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aropita는 ava(아래로)+√rup(to break)의 과거분사로서 ‘심다’는 뜻이며 이처럼 ‘선근을 심는다’는 형태로 대승경전에 많이 나타난다. 쁘라끄리뜨화된 채로 orupita 등의 형태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선근을 심는다는 표현은 빠알리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kus#ala(Paali. kusala)는 불교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인데 특히 초기불교에서는kusala-dhamma(善法)로많이나타나며이kusala-muula(善根)라고도 나타난다. 초기경에 의하면 꾸살라물라는 다름 아닌 불탐·부진·불치 즉 탐·진·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앞에서도(4장 5번 주해 참조) 언급했지만 복덕(福德)으로 옮기는 pun*ya의 반대말인 paapa는 악(惡)으로 번역되는데 이 꾸살라를 이처럼 악(惡)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선(善)으로 이해한다면 꾸살라가 가지는 깊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많은 한글로 번역된 경들에서 꾸살라담마[善法]를 아무 생각 없이 착할 善자 선법이라고 간주하여 ‘착한 법’이라고 옮기고 있으니 정말 원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벗어나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여기서 선(善, 꾸살라)과 불선(不善, 아꾸살라)의 근본의미를 어원에 입각해서 음미해본다면 선·불선의 불교적인 근본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꾸살라(kusala, Sk. kus#ala)라는 단어는 인도의 전통에서는 kusa +la로 분석하고 있는데 여기서 꾸사는 꾸사라는 풀을 의미한다. 그리고 √la는 ‘자르다, 베다(to cut)’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꾸살라는 꾸사풀을 꺾는 것을 뜻한다. 왜 선이 이 의미와 연결되어 있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꾸사풀은 우리 나라의 억새풀과 비슷하다 할 수 있는데 인도의 전통적 제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풀이다. 그런데 이 풀이 아주 억세고 날카로워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 꺾게 되면 손이 베이게 된다. 우리 어릴 때도 억새풀 꺾다가 손이 베인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중요한 풀을 베려면 아주 마음을 기울여서 조심해서 꺾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선이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주의(yoniso manasikaara, 16-1장 1번, 2번 주해 참조)를 기울임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이 말이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면 칼을 들어서 사람 몸에 상처를 주는 행위 그 자체는 그냥 하나의 행위지만 여기에 작용하는 의도에 따라서 선·불선으로 나누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의사가 칼을 들고 환자의 배를 가르는 것은 살리기 위한 의도이니 선 혹은 선업이 될 것이고, 강도가 금품 탈취를 위해서 행인의 배를 그리 하는 것은 불선 혹은 불선업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선이다. 불선이다’라고 무엇을 세운다면 그것이야말로 극복되어야 할 산냐가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선 아니 선이라는 산냐를 위해서 목숨 바친다 운운하는 극단적인 사고나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 선업(kamma), 선근(muula), 선법(dham ma)과는 거리가 멀게 되고 만다.
굳이 선·불선의 기준을 초기경에서 찾자면 저 유명한 깔라라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탐·진·치가 증장하는 것은 불선이고 반대로 탐·진·치가 줄어들고 소멸되는 것은 선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범부는 매순간 어떤 식으로든 의도를 하지 않고서 살 수는 없으니 항상 그 의도가 선이 되도록 노력해야겠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선·불선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이 선불선을 판단해서 선은 증장시키고 불선은 없애려는 노력이 사정근(26장 7번 주해 참조)이요, 팔정도에서는 6번째인 정정진이다. 이런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바른 마음챙김은 확고하게 되고 바른 선정을 얻어 평온과 마음챙김이 지극히 청정해져서[捨念淸淨, 우뻬카사띠빠리숫디] 이 힘으로 저 번뇌를 멸절하여 완전히 해탈하고 해탈했다는 지견[解脫知見]을 증득하는 것이 초기경에 나타나는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말씀하고 계신 해탈의 길 저 팔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본 경의 23장에서도 “그 무상 정등각은 자아 없음, 중생 없음, 영혼 없음, 개아 없음으로 평등하나니 모든 선법(꾸살라 다르마)들로 철저하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라고 하여 꾸살라 다르마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선·불선 ― 꾸살라·아꾸살라 ― 의 철저한 간택, 이런 노력을 통해서 위없는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라고 대승 경전인 본 경도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한편 영어로는 꾸살라는 wholesomeness로 아꾸살라는 un-wholesomeness로 옮겨져서 정착이 되고 있는데 아주 좋은 번역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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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금강경 역해> 게시판에 있던 스님의 말씀을 다시 올렸습니다. 다시 읽어보아도 여름 후 이즈음 의 하늘 푸른 날씨들처럼 신선합니다. ..()..
善(꾸살라)과 不善(아꾸살라)은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를 통하여 탐·진·치가 줄어들고 소멸되게 하는 행위,말,사유 입니다.착함,착하지 않음,건전함,건전치 못함등으로 번역해서는 정확한 뜻을 알수 없습니다.그래서 요즈음 온전함,온전치 못함,유익함,해로움등으로 번역하고
첫댓글 꾸살라= wholesomeness = 온전, 아꾸살라= un-wholesomeness 온전치 못함. ..._()_
善(꾸살라)과 不善(아꾸살라)은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를 통하여 탐·진·치가 줄어들고 소멸되게 하는 행위,말,사유 입니다.착함,착하지 않음,건전함,건전치 못함등으로 번역해서는 정확한 뜻을 알수 없습니다.그래서 요즈음 온전함,온전치 못함,유익함,해로움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정확치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그냥 탐·진·치의 소멸하게 하는 모든 행위,고의 소멸로 이끄는 모든 행위,상태 라고 설명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고의 발생은 어떻게 일어나며 고의 소멸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