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슴물에 잠기다
하인혜
구순(九旬)이 넘은 엄마가 사는 곳은 남향받이로, 좁다란 베란다에는 누룽지 같은 볕내음이 고여 있다. 고물거리는 다육이의 숨결조차 달뜬 냄새를 더한다. 실과 시간에 처음 들어가 보았던 온실 같은 곳에서 엄마가 그려내는 동선은 지극한 곡선이다. 볕이 데운 물을 가까이에 두고 오가는 움직임이 자늑하다. 지난 겨울부터 다독였던 잔조롬한 시래기 두름을 거두고 물갈이하며 바튼 숨을 내쉰다. 해질 녘이면 따슴물이 담긴 대야에 두 발을 넣고 앉아 있는 모습은 정물화의 소품처럼 적요하다.
엄마는 햇볕이 데운 물을 따슴물이라 불렀다. 우리 가족에게는 익숙한 호칭인데 따뜻한 물이 맞는 말이다. 필요에 의해 급하게 데워낸 물이 아닌 손을 넣으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정도라는 것으로 알아듣고 자랐다.주거 환경이 바뀌기 전까지 겨울철을 빼고 마당의 볕바른 자리에는 다라이라고 부르는 용기에 일정량의 물이 채워져 있었다. 햇볕의 손길이 데워준 물은 언제나 도타운 온도로 쓰임을 다했다.
심심찮게 찾아낸 놀이로 또래 아이들과 재밌다가도, 곧잘 티격거리며이 또한 심드렁해지면 뱃구레에 끄륵대는 소리를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 켠에 놓인 따슴물이 때꼽재기 내 몰골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꾼한 얼굴에 분(粉)처럼 내려앉은 흙먼지와 두 손이 움켜쥔 못다한 놀이에 대한 아쉬움조차 말끔하게 씻겨 내렸다.
꼬장물은 마당 구석에 뿌렸다. 들녘 모퉁이 한 조각을 잘라온 듯한 오붓한 꽃밭이 있는 곳이다. 민들레와 토끼풀 같은 야초들 사이에서 해거름의 분꽃은 알뜰한 물을 먹고는 어둠을 맞으며 방식거렸다. 수십 송이 나팔꽃은 머금었던 볕을 닫아 늙은 입처럼 쪼글거렸지만, 따슴물을 마신 다음날 아침이면 나지막한 담장을 돌며 어김없이 노래를 불렀다.
햇살이 짧은 겨울 한철을 제외하고는, 담겨진 물은 마치맞은 온기를 간직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낸 엄마는 따슴물이 담긴 놋대야를 들고 방안에 조심스레 들어섰다. 조붓한 엄마 등은 더욱 낮아졌다. 완고하고 묵직한 놋대야가 놓일 자리는 아버지 발 아래 즈음이다. 마른 걸레를 방바닥에 펼쳐 놋대야 주변에 둘러 놓으면 잘박거리는 엄마 손길에 튀는 물방울과 진자리의 흔적을 덮어 주었다.
아버지 두 발은 엄마의 손으로 정성스런 섬김을 받았다. 보무도 당당한 아버지 보폭이야말로 가족을 지켜주는 온전한 믿음의 연결고리였으며 우리 집 울타리였다.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를 정결하게 닦아내고 발등을 쓸어내리며 보듬던 두 손의 순종이야말로 극진한 헌신이었다. 지아비에 대한 지어미의 정성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 되어, 저녁 시간은 밤으로의 동굴로 아늑하게 깊어갔고 가끔은 소쩍새가 울기도 했다.
방학이면 사촌 미정이는 우리 집에 놀러와 몇 밤씩 잤다. 안방의 윗목의 한갓진 구석에 둥글게 모인 여자애들은 서캐슬은 상고머리를 수그리고 인형 옷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종이에 그려 놓은 화려한 드레스를 가위질하면서도, 미정이는 놋대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신문을 보는 제숙부와 그 발을 씻기는 숙모의 모습에 눈길을 떨구며 연신 흘끔거렸다. 왜 발을 씻겨 주는 거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밥을 왜 먹는 거냐고 묻는 거와 같은 걸 왜 자꾸 물어보는지 미정이야말로 바보 멍텅구리였다.
아버지는 충실한 가장이었다. 아침이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날선 바지 주름을 절도 있게 접어 가지런히 놓인 군화에 넣는다. 신발끈은 X자로 촘촘하게 엮어 올라가면서 무릎 아래 종아리로 한 바퀴 돌아서야 옹골게 매듭을 지었다. 밑바닥을 견디며 복종했던 아버지의 두 발은 저녁시간 따슴물에 그윽하게 담겨지면서 하루의 굴욕과 화해하지 않았을까? 밥벌이의 수고가 끝날 즈음, 아버지의 몸은 풍을 맞았고, 당신의 두 발은 바닥과 이별했다. 세상을 딛고 설 근거가 없어졌기에, 완강한 군화 속에 더 이상 발을 넣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의 굳어버린 몸, 그 도저한 저항은 무자비했다. 연민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엄마는 느닷없이 탄식했지만, 추레한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던 열 손가락의 움직임은 결코 그치지 않는 연주처럼 바듯하게 이어졌다. 당신이 견뎌야할 막막한 시간의 보면대(譜面臺)에는 어떤 음표가 적혀 있었을까? 문밖에 선 고아처럼 그 시절을 서성거리면, 마음 벽을 스치는 젊은 바람결이 종종 이명(耳鳴)처럼 어룽거린다. 정녕 엄마가 내어준 손은 따듯했으니 알아듣기 어려운 신비의 영역이다. 놀빛 품은 잔양과도같은 따슴물에 잠긴 풍경은 여전한 온도로 고즈넉이 남아있다.
<2023 수필미학 봄호>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