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목탁소리 지대방 원문보기 글쓴이: 불목한
업의 올바른 이해
그런데 업(산스끄리뜨어로는 ‘karma', 빠알리어로는 ‘kamma')이라는 용어가 서양에서는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점을 바로 잡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까르마(karma)란 ‘하다', ‘만들다', ‘행하다'를 뜻하는 어원 kar에서 나왔으므로 ‘행위'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까르마(karma)란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에 붙이는 이름이며, 그것과 관련지어 행동, 말 또는 정신 활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의식과 심적 요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깜마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cetanā)이다. 의도를 통해서 사람은 몸, 말, 뜻을 통하여 업을 짓게 된다”라고 경전에서는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업은 의도적인 행위일 뿐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1. 업이라는 용어는 ‘행위의 결과'를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지학(神知學)6)의 논문들을 읽은 많은 서양인들은 업이란 말이 행위의 결과를 포함한다고 이해합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즉 업은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만을 말하며, 업의 과보(kamma-vipāka)를 행위의 ‘결과'라고 합니다.
2. 모든 일, 심지어는 우리가 짓는 새로운 선업과 악업까지도 전생 업의 결과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결과가 또한 새로운 결과의 원인이 되며 이같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를 숙명론으로 낙인찍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운명은 결코 영향을 받거나 변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해탈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3. 업이란 용어를 잘못 쓰고 있는 세 번째 경우는 첫 번째 견해를 확대한 것으로서, 업이란 용어에 행위의 결과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대중의 업, 집단의 업, 혹은 국가의 업과 같은 소위 공동의 업이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단의 사람들, 즉 어떤 국민들은 전생에 바로 그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금생의 국민들은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그 개인들의 업의 상속자는 아닌 것입니다.
불교에 따르면, 신체의 고통을 당하는 자는 전생이나 금생의 악행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을 겪는 국가에 태어난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로 신체적인 고통을 당한다면, 금생에서나 혹은 지금까지 거쳐 온 수많은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악행을 저질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이른바 국가가 행한 악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가 지은 악업에 의해 그에게 어울리는 불행한 환경으로 이끌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업이란 용어는 각각의 경우에 단지 한 개인의 선한 혹은 악한 의도적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은 원인 혹은 씨앗을 형성하고 그 결과가 금생에서나 미래생에 그 사람에게 나타날 것입니다.7)
업의 소멸
인간은 자기 의지나 행위로 자신의 장래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 운세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자기 행위에 달려 있으며 행복해지거나 비참해지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더구나 업은 사후에 생사윤회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종자일 뿐만 아니라 금생에서도 좋거나 나쁜 과보를 초래하여 금생의 인격과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따라서, 사람이나 동물, 모든 생명체들에게 매일 친절을 베풀게 되면 우리는 날이 갈수록 선량하게 되며, 증오심도, 그로 인한 악행이나 또 거기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악행도, 괴로움도 쉽사리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천성과 성격은 굳건해지고 행복하며 평화롭고 평온하게 될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너그럽고자 노력하면 탐욕과 허욕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비와 친절을 베푼다면 분노와 증오가 사라질 것입니다. 지혜와 통찰을 갈고 닦으면 무지와 미망이 점차 가셔질 것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탐욕, 증오와 무지가 줄어들수록 몸과 말, 생각을 통해 악행을 짓는 일도 줄어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악한 것들과 모든 악운은 탐욕, 증오와 무지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 가운데서도 무지(moha) 혹은 무명(avijjā)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의 가장 큰 뿌리이고 으뜸가는 원인입니다. 무명이 소멸되면 더 이상 탐욕과 증오도 없을 것이요, 재생이나 고(苦)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탐욕과 증오, 무지라는 삼독(三毒)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자(아라한)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삶의 과정 전체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무아(無我)라는 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통해, 그리고 그런 통찰의 결과 모든 형태의 존재에 대한 집착을 여읨으로써 달성됩니다. 탐욕, 증오, 무지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소멸되면 존재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 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의 재생은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부처님이 제시한 목표, 즉 일체의 생사윤회와 고(苦)의 소멸이 실현될 것입니다.
성자(아라한)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선업이나 악업을 더 이상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라한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그가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흔히 말하는 ‘선’한 것들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추호의 집착이나 아만, 자기 고집도 없습니다.
소위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일부는 전생의 업에 의해, 일부는 금생의 업에 의해 생긴 잠재의식적 성향들의 총합입니다. 이 성향은 평생에 걸쳐 몸과 말, 생각을 통해 선하거나 악한 의도적 행위인 업으로 이끄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명에 뿌리박은, 삶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소멸되면 새로운 재생은 없을 것입니다.
코코넛 나무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면 나무가 말라죽게 되듯, 중생의 삶을 있게 하는 삼독인 탐욕과 증오, 무지가 완전히 근절되면 다시는 새 몸을 받게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 ‘그', ‘성자'처럼 인격체를 지칭하는 모든 표현은 자아라는 실체가 없이 전개되는 삶의 과정에 붙인 인습적인 명칭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죽음 직전의 업과 재생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곧이어 태어날 다음 생의 성향을 결정하는 것은 임종 직전의 업(業 maraṇāsanna-kamma)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불교 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임종을 맞는 사람에게 생전에 그가 행한 선한 일들을 기억 속에서 되살리어 행복하고 청정한 마음을 지니게 하여 선처(善處)에 태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혹은 친족들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승가에 공양할 물건(가사 및 기타 공양물)을 그에게 보여 주면서, “우리는 당신 내생의 행복을 빌기 위해 이것을 승가에 바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설법을 들려주기도 하고 경을 독송해 주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염처경(念處經 Satipaṭṭhāna Sutta)」
8)을 독송해 줍니다.
『청정도론』17장에 따르면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억에는 임종 직전에 대체로 전에 지은 모든 악한 행위의 영상이 떠오르거나, 그 악행과 연관된 주변 환경이나 물건, 예를 들어 피나 피 묻은 단검과 같은 표상이 보이거나, 활활 불타고 있는 화염과 같이 그에게 임박한 비참한 내생의 표상(gati-nimitta)이 떠오르기도 하며, 또 어떤 이의 마음에는 육욕을 일으키는 육감적인 몸매의 형상이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의 마음에는 예전에 행했던 고매한 행위인 업, 혹은 선행 당시 있었던 모습[業相 kamma-nimitta]이 나타나거나, 천상계의 궁전 모습 등 그가 곧 다시 태어날 곳의 표상이 보인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성전 『봐와 산끄란띠 수뜨라(Bhava-sankrānti-Sūtra)』의 한역본(漢譯本)
감각이나 인식이 하나의 단일한 작용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인식 과정에서 여러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일련의 연속적인 생각의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업이 형성되는 그 과정은 자와나 찟따(javana-citta)라고 하는 찰나적인 생각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생각들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러한 찰나적인 생각들 중 첫 번째 찰나의 생각은 현생에서 과보를 맺고, 마지막 찰나의 생각은 다음 생에서 과보를 맺으며, 그 둘 사이에 있는 순간의 생각들은 그 후의 생에서 과보를 맺습니다. 금생과 바로 다음 생에서 과보를 맺는 두 종류의 업은 가끔 과보로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으나, 그 후의 생에서 과보를 맺는 업은 언제 어디서나 기회가 닿을 때마다 과보를 맺습니다. 그리고 삶의 과정이 계속되는 한 이 업에서 결코 풀려날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업을 그 기능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발생업(janaka-kamma), 지원업(upatthambhaka-kamma), 방해업(upapīḷaka-kamma), 파괴업(upaghātaka-kamma)이 그것인데, 이들은 모두 선업(善業)일 수도 있고 불선업(不善業)일 수도 있습니다.
발생업은 임종 순간에 지배적이 되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으로서, 출생 순간부터 발동하여 이후 이어지는 삶 동안 다섯 가지 감각 의식과, 그와 연관되어 생겨나는 느낌, 지각, 감각 인상 등의 정신적 요인들과 같은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냅니다.
지원업은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평생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 속성에 맞추어 도와서 계속 일어나게끔 지원합니다.
방해업은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발생업에 의해 생겨나는 모든 일을 그 속성에 맞추어 방해하여 계속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파괴업은 자신보다 약한 업은 없애고 오직 자신의 선업이나 악업의 과보만을 받게 합니다.
『중부』135경에 대한 주석서에서는 발생업은 농부가 파종하는 것에, 지원업은 물을 끌어들이고 비료를 주며 논밭을 살펴보는 것에, 방해업은 흉작을 가져오는 가뭄에, 그리고 파괴업은 수확을 완전히 망치는 화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데와닷따가 왕족으로 태어난 것은 그의 선한 발생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가 비구가 되어 높은 신통력을 얻게 된 것은 선한 지원업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부처님께 살의를 품은 것은 방해업으로 인한 것이며, 그가 승단을 분열케 한 것은 파괴업으로 인한 것인데, 이로 인해 그는 악도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 주석서에 나타난 업의 복잡한 구분을 상세하게 기술하기란 어렵습니다. 본 논의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재생에 관한 불교의 교리는 어떤 영혼이나 자아라는 실체가 있어 윤회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과정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업과 재생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모든 생명체의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냐나틸로카 큰스님(Nyanatiloka Mahathera : 1878-1957)
독일 비스바덴(Wiesbaden) 출생.
불교를 배우기 위해 인도, 스리랑카를 거쳐 미얀마로 가서, 1903년에 사미계를 받고 1904년에 독일인 처음으로 비구계를 받음. 1905년 스리랑카로 감. 1909년 도단두와(Dodanduwa)의 Island Hermitage를 만들어서 본격적인 저술활동과 수행생활을 하였다. 1957년 5월 28일 입적.
대표적인 저서로는 『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고요한소리, 2002)을 포함해서 『청정도론』의 독어역 『Visuddhimagga oder der Weg zur Reinheit』, 『Buddhist Dictionary(불교사전)』, 『Guide through the Abhidhamma-pitaka(아미담마 입문)』, 『The Buddha's Path to Deliverance(부처님의 해탈에의 길)』등이 있다.
스님의 전기,『The Life of Nyanatiloka: The Biography of a Western Buddhist Pioneer』(BPS, 2009)가 출간되어있다.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역주]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 미국 뉴욕 출신의 의학을 전공한 철학자·심리학자. 실용주의 철학운동과 기능주의 심리학 운동의 선도자. 본문으로
2) 『청정도론(The Path of Purification)』(냐나몰리 스님 영역(英譯) 콜롬보 1956) 참조. 본문으로
3) [역주] 명색(名色 nāma-rūpa) :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 원래 고(古) 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세계의 명칭과 형태를 의미했으며, 불교에서도 가장 오래된 시구에서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후에는 명(名)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 색(色)은 물질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오온 전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쓴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서는 제 4항으로 식(識)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또 육처(六處)의 조건이 된다. 본문으로
4) [역주] 오온(五蘊 pancakkhandha) : 존재[有]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
물질 또는 신체의 요소[色蘊], 느낌의 요소[受蘊], 지각의 요소[想蘊], 의지의 요소[行蘊], 의식의 요소[識蘊].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주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 있는 범부와 사향 삼과(四向 三果)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 pañcāupādānakkhandā)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함. 본문으로
5) [역주] 게오르게 그림(Dr. George Grimm 1868-1945) : 독일 출생. 판사 출신의 불교학자, 수행인. 보리수잎·여덟『불교이해의 정과 사』주해10) 참조.
『부처님의 가르침 : 이성과 명상의 종교(The Doctrine of the Buddha : The Religion of Reason and Meditation)』(독일)에서 발췌, 영어로 번역된 책이 『출가의 길(Going Into Homelessness)』(보리수잎·마흔넷)로 출간되어 있음. 본문으로
6) [역주] 신지학(神知學 Theosophy) : 신성(神性)의 숨겨진 신비를 밝혀주는 지식을 탐구하려는 노력인데, 신지학자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이 우주의 신비와, 인간과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지식을 내면적 깨달음에 의해 파악하고자 한다. 신지학회에 관해서는 법륜·셋『다르마팔라』(2007) 30쪽 주해를 참조바람. 본문으로
7) 위빠아까(vipāka)라는 빠알리(pāli)어는 일반적으로 결과라는 뜻의 ‘effect'나 ‘result'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두 번역어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논사(論事, kathā vatthu)』에 따르면 이 말은 단지 업이 만들어 낸 ‘심적 결과’들을 지칭한다. 몸에 대한 즐겁고 괴로운 느낌과 그 밖의 기본적인 심적 현상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반면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 기관 등과 같은 모든 물질적 현상들은 ‘위빠아까’라 부르지 않고 ‘깜마자(kammaja 업으로 태어난 것)’ 혹은 ‘깜마 사무타아나(kamma-samuṭṭhāna 업이 산출한 것)’라 부른다. 본문으로
8) [역주] 염처경 : 『중부』에는 염처경, 『장부』에는 대념처경이 있다. 4념처를 중심으로 불교 수행법의 핵심을 설한 중요한 경. 본문으로
9) [역주] 『유전제유경(流轉諸有經)』 본문으로
첫댓글 옴아비라훔캄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