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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34)한산 습득~한암선사~항복~향~해탈~해우소~행각~허공~혜초대사
492. 한산(寒山) 습득(拾得)
☀ 한산사(寒山寺) 그리고 한산과 습득 이야기
한산사(寒山寺)는 서기 502년에 건립된 고찰로 1.500년이나 된 오래된 사찰이다. 중국의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5차례나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가 청대말(淸代末)에 재건되었다.
중국의 대부분 관광지는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이 다르다. 한산사는 입구로 들어가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 뒤를 돌아 밖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우리나라 절과는 틀리게 건축되어있다.
당나라 때에는 일본에서 많은 스님들이 유학을 오기도 하였다. 당대(唐代)의 승려인 한산(寒山)이
이 절에 주지로 근무한 후부터 한산사라고 개명되었다.
한산사에서는 한산과 습득(拾得)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을 주웠을 때 쓰는 바로 그 습득이다.
이 이야기는 사나이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중국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다.
이곳 한산사(寒山寺)에는 한산과 습득의 상(像)이 있는 한습전(寒拾殿)이라고 있다.
출처: https://guamcafe.tistory.com/5564 [구암카페]
한산(寒山)시집에서...
靑山見我無言以生(청산견아무언이생)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見我無塵以生(창공견아무진이생) 창공은 나를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解脫貪愛解脫塵埃(해탈탐애해탈진애)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生涯以去(여수여풍생애이거)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한산 과 습득은 당나라 때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풍간 선사라고 하는 도인과 함께 국청사에 살고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국청사에 숨어 사는 세 사람의 성자라는 뜻으로 국청삼은(國凊三隱)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분들은 모두 불보살님들이셨는데 바로 풍간 선사는 아미타부처님, 한산은 문수보살님,
습득은 보현보살님의 나투심이라고 합니다.
한산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 이라는 굴속에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늘 다 떨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 되면 국청사에 와서
습득이 대중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모아주면 먹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끔 절에 와서 거닐기도 하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고 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절의 스님들은 그런 그를 작대기로 쫓아내곤 하였는데, 그러면 한산은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가버리는 것 이였습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버려진 남자 아기를 주워다 길렀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국청사 주지스님은 습득이 자라자 법당 부처님 앞에 있는 촛대와 향로를 청소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하루는 스님이 법당 앞을 지나가는데 법당 안에서 말소리가 나는 것 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습득의 목소리였습니다.
“부처님, 밥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부처님, 반찬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스님이 이상히 여겨 법당 문을 열어보았더니 습득이 부처님 턱 밑에 앉아 공양 올린 밥을 숟가락으로 퍼서 부처님 입에 갖다 대고는 자기가 먹으면서 연신,
“부처님 밥 잡수시오. 안 잡수셔? 그럼. 내가 먹지.”
그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스님은 그를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맡겨버렸습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는 일을 하였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에는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대나무 통에 넣고서는 한산과 어울려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습득이가 마당을 쓸고 있는데 주지스님이 지나다가「너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습득은 일을 중지하고 손을 깍지 짓고 섰습니다. 주지스님이 그 뜻이 뭔지 모르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 옆에 한산이 나타나서 가슴을 밀면서「창천(蒼天)아 창천(蒼天)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습득이가 한산에게 도리어 묻기를 「내 무어라 했느냐」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산이가 말하기를「어찌 동가(東家) 사람의 죽음을 모르고 서가(西家) 사람이 슬퍼하겠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울고 웃고 춤추며 주지스님 앞을 지나 밖으로 멀리 뛰어나가 버렸습니다.
⌾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국청사에는 절의 외진 곳에 가람신(伽藍神: 절을 보호하는 신)을 모셔둔 당이 있었는데 별로 돌보는 이가 없어서 문짝이 다 떨어져 나가고 지저분했습니다. 습득이 청소를 하고
사시 때마다 공양을 올려놓으면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가 내려와서 마구 쪼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이를 지켜보던 습득이 가람신에게 달려가 지팡이로 마구 때리며 "네 밥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가람을 지켜? 이 못난 놈아!" 하며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이 날 저녁 주지스님 꿈에 가람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보현보살께서 내 밥도 못 지킨다고 저를 마구 때리니 죽을 지경이요. 내 집에 문을 달아 주든지 아니면
공양 올리는 일을 보현보살에게 맡기지 말아주셔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 이상한 꿈 이야기를 대중에게 하니 모두 똑 같은 꿈을 꾸었다고 소란들이었으며,
더구나 그게 바로 습득인 줄 알고는 더욱 신기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없이 하늘을 보고 웃기도 하고,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불도의 이치에 맞는 말만 하였습니다.
⌾ 어느 날 주지스님이 멀리 가셨다가 산 아래 목장을 지나 돌아오시는데,
한산과 습득이 소 떼와 더불어 놀고 있었습니다.
한산이 먼저 소 떼를 향하여 말을 했습니다.
“이 도반(道伴)들아, 소 노릇하는 기분이 어떠한가, 시주 밥을 먹고 놀기만 하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법문을 나눌까 하여 왔으니, 이름을 부르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게.
첫 번째, 동화사 경진 율사!”
그 소리에 검은 소 한 마리가 ‘음메~’하며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나서는 한산이 가리키는 위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관사 현관법사!” 이번에는 누런 소가 ‘음메~’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 번째 소를 따라 갔습니다. 이렇게 서른 몇 번을 되풀이하였습니다. 백여 마리의 소 가운데 서른 마리는 스님들의 환생(還生)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주 밥만 축내며 공부를 게을리 한 과보로 소가 된 것입니다.
몰래 이 광경을 지켜 본 주지 스님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고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한산과 습득이 미치광이인줄만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임에 틀림없구나.’
⌾ 한편 그 고을에는 여구윤이란 사람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왔는데 그만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은 어떠한 약과 의술로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풍간 선사가 그의 병을 깨끗이
고쳐 주었고, 이에 여구윤은 크게 사례하며 설법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풍간 선사는
“나 보다는 문수와 보현께 물어 보시오.” “두 분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국청사에서 불 떼고 그릇 씻는 한산과 습득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리하여 자사는 예물을 갖추고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가니,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으며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절을 올리자 한산은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바로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리를 찾으면 뭘 하나?”
이 말을 남기고 한산과 습득은 절을 나와 한암굴로 들어 가버렸는데,
그들이 굴로 들어가자 입구의 돌문이 저절로 닫기고 그 후로 두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한산과 습득의 문답>
옛날에 한산이 습득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고 업신여기고 욕하고 비웃고 깔보고 천대하고 미워하고 속이니
어떻게 대처(對處) 해야겠는가? 」
습득이 말했다.「참고 양보하고 내버려두고 회피하고 견디어내고 그를 공경하고 그와 따지지 않으면,
몇 해 후에는 그들이 그대를 보게 되리라.」 「그런 것을 비켜 갈 비결은 없는가?」
「내가 언제 미륵보살의 게송을 본 일이 있으니, 들어 보게나.」
늙은 몸이 누더기 옷 입고 거칠은 밥으로 배를 불리며 해진 옷 기워 몸을 가리니 모든 일에 인연을
따를 뿐이네. 어느 사람 나를 꾸짖으면 나는 좋습니다 하고 나를 때리면 나는 쓰러져 눕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마를 때까지 그냥 두네.
내편에선 애쓸 것 없고 저편에선 번뇌가 없으리. 이러한 바라밀이야말로 신묘한 보물이니 이 소식을
알기만 하면 도가 차지 못한다 걱정할 것 없네.
사람은 약하나 마음은 약하지 않고 사람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아 한결 같은 마음으로 행을 닦으면 언제나 도에 있으리.
세상 사람들 영화를 즐기나 나는 보지도 않고 명예와 재물 모두 비었거늘 탐하는 마음 만족을 모르네.
황금이 산처럼 쌓였더라도 덧없는 목숨 살 수 없나니 자공(子貢)은 말을 잘 했고 주공(周公)은 지혜가
빠르고 제갈공명 (諸葛孔明)은 계책이 많고 번쾌(樊快)는 임금을 구했으며 한신(韓信)은 공이 크지만
칼을 받고 죽지 않았던가.
고금(古今)에 수없는 사람들 지금 얼마나 살아 있는가.
저 사람은 영웅인 체하고 이 사람은 호남자(好男子)라 하지만 귀밑에 흰 털이 나게 되면 이마와 얼굴은
쭈그러지고 해와 달은 북 나들듯 세월은 쏜 살과 같네. 그러다가 병이 들게 되면 머리를 숙이고 한탄할 뿐 젊었을 적에 왜 수행하지 않았던가 하네.
병 난 뒤에 지난 일 뉘우쳐도 염라대왕은 용서하지 않나니 세 치 되는 목숨 끊어지면 오는 것은 송장뿐,
옳다 그르다는 시비도 없고 집안 일 걱정도 않으며 나와 남을 분별함이 없고 좋은 사람 노릇도 아니 하네.
꾸짖어도 말이 없고 물어도 벙어리인 양 때려도 성내지 않고 밀면 통채로 구를 뿐이네.
남이 웃어도 탓하지 않고 체면을 차리지도 않으며 아들 딸이 통곡하여도 다시는 보지 못하고,
명예와 재물 그렇게 탐하더니 북망산천으로 이웃을 삼네.
온 세상 사람들 두 얼이 빠졌으니 그 만이라도 정신 차려서 보리의 도를 닦아 행하라.
씩씩한 대장부 되어 한 칼로 두 조각내라. 불구덩 에서 뛰어나 쾌한 사람 되어 보게.
참된 이치를 깨닫게 되면 해와 달로 이웃하리라.
또한 그들은 시에도 능했는데 시를 지어서는 나뭇잎과 바위 등에 써놓았다고 합니다.
한산과 습득의 천진난만한 생활을 알 수 있는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 적도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로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으며 큰 도리는 웃음 속에 꽃 피네.
나라가 잘 되려면 군신이 화합하고 집안이 좋으려면 부자간에 뜻이 맞고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일이 하나 없네. 부부간에 웃고 사니 금슬이 좋을시고 주객이 서로 맞아 살맛이 나는 구나 아래 위가 정다우니 기쁨 속에 위엄 있네. 하하하 허허허 웃으며 살자.”>
<구암카페에서 퍼온 글.>
☀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한산과 습득은 선종화(禪宗畵)의 주제에 걸맞는 괴팍한 성격의 기인(奇人) 선승(禪僧)이다.
이들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기벽(奇癖)의 일화(逸話)와 파격의 시(詩)들이 알려져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산(天台山)국청사(國淸寺)의 괴승 풍간(豐干)의 제자로 전해 온다.
풍간ㆍ한산ㆍ습득은 자유분방하고 광적인 기행(奇行)의 무위도인(無爲道人)이었다. 세 사람을 삼은사
(三隱士), 세 사람의 시를 삼은시(三隱詩)라 일컬으며, 셋을 함께 등장시킨 그림의 예도 있다.
그리고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변신으로,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신(化身)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한산은 저장성(浙江省)시팽현(始豊縣)의 한암(寒巖)에 기거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천태산의 국청사를 내왕하며 살았다고 한다. 특히 세 인물 가운데 한산이 대표격인 시인으로서
세상 풍자가 심하고 인과응보의 내용을 담은 특이한 형태의 시들이 전해 온다.
그의 시는 흥에 겨워 나뭇잎이나 촌가의 벽에 써놓은 것을 모은 것이라 한다.
그의 시집에는 314수가 들어 있으며, 습득의 시 60수, 풍간의 시 6수도 포함되어 있다.
습득은 풍간이 적성(赤城)을 지나다 발견하고 국청사에서 길렀다고 전해 오며, 부엌에서 밥짓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리고 한산이 오면 찌꺼기를 모았다가 먹이고는 하였다 한다.
한산과 습득을 그린 선종화는 산발하고 누더기 차림인 두 인물이 파안대소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시권(詩卷)을 펴고 읊조리는 자세의 습득과, 붓을 들고 시권 두루마리나 파초 잎에 시를 쓰는 한산을
표현한 예도 있고 빗자루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한산습득도는 선종화가 유행하던 중국의 남송시대와 원나라 때에 즐겨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나 달마도(達磨圖) 등의 선종화에 비하여 현존하는 작품으로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준(劉俊)의 전칭 작품이 고려 말기의 것으로 전해 온다.
493. 한암선사 (漢岩禪師)
한암선사의 속성은 방(方)씨이며 이름은 중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스스로
글을 깨쳤기 때문에 부모들이 일부러 글공부를 시킨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선사는 나이 23세 때 금강산에 구경 갔다가 정신적으로 느낀바가 있어 그곳 장안사에서 삭발 득도하였다고 한다.
경주 청암사(靑岩寺)에서 경허선사(鏡虛禪師)를 만나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설법을 듣고 홀연히
안광(眼光)이 열리며 점차 우주의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사(禪師)가 입산 7년 후인 1905년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초대되어 5년 동안 납자를 제접 지도했다. 그러다 1910년 선사의 나이 35세에 선원을 해산하고 평안북도 맹산의 우두암으로 들어가 조용히
참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열심히 참선하는 도중에 어느 날 불을 때게 되었는데 타오르는 그 불길을
보고 깨침을 얻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
着火廚中眼忽然 (착화주중안홀연)
從玆古路隨緣淸 (종자고로수연청)
若人問我西來意 (약인문아서래의)
岩下泉鳴不濕聲 (암하천명불습성)
‘부엌에서 불 지피다 홀연히 밝아지니
이로부터 옛 길이 인연 따라 밝아지네.
누군가 나에게 달마가 서쪽으로 간 뜻을 묻는다면
바위 아래 샘물 소리 적시는 일 없다 하리.’
이후 선사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50세에 뚝섬 봉은사의 조실로 있다가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열반할 때까지 27년간 동구(洞口)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사의 법력은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 일본인 고관들도 심심치 않게 상운암을 찾았던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저술에 무척 인색했던 선사였지만 붓을 들면 무척 맑고 수려하며 고아한 글을 썼다고 한다.
이렇게 틈틈이 쓴 시문들을 ‘일발록(一鉢錄)’이라 제하여 보관하였는데 1947년 불의의 화재로 타버려
아까운 시문이 안타깝게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6.25동란 중에 군 작전상 상원사가 소실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법당 안에 앉아서 나는 이대로 앉아
이 절과 함께 불타 죽을 터이니 불을 지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불을 지르러 왔던 장교는 선사의 선기에 눌려 법당 문짝 하나만 태우고는 물러가는 바람에 고찰 상원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6.25사변으로 국내가 시끄러운 1951년 2월 14일 아침에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선사는 무언가
손가락을 꼽아 보더니,
‘오늘이 2월 14일이 아니냐?’ 라고 묻더니 가사와 장삼을 손수 찾아 입고 선상(禪床)위에 올라앉아
태연한 모습으로 열반하셨는데 그때 선사의 세수 76세 였다.
494. 합장 (合掌)
열 손가락과 좌우 손바닥을 얼굴과 가슴 앞에 모아서 부처님이나 상대방을 공경하는 불교 예법이
합장이다. 합장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인사법으로 인도ㆍ스리랑카ㆍ미얀마ㆍ태국ㆍ베트남 등에서는 일상적인 행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오른손은 신선한 손, 왼손은 부정한 손이라고 구분하고 양손을 합하는 일은 인간 내면의
신성한 면과 부정한 면을 합일시키는 것으로 인식했다.
여러 불전에는 합장은 부처님을 공경하고 높으신 덕을 찬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했다.
<관무량경>에서는 수행자가 아미타불ㆍ관세음보살ㆍ대세지보살 등 삼존께 합장차수하고
제불을 찬탄하면 일념 동안에 극락국 칠보의 연못 속에 태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합장은 우주의 만법을 절대적인 한마음의 경계로 모으는 통일된 자세이자 수행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495. 항복 (降伏) ☀불교에서 나온 말
범어 ‘stambhana (저해하는 것)’ ‘pragrahitavya (당연히 억제할)’ 등의 의미를 번역한 것으로
‘위력으로 다른 이를 눌러 복종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사전적인 의미의 항복(surrender)은 군대, 병사, 국가 따위가 패배를 인정하고 전투행위를 중단하고
적의 권력 하에 자신을 두는 행위이다.
물리 용어 항복은 어떤 물체가 복원력을 잃었을 때 쓰인다. 이때 가한 힘을 항복 강도라 한다.
496. 향 (香)
불자들은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면서 향을 피운다.
향은 범어로는 'Gandha'이며 건타(乾陀)ㆍ건두(乾杜)ㆍ건태(乾駄)등으로 음역된다.
<품류족론 品類足論>에서는 향을 호향, 악향, 평등향(好香,惡香 平等香)으로 구분하고 있다.
불에 태워서 피우는 향을 소향(燒香), 훈향(薰香)이라 부른다.
향나무가 많은 인도에서는 향을 몸에 바르거나 방안에 피워 냄새를 제거하는데 이용했다.
인도에서 일찍부터 몸에 바르는 향수(香水), 향유(香油)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향이 발달했다.
이런 인도의 생활관습에 의해 향은 주변의 악취를 물리치듯 번뇌(煩惱)의 망상(妄想)을 제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부처님께 향을 공양하는 것이 하나의 공덕(功德)이 되었다.
향(香)을 피울 때는 오른손으로 향의 중심부를 잡고 촛불에 향불을 부친다. 다음에 향을 든 손을 머리위로 올려 경건한 마음을 표하고 향로 중앙에 바로 꽂는다. 그리고 합장(合掌)한 자세로 반배하고 참배한다.
향을 피우면 향훈(香薰)이 잠깐 사이에 백천만억 부처님 세계까지 널리 퍼져 여러 부처님들이 이 향기를 맡고 법문을 듣거나 공양하는 이들을 실제로 보고 실제로 알게 되는 큰 공덕이 있다.
불교의식에 소향(燒香)의 영험과 공덕에 대해 『금강명경』<사천왕품>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으로 향로를 받들고 경전에 공양할 때에 그 향기가 잠깐 동안에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해와 달과 백억 큰 바다와 백억 수미산과 백억 큰 철위산(鐵圍山), 작은 철위산과 모든 산왕(山王)과 백억 천하, 백억 사천왕, 백억 삼십삼천과 나아가 백억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까지 두루 퍼진다. 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백억 삼십삼천과 온갖 용 귀신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들의 궁전과 허공에 여러 가지 향기의 일산(日 傘)이 가득 차고 그 일산의 금빛은 궁전까지 비출 것이다.”
☀ 매향의 풍습(埋香風習) <김현준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191쪽>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향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향에는 사향(麝香)을 비롯하여 독누(篤耨)ㆍ용뇌(龍腦)ㆍ전단(栴檀)ㆍ침수향(沈水香)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침수향이 가장 좋으니 이는 아주 오래 묵은 향나무의 심(목심)으로, 물에 넣었을 때 깊이
가라앉을수록 향내가 짙고 좋은 것이다.”
침수향은 줄여서 침향(沈香)이라고 많이 부른다. 향 중에 가장 좋은 침향을 불전에 올리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과 함께,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침향을 만드는 매향(埋香)의 의식이 많이
행하여졌다.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두면 보다 단단하여지고 굳어져서,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침향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향의 풍습을 기록한 매향비(埋香碑)는 현재 5기가 발견되었다.
ㆍ 1309년(충선왕1)에 세운 고성 삼일포 매향비
ㆍ 1335년(충숙왕 복위4)에 세운 정주 매향비
ㆍ 1387년(우왕 13)에 세운 사천 매향비
ㆍ 1405년(태종 5)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ㆍ 1427년(세종 9)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다.
이들 매향비가 세워진 지역은 모두 바닷물이 유입되는 내만(內灣)이나 첨입부에 위치하고 있다.
좋은 침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적지가
‘산곡수(山谷水)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리라.
남아 있는 매향비를 통하여 볼 때, 매향을 위해 사람들은 보(寶)ㆍ결계(結契)ㆍ향도(香徒) 등의 조직체를 만들었고, 승려보다는 일반 민중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왜 그들은 지금 현세에서 사용할 수도 없는 침향을 만들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깊은 산의 좋은 향나무를 베어 바닷물이 유입하는 곳을 찾아 목심(木心)을 묻었을까?
매향신앙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를 두고 있다.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을
제도 할 때 미륵의 정토에 태어나서 살겠다는 소원이 담겨져 있다.
매향은 그들의 고통과 불안을 땅에다 묻는 것이었다. 단순한 향나무가 침향으로 탈바꿈하는 때는
곧 미륵불이 출현하는 때이고, 그때 그들도 용화세계에 태어나 묻어 두었던 향을 파내어 부처님께 올리고 해탈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소망에서 매향의 풍습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497. 향로, 향완 (香爐,香浣)
향로는 향(香)을 피우는 그릇이다. 금속이나 도자기로 만들어지며, 모양도 다양하다.
자루가 있는 것은 병향로(柄香爐, 들고 다니는 것), 없는 것을 거향로(居香爐, 지정된 장소에 두는 것)라
한다. 또한 뚜껑이 없고 윗부분이 그릇형으로 된 것을 향완(香浣)이라 한다.
이는 불교 의식에서는 필수적인 불구(佛具)의 하나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향로를 들고 가는 행렬도가 있는 것과 중국에서 신라에 향(香)을 보내온 사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사리 장엄구 중에 향로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옛 사찰 향로의 대부분은 손잡이가 없는 밥 그릇모양의 몸체, 몸체 위의 넓은 전(구연부:口緣部), 나팔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받침대를 갖춘 향완(香浣)이다.
이 향완(香浣)이 불단의 중심에 놓이는 불구인 만큼 향도들은 제작에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특히 문양 장식에 쏟는 정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문양은 선각(線刻)하고 그 틈에 은실, 또는
금실을 꼼꼼하게 박아 장식한 입사(入絲)문양이 대종을 이루었다.
향완에 장식된 문양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자연현상, 문자, 기물, 동물, 식물 등으로 분류되는데 자연현상문은 구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기물문(器物紋)은 여의두문이 많으며, 동물문(動物紋)으로는 용ㆍ봉황기러기ㆍ오리가 있고, 식물문
(植物紋)으로는 연꽃ㆍ당초ㆍ보상당초ㆍ넝쿨무늬ㆍ풀무늬 등이 있다.
그리고 문자문(文字紋)은 ‘옴’,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반메훔’ 등의
범어(梵語)로 된 진언문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진언은 범종ㆍ운판ㆍ단청 등에도 보이지만 향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향로는 1993년 12월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국보 제287호로
지정된 “부여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이며 이 향로의 의장(意匠) 내용이나 제작 기술,
그리고 예술미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 향로의 몸체는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山)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봉황(鳳凰)이 장식되어 있고, 몸체 아래에는 용(龍)이 향로 전체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박산향로(博山香爐)와 형태가 비슷하지만 몸체가 연꽃 봉오리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향로 뚜껑에는 첩첩의 산ㆍ사슴ㆍ학ㆍ신선ㆍ봉황 등 도교적 색채가 강한 문양들이 시문되어 있는데,
이것은 불교와 도교의 융합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산향로: 발해 동쪽 바다의 신선이 산다는 상상의 산을 본떠 만든 향로
또한 예술성 높은 향완은 소개하면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국보 제75호 ‘표충사 청동입사향완’이 있다.
이 밖에 고려시대 유물로 흥왕사 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환(화암미술관 소장), 동제은입사향환(개인소장),
봉업사 명청동향로(호암미술관소장), 지정4년명고려청동누은향로(동국대학교박물관소장), 통도사 은입사동제향완,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 향완(호암미술관소장), 마곡사 동제은입사향로 등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물로는 청동은상감향로(국립중앙박물관소장),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강희십삼년명동제은입사향로(통도사소장) 등이 있으며,
왕실제작 향로로는 조선 정조임금이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금동향로, 청동향로가 있다. 이 향로는 8각을 기본형으로, 각 면에 산수 무늬를 양각한 궁정 취향의 화려하고 섬세한 향로이다.
498. 해탈 (解脫) ☀불교에서 나온 말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불교는 이것을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였다.
즉 범부는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499. 해우소 (解憂所) ☀불교에서 나온 말
사찰 화장실에 해우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스님은 경봉스님(1892~1982) 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때의 일이다. 당시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있던 경봉스님은
두 개의 나무토막에 붓으로 글자를 써서 시자에게 내밀었다. 하나에는 해우소(解憂所)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나무토막에는 휴급소(休急所)라고 적혀 있었다.
경봉스님은 두 나무토막을 각각 큰일을 치르는 곳과 소변을 보는 곳에 걸라고 명했다.
해우소(解憂所)는 근심을 해결하는 곳, 휴급소(休急所)는 급한 것을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후 극락선원을 찾는 수좌와 신도들은 문패를 보고 설왕설래 말이 많자, 경봉스님은 어느 날 법문을 통해 참뜻을 전달했다.
“우리 극락선원 정랑에 갔다가 사람들이 해우소, 휴급소(休急所)라는 팻말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려.
그리고 저마다 한 소리를 해.
이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이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일이야.
그런데도 중생들은 화급한 일은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은 바쁘다고 해.
내가 소변보는 곳을 휴급소(休急所)라고 한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 그 곳에서 쉬어가라는 뜻이야.
그럼 해우소(解憂所)는 무슨 뜻이냐. 뱃속에 쓸데없는 것이 들어 있으면 속이 답답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지. 그것을 다 버리는 거야. 휴급소(休急所)에 가서 급한 마음을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 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 닦는 거야.”
휴급소(休急所)는 잊혀졌지만 해우소(解憂所)라는 명칭은 지금도 사찰뿐 아니라 일반에서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 해우소 진언 ‘입측오주(入厠五呪)’
‘입측진언(入厠眞言)’ (화장실 들어가서)
버리고 또 버리니 큰 기쁨일세 탐진치 어둔 마음 이같이 버려
한 조각 구름마져 없어졌을 때 서쪽에 둥근 달빛 미소지으리
옴 하로다야 사바하 (세번)
‘세정진언(洗淨眞言)’ (뒷물 하면서)
비워서 청정함은 최상의 행복 꿈같은 세상살이 바로 보는 길
온 세상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 청정한 저 국토에 어서 갑시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세번)
‘세수진언(洗手眞言)’ (손을 씻으면서)
활활 타는 불길 물로 꺼진다 타는 눈 타는 경계 타는 이 마음
맑고도 시원스런 부처님 감로 화택을 건너뛰는 오직 한 방편
옴 주가라야 사바하 (세번)
‘거예진언(拒穢眞言)’ (더러움을 버리고)
더러움 씻어내듯 번뇌도 씻자 이 마음 맑아지니 평화로움 뿐
한 티끌 더러움도 없는 세상이 이 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소원
옴 시리예바혜 사바하 (세번)
‘정신진언(淨身眞言)’ (몸이 깨끗해지고)
한 송이 피어나는 연꽃이런가 해뜨는 푸른 바다 숨결을 본다
내 몸을 씻고 씻고 이 물마저도 유리계 푸른 물결 청정수 되리
옴 바아라 놔가락 사바하 (세번)
500. 행각 (行脚) ☀불교에서 나온 말
“사기행각을 벌인 아무개가 구속됐다” 행각이란 말은 신문지상을 통해 종종 접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곳저곳에서 나쁜 일을 저지를 때 행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행각(行脚)의 뜻은 그렇지 않다. 갈 행(行), 다리 각(脚)으로
단어상 의미는 “여기 저기 돌아다님”을 나타낸다. 사전에서도 나쁜 뜻으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행각은 불교집안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세속으로 내려온 것이다. 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이 자신의 공부와 수도에 적합한 선지식과 장소를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것, 이를 행각이라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수행자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스승을 찾아 불법(佛法)을 익힌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부처님 가르침을 익힘에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몸소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스승으로부터
불법을 익힌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수행하는 스님들을 행각승(行脚僧)이라고 한다.
501. 행자 (行者) ☀불교에서 나온 말
행자는 불교에서 출가하여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예비 사미, 사미니를 일컫는다.
우리나라 최대 종단인 조계종에서는 6개월의 수행 기간 후 사미계를 받게 되며, 1600년 전통 종단인
태고종에서는 최소 6개월의 수행 기간 후 예비 사미계를 받게 되며 예비 사미계 이후 6개월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 정식 사미계를 받는다. 이후 종단별로 5년 전후의 습의와 교학수학을 거쳐 정식 승려인 비구, 비구니계를 받게 된다.
☀
조계종 기준의 행자 자격 기준은 출가를 위해서는 우선 등록된 사찰이면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만 15세 이상의 나이여야 하며 고졸이상의 학력을 소지하셔야합니다.
독신이어야 하며, 이혼한 사람은 이혼 후 6개월이 넘어야 합니다.
신체적인 질환이 있어서 수행을 제대로 할수 없는 경우에는 출가할 수 없으며, 사회에 갚아야 할 부채가 있거나 신용불량, 지명수배중인 사람등은 출가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수계를 하기 전에 신원증명을 하기 때문에 자격을 숨기고 출가할 수 없습니다. 출가를 위해서는 우선 등록된 사찰이면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행자교육을 받게 됩니다.
2개월 이상 행자 생활을 하게 되면 교구본사에 가서 3개월 정도 행자교육을 받게 됩니다.
우선 은사스님을 정하고 행자교육을 받게 되는 데, 행자생활은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속세에서 익혀온
습관과 미련을 버리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에 자신의 출가 동기를 다짐하고 수행자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결정하는 기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러한 기간을 두는 이유는 곧바로 수행자가 되어 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가 혹시라도 세속에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환속하는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보통 행자생활은 여러 가지 출가자로서의 계행을 배우고 사찰에서 필요한 기본 의식과 예법을 배우며
독경 및 초발심자경문등 경전공부를 합니다. 아울러 사찰에서 하는 모든 허드렛일을 하게 됩니다.
청소, 밥짓기, 예불, 불공, 좌선, 정진, 울력 모두 참석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사찰생활을 터득하기위해
이루어지는 교육의 일환입니다.
이러한 행자교육을 마치게 되면 종단에서 마련하는 수계산림에 모여 최종교육을 마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계를 받게 되는데 이때 사미계를 받게 됩니다.
사미계를 받고 나서 강원이나 선원에서 4년이상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되면 비구 또는 비구니계를 받게
됩니다.
행자들은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새벽 3시에 기상합니다. 스스로 일어나도 되고, 알람을 맞춰도 되며, 아침에 도량석을 하는 스님의 목탁소리를 듣고 기상해도 됩니다.
그리고 나서 3시반 경에 아침예불을 다 같이 하게 됩니다.
502. 허공 (虛空) ☀불교에서 나온 말
허공은 빈 하늘 즉 거지중천(居之中天)의 의미로 범어 ‘akasa'의 번역이다.
일체제법이 존재하는 공간을 일컫는 불교 용어이다.
<다음은 위키백과사전 내용이다.>
허공(虛空, 산스크리트어: ākāśa)은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무위법(無爲法) 위(位)에 속한 3무위(三無爲) 중의 하나이며,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무위법(無爲法)
위(位) 속한 6무위(六無爲) 중의 하나이다.
아가사(阿迦舍)라 음역하며, 허공무위(虛空無爲, 산스크리트어: ākāśāsaṃskrta)라고도 한다.
공간적 점유성이나 장애성을 지니지 않는 것, 즉 무애(無礙)를 본질로 하는 공간 즉 절대공간을 말한다.
어떠한 것도 장애하지 않기 때문에 색(色: 물질)이 그 가운데서 작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체의 물질적 변화를 제거할 때 남는 법(존재) 또는 공간이다.
이 절대공간은 인연의 화합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한다.
503. 현관 (玄關) ☀불교에서 나온 말
집이나 빌딩을 드나들 때 처음으로 통과하는 문이 현관이다. 사전에는
“모든 건축물의 출입구로 방 또는 홀과 연결되는 건축물의 첫 번째 출입구”로 정의하고 있다.
사실 현관은 불교에서 비롯된 용어로 “깊고 묘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關門)”이란 뜻을 담고 있다.
주로 불가(佛家)의 선종(禪宗)에서 사용했던 용어로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는 시작,
이치나 도리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한 뜻에 출입하는 관문이란 것이다.
즉 부처님 가르침을 익히고 배우려는 첫 번째 관문을 일컬어 현관(玄關)이라고 한다.
중생의 근기로는 헤아리기 힘든 미묘함을 지닌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현관이다.
불교를 현문(玄門)이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
불교(佛敎)이기 때문이다.
504. 현장법사 (玄奘法師)
불교에서 삼장(三藏)이라고 하면 경, 율, 론(經,律,論)을 말하는 것이므로
불교의 세 방면 즉 교리, 실천, 학문을 포괄하는 호칭이다.
이런 삼장에 정통한 덕망 높은 승려를 삼장 또는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당나라 현장법사의 경우에는 그저 삼장법사라고만 말해도 그를 가리킨다고 할 만큼 훌륭한
학승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29세 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3년 만에 나란다(那爛陀)
절에 도착했다. 절이라기보다는 당대 제일의 불교대학이였다. 인도에 머무른 13년 동안에 지금으로
말하면 부학장 (당시 학장은 戒賢)을 역임하기도 하고 645년 1월에 귀국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져온 불경(佛經)은 657부였다. 그것을 장안에서 하나하나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의 번역을 신역이라 하고 그 이전의 것을 구역이라 한다. 그가 번역한 것은 75부 1,330권에 이른다.
또한 인도 기행에 대해서 쓴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이 책은 통틀어 17년간 138개국을 다니며 쓴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되어 오고 있다.
현장법사의 문하생이 3천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규기(窺基), 신태(神泰)등이 수제자이다.
특히 규기는 자은대사(慈恩大師)라고 불리는데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법상종의 근본 불전에 관해 권위자였다.
현장에 앞서서는 법현(法顯, 577~653)이 4세기 말에, 뒤에는 의정(義淨, 635~731)이 7세기 후반에
각각 입축(入竺:인도에 들어감)하고 인도 본고장의 새로운 불교를 중국에 가져왔다.
삼장법사 현장은 664년 2월 5일 세수 65세에 입적하셨다.
505. 혜가 (慧可: 2祖)
“스승이여 제자는 마음의 평화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달마와 2조 혜가선사의 선문답이 바로 그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文)이다.
달마의 법을 이어받은 2조 혜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혜가단비(慧可斷臂)의 고사다.
참다운 깨달음을 구하는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추운 겨울날 눈이 몸까지 차오르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팔을 잘라버리는 진지한 구도자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혜가의 가장 큰 공적은 초기 선종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토착불교로 뿌리를 낼 수 있는 초석을 놓은 데 있다. 진지하고 성실한 구도자로서 면모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행적을 살펴보자.
자신의 열반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혜가선사는 매일 저자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궂은일을 도와주며
교화를 폈다.
“화상은 도가 높으신 분입니다. 제발 궂은일을 그만하십시오.” 라고 주위사람들이 말하자
“내 스스로 하는 마음의 수행일 뿐 다른 뜻은 없다” 고 일축했다.
<속고승전>권16에서는 “달마선사가 낙양과 양자강 주변에서 교화를 펴다가 입적하자 혜가는 몸을
숨겼다. 그러나 예부터 명성이 드높았으며 아름답던 그의 뜻은 근방에 널리 퍼져 있어서 배움을 구하는
승려들과 재가신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셨다.”
506. 혜능① (慧能:638~712: 六祖)
중국 선불교(禪佛敎)를 화려하게 개화한 혜능선사는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本來無一物)”이란 화두로 당시 수제자였던 북종선의 태두 신수선사를 제치고 방앗간에서 일하던 행자에서 하루아침에 달마조사의 법을 이어받은 불세출의 스타가 된다.
육조(六祖)까지 법과 법을 이어받는 장면들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완벽한 시나리오는 살불살조적
(殺佛殺祖的)이며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선(禪)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전범들이다.
“마음을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고 자유 자재롭게 하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서 발심 출가를 결심하듯 혜능선사의 가풍은 <금강경>으로 심안을 열었다.
그 사상의 핵심은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육조단경>에서 찾을 수 있다.
<단경>에서는 “자성은 본래청정하고 생멸도 없으며 누구나 다 구족해 있으며 동요도 없고 만법을
낳는 것” 이라고 밝히고 있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적인 직관을 중심하는 돈법(頓法)을 강조하고 있다.
혜능선사의 백미는 보림사 전법에 있다.
40년간 이곳에 주석한 혜능선사는 남악회양, 청원행사, 남양혜충, 영가현각, 하택신회 등 5가 7종의
종장이 된 선의 거장들을 배출해냈다.
달마조사로부터 비롯된 중국 선불교는 비로소 이곳에서 그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혜능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전설로 남아있을 정도로 위대한 선(禪)의 종장(宗長)이다.
☀ 혜능② (慧能:638~712)
혜능스님은 아주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하지 못한 그는 30대 중반까지 땔나무를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습니다. 하루는 장터에서 어떤 스님이 금강경을 익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친 바 있어 제5대조사인 홍인(弘忍)대사를 찾아 갔습니다.
천여 명의 문하생을 거느리고 있던 홍인대사는 첫눈에 혜능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는 일을 맡겼습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석가모니불로부터 32대를 걸쳐 내려온 의발(衣鉢)과 선법(禪法)을
전해야 할 때임을 알고, 모든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스스로의 지혜를 살펴 자기의 본심인 반야(般若)의 성품으로 게송 하나씩을 지어오너라,
만약 대의(大意)를 깨친 사람이 있으면 의발과 법을 전하여 제6조로 삼으리라.”
스승의 지시를 받은 제자들은 대사형인 신수대사(神秀大師)만 바라보았습니다.
“신수 대사형은 현재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사(敎授師)로 계신다. 반드시 그 분이 법을 얻을 것이며,
앞으로 우리는 신수대사만 의지하면 된다. 어찌 주제넘게 게송을 지으리.”
신수대사는 아직 도를 통달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대중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
한밤중의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홍인대사의 방 남쪽 복도 벽에 한 수의 게송을 썼습니다.
몸이 보리수라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와 때가 끼지 않도록 하세.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 물사야진애 時時勤不拭 勿使惹塵埃)
이를 보신 홍인대사는 대주에게 이르셨다.
“이 게송에 의지하여 닦으면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뿐더러 큰 이익이 있으리라.”
그러나 견성하였다고 인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당시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던 행자 혜능(慧能)도 한 수의 게송을 신수대사의 게송 옆에 썼습니다.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아니네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때 끼고 먼지가 일까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 게송을 보신 홍인대사는 사람들이 혜능을 해칠까 염려하여 신발로 게송을 문질러 지워버리고
‘견성하지 못한 게송’이라 하셨지만,
3경(三更)에 혜능을 몰래 불러 의발과 법을 전하고 제6조로 삼았습니다.
혜능스님은 시기하는 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갔다. 수년간 사냥꾼들의 무리에 숨어 있다가
의봉 원년(677)년 광동성 남해의 법성사로 가서 인종(印宗)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조계 보림사에서 선풍을 크게 선양하고, 광동성 소주와 광주에서 40여 년간에 걸쳐
교화를 펼쳤으며 소주 대범사에서 설한 법문을 편집한 것이 후일의 ‘육조단경’이다.
507. 혜능 (惠能)
혜능(1562~1636)은 조선의 스님으로 자는 중열(仲悅)이고 호는 양성당(養性堂)이다.
속성은 남(南)으로 12세에 응철(應哲)에게 사미계를 받고 8년 동안 내외경전을 배워 통달하였다.
천조(天照)에게 의심을 묻고 처구당(處丘當)에 참예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보시(布施)하기를 좋아하고 계율을 엄하게 가지며, 성품이 명산으로 다니기를 좋아하여
두륜산,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 태백산 등 아니 간 곳이 없었다.
하루는 지나가는 기러기를 보고 시를 읊었다.
‘도를 다른 곳에 구하고 근본에 돌아가지 아니하면 어려서 고향을 떠나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하고 탄식하는 애절한 시를 지어 후세 전하였다.
옛 절에 돌아가 천축사에 있다가 조선 인조 14년 세납 75세로 입적하셨다.
508. 혜월선사 (慧月禪師)
혜월선사는 속성이 신씨이며 186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그는 13세에 예산의 정혜사에 출가 입산하여 24세 되던 해에 한국 선풍의 중흥조인 경허선사를 만나,
“이 몸도 허공도 설법이나 청법을 하지 못하는 것, 다만 눈앞의 뚜렷이 밝고 형태가 없으면서도
분명한 이 물건 이것이 비로소 설법하고 청법하는 것이니라.”
하는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하여 더욱 맹렬히 정진하더니 7일째 되는 날 아침에 짚신을 삼는 도중에
크게 깨침을 얻었다고 한다.
혜월선사는 한국 선승 중에 제일의 무심도인(無心道人)으로 유명한데 일화 중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언젠가 선사가 울산 미타암에 있을 때 신도에게 재(齋)를 지낼 돈으로 받은 1백원을 가지고 재(齋) 지낼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가다가 마침 길가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선사(禪師)는 그 여인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저는 남에게 80원을 빚졌는데
날마다 독촉이 어찌나 심한지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길거리에 나와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사는 두말없이 80원을 그 여인에게 건네주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그 빚을 갚으면 당장 애들 밥 지어 줄 쌀은 있는가?’
여인은 고개를 저어며 울먹였다.
선사는 여인의 딱한 처지를 알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나머지 돈 20원을 냉큼 내주고 말았다.
한편 절에서는 선사께서 재(齋) 지낼 물건을 사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늦게서야 빈털터리로 돌아오자 왜 장을 봐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선사는 이렇게 태연하게 말했다.
‘기가 막히게 재(齋)를 지내고 오는 길이다. 부처님께 지내는 것이나 불쌍한 사람에게 재를 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뒤에 그 재주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으며 다시 재 지낼 돈 1백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한번은 선사에게 어느 신도가 여름철에 깨끗한 모시 두루마기를 지어 드린 일이 있었다.
선사가 그 두루마기를 입고 시장에 가다가 아이들이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선사는 ‘애들아 그 미꾸라지 나에게 팔아라.’ ‘싫어요.’
‘녀석들아, 스님이 팔라면 팔아야 하는 게야.’
‘싫다니까요, 안 팔아요.’ 이렇게 선사와 아이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깨끗한 선사의 두루마기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선사는 아이들을 끌고 지서까지 갔다.
지서의 순사는 혜월스님이 그 유명한 무심도사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달래서
그 물고기를 선사에게 팔도록 했다.
선사는 자신의 모시 두루마기 버린 생각은 않고 그 미꾸라지를 놓아주며 좋아 하였다고 한다.
혜월선사는 1936년 산에 올라 솔방울을 따 가지고 내려오시다가 그대로 서서 열반하셨는데
그때 선사의 세납이 76세였다고 한다.
509. 혜초대사 (蕙超大師)
혜초(蕙超大師)는 신라의 스님으로 20세쯤 당나라에 서서 금강지 삼장(金剛智三藏)을 섬겼다.
남해(南海)로부터 바다로 하여 인도(印度)에 이르러 부처님의 유적을 찾아 참배하고 5천축을 두루
돌아다녔다.
북서로는 가습마라ㆍ대발률ㆍ소발률ㆍ건타라ㆍ오장ㆍ구위ㆍ람파ㆍ계빈ㆍ시율ㆍ범인ㆍ토화라 등에
갔다가 다시 동쪽으로 와서 안국ㆍ조국ㆍ사국ㆍ서라국ㆍ미국ㆍ당국ㆍ발하나국ㆍ골돌국ㆍ호밀국ㆍ
시닉국 등을 지나고 총령을 넘어서 소륵국ㆍ구자국ㆍ우면국을 돌아서 10년만인 727년 (당 개원 15년)
11월에 안서(安西)로 돌아 왔다가 다시 언기로 부터 동쪽의 여러 나라를 거쳐서 장안에 돌아왔다.
이 10년 동안의 여행에서 보고들은 것을 기록하여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고 다만 <일체경음의> 제100권에 그 음의가
실려 있어 책 이름만 알려져 있었는데 1910년 불란서의 동양학자인 펠리오가 감숙성 돈황의 천불동
석굴에서 앞뒤가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하여 그 대강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원본의 3권을 1권으로
내용을 줄인 책이다.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것이며,
현장의 <서역기(西域記)>는 육지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온 것,
의정(義淨)의 <남해기귀전(南海奇歸)傳>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것인데
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온 것이 특색이다.
사학계의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당나라에 돌아와서는 54년 동안 오대산에 있었고 금강지삼장과 불공삼장(佛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필수(筆授)를 많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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