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미사 대신 집안 일을 하며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습니다.
앞산은 겨울 기색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나무의 물관 속에선 이제 물 올릴 숨고르기가 한참 진행중이겠지요.
추운 겨울을 풀이나 나무가 견뎌내는 게 신비롭기만 했다가
겨울이 되면 풀들은 잎을 도마뱀처럼 스스로 말리어 죽이고
나무는 수액을 뿌리로 내려보내
겨울 나무엔 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전 정말 하느님의 전능을 체험 했었습니다.
내 삶이 지치고 힘들 때라면
내 몸의 모든 진액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철저히 낮아져
다시 기운을 차릴 때까지
그런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함을 나무에게서 배웁니다.
고향을 떠나 온 지 올해로 삼십 년.
참 오랜 기간 그곳을 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접은 지도 꽤 됩니다.
마지막 갔을 때조차 괜히 왔구나 싶어 후회가 막급했었습니다.
내 숨바꼭질과 소꿉놀이 친구들은 모두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소녀적 소망과 꿈이 벽지 여기저기 묻어 있을 집도 철거 되고
내 꿈을 간직한 그곳은 온통 아파트만 가득이어서
꿈속에서 걷던 철길도 논둑길도 옛 모습을 기억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낯선 신도시를 방문한 이방인만 있었을 뿐.
서울 가는 완행 열차와 급행열차가 지나가고 내가 학교를 걸어 다니던 철길엔
종례 시간에 철길로 다니지 말라던 담임선생님들의 종례소리가 쟁쟁했습니다.
그저 어릴 적 내 기억은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목포는 낯선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엔 서울을 고향처럼 여기고 지내다가
이곳 용인에서 닻을 내렸습니다.
용인은 저를 새로 나게 한 곳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늘 신나게 사는 성격이라
좋은 이웃들과 김치에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 떨어 뜨려서 쓱쓱 비벼 앞에 놓고
숟가락 몇개만 걸쳐 놓으면 전 어디서든지 행복합니다.
그런 이웃들이 있는 용인이 새 고향이 된 지도 이제 십오 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목포에서도 변두리에서 살던 저인지라
사람냄새 안나는 서울이 제겐 참 낯설기만 했다가
용인에 처음 내려 와 서른 두세 살 때의 저는 병원 개업 직후의 억척아지매였습니다.
외로움 따윈 느낄 겨를도 없었습니다.
외로우신가요? 당신의 여유로움에 감사해야할 때입니다.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고
살찌는 걸 걱정 하기보다 혹시라도 내일 아침 병이 날까 싶어
다이어트라는 호사스런 말보다
잘 먹고 일 잘하는 하녀가 되기를 꿈꾸는 나날이었습니다.
아침엔 일어나 직원들과 환자 밥을 하고
어제 거두어 들인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수술 후의 피 묻은 빨래는 따로 삶고
지하 일층부터 사층까지의 청소 그리고 점심준비
그리고 환자들의 소모품을 재봉질하고 수술포등을 정리해서 소독기에 넣어주고
남은 시간 붕대를 접어냅니다.
남편은 언제나 진료중일 뿐.
전 은행에도 가야하고 시장에도 가야하고 저녁준비에
밤이면 하는 수술실에선 지저분한 뒤치닥거리는 다 제 몫입니다.
당시 직원은 일곱명, 지금은 열 여섯,
사실 아홉 명의 일은 다 제가 해치우던 일입니다.
우리 병원 사무장님 당시에 웃으며 지은 제 별명은 '영원한 스페어'였습니다.
어디서든 손이 모자라면 다 제가 가서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세달 반을 지내자 주방 아줌마 한 분, 그 다음 달엔 또 한 분
이렇게 직원들이 늘어 갔습니다.
지금 저희 병원 주방 근무자는 십여년 전
취직하러 왔다가 재봉틀을 돌리는 저를 보고는
같이 왔던 친척이 강력하게 말렸다고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여적지 저랑 살고 있으니 정들면 헤어지는 게 더 어렵잖아요?
그렇습니다.
산도 옛산이 아니고 물도 옛물이 아닌 낯선 고향보다는
저랑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웃이 있는
이곳 용인이 제게는 고향일 것이고 아이들의 고향이 되는 겁니다.
처음 용인에 내려와 오백포기 칠백 포기가 넘는 김장을 처음 할 때
사람을 사야한다는 생각에 난감 했습니다.
김장이야 온 동네 사람들이 누구든 달려들어 해주는 것이 시골 인심인데
사람을 사야한다니 이곳이 타향이라는 걸 그때만큼 실감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오갈 데 없는 촌년인 제게
그 기억은 지금도 황당하고 부끄럽기만한 기억입니다.
그때 전 사람이 재산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사람이 귀한 줄을 알았습니다.
돈만 돈이 아니고 사람이 그것보다 더 귀함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어디 낯선 곳을가더라도
"언니 가자!"
하고 조르면 하던 일 멈추고 나서줄 사람들이 있는 우리 가족의 고향입니다.
시장에 가도
"아이구! 사모님 오셨네, 한줌 더. "
이리 풍성한 인심을 쓸 줄 아는 이웃과 더불어 사니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된다는 유행가 가사가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제 저녁 미사후에 가까운 언니들과
떡볶이 한 그릇과 골뱅이 소면 하나를 시켜 놓고
저 자신과 이웃들 흉도 보고 칭찬도 하며 한수다 떨다가 집에 왔습니다.
날이 풀려서인지 가슴안에 훈기가 가득입니다.
용인이 참 좋습니다.
이곳은 이제 저와 아이들의 고향입니다.
아들 시험기간이면 그 애와 함께 타던 자전거 바퀴자국이 남아 있는,
내가 들꽃을 따며 산보를 하던 ,
손등이 갈라터지게 병원 일을 했고 ,
개울에서 솥을 걸고 보리밥을 들풀 뜯어다 고추장에 쓱쓱 비벼먹던 이웃과 사는,
내가 남편과 애들을 키우는 소중한 고향입니다.
첫댓글 저에게도 조암은 젬마님의 용인과 같은 곳인데....3년 후 다시 오려고 하는 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