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절집, 영주 부석사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는 과연 돌이 붕 떠 있는지 확인코자 두 젊은이가 실을 챙기고 무작정 서울은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마음속 깊은 상처를 위로 받고자 부석사를 찾았지만 입구에도 가지 못한 채 폭설에 가로막혀 마애불 근처를 헤매다가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제목만 <부석사>지 부석사를 보고 난 소감은 하나도 없었다. 소설가의 눈을 빌려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간접체험 하고자 했던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 아쉬움 달래기 위해 부석사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린 느낌은 부석사는 눈으로 보는 사찰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사찰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마음속에 꿈꾸어 왔던 천상세계가 건물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산문에 들어선다. 진리를 향하는 문은 언제가 열려 있기에 따로 문짝을 달 필요가 없다. 부처님은 두 팔을 벌리고 언제나 중생을 기다리고 있건만 오늘도 역시 마음을 꽉 움켜잡고 이 문에 들어선다. 언젠가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이문에 뛰어들겠지.
부석사의 숨어 있는 아름다움은 석축과 돌계단일 것이다. 부석사는 터가 좁고 길어 평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올렸다. 그냥 쌓은 것이 아니라 극락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세 가지 방법인 '구품 만다라'를 건물로 구현해 놓은 것이다. 대석단 3개를 지나면 극락에 이르는 ‘안양문’을 만나게 했다.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건물 배치는 빛날 '華(화)'의 모습을 하고 있단다.
안양문 계단을 통해 무량수전 들어가는 장면이 가장 극적이다. 누각입구에 도달해 숨 한번 몰아쉬고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무량수전의 화폭은 서서히 커진다. 부처님을 만나기 전 마지막 클라이맥스다. 그러나 건축가는 무량수전을 바로 만나게 하지 않았다. 석등에 새겨진 신라 여인네의 미소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조금 이따가 뵙지. 뭐' 신라 여인은 가슴에 손에 얹고 고개를 살며시 틀고 있다. 입가의 야릇한 미소가 그만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드디어 무량수전을 만났다. '부처님 조금 늦었습니다. 신라 여인네가 저를 유혹하는 바람에...' 나는 하느님께 변명을 늘어놓은 아담이 되어 있었다. '배홀림기둥, 안쏠림기법, 귀솟음기법, 안허리곡' 오늘은 그런 복잡한 가구구조를 생각치 말자. 정성스레 108배를 올리는 아주머니처럼 그저 순명하는 자세를 갖자. 오른쪽 그늘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무량수전을 바라보았다.
저 건물이야말로 우리 건물의 가장 큰 어른이며 화엄경을 아우르는 절대자다. 처마는 새의 날개처럼 부드럽게 반전을 이룬다. 조선백자의 풍만한 곡선이 부석사 지붕선과 상통한다. 몇 시간동안 바라만 봐도 질리지 않은 우리의 곡선이다.
무량수전 기둥에 기대어 시원스런 경치를 감상한다. 유홍준 교수가 이 광경을 보고 ‘국보 0호’ 라고 칭하지 않았던가? 스크럼을 짜듯 소백의 영봉들이 어깨를 맞대고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무량수전 왼쪽에 부석이란 바위가 서 있다. 처음 절을 세우려고 했을 때 이교도들의 반대가 심했다. 의상의 지킴이 선묘낭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바위를 공중부양시켰다.
놀란 이교도들은 겁을 먹고 도주했고 이곳에 터를 잡고 절을 세운 것이다. 그 전설 속의 바위가 바로 뜬바위인 ‘부석’이다. 한 남자를 위한 위대한 사랑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한다. 경내에는 선묘 아가씨를 모신 선묘각이 따로 모셔져 있다.
조사당 올라가는 초입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다이어트하지 않는 석가탑이라고 할까? 대웅전 앞, 탑이 놓일 자리는 예쁜 석등에게 빼앗기고 이 구석에 탑이 서 있어 왠지 처량해 보인다. 내가 뚱뚱하다보니 동병상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평등했다. 후미진 장소에 서 있지만 부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산을 조금 오르면 조사당 건물이 나온다. 한쪽에 상사화가 철창에 갇혀 있다. 이름 모를 들꽃보다 못난 신세다. 조사당 측면부분은 간결한 결구를 가지고 있다. 절제가 화려함을 아우르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고려 때 건물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 건물이 살아남은 것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전화를 피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산골의 작은 예배당이 되겠지. 산골의 작은 교회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고려시대 궁궐은 얼마나 황홀했을까?
오늘도 부석사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떠나는구나. 내 생애에 부석사 일주문을 몇 번이나 들락거려야 조금이나마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물질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내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머리 숙이는 내가 되게 하소서.
첫댓글 1970년 늦가을 택시 대절 손님을 태우고 상동(영월)에서 금정재(우구치) 춘양~물야를 거쳐 부석사에 간것이 첨이죠.
영주서 공무원 10여년 할때 무시로 부석사 댕겼지요.
뭔가 편해요.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던
전망을 잊지못하지요.
겹겹이 펼쳐진 능선들
두아들(이제40 중반)들 오토바이에 태우고 소수서원,부석사,희방사.부지런히 댕기던 시절 생각납니다, ㅎ
절 하나에도 이런 절묘한 표현이 깃들어 있네요
부석사라 그런가요?
그냥 지나치던 그 자리에 다시한번 대장님 글 떠올리며 음미하고픈 마음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