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을 건설한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자 제왕
칭기즈칸
글 표정훈 출판평론가, 저술가, 번역가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중에서
“그의 눈에는 불이 있고 얼굴에는 빛이 있다.”
<몽골비사> 중에서
1 복수와 약탈의 세계에서 사고무친의 고난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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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타이치우드 씨족에 사실상 의탁해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가 죽자 그 가족들을 버리고 이동했다. 고립된 가족은 오논 강 유역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겨우 연명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 테무진은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었고, 배다른 형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테무진은 탈출했다. 1178년 16살 경 테무진은 부르테와 결혼하고 몽골 중부의 유력한 부족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복종하여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메르키트 부족이 후엘룬을 빼앗긴 것에 대한 뒤늦은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2 타타르와 타이치우드를 정복하고 초원의 강자로 떠오르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옹 칸에게 메르키트를 습격할 뜻을 밝혔다. 메르키트와 구원(舊怨)이 있던 옹 칸은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를 끌어들여 메르키트를 공격해 승리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1181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1189년 여름 27살의 테무진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 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했다. 1196년에는 옹 칸과 함께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을 통해 테무진은 금나라가 타타르, 케레이트, 몽골 등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1197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케룰렌 강과 쳉게르 강이 만나는 곳 근처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다. 이곳이 몽골의 수도 아바르가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정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01년, 새롭게 떠오르는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지닌 씨족들이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해 옹 칸과 테무진에 도전했다.
옹 칸은 자무카와 맞서고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부족과 맞서 승리했으나 자무카는 달아났다. 1202년 옹 칸은 메르키트를 공격하고 테무진은 타타르를 공격했다. 타타르를 정복한 테무진은 수레바퀴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성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자기 부족의 구성원으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몽골 군대와 부족을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간(1000호), 투멘(1만호) 체제로 재편했다.
3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의 지배자 칭기즈칸으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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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즉위식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옹 칸은 거부했다. 그러나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 칸은 계략을 세웠다.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던 것.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옹 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고, 이는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테무진은 흩어진 추종자들을 모아 옹 칸을 향해 진군했다. 기습당한 케레이트 부족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옹 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1204년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테무진 앞에 끌려 온 자무카의 유언은 이러했다. “나를 죽여 그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의 후손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1206년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聖山)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참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테무진, 아니 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夏)를 정복했다.
4 금나라와 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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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부대의 행렬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칭기즈칸은 이제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 족술탄 무함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칭기즈칸은 많은 물자와 함께 상인들을 보냈다. 그러나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트(카자흐스탄 남부)의 총독이 상인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사신을 보내 총독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오히려 사신들을 죽였다.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5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이제 서하, 즉 탕구트 공격을 준비했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 때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깐수성(甘肅省)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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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언덕에 그려진 칭기즈칸의 초상화(2006)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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