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전부터 전쟁 기운 감돌아
갑종장교 5기생인 백낙수(白樂洙·88) 예비역 대위는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다.
공산주의가 싫어 1948년 일가족이 모두 월남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해 12월 제2국민역으로 소집을 받았다가 국군 제8사단이 재편성될 무렵인
1951년 3월 대구에서 현지 입대했다.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지리산 공비토벌에도 참전했다.
1951년 11월 12일 갑종장교 제5기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 1중대의 1소대장과
화기소대장으로 소규모 정찰 활동과 방어임무를 수행하다 이듬해 9월 하순
1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저격능선 전투에 참전하였다.
“1952년 초가을에 접어들자 저격능선에 무척이나 전쟁 기운이 감돌았어요.
나처럼 말단 소대장들도 예측할 정도로 정찰활동과 각종 포의 기점사격, 탄약보충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니까.
나는 81밀리 소대장으로 저격능선 일대의 적 예상 진지나 화기 진지,
그리고 기동로(機動路)상의 종합적인 사거리표(기점, 화집점, 거리 등)를 작성하며
전투태세를 가다듬었어.”
1952년 10월 14일 저격능선 전투가 시작되자 그가 속한 중화기 중대는 쉴새 없이 포를 쐈다.
판초에 쌓인 사체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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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 미 제24사단 제19연대 군인이 생포한 중공군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 수색하는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
“그날 밤 9시30분쯤 중공군이 반격해 아군이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때 적의 포 직격탄이
소대 진지에 떨어지면서 포반장 김 중사가 피를 토하며 전사하는 비통함을 감내한 게 첫 시련이었지.
우리가 얼마나 포를 많이 쏘았는지 탄피가 동산을 이루고 포신이 열을 받아 포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부근에 떨어질 정도였어요. 할 수 없이 물통을 옆에 놓고 물을 부어가며 포신을 냉각시켜야 했어.
그러다 보니 땅이 젖어 포판이 땅속으로 들어가 포를 옮겨가며 사격을 했는데,
결국 많은 사격으로 공이가 부러졌어요. 부속품이 바로 보충이 안 돼 나머지 4문으로만 사격해야 했어요.
한편으론 많은 폭음과 섬광으로 고막이 터져 불러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이 늘어갔어.
눈이 멀어버린 병사도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어요.”
백 소위는 이튿날인 10월 15일 2사단 제17연대 2대대가 공격할 당시 많은 병사가 전사하자
화기 소대원들이 차출되었다고 한다.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한 당번병부터 차출돼 짐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적의 반격이 주춤하자 박격포 소대는 전투 임무가 아니라 보급품 수집이나 전사자를 후송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어. 당시 판초에 쌓인 사체 조각들…, 군화 속의 발가락들이 참상을 말해주고 있었어요.”
1952년 10월 29일 저격능선 전투 때 날아오는 적 포탄이 OP 부근이나 포진지 주위에 떨어졌다.
다행히 백 소위의 진지에 떨어지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지에 포탄이 떨어졌다.
“그날 1개 포반 4명이 포와 함께 공중으로 비사(飛死)하면서 전사하게 되었어.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었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포사격을 위해 달려가던 병사가
적의 저격병에게 총탄을 맞아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지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죠.”
“백 소위만 살았군!”
저격능선 전투의 마지막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11월 24일) 백 소위의 32연대가
저격능선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을 확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중공군도 피해가 컸다.
“갑종 동기생 3명 중 1명(박완섭 소위)이 전사하고 1명(강순형 소위)은 부상으로 후송돼
나 혼자 남게 되었어요. 17연대 동기생 3명도 그날 함께 전사하고 말았어요.”
슬픔을 달래며 제9사단 2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집결지에 도착했다.
부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던 대대장이 다가와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백 소위만 살았군!”
백낙수씨는 이 대목에서 숨을 가다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제일선 공격소대들은 가끔 임무를 교대하지만, 보병대대 유일의 81밀리 박격소대는
계속 싸우기만 했어. 중대 단위의 공격전에 가장 효과적으로 근접 지원할 수 있다는
특성상 공격·방어 부대가 바뀌어도 임무교대 없이 계속 전투를 치러낸 박격포 소대장의 긍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도 가끔 그때가 생각나면 차를 몰고 김화 와수리(철원군 서면)에서 화천 방향으로
달리다가 말고개에서 천불산 너머로 저격능선의 Y고지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영원히 늙지 않은 전우! 그때 그 얼굴!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이 아련하게 보이곤 해요.
오늘도 저 오성산이 얄미울 정도로 위엄을 보이지만 명령 한마디에 죽음을 무릅쓰고
기어오르던 저격능선이었기에 애착도 느껴봅니다.
많은 전우를 앗아간 저격능선과 영령들을 생각하고 위로하기 위해 해마다 6월이 오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차디찬 비석을 쓰다듬으며 ‘백 소위만 살아서 미안하다’를 몇 번씩 되뇝니다.
어느 동기생은 ‘여기에 누워 있는 이놈이 행복한지, 여기 선 우리가 행복한 놈인지 모르겠구나’ 하는
쓴웃음 속에, 많이 변한 조국과 무공훈장 하나, 국가유공자 예우에 만족해야 하는 백발이 성성하게
늙어버린 자신을 투영해봅니다.”
백낙수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를 마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1대대 중화기 중대장(대리), 2대대 교육관, 2대대 6중대장, 제2훈련소 교관과 26연대 중대장,
제26사단 작전처 교육관을 끝으로 1958년 7월 31일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전역 후 건축설계사로 일했고, 천은건설(주) 대표와 성열산업(주) 대표를 지냈다.
첫댓글 전쟁, 일으킨 놈들은? 그리고 그 후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