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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갈 동방의 한 나라(a nation)는?
이사야 55장 1~13절과 병행구절 연구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한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사 55:5)
이사야 55장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과 은혜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본장의 핵심 구절은 5절에 기록된 말씀으로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도록 예루살렘으로 보내실 한 이방 민족(a nation)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 이방의 한 나라(a nation)는 과연 어느 나라인가?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1절부터 해석해 나가자. 하나님은 먼저 목마른 자들은 모두 당신께로 와서 물을 마시라고 권고하신다. 이스라엘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고 사랑으로 초대하신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 55:1)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여기서 '목 마른 자들'이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의 심령 상태를 타는 갈증으로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이 물은 무슨 물인가? 메시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 앞에 나와 그 생명수를 마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말씀이다. 본절에서 '물'은 구원을 비유한 것이다(요 4:10, 14 참조).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귀한 물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거저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죄값을 치르셨으니 거저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여기서 "포도주와 젖"은 역시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상징한다. 이사야 55장 1절은 신약시대에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참여하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예언한 것이다.
이어서 2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면 풍성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 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 55:2)
여기서 "양식 아닌 것" 또는 "배 부르게 하지 못할 것"은 이 세상 부귀와 육체의 쾌락을 가리킨다. "좋은 것", "기름진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신령한 은사와 은혜를 가리킨다. 다음에 3~4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의 말씀을 청종하면 그들의 영혼이 살 것이며, 또 다윗에게 약속하시고 맺으신 영원한 언약의 혜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와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영원한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다윗의 언약’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영원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보라, 내가 그(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를 백성에게 증거로 주었고,
또 백성에게 인도자와 명령자로 주었노라(이 구절은 원문 직역)
(사 55:3~4)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와 영원한 언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삼하 7:14상; 히 1:5하),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을 뜻한다(렘 31:31; 겔 36:24~27). "영원한 언약"은 은혜 계약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하시는 계약을 이름이다(박윤선 주석). 따라서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속죄 사역으로서 이미 성취가 된 것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음으로 이 새 언약의 효과 밖에 놓여 있으나, 그들도 장차 메시아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을 받으면(롬 11:25~27) 그 영원한 언약의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1~3절에서 헛된 것을 위하여 애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양식을 준비하고 초대하신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에 응하여 그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옛날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을 그들에게서 성취시킬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구원받는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으며(롬 11:1)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기다리고 계신다(롬 11:25~26).
4절에서 말하는 ‘그’는 세상의 명령자와 인도자가 되시는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 곧 왕도 되신다. 그런데 5절에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예언되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언약의 성취자이신 메시아 예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이다.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한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사 55:5)
본절 상반절의 '네가'와 '너를'이라는 인칭대명사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서구주석가들은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5절 말씀을 메시아에 의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예언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기존의 해석은 즉각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왜? 본절은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어찌 그의 모든 피조물을 알지 못하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명백한 난제를 해결하려고 서구주석가들은 억지에 가까운 이론을 끼워맞추기식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결국 거듭해서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 상반절의 '네가'와 '너를'이란 메시아가 아니다. 1~3절에서 초대받고 있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알지 못하는 한 나라"는 물론 이방 나라를 의미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방의 ‘한 민족(a nation)’을 사용하신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은 그 이방의 ‘한 나라’를 부를 것이며 그 ‘한 나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갈 것이라는 계시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본절이 목적하는 바이다. 그 결과 로마서 11:26에서 바울이 예언한 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이 마침내 성취될 것이다.
이 구절 가운데 있는 ‘나라’라는 말은 한글개역성경에 그냥 ‘나라’로 번역되어 있어 단수, 복수의 개념이 애매하나 히브리 원문에서는 복수형인 ‘고임(goim)’이 아니라 단수형의 단어 ‘고이(goi)’로 되어 단수의 ‘한 나라(a nation)’로 번역해야 정확한 의미가 된다. 영어 성경 NASB는 단수로 번역해 원문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Behold, you will call a nation you do not know,
And a nation which knows you not will run to you.”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영어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언제나 명확히 구별하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땅 끝 예루살렘에 능히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실 나라는 ‘여러 나라’가 아니고 ‘한 나라(a nation)’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심은 여러 나라가 함께 몰려가서 전도하는 소위 ‘글로벌 프로젝트’에 의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은 말세에 한 나라(a nation)의 특별한 복음전도사역으로 실현될 것이다. 장차 때가 차면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이방의 ‘한 나라(a nation)’가 복음을 들고 이스라엘로 달려갈 것이다. 바울이 말한 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는 약속은 바로 그때에 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6~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6,7)
이방의 ‘한 나라(a nation)’에서 전도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와 전할 때, 바로 그때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라는 것이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라는 예언이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복음전도자가 보냄을 받아야 한다고 교훈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유대인과 이방인)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이방의 한 나라(a nation)에서 보내심을 받은 전도자들의 복음전도사역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의 한 나라를 통해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데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리라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리하여 8절과 9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을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 55:8,9)
유대민족은 선민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유대인들로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의 한 나라(a nation)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가당치 않는 일로 생각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선민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고 “아니, 이방인의 나라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다니요”하고 반문할 것이다. 특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소수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더욱 그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동족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여 온 이스라엘이 메시아 예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게 가능하다면 이스라엘은 2천 년 전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벌써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8,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그 이방의 한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축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이방의 한 나라인 파사의 고레스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례가 있다. 그때에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이방인의 나라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길 것을 전지하신 하나님은 미리 아셨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사 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10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1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3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방의 한 나라를 그들에게 복음을 가져갈 나라로 선택하셨다. 유대인들로서는 거부감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과 그분의 생각은 사람의 길이나 생각보다 높은 것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에 대한 시기심에 자극을 받도록 해서 메시아 예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임을 깨닫고(롬 11:11,14)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3~34).
그렇다! 실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못한다면 주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며, 그의 판단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사야 45장 9~10절 말씀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의 어느 한 나라를 통해 자기 민족을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사 45:9~10-
그렇다면 말세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가서 능히 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그 이방의 한 나라(a nation)는 과연 어느 나라일까? 복음전도의 마지막 주자로 쓰실 그 거룩한 나라는 동방의 코리아이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나? 이사야서에는 55:5절과 병행구절인 아래와 같은 여러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52장 7절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여기 이른바 “좋은 소식” “평화” “복된 좋은 소식” “구원” 등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이 말은 헬라어로 “복음”이라는 뜻의 “유앙겔리조메노스(ευαγγελιζομενος)”에 해당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구절은 바울이 유대인도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복음전도자들이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한 구절이다(롬 10:12~15).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의문의 여지없이 종말에 메시아 앞으로 돌아올 유대민족의 구원에 관련된 예언인 것이다.
그러나 서구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파사의 고레스에 의한 유대인들의 바벨론 해방 소식에 대한 예언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전 6세기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 백성이 고레스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려고 산 너머 신음하는 동족들을 향하여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필사의 노력을 다해 달려가는 젊은 메신저(messenger)의 모습을 형상화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현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 거리는 42.195km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2000km 거리이다. 당시에 전령의 역할을 하려고 그렇게 먼 거리를 마치 그리스 전투에서 승전보를 전하려고 달려오는 마라톤 이야기 같이 예루살렘까지 쉬지 않고 뛰어갔던 메신저들이 실제로 있었던가? 없었다. 그런 초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사건이 있었다면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구전이든 기록이든 후대에 분명히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혀 없다. 그것은 서구 주석가들의 상상일 뿐이다.
여기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시온으로 달려 가는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면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마지막 때에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가는 이방인 전도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해방 소식과 관련된 예언이 결코 아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주전 536년 바벨론에서 귀환했을 때 큰 기쁨을 경험했지만 이사야가 여기에 기록한 기쁨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시온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될 때의 기쁨인 것이다. 본문은 마지막 때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이방의 한 나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복음을 들고 달려가는 전도자들의 아름다운 발길을 회화적 표현방식으로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52장 7절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장차 이방의 한 나라(a nation)에 의해 실현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예언인 것이다.
이는 7절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자명해진다. 성경을 해석할 때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하나의 성경 구절은 반드시 전후 문맥 속에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이 7절 말씀을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면, 이것은 결코 구약시대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10절 말씀을 살펴보자.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주경신학자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 있는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는 말씀을 “이는 신약시대의 만민구원운동을 예언한다”라고 설명한다(박윤선 ․ 성경주석 이사야서).
그렇다! 모든 땅 끝까지 구원을 받는 것은 신약시대의 일이다. 물론 여기 10절에 언급된 ‘땅 끝’은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우선적으로 7절에 있는 ‘시온’, 즉 ‘예루살렘’을 뜻한다.
이것은 문맥상으로도 그렇지만 복음전도의 마지막 과제로서의 땅 끝이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이요, 민족적으로는 유대 민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롬 11:25~26). 예루살렘에 다시 복음이 들어가고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 비로소 “모든 땅의 끝들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10절의 예언은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사야 52장 7~10절이 고레스 때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이 구절 가운데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파사에 의해서 귀환된 후 그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귀환 후에도 계속하여 헬라, 시리아, 애굽, 로마 등 많은 이방 나라들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 예언은 과연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마지막 때에 이방의 한 나라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내심을 받은 전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능히 복음을 전할 때 실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유대민족 가운데 전국적인 회심이 있을 것이며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나 영역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다. 메시아 예수의 다스림과 통치권이 인정되고 환영받으며 행사되는 곳이면 거기는 개인의 심령이든, 가정이든, 민족과 국가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따라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예언은 장차 온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을 때 성취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야 52장 7~10절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예언인데, 그것은 말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가는 전도자들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부터 시온을 향해 가는 자들인가?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이 “해 돋는 데”, 즉 동방의 어느 한 나라(a nation)로부터 보냄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따라서 그 동방의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사야 41장 25~27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할 자들을 ‘해 돋는 곳’에서부터 보내실 것이라는 예언은 이사야 41장 25~27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같이 하리니
누가 처음부터 이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뇨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사 41:25~27)
먼저 27절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하나님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기쁜 소식’은 이사야 52장 7절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 ‘좋은 소식’과 같은 히브리 원어 ‘basar’를 사용하고 있다. ‘바사르’는 현대 히브리어로도 ‘복음’이라는 뜻이다. 이사야 52장 7절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 10~1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아야 한다는 것, 곧 복음 전파의 보편적 필요성을 강조할 때 인용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 25절에는 ‘해 돋는 곳’ 즉 동방이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는 땅으로 지명됐다.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25절). 한글개역성경은 25절 첫 부분이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곧에서 오게 하였나니”로 번역되어 있지만, ‘한 사람’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해 돋는 곳에서 ‘온다’는 동사를 3인칭 단수 남성을 받도록 사용하였을 뿐이므로 그를 반드시 사람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one)’로 번역하였다: "I have raised one from the north, and he shall come from the rising of the sun"(KJV). 따라서 이 ‘하나(one)’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라’라는 뜻의 ‘고이(goi)’도 히브리어에서 3인칭 단수 남성을 받기 때문이다. 25절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25)라고 된다.
그러면 25절이 말하는 ‘북방’이란 어디인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자는 ‘동방’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주님은 북방으로부터 그를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는 분명히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기쁜 소식’ 곧 복음을 가져갈 자이다. 그런데 그가 북방에서 일으킴을 받는다. 북방과 동방의 두 곳이 엇갈린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주석가 흑기(黑崎)는 이 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확히 그가 온 것은 ‘동북’인데 이를 시적으로 분리하여 두 방향을 든 것이다.”
타당한 설명이다. 우리는 이 해석을 취한다. 그러므로 25절의 “해 돋는 곳”이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도록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보냄을 받는 나라인데,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 돋는 곳” 즉 정동방이면서 또한 북방에 해당되는 나라이다(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가 정확히 그곳과 일치한다).
바로 이 “해 돋는 곳”이 계시록 7장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령의 인침을 받도록 인치는 사역자(복음전도자)들이 출동하는 곳인 “해 돋는 데”인 것이다(2절). ☞→▶ < 요한계시록 7:1~8 >
여기에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는 단수로도 언급되고 복수로도 언급되어 있다.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에서는 복수이며,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다. ‘기쁜 소식 전할 자’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나 민족과 같은 집합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복수로 ‘그들’이라고 말할 때는 그 나라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 27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를 서구 성경주석가들은 주전 6세기의 파사 국왕 고레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기쁜 소식 전할 자”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에 의해 해방이 될 때 그 기쁜 소식을 고국으로 달려가서 전달할 “전령”들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이사야 41장의 예언을 이사야 52장 7절 처럼 전부 구약시대에 파사의 고레스에 의해 성취된 예언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할 때에 일반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성취될 사건(근접성취)과 멀리 성취될 종말의 사건(원접성취)을 섞어서 예언했다는 성경 예언의 특성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으로서, 성경 예언해석의 중요한 원리인 “이중 성취의 원리”를 전적으로 간과한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구약의 예언들을 읽어보면 선지자들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한 호흡으로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의 예언 또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심판 날에 대한 언급이 서로 중복되어 있다. 이것을 "예언적 원근법"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에도 이러한 점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중 성취의 원리
예언의 많은 부분은 예언하는 때로부터 가까운 때의 사건을 일차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므로 이 예언이 나중에 가서 종국적인 성취를 이루도록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일차적인 성취는 나중에 완성될 예언의 표징이다.
사무엘하 7:12~16의 예를 보면,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아들에 관해서 약속을 주셨다. 이 예언은 말할 것도 없이 왕위에 있는 다윗을 계승할 솔로몬에 대한 것이다. 더욱이 14절 하반부 같은 것은 솔로몬에게 한정된 것이다. 한편, 히브리 1:5하반절에서는 14절의 상반부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즉, 예수님은 다윗의 위대한 아들이며, 솔로몬은 그의 예표였다. 솔로몬은 다윗의 다들이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엄청난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도 그러하셨다. 하박국 1:5,6과 사도행전 13:41에서도 구약의 이중적 예언 성취를 내다본 신약성경의 권위를 볼 수 있다.
앞산과 뒷산은 시간적 간격이 있다.
선지자의 위치 선지자는 앞산의 정면에서 미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시간의 전후 관계는 간과되었고,
앞산에 대한 예언과 뒷산에 대한 예언을 겹쳐서 예언했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을 해석할 때 우리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통해 예언 구절이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인지를 파악하되 특별히 예언 당시의 무엇을 가리키며(근접 성취), 멀리는 무엇을 가리키는지(원접 성취)를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발간한 『구약개관(Old Testament Survey)』973쪽에 보면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미래에 대한 예언들은 종종 “선지자적 시각”(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상호 침투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 선지자적 시각 속에서는 가까운 장래의 일과 먼 미래의 일이 서로 엇물려 들어간다. 예를 들어 이사야 9장에서 스불론과 납달리(앗수르에 점령된 땅의 대표적인 지역들)에 주어진 번영과 기쁨의 메시지는 후에 일어날 일로 옮겨 가며(9:1 MT 8:23, 주: MT = Masoretic Text), 다윗의 보좌에 앉은 “평화의 왕”으로 절정을 맺는다. 그의 통치는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6,7절[MT 5,6절]).”(윌리엄 S. 라솔; 데이비드 앨런 허바드; 프레드릭 윌리엄 부쉬[공저]; 박철현 역, 일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pp. 973~974)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사야 41장은 이중의 성취를 가진다. 다니엘이 헬라의 안티오커스와 종말론적 적그리스도를 겹쳐 보고 있듯이(단 8:9~14). 감람산 강화에서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 파멸과 종말론적 세계 멸망을 같이 보듯이(마 24:15~28), 사도 요한이 먼저는 로마제국을,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종말론적 적그리스도의 권력을 같이 묘사하고 있듯이(계 13장) -그리하여 안티오커스는 종말론적 적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예루살렘 심판은 종말론적 세계 심판의 예표이며, 로마제국은 종말론적 적그리스도 제국의 예표이다- 이사야 41장은 먼저는 동방의 파사를,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쓰임 받을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일으키신 동방의 파사는(사 41장, 45장) 장차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구원(복음으로 얻는 구원)을 위해 동방에서 예루살렘에 능히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한 표징이요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많은 성경기자들처럼 고레스(파사) 시대와 종말(End-time)이 함께 섞이는 것으로 본 것이다.
예시적인 나라 파사 제국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동방의 파사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동방에서 선택하사 유대 민족에게 능히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표의 나라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41장과 더불어 파사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 45장 말씀을 자세히 상고하면 여실히 드러난다. 먼저 이사야 45장 1~4절을 상고해 보자.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에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는 알지 못하였을 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사 45: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상태로부터 구출시키기 위해 장차 고레스의 파사 제국을 일으키사 그 나라를 아주 강하고 부한 나라가 되도록 큰 은총을 베푸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고레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능히 해방시킬 수 있도록 나라들을 정복케 하시고, 또 아무도 찾지 못했던 보화와 숨겨진 재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13절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동일한 대상에 관한 예언이 계속된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파사 제국을 세워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내가 공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사 45:13)
초세기의 유대인 사학자 요세푸스(Josephu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파사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였을 때 바벨론에 있던 다니엘이 이사야서의 본 구절들을 고레스에게 읽어 주어 그를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고레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약 150년이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아시고 선지서에 기록하신 것을 보고 놀라,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파사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에 관해 17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사 45:17)
17절은 파사에 의해 귀환된 이스라엘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며, 영원히 세상에서 수치나 치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파사왕 고레스에 의해 해방된 이스라엘은 귀환 자체도 충분하지 않았고, 다시 헬라, 시리아, 애굽, 로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환란과 수치와 치욕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예언이 틀렸는가? 그렇지 않다.
분문이 말하는 ‘영원한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레스의 파사 제국은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즉 고레스의 파사 제국은 말세에 등장할 나라로서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종말의 때에 동방(해 돋는 곳)에서 일으키실 또 하나의 나라에 대한 예표의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즉 구원의 복음을 능히 전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마침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동방의 한 나라 파사 제국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셨듯이, 마지막 때에도 동방의 어느 한 나라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는 후자의 모형이며, 예표의 나라이다.
이사야 41:25~27은 바로 이 이중적 사건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구절의 완전한 성취는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다. 이 예언은 파사의 고레스 시대에 그 부분적인 성취를 두고 있으며, 그 마지막 성취는 장차 복음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할 동방의 한 나라에 의해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면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그 동방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 주석가들은 이사야 41:25~27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고레스에 의해 해방될 때 성취된 예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 구절은 당시 그 해방의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할 ‘전령’들에 대한 예언으로서 이미 구약시대에 끝났다는 것이다.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를 무시하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목적을 놓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나라를 “해 돋는 곳” 즉 동방에서 일으키시어, 바로 그 동방의 한 나라(a nation)로부터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도자들을 보내주실 것을 예언한 말씀인 것이다. 결코 고레스 시대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사야 40장부터 계속해서 그 이하의 전 내용은 신약에서는 복음 시대에 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사야 41장과 45장 및 그 이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여러 병행 구절들은 이중의 성취를 가지는 예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예언들은 가까이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출시킬 동방 페르시아에 대한 예언일 뿐 아니라(근접성취), 멀리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영적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능히 복음을 전할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원접성취).
페르시아를 통해 그 부분적 성취를 본 이사야의 예언은 마지막 때에 또 하나의 동방 나라를 통해 완성될 사건의 모형이며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도구로 동방의 한 나라를 사용하셨듯이, 마지막 때에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도구로 동방의 한 나라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이중의 성취를 가진다.
만일 우리가 성경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 즉 직접 예언과 예표 예언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사야 41장 25절 이하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를 파사의 고레스라고 해석하고,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들”을 파사의 고레스에 의한 유대인의 바벨론 해방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만 단정해 버리면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고레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닌데 41장 25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점이다.
왜 고레스는 '해 돋는 데'서 오는 자가 아닌가
25절에 의하면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고레스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배화교)의 신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다. 고레스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릴 때에도 역대하 36:23에 보면 어디까지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 또는 “하늘의 신”이라고 불렀지 자신의 하나님으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난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따르며 예배하는 자를 말한다(창 4:26).
이사야 12:4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고 기록하였고, 64:7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라고 기록하였고, 사도행전 2:21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으며, 9장 14절과 21절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에게 받았나이다···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기록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성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으며, 로마서 10:13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많다.
그러므로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고레스일 수 없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석가 류폴드(H.C. Leupold)는 19세기에 발견된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의 기록에 의거해 고레스가 개종자가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 원통으로부터 우리는 고레스가 자신의 성공(바벨론 정복이나 다른 일들에서)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에게 돌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호르무즈드 라쌈(Hormuzd Rassam)’에 의해서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이 발견되었다. 그 원통은 점토로 된 것으로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발표한 칙령(조서)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인 즉, 바벨론 왕인 나보니더스(Navonidus)와 벨사살 왕이 행한 실책들과 저들이 마르둑(Marduk) 신을 경배하지 아니한 점을 제시한 후, 고레스는 어떻게 마르둑이 자신을 합법적인 통지차로 선택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고레스는 자신의 성공(바벨론 정복이나 다른 일들에서)을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에게 돌렸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그의 칙령이나(에스라 1:1~3) 원통에 기록된 기사는 모두 고레스의 것인데, 성경에는 그가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개종자였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고레스는 다신론적 견지에서 상충되는 진술들을 했던 것이다. 고레스가 공포한 칙령은 느부갓네살이 그 당대에 발표한 것(단 4:1~3)보다 더 진실된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H.C. 류폴드, 이사야주석(하), 크리스챤서적, 1990, pp.768~769)
페르시아왕 고레스(559~530 BC)의 원통(Cyrus Cylinder) 이 실린더의 길이는 약 9인치이고,
거기에는 536 BC에 기록된 고레스의 필적이 있다. 이 필적은 에스라 1:1~3의 내용을 확증해 준다.
고레스는 이교도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신론자였을 뿐 개종자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41장 25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가 고레스가 아니라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물에 의해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아래의 글은 존 C 윝컴(John C. Whitcomb, Jr)이 쓴 논문『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난 고레스』에서 발췌한 글인데,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비록 고레스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고 그에 관하여 위대한 말들을 하였지만, 참으로 여호와를 믿는 자는 아니었다. 대략 50.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왕의 선포에 응하여 스룹바벨/세스바살(Zerubbabel/Sheshbazzar)과 예수아(Joshua)의 지도 아래 유대로 돌아왔다(스 3:1~2).
에스라 1장의 조서에서 고레스는 “하늘의 신 여호와”를 자신에게 “세상 만국”을 주신 분이요 자신을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신 분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진술을 고레스가 여호와에 의해 “의로” 불리움을 받을 것이며(사 41:25),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41:25), 그가 “의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45:13),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할 것]”이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과 비교할 때, 우리는 쉽게 그가 참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였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여호와께서 친히 고레스에 대하여(사 44:28에서) “나의 목자”(이 호칭은 렘 23장과 겔 34장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신정왕국을 다스릴 왕에 대해 사용되었다)라고 언급하시고, 그리고 45:1에서 실제로 그를 “그의 기름 받은” 자(문자적으로는 “그의 메시야”, 참조, 시 2:2와 단 9:25)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화려한 호칭들을 신정적인 의미(the theocratic sense)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사야의 예언들에서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나오지 않고(참조, 신 18:15, 18), 동방에서(사 41:2), 북방에서(41:25), 그리고 심지어는 “먼 나라”에서(46:11) 올 이방의 정복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고레스에게 특별한 임무를 위임 하신 것은 느부갓네살을 여호와의 “종”(렘 25:9)이라 부르시며 위임하신 것, 다메섹의 무자비한 군주 하사엘을 엘리사를 통하여 “기름 부으시고” 이스라엘에 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행하게 하신 일, 그리고 언젠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적그리스도(슥 11:16)를 세우시는 것과 잘 비교가 될 것이다.
고레스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니었으며, 그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여 억압 받던 다른 민족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세속 역사의 자료로부터 풍성한 증거가 있다. 고레스 원통에서 이 새로운 정복자는 자신의 바벨론인(人) 신하들에게 베벨론의 신 마르둑이 어떻게 자신을 택하여 세웠는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르둑은 “온 나라들을 샅샅이 살피며 기꺼이 (매년 있을 연례 행진에서) 자신(즉, 마르둑)을 앞세우고 진행할 의로운 통치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안샨(Anshan)의 왕 고레스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온 세상의 통치자로 선포하였다… 위대한 주요 그의 백성의 보호자이신 마르둑이 그의[고레스의] 선한 행위들과 그의 바른 마음을 기쁘게 보셨으므로 그를 명하여 자기의 성읍 바벨론으로 행진해 들어가게 하셨다. 그는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고레스를 마치 진정한 친구처럼 자신의 옆에서 진행하게 하셨다… 마르둑은 고레스로 하여금 전쟁도 치르지 않고 자신의 성읍 바벨론에 들어가게 하셨으며, 그로써 바벨론을 그 어떤 재난도 당하지 않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즉, 마르둑]을 섬기지 않는 왕 나보니두스를 그의 손에 넘기셨다.”
고레스가 실제로는 다신론자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고레스를 분석하며 말씀하신 두 서술로서 잘 확증되는 것 같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사 45:4~5). 그는 여호와를, 이사야 선지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는 후렴구와 같이 반복되는 표현에서 “너는 나를 알지 못할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라는 표현이 지닌 비극적인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구약신학 논문집, 윤영탁 역편,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8, pp.152~154).
고레스는 유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이었다. 그렇지만 이사야 45장 1절은 그를 가리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메시아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이교도인 고레스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서 고레스에 대한 이같은 과분한 칭호는 이 예언이 가지는 이중의 성취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난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레스는 예표의 왕이었다. 즉 당시에는 왕이 곧 나라와 동일시되는 개념 -왕국- 이었으므로,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는 말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의 보다 크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국가적으로 기름 부어 주실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 대한 예표 예언인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페르시아를 통해 그 부분적 성취를 보았으며, 마지막 때에 또 하나의 동방의 나라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볼 것이다. 본문이 예언하는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고레스가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도록 장차 동방의 한 나라에서 보내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결코 과거에 종결된 예언이 아니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가져갈 동방의 한 나라에 의해 성취될 예언인 것이다. 27절 하반절에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하셨는데, 앞서 지적했듯이 “기쁜 소식”이란 종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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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 :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칙령(조서)을 발표했었다. 그 칙령이 적힌 점토로 된 원통이 19세기에 ‘호르무즈드 라쌈(Hormuzd Rassam)’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인 즉, 바벨론 왕인 나보니더스(Navonidus)와 벨사살 왕이 행한 실책들과 저들이 마르둑(Marduk) 신을 경배하지 아니한 점을 제시한 후, 고레스는 어떻게 마르둑이 자신을 합법적인 통지차로 선택했는지를 기술한다. 그는 바벨론에서 바른 경배가 회복되도록 조처하고 포로된 신들과 백성들을 각기 그 신전과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는 칙령을 선언한다(에스라 1:1~3, 6:3~5 참조). 이 유물은 성경의 진실성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입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을 꾸며낸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이 원통의 글을 제시하며 성경이 실제 있었던 일을 미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46장 10~13절
이사야 46장 10~13절도 앞서 살펴 본 이사야 41장 25~27, 52장 7절과 짝을 이루는 예언이며, 또한 요한계시록 7장 1~8절과 병행구절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마지막 때에 먼 동방의 나라에서 시온으로 사람을 부를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 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사 46:10~13)
먼저 12절 말씀을 살펴보자(한글개역성경).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여기에서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참조 10:2~4). 또한 “마음이 완악하여”란 구절은 유대인들이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롬 11:7). 즉 12절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이스라엘아 나에게 청종하라”는 뜻이다.
왜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게 청종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13절에 있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의’란 ‘하나님의 의’로서 ‘복음’을 뜻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주석학자 박윤선 박사는 본문 13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힘쓰나 하나님은 그로 더불어 가까와지시기를 원하신다. 그가 ‘의’를 가지시고 우리에게 ‘가깝게’ 오심은, 필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 그는 우리의 공로 유무를 보시지 않고 우리 구원의 대가가 될 하나님의 의를 친히 가지고 오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내것이라고 하기만 하면 그대로 되어진다.”(박윤선, 성경주석 이사야서, 서울: 영음사, 1982, p.450)
베이커 성경주석도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13절)는 말씀이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예언인 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본문의 성취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분히 갖는다. ‘의’는 하나님께서 가깝게 하리라고 약속하시는 구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주어지는 가장 성실한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마련함과 동시에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마련한 의에로의 구원이기 때문이다(롬 9:30). 그리고 구원은 그것이 하나님이 의의 판단자이신 한 공정하시리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의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간이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없는 의를 인간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에 단연코 ‘하나님의 의’이기도 하다.”(베이커 성경주석 이사야(중), 기독교문사, P.641)
13절에 기록된 ‘의’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나님의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12~13절 전체의 뜻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까이’ 가져가시어 그들을 구원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12절에 있는 “의에서 멀리(far) 떠난 너희여”라는 구절과 13절에 있는 “나의 의를 가까이(near) 할 것인즉”이란 구절은 ‘대구’를 이루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실 것인가?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11절 말씀이다(한글개역성경):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여기에서 ‘동방(the east)’이란 말과 ‘먼 나라(a far-off land)’라는 말, 두 곳에 밑줄을 치라. 하나님은 동방의 먼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냥 ‘동방’이 아니고 ‘먼 나라’ 동방이다! 즉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동방’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땅(a far-off land)’에 있는 동양의 나라이다. 11절에 기록된 이 계시는 마지막 때에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로 보내심을 받게 될 복음의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다.
예루살렘 정동쪽의 가장 먼 나라
그러면 “해 돋는 데”(동방)란 어디일까? 그 “해 돋는 데”란 과연 동방의 어느 나라를 말함인가? 바로 이것이 본문 해석상의 가장 큰 문제다. “해 돋는 데”라는 말이 명백히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된 이상 “해 돋는 데”는 과연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 회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마땅히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지리학적으로 아시아 대륙 동쪽 땅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는 ‘동방’의 ‘해 돋는 곳’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전인수격 해석은 아니될 것이다.
팔레스틴의 동쪽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 이 나라들 중에 마지막 때에 회개하고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올 이스라엘 백성에게(롬 11:25, 26) 능히 복음을 전할 나라는 과연 동방의 어디에 있는 나라일까? 코리아라고 단정해도 문제될 소지가 없을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실제로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 돋는 곳, 동방에서 올 수 있는 나라에 해당될 수 있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이겠는가를 지도상에서 살펴보면, 제일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강경한 나라인 회교국가 이라크가 있다. 그 다음에 역시 이스라엘 적대 국가인 회교국 이란이 있다. 다음에 역시 회교국 아프가니스틴과 파키스탄이 있다. 그 뒤를 이어 힌두교 국가인 인도가 있고, 이어서 공산국가인 지나(支那)가 있으며 가장 먼 곳인 동아시아 땅 끝에 코리아가 있다.
팔레스틴의 동쪽에 있는 이 많은 나라들 가운데 예언이 의도하는 “해 돋는 곳”이란 과연 어디일까?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해 돋는 곳”이 어디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성경에 자세히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성경을 탐구한다면 기록된 계시인 성경 안에서 얼마든지 그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46장 10~13절, 바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해 돋는 곳”이 극동의 코리아라고 해석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12.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 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 ‘동방(the east)’ 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a far-off land)’에서 당신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1절). 여기에서 ‘동방(the east)’이란 말과 ‘먼 나라(a far-off land)’라는 말에 주목하라. 그냥 ‘동방’이 아니고 ‘먼 나라’ 동방이다. 즉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동방(the east)’에 있는 나라로서 그 거룩한 나라는 “멀리 떨어진 땅(a far-off land)”에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곳은 어디인가? 한반도, 즉 극동(far east)의 코리아다!
‘동방(the east)’ + ‘먼 나라(a far-off land)’= 극동(the far east)
하나님이 먼 동방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중심해서 “정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먼 땅”에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왜? 그것이 해석상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동방’도 ‘동북방’이 있고, ‘동남방’도 있고, ‘정동쪽’이 있다. 그렇지만 해석상의 우선순위는 당연히 ‘정동쪽’인 것이다. 따라서 ‘해 돋는 데’는 예루살렘의 ‘정동쪽’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먼 나라’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먼 나라’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조금 먼 나라”가 있고, “좀 더 먼 나라”가 있으며, “가장 먼 나라”가 있다. 하지만 해석상의 우선순위는 “가장 먼 나라”인 것이다. 이게 객관적이고 타당한 해석방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의 ‘정동쪽’에 있는 나라이면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 동방의 나라”를 지목해야 한다. 그 나라는 아시아 대륙 동쪽 땅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코리아이다.
게다가 성경은 가장 먼 땅을 항상 ‘땅 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행 1:8, 사 41:9). 세계지도를 펴놓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정동쪽’에 있는 땅 가운데 가장 먼 땅, 즉 ‘땅 끝’이 어디인지 찾아보라. 바로 극동아시아의 한반도이다.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은 동쪽으로 코리아에 이르러 끝이 나고 다음은 태평양 바다가 나온다. 그러니까 11절이 의도하는 ‘동방의 먼 나라’는 코리아다. 이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이 아닌 것이다. 아주 타당한 해석이다.
인도는 동방의 먼 나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도는 국토의 대부분이 동방보다는 남방으로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지나(支那)도 역시 동방의 먼 나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나는 영토가 광활하여 서쪽 국경이 이란과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국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거리라면 이스라엘에서 “먼 땅(a far-off land)”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나(支那)가 예루살렘으로 복음전도자들이 보냄을 받을 땅인 “해 돋는 데”, 곧 동방의 먼 나라로 간주될 수 없는 보다 확실한 근거가 있다. 지나인들은 셈의 후손이 아닌 함의 후손이다. 하나님은 함의 후손을 세계 선교의 마지막 주자로 쓰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구원사를 셈족을 통해 시작하시고 셈족을 통해 마무리 하신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 9:26).
지나인들이 함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지나인들은 ‘시노(Sino)’ 족이라고 부른다(영어 사전에서 ‘Sino’를 찾아보라). 이 ‘시노’는 함의 후손 ‘신(Sin)’ 족속에 해당 된다(창 10:17). ‘시노’의 어원이 ‘신’인 것이다. ‘신’은 가나안의 아들이요,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창 10:6; 15). 가나안은 노아로부터 저주받은 자였다(창 9:25). 이 가나안의 아들 ‘신’이 지나 민족의 고대 조상이다(창 10:17하). 고래로 지나인들이 용(龍)을 숭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함의 가계, 그 중에서도 가나안의 아들 ‘신’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용을 숭배하는 족속은 저주 아래 있는 족속이다.
성경은 용을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말한다(계 12:9, 19:2). 용은 신비감을 자극하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셈 계열의 백성들은 그렇게 용을 숭배하지 않는다. 고대로부터 용을 조상대대로 지극히 숭배하는 족속인 지나인들은 함의 후손인 것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예언이 의도하는 “해 돋는 데”는 결코 지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인은 셈의 후손이다. 더욱이 셈족의 현저한 가지인 욕단의 후손이다(창 10:21~30). 게다가 코리아는 예루살렘의 정동쪽으로 같은 위도상에 있으며 또한 거리상으로도 이스라엘은 아시아의 서쪽(극서)에 위치해 있고 코리아 아시아의 동쪽(극동)에 위치해 있어 코리아야말로 가장 먼 땅이며 팔레스틴의 이스라엘로부터 정확히 “해 돋는 곳”이다. 따라서 예언이 지목하는 “해 돋는 데”란 한반도, 곧 코리아를 의도한 것이 틀림없다.
예루살렘 전경
성경 예언에서 코리아가 점하고 있는 위치
우리 겨레는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땅 끝까지 능히 복음을 전하여 로마서 11:25~26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을 실현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를 완수할 제2의 성민이다. 바로 이것이 구속사에서 알이랑 민족 우리 겨레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이다. 우리나라는 종말론적으로 성경 예언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동방의 현자들(동방박사)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로 인해 1세기의 사건이 마지막 세기에 재현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555 프로젝트", "멜기세덱 프로젝트"다. 동방의 코리아는 세계와 하나님 앞에서 독특한 사명과 위치를 지닌 선택받은 나라이다. ☞→▶ < 셈족의 현저한 두 가지 벨렉과 욕단의 후손 >
필자는 “해 돋는 데”를 문자적 해석을 취하여 특정 장소인 동방의 한국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해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이라고 비판하는 인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비판이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단견이요 성급한 결론이었다고 단정한다.
물론 이사야서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해 돋는 데”를 한국이라고 주장하던 사이비 종파의 교주들이 있었기 때문에(이유성 김득만 박태선 백시응 등), “해 돋는 데”라는 명사구의 문자적 해석에 대한 그들의 거부반응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계시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실제적인 교훈을 놓칠 수는 없다.
“마귀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그들을 향한 특별한 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이것에 관해 우리를 대적할 것이다.”
☞관련자료: < "유대민족의 대추수를 위해 한국 사람을 쓰리라!"- 신디 제이콥스의 예언 동영상 >
< 동방박사들의 고국은 어디인가? >
- 이 기사는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유석근 저, 예루살렘 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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