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2025년 1월 26일
담대한 힘의 원천
루가 4:14-21. 느헤 8:1-10. 1고린 2:12-31.
올해는 부활 주간을 제외한 연중과 사순 기간에 루가복음을 읽습니다. 루가복음은 지난해 읽었던 마르코복음과는 또 다른 매력과 울림이 있습니다.
루가복음과 그 후속편 격인 사도행전은 같은 저자가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루가복음은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율법에 의해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을 죄인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과 자비를 기록합니다.
어느 복음서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특히 여성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아주 많이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포입니다. 이 담대한 선언은 그분의 관심이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요점은 힘 즉 권위입니다. 담대하게 선포된 하느님의 힘에 대해 묵상합니다.
1독서로 들은 느헤미야서는 사제 에즈라가 하느님의 명령을 기록한 모세의 법전을 읽었고, 이를 듣던 온 백성이 울었다고 전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었기에 그들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일찍이 하신 약속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전이 선포된 초막절은 이스라엘인에게 과월절, 오순절과 함께 3대 절기로 지키는 귀한 절기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생활했던 광야에서의 고난과 어려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담대한 힘의 근원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모세를 통해 함께 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매여 있고 붙들리는 마음이 아닌 참 자유로움으로 함께 계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틀에 갇힌 엄숙함이 아닌 기뻐하고 감사하는 찬양에서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렵고 힘든 시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과 고난, 기쁨과 만족 모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참 힘과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감정이 복받쳐 올라 울어본 적이 있던가요? 힘겨운 시절을 이겨내고 그 상황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힘과 권위’입니다.
2독서를 묵상합니다. 각자가 좋은 은총을 받았고 특기가 많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힘과 권위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서 각자의 재능은 세상의 이치와 조금 다릅니다.
화이부동 동이불화(和而不同 同而不和)에 대한 해석이 이것입니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음에도 협력하지 못하고, 다름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지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대신 할 수 없는 주님의 귀한 권위는 서로에 대한 배려이고,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함에 있습니다. 진정한 힘의 근원은 공동체에서 나옵니다. 섬김과 이해, 사려 깊은 보살핌 가운데 권위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연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힘겨운 이들에 대한 정확한 시선과 존중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고백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을 묵상합니다. 루가복음은 약하고 힘겨운 이들에 대한 지극히 당파적인 관점으로 기록되었지만, 그만큼 기도에 대한 강조도 많이 언급합니다. 루가복음을 ‘기도의 복음서’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주님 스스로 기도를 많이 하셨지만, 제자들에게도 늘 기도에 힘쓰라고 여러 번 강조하십니다.
루가복음의 또 다른 별칭은 ‘성령 복음’입니다. 성령이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잉태하셨던 것도, 세례를 받으신 것도 모두 성령의 능력 즉 힘이라고 전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설립된 계기도 성령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힘과 권위 그리고 돌봄과 나눔의 자비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바로 항상 깨어 기도에 힘쓰고 성령을 따라 살도록 노력하는 열정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잉태와 세례 그리고 광야에서 악마를 물리치신 성령의 힘을 가지고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실 일들에 대해 처음으로 담대히 선포하십니다. 고정된 선입견과 편견의 상징인 자신의 고향에서 그리고 스러져가는 유대교의 상징인 회당에서, 이제 율법의 시대는 끝났고 은총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십니다. 이는 차별과 편견의 시대는 가고, 사랑과 자비, 구원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이가 무엇일까요? 물질적 가난 그 너머의 의미입니다. 지금 나와 우리의 마음자리는 풍요로울까요? 바로 우리가 무엇인가 부족하고 빈 것 같은 마음으로 사는 가난한 사람들 아닐까요? 묶인 이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 붙들려 있을까요? 나를 묶고 있는 것은 없는가요? 또한 무엇에 눌려 있는 사람이라면, 그 답답함의 원천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담대한 선언과 힘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가장 아쉽고 부족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근원을 보도록 이끄십니다. 이 담대한 선언은 여전히 고민과 불안을 안고 사는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을 얻으라는 선포입니다.
그 힘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한 확신에 있습니다. 참된 힘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 때 힘이 생기고, 진리를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동력이 됩니다. 그 담대한 힘의 원천은 기도와 성령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엽고 힘겨운 이들에 대한 사랑도, 소외되고 소수자로 사는 이들에 대한 공감과 사랑도, 주님께서 받으셨고 행하셨던 기도와 성령의 힘이 있을 때 더욱 빛이 날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은 그래서 우리의 행동만큼의 성찰과 기도를 요구합니다. 우리 역시 말씀의 권위를 입고 기도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구합시다. 올해 각자 받은 말씀 카드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귀한 지표와 위로 그리고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힘을 얻은 우리가 자비로운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