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부활주일 메시지(20170416)
“죽음에서 생명으로!”
야고보서 2:14-26
▪ 나는 그곳에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시며, 축하하시는 여러분의 삶에 부활의 큰 기쁨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이 땅 그늘진 곳에서 아파하며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가시어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살아있으되 죽음과도 같은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요, 그런 선행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고, 우리의 믿음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하략)
3년 전 오늘, 우리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픔 앞에서 위로받아야 했을 이들이 오히려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보듬어야 할 교회에서조차 그들을 조롱했고, 진상규명을 외치며 단식하는 유족 앞에서 폭식투쟁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일베의 폭력이 대낮에 자행되었고, 정치권력은 가족을 잃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회적인 약자의 편에 서야 할 교회는 침묵했고,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그런 사건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돕지 않았습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한국교회도 침몰한 것입니다.
▪ 온전한 믿음
부활의 기쁨이 넘치는 부활주일에 무겁고 불편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이 일시적인 기쁨이나 형식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 되려면 부활의 깊은 의미를 묵상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냥 ‘믿음’이면 좋겠는데,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다른 말은 ‘신앙’이니, 살아있는 신앙이 있고, 죽은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2:22)”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한 짝이라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가지고서는 죽은 행동이거나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활시키려면 ‘한 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시인하고 공언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19절에 의하면 그런 정도는 귀신(마귀)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르가’는 ‘선행’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행위’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선한 행동’입니다. 아파하는 이들을 보며 함께 울어주고, 토닥여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선행’이요, 그래서 선행은 ‘공감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공감하기 때문에, 더는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에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때론 편향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선행’을 통해서, ‘공감하는 능력’을 배양함으로 살아있는 믿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22절 말씀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냥 “믿습니다!”라는 말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온전한 믿음의 조상이 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오해해서 ‘입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의 시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면 ‘가식적’이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바로 의로운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은 마치 ‘행동’이 필요 없다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율법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적인 행동의 기원이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떨어질 수 없는 ‘한 짝’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즉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라는 말입니다. ‘죽음을 죽인 사건’이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은 ‘죽은 신앙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죽었습니까? 행동하지 않아서 죽었습니다. 왜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신앙적인 행동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고, 내가 행동한다고 뭐가 변하겠는가 하는 무기력함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죽었습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왜 우리는 한 때 ‘세월호 지겹다’고 외면했을까?’라는 기고문을 통해서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나 피해자는 당연히 이런 불행한 사건을 수습하고 해결하는 것을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데, 동시에 자신이 지지하는 정부가 비난받는 것을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부는 이용했고, 그 결과로 위로받아야 할 피해 당사자들이 위로를 받지 못한 채,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돼 버리는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깊이 들어가 보면, 유족 자체가 미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을 붕괴시키는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런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에 세월호 가족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기력감’에 빠져있습니다. 근대 이후 한국사회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부정적인 사건에 계속 노출되었는데, 그때마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상규명을 한다고 했지만, 지속해서 반복되었고 그 결과로 ‘가능하면 빨리 덮어버리자거나 외면하고 잊으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큰 사건이 생기면 ‘멘붕’에 빠지고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무기력감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경험한 촛불집회는 그런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공감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뭐가 되겠어?’라는 무기력증에 빠지지 말고 예수님이 사신 삶이 옳다고 믿고, 그 길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부활신앙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은 대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통 크고 멋진 삶을 살아가십시오.
“죽음에서 생명으로!” 여러분의 삶, 전역에 이뤄지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너무나 좋은 말씀, 큰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 말씀 퍼갔어요!
감사합니다. 부활의 삶이 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