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사를 거쳐 태인 향교를 보고 김제의 금산사로 가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차장을 지나 조금 오르면 왼쪽으로 자그마한 전각이 나온다. 이곳에서 커다란 소리로 염불을 외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온다. 안을 들여다 보니 미륵석불이 불안하게 서 계시다. 짙은 향내에 실신상태같은 모습으로 경을 읽어가는 한 분의 소원이 무엇 일가를 생각하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간곡하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 하기까지 했다.
금산사는 김제와 전주의 경계를 형성하는 모악`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고찰. 옛부터 여름에는 변산, 가을에는 내장산, 겨울에는 백양산, 봄에는 모악산이라 할만큼 이름높은 곳의 중심사찰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때 창건하여 통일 신라때의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번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국가의 원찰로 삼았을 뿐 아니라 훗날 자신의 아들에 의해 유배당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하고 이로인해 견훤에 대한 많을 일화를 담고 있기도 한다. 지금도 금산사에는 견훤에 대한 흔적을 곳곳에서 엿볼수 있다.
[금산사 입구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는데 성급한 코스모스가...]
그중 가장 먼저 보여지는 것이 견훤성이다. 금산사를 찾아가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돌문을 가장 먼저 지나게 된다. 바로 그 돌문이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자신의 복을 빌어주는 사찰로 금산사를 정하고 왕성을 쌓듯이 금산사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데 그때 쌓았던 성의 출입문이다. 비록 작은 부분만 남았지만 성문 옆에 견훤성이라는 알림판이 있어 그 흔적을 느끼게 한다. 고 엠파스 여행에 쓰여져 있다. 그리고 각 사적의 설명은 코리아 템플이라는 사이트의 글을 빌어 적어놓았다. 미륵전에 법회중이라 삼존불을 못담아서 좀 아쉽다.
[금산사 가는 길목에 견훤성이라 알려주는 역사적인 성벽과 문의 터...]
[모악산 금산사 가람배치 안내도...]
[걸어 들어가는 길목에 만난 바위취...]
[길가에서 다람쥐도 만나고...]
[모악산 금산사라 쓰인 금산사 일주문...]
금산사에 오르는 산길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문으로, ‘모악산금산사(母岳山金山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975년에 세운 맞배지붕 건물로, 편액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이다. 일주문은 세속의 세계를 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으로 일심(一心)을 뜻한다. 다른 사찰의 일주문과는 조금 다르게 윗부분이 커다랗게 조성되어 있는 금산사 일주문을 지나 숲속같은 길을 걸어올라가면 경내에 들어가기전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두 개나 보인다. 극락교일 것이다.
[금산사 극락교...]
[금산사 전통찻집인 "산중다원"...]
[금산사 금강문(金剛門)...]
일주문을 지나 100m 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잡은 금강문을 만나게 된다. 1994년에 건립된 이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 2구와 함께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한편, 금산사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금강문이 따로 있는데, 현재의 금강문 오른쪽에 자리잡은 ‘모악산 금산사’라는 편액이 걸린 건물이 그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최근까지 금강문으로 사용되다, 1994년 가람을 정비할 때 절의 입구를 변경하면서 지금은 방사로 사용되고 있다. 1556년(명조 11)에 인언(仁彦)ㆍ경휘(敬輝) 스님이 재건한 뒤 1972년에 중수 되었다.
[금산사 천왕문(天王門)...]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는 천왕문은 1994년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좌우 각 2구씩 목조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금산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금산사의 당간지주는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의 상태 그대로 잘 남아 있다. 현재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와 지주를 놓은 기단석 등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단부는 단층이며, 잘 다듬은 6장의 길쭉한 장대석을 조합한 지대석 위에 지주를 낀 기단석을 받치고 있는 형식이다.
기단석은 4매의 장대석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각 측면마다. 우주와 탱주를 두어 면을 둘로 구분하였으며, 중앙을 음각하여 위아래의 가장자리에 볼록하게 솟은 띠를 둘렀다. 또한 둘로 나뉜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지주의 높이는 3.55m로 상ㆍ중ㆍ하 세곳에 홈을 내어 당간을 고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지주의 안쪽 면은 수직을 이루지만 바깥 면은 꼭대기 부분에서 안쪽으로 굽혀져 날렵한 느낌을 준다. 또 앞뒷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볼록한 띠를 둘렀으나 좌우의 옆면에는 중앙과 가장자리에 수직의 띠를 양각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들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뛰어나며,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이들의 조성시기는 모두 8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 역시 이 무렵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현재 보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
천왕문을 들어서면 보제루 아래 서편으로 최근에 건립된 성보박물관이 있다. 건물을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이층으로 구조되어 있다. 2004년 겨울 현재 개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금산사 및 금산사 말사의 성보문화재들을 보관하고 연구하며 전시할 예정이다. 라고 코리아 템플에서 알려준다.
[금산사 보제루(普濟樓)...]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중문(中門) 역할의 건물이 보제루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0년대에 건립되어 1998년에 증축된 바 있으며,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樓)라는 12칸 규모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어 지금의 보제루는 아마도 이 만세루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하며, 2층은 주로 법회나 대중집회의 공간으로 활용된다. ‘보제루’라는 편액 외에 ‘개산천사백주년기념관’이라는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최근에 조성된 금동석가여래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 누각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조선시대부터 인데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집결소가 되고 군사적 필요에 따라 누각으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승병이 사라지면서 법회, 강설, 대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실용적인 기능이 아닌 가람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금산사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보제루 향 좌측에 있는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반듯하게 정돈된 석축 위에 자리잡고 있다. 불전사물인 범종(梵鐘)ㆍ법고(法鼓)ㆍ목어(木魚)ㆍ운판(雲版) 등을 모두 봉안하고 있으며 범종은 1969년, 운판은 1986년에 조성되었고 법고와 목어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범종과 법고는 조석예불시 울리는 공양구로서 종소리는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북소리는 축생들을 위하여 두들긴다고 한다. 목어는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정진하라는 뜻이다.
[금산사 감로수...]
[금산사 미륵전앞 경내...]
[금산사 미륵전(彌勒殿) - 국보 제 62호...]
금산사의 중심 법당으로 『진표율사진신장골탑비명』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장륙상을 3층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모습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인조 13년)에 수문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이후 1748년(영조 24)과 1897년ㆍ1938년ㆍ1994년 등 여러 차례에 거쳐 중수 및 보수된 바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들 편액은 이름이 다르지만 모두 미륵불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은 팔작지붕의 3층 구조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줄어들었다. 장대석의 기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막돌초석을 올리고, 여기에 기둥을 세워 창방과 평방을 짜 올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얹은 다포식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건물의 무게를 분산시켰다. 미륵전의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하나의 공간인 통층(通層)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은 4개의 고주(高柱) 중앙에 미륵삼존불상과 함께 2구의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미륵삼존불은 본존의 높이가 11.82m이고, 협시는 8.7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서 1938년에 근대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에 의해 조성되었다. 원래 미륵전에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만을 모셨는데,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삼존불을 봉안했으며, 1934년에 다시 실화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불상이 봉안된 것이다. 한편 법당의 오른쪽에는 1890년에 금어(金魚) 용준(聳俊)ㆍ정선(定善)ㆍ오종(午從) 스님 등이 조성한 신중탱화와, 근래에 조성된 범종 1구가 봉안되어 있다. 현재 미륵전은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미륵전 3층에 걸린 미륵전(彌勒殿) 현판...]
[금산사 미륵전 2층에 걸린 현판엔 용화지회(龍華之會)라고 ...]
[금산사 미륵전 1층에 걸린 현판엔 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고...]
[금산사 미륵전...]
[오층석탑과 방등계단...]
[금산사 감로수...]
[뒤로 대적광전이...]
[수련이 부끄러운듯...]
[금산사 대장전(大藏殿)...]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위치한 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산사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 대장전은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라고 한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은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때문에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변화하였지만 전각 꼭대기에 복발과 복주가 남아있어 신라시대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건물은 잘 다듬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정면 중앙의 어칸에는 2분합의 문을 달고, 아랫부분에는 안상을 조각한 판벽을 댔다. 내부에는 목조로 조성한 석가여래좌상을 본존으로 좌우에 소조로 조성한 가섭과 아난을 협시로 봉안하였으며, 특히 불상이 안치된 불단은 4단으로 구획하고 정교한 솜씨로 투각하여 수미단의 장엄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 대장전내 수미단 - 보물 제 8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