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크웨 이스라엘, 소망의 하나님(렘 17:12-18)
할렐루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제임스 와트가 그린 “소망”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근 지구 위에, 앞을 못 보는 여인이, 고독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컴컴하고, 침울하고, 암울합니다.
여인의 품에는 비파가 있는데, 그 비파를 자세히 살펴보면, 비파줄이 다 끊겨 있고, 단 한 줄만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캄캄한 밤하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한 줄 남은 비파를 튕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줄이 정상적으로 모두 있어도, 비파를 켜기 어려운데, 줄이 다 끊어지고,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 연주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 남은 줄을 가지고, 여인은 행복하게 열심히 비파를 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살다 보면,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세상의 인맥의 줄이 와창창 끊어져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동안 오랜 세월 동안 맺어왔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한 순간, 어이없게 끊어져 버릴 때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그런 고독한 지경에 이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에 기억해야 하는 것은 끊어진 줄들이 아니라, 그 하나 남은 줄을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여인처럼, 우리도 하나의 줄을 붙잡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남은 한 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내가 교통할 수 있는 한 가닥 소망의 줄이어야 합니다. 모든 세상의 줄이 다 끊어져 버렸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이 한 가닥 줄만 있으면,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신나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연결된 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줄을 절대 놓으면 안됩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낯선 타국에 도착했을 때, 허드렛일을 해야 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얼마나 캄캄했겠습니까?
그의 형들은 돈을 받고, 그를 팔아 버렸고, 그의 아버지인 야곱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고, 그의 주인 보디발은 억울한 그의 누명을 벗겨주지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나를 기억해주세요”라고 부탁받았던 술 맡은 관원장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의지할 수 있는 줄들이 하나둘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한 가닥 줄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세상의 줄이 따 끊어져도, 하나님과의 그 한 줄이 남아 있었기에,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호세아 1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들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방신들을 사랑하고, 섬겼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그들을 놓지 않겠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불붙듯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식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절대로 돌아서거나 떠나 버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의지할 것 없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힘든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놀라운 은총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살다 보면, 건강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고, 물질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고, 가족의 줄이 끊어지는 등의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줄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줄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좋은 일들보다는 나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들려옵니다.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소망을 둘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세상은 내 편, 네 편을 따지기 바쁩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공격합니다. 내 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겠다”고 말을 하지만, 소망을 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소리, 탄식소리가 가득합니다. 삶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믿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저 사람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철썩같이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의 뒤통수를 칠 때가 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너마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그럴 때가 있습니다. 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시카고의 무디 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지 스위팅”이란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먹지 않아도 40일은 견딜 수 있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8일을 살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어도 8분을 살고, 숨을 쉬지 않아도 최고 4분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코로나 19의 위협을 벗어나,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줄길 수 있는 행복한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잘 되어, 늘 웃을 수 있는 형통의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과 사업이 번성하여,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이, 넉넉한 삶을 살 수 있는 풍부의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한마음교회가 부흥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도의 역사들이 일어나며, 주변에 좋은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는 그런 복된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된다. 안된다.”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된다. 된다.” 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여러분! 어떤 형편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설령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안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17:5-8절 말씀입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아멘.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입니다.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은 믿는 것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믿음의 결과도 다르게 나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저주 받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복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과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복을 받습니까?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염려, 걱정, 두려움 없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더위가 전혀 찾아오지 않을까요? 가뭄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더위가 찾아오고, 가뭄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코로나19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피해갔을까요? 잘못된 교리에 빠진 사람들에게만 코로나19가 들어갔을까요?
교회 열심히 다닌다고, 코로나19가 알아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통하여, 코로나에 걸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을 통하여,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같이 한 공간에서 생활했던 사람을 통하여, 코로나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셨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 거리두기”를 해야 합니다.
지금껏 가까이 했던 것, 좋아했던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좋아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거리를 두었던 것처럼, 영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쾌락적인 것들을 멀리 해야 합니다.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2-14절 말씀입니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아멘.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도하면서, 먼저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이스라엘의 소망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소망이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망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미크웨 이스라엘,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나 혼자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깨진 항아리에 채우겠다고 계속 붓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딴 방법을 찾아보겠디고, 하나님을 버리거나,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마 8:1-4)
주님은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절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고생하고, 근심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웃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고생스러울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고, 울 때도 있고,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고, 근심에 가득 찰 때도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고생스러운 일, 근심된 일을 만나거나,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 내려놓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불안, 두려움, 근심, 눈물, 질병, 아픔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소망을 둠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들로 인하여, 절망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 나의 병든 몸과 상한 심령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깨끗하게 고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길 수 있는 복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코로나19를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아멘.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이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주님,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 왜 나를 회초리로 때리십니까?”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런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셔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 27:3)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라는 뜻입니다.
힘든 일들이 사방에서 덮쳐 오는데, 어떻게 두려움도 없이 태연하게, 하나님만 의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 27:5)고 고백했습니다.
재앙과 환난의 날이 오면, 주님께서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춰주시며, 그리고, 마침내,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나를 반석 위에 높이 올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주님의 품 안입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미크웨,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소망이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주님의 음성만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이 병든 시대를 넉넉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만 의지하오니,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염려와 근심거리를 물리쳐 주옵시고, 평안을 주옵소서.
모든 질병과 바이러스와 아픔을 제거하여 주옵시고, 기쁨을 주옵소서.
소망의 주님, 우리를 주님의 품에 안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