 고관들이 모두 빠른 동작으로 탑아래 이르러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어 반선이 손을 들어 그들의 이마를 낱낱이 한 번씩 어루만져 주니, 그들은 일어서서 물러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뒤에 천자가 노란 빛깔의 작은 가마에 오르니, 시위(侍衛)로는 칼을 찬 자 5~6쌍이 길을 인도할 뿐이고 풍악은 퉁소 한 쌍, 젓대 한 쌍, 징 한 쌍과 거문고ㆍ비파ㆍ생황ㆍ호가(胡笳)와 구라파의 철금(鐵琴) 두세 대, 단판(檀板) 한 쌍과 의장도 없이 따르는 자 백여 명쯤 되었다. 황제의 가마가 앞에 이르니, 반선이 천천히 일어나 탑 위에서 몇 걸음 옮겨 동쪽을 향해 서서는 흔연히 웃는 얼굴을 지었다. 황제가 4~5칸쯤 떨어진 거리를 두고 가마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반선의 손을 잡고 서로 흔들고는 마주보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황제는 꼭지가 없는 붉은 실로 짠 모자에 검정 옷을 입고 금실로 짠 두꺼운 방석 위에 평좌(平坐)하였고, 반선은 금삿갓에 노란 옷을 입고 금실로 짠 두꺼운 방석이 깔린 동쪽 탑 위에 가부(跏趺)를 틀고 앉는다. 두 사람의 방석 사이는 무릎이 서로 닿을 듯한데, 자주 몸을 기울여 이야기할 적에는 반드시 서로 웃음을 띠고 즐거워하였다. 찻잔이 자주 이어지는데 호부 상서(戶部尙書) 화신(和珅)은 천자에게, 호부 시랑(戶部侍郞) 복장안(福長安)은 반선에게 올렸다. 장안은 병부 상서(兵部尙書) 융안(隆安)의 아우로서 화신과 함께 천자를 가까이 모셔 그 권귀(權貴)가 온 조정에 떨쳤다. 날이 저물어 황제가 일어서자 반선도 일어나 황제와 마주서서 서로 악수하고 한동안 있다가 각기 탑에서 내려섰다. 황제는 나올 적의 차림대로 환궁하였고 반선은 황금교자를 타고 찰십륜포로 돌아갔다. 지정(志亭 학성(郝成)의 호)은 ‘라마란 서번에서 도덕(道德)을 일컫는 말이며, 반선은 음률(音律)을 잘 알아 팔풍(八風)을 점치고 시방(十方)의 말에 능하다. 또한 그는 나무 숲속에서 신령스러운 나무 한 그루를 뽑아다가 분(盆)에 심어가지고 나온바 이름을 천자만년수(天子萬年樹)라 했는데, 교차된 가지에 모두 천자만년(天子萬年) 네 글자 모양이 형성되었고 잎 줄거리에도 모두 천자만년 네 글자 모양이 형성되었다.’ 했다.” 하였다. 반선을 맞이할 무렵에 중원에서는 길거리에서 어린이들이 황화요(黃花謠)를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험이다. 그 동요(童謠)는 욱리자(郁離子) 유기(劉基)가 지은 것으로 “홍화(紅花)가 다 지니 황화(黃花)가 피었네.” 했는데, 홍화는 붉은 모자를 가리키고 황화는 몽고나 서번에서 쓰는 노란 모자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또 “본시 옛 물건인데 누가 그 주인이랴.” 하는 동요는 몽고와 원 나라에 부응(符應)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홍화는 홍교(紅敎)를 가리키고 황화는 황교(黃敎)를 가리킨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의 천의(薦衣)는 그 모양이 중의 선의(禪衣)와 비슷하여 깃만 있고 소매는 없다. 이는 고려 때에 원 나라의 것을 인습한 때문에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인데, 세속에서 이르는 천의는 곧 선의의 와전이다. 삼교(三敎)가 정립(鼎立)해 오다가 점차 결렬되어 있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지금에는 겨우 그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따진다면 모두가 근본적인 교가 되지 못한 때문이다. 세 교 이외에도 회회교(回回敎)와 채식(菜食)을 하며 마두(魔頭)를 섬기는 교와 교문교(敎門敎)와 야소교(耶蘇敎)가 있고, 또 홍ㆍ황 두 교가 있는가 하면 서천축(西天竺)의 바라문교(婆羅門敎)까지도 중원에 들어왔으니, 그 숫자를 헤아리면 무려 천여 종이나 된다. 우리 유교(儒敎)를 제외하고는 다 외도(外道)이며 사술(邪術)이다. 지금 온 천하에 꽉 차 있는 것은 전혀 외도이며 사술인데 이른바 정도(正道)가 끊이지 않고 실오라기처럼 일맥만이라도 보존되어 있는 곳은 중원과 우리나라뿐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첫댓글수고하신 글 대단히 감사 합니다 / 지금의 우리가 왜눔들 불교를 하는데 그 왜놈들의 본거지가 동인도 라는 생각이지만 근거가 될 만 한게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부처인냥 숭내를 내는 악마불교가 극악을 떨치니 영국의 일루미내리가 지들의 권리를 위해 새로 만든 불교가 인기를 얻었다고 봅니다
황교인지 홍교인지 아니면 라마교인지 어째든 위에 묘사된 임신부 인신공양 설명이 너무 자세하네요 그런데 일루미나티의 인신공양 묘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바티칸의 비밀장소나 카톨릭 고위사제가 주관했다는 제사의식을 그런식으로 묘사하는 증언들이 떠도는게 있는데 옛기록에서 그보다 더 심한걸 보니 그냥 헛소문이 아니구나 하는 심증이 생깁니다.
첫댓글 수고하신 글 대단히 감사 합니다 / 지금의 우리가 왜눔들 불교를 하는데 그 왜놈들의 본거지가 동인도 라는 생각이지만 근거가 될 만 한게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 부처인냥 숭내를 내는 악마불교가 극악을 떨치니 영국의 일루미내리가 지들의 권리를 위해 새로 만든 불교가 인기를 얻었다고 봅니다
문화대혁명 때 인민재판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몸을 죽인 자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믿지 못할 동영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읽으며 들었습니다 훌륭한 내용의 글을 나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독하는데 2시간 걸린거 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최선생님.
전 쓰는데 한 다섯시간 걸린듯 한데...새벽에 졸면서 쓰고선...아직 오타수정을 못 했습니다.
황교인지 홍교인지 아니면 라마교인지 어째든 위에 묘사된 임신부 인신공양 설명이 너무 자세하네요 그런데 일루미나티의 인신공양 묘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바티칸의 비밀장소나 카톨릭 고위사제가 주관했다는 제사의식을 그런식으로 묘사하는 증언들이 떠도는게 있는데 옛기록에서 그보다 더 심한걸 보니 그냥 헛소문이 아니구나 하는 심증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