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
삼상11:1-5
(삼상 11:1, 개역)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삼상 11:2, 개역)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삼상 11:3, 개역) 『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삼상 11:4, 개역)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인간은 죄라는 것을 감정적으로 여기지만
죄의 결과가 심판이요,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를 알도록
이 힘든 환경을 이용하십니다.
그 한 예가
야고보서 4:14-16에 나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인간들은 가능한 것으로 웃고
불가능 한 것으로 웁니다.
왕이 없는 시절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국가라는 것이 없어서
항시 외부의 공격을 받을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 짓고자 하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동력을 가족들에게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손자 친지들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집단을 가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족은
군대가 아닙니다.
만약에 강력한 힘을 가진 타국가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면
농사만 짓던 가족들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있는 다른 가족들과
힘을 합치기 마련입니다.
여기서 바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장로가
나오게 됩니다.
일종의 부족장이지요.
이것보다 더 큰 집단이
바로 지파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동네의 사람들은
막강한 국가 군대로부터
공격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전문적으로 전쟁을 하는 군대에 대해
농사꾼들이 당해낼 입장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을 찾아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소리 높여 울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좋다는 것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확인이 된 고수입 자리,
좋은 수입이 보장되는 곳이라면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의 이익을 자차지해보고자
우르르 달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힘들게 살기 보다는
남이 가진 것을 쉽게 빼앗는 것이
편하게 살고 싶은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왕이 없는 시절에,
누구하나 간섭하는 사람없이
만사 편해 보이지만
그 편함을 그냥 보고 있지 않는 것도
또한 세상입니다.
약한 자의 것은
항상 어디를 가나
공격의 표적이 됩니다.
먼저 본 자가 임자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울음 소리는
적들이 쳐들어와도 대응할 힘이 없고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하는 자기네들 신세가
처량해서 우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을 본받지 않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써보지만
타인의 공격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영 대안이 서지 않는 법입니다.
당하면 당하는대로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욕심없는 살아가는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밖에
더 비현실적인 발상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욕심이 있기 마련이며
오직 힘있는 자만이
그 욕심을 현실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대신할 영웅을
고대하고 찾게 됩니다.
사실 농사짓는 대는
별다른 영웅이 필요치 않습니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 일하면
어지간한 일들은 다 해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란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비정상적 행위입니다.
즉 말로나 법으로서
막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격다짐이 전쟁이며
무리한 수를 쓰는 것이 전쟁입니다.
안되는 것에 대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을
본의 아니게 맞이하는 자들 쪽에서도
말도 안되는 비정상적인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점을 인간들은 알기에
사전에 여호와께
자신들도 왕이 있어야 한다고
요청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영웅적인 왕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평온할 때는
각자의 능력으로 맡은일을 수행해나가지만
긴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영웅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가 하면
무엇이 잘된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려 합니다.
즉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것은
신에 속한 일이요,
그 신에 속한 일로 인해 승자가 되면
선한 집단이 되고
패자가 되면 스스로 저주받은 악한 자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게 굳어져버리면
그 다음에 강자에 대한 굴복이
신의 뜻인 양인 양 이해해서
굴욕적인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는
전쟁을 통해서
선과 악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성공한 사람이 있는 반면
가게문을 접은 사람도 생겨납니다.
다같이 망해버리면
여전히 외부의 경기를 탓하고 싶겠지만
유독 자신만 망해버리면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란
단순히 밥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수시로 자신의 가치를 점검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때 삶의 행복을 가름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런 암몬 국가의 도전에 대해서
참으로 이스라엘이 옳음을 증명해줄
영웅을 구하는 것은
본성상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영웅은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절망적입니다.
이 절망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울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사나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됩니다.
소를 찢어버리고
그 찢어진 고기를
모든 이스라엘 지파로 보내
영웅이 나타났음을 알려줍니다.
사울은 외부의 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존재를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사울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로 간주해서
소의 찢음같이
가차없이 찢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적을 존재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더 두려워해서 울기보다
그 앞에서 늘 잠잠하고 고요해야 하는 겁니다.
이제는 백성들은 안심해도 괜찮습니다.
사람대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싸움이 된 것입니다.
과연 사울의 33만 군대는
암몬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승리요 사울의 승리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승리’를 빼고
‘사울의 승리’로 돌려버립니다.
사울 역시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보다 자기의 승리로 여기게됩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영웅을 원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세상 생활에서
자신을 여전히 살만한 가치있는 존재로
증명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능력있는 목사를 구하는 것이고
똑똑한 목사를 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울이 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습의 영웅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영웅입니다.
우리를 마냥 ‘살려주는 하나님’만 찾는
죄인인 것을 알려주는 영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늘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앞에서 운다는 것은,
대단히 수상한 짓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