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이라니.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학교와 집이 아니라면 산과 들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냈을 텐데, 어떻게 그런 확률이 스밀 리 있나. 담배 피우지 않은 이의 폐는 치유될 가능성이 높다는 풍문을 들었고, 과연! 명쾌한 목소리를 찾은 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다시 차일피일했는데, 별세 소식을 듣고 말았다.
직계 후배들은 한결같이 “놀부”라고 했다. 제물포고등학교 생물반의 신입 후배에게 자신의 전공을 소개하던 선배와 서울대학교 임학과 실습장을 방문했는데, 선배는 귀엣말로 놀부라 귀띔했다. 기대하는 후배를 술과 놀이로 안내할 수 없는 법. 강도 높은 현장 조사 연구팀에 넣은 모양이었다. 혀를 내두르던 선배들은 대부분 교수가 되었으니, 나중에 이경재 교수도 뿌듯해한 별명, “농부”는 고마움의 당시 표시였을 게 틀림없다.
생물학을 전공해 교수가 되려던 청년은 생물학과를 막 개설한 인하대학교에 입학했다. 1회인 만큼 우선권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미경 몇 대에서 시작한 생물학과로 부임한 지도교수는 “무에서 유를 만들자!” 하면서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1회로 독려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청춘을 바쳤는데, 거기까지였다. 교수로 자리 잡는다는 거,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진리를 새파란 학자는 깨닫지 못했다.
지도교수 추천서를 요구하지 않는 연구소에 지원했을 때, 이경재 교수가 떠올랐다. 까마득한 후배를 기억한 걸까? 흔쾌히 추천사를 써주었고, 실패하자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