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에서 ‘볼일’ 보면 우승 못한다?
저자 - 김규회
국내 마라톤 도전사는 땀, 좌절, 재기, 희망이 어우러진 대서사시다. 한국 마라톤의 최고 기록은 2000년 2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가 세운 2시간 7분 20초(도쿄 국제마라톤 2위). 한국의 올림픽 영웅으로 불리는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를,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를 기록했다.
마라톤 경기는 기원전 490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마라톤 평원 전투에서 유래했다. 당시 그리스군 약 1만 명과 페르시아군 2만 5000명이 아테네 동북방에 위치한 마라톤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그리스군은 최강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리스군의 전사자는 겨우 192명에 불과했지만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전사했다. 예상치 못한 힘든 전투에서 이겼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아테네의 전령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는 감격의 승전보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그는 마라톤 평원부터 아테네까지 약 40km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아테네에 도착한 그는 “우리가 이겼다!”라고 말한 뒤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초기의 마라톤 구간은 25마일, 즉 39km 정도였다. 그러다가 1908년 4회 런던 올림픽 때 윈저 궁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 42.195km가 마라톤의 정식 거리로 결정됐다. 이는 영국의 왕실 일가가 윈저 성에서 편하게 경기를 구경할 수 있도록 조정한 거리였다. 42.195km는 1924년 8회 파리 올림픽 때 최종 확정됐다.
현재 세계 최고 마라톤 기록은 2시간 3분 38초. 패트릭 마카우 무쇼키(케냐)가 2011년 9월 25일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세운 기록이다. 여자 최고 기록은 영국의 폴라 래드클리프가 2003년 4월 13일 런던 마라톤 대회에서 세운 2시간 15분 25초다. 일본의 가나쿠라는 마라톤 역사상 최장 기록을 보유한 주인공. 가나쿠라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기 중 탈진해 코스 인근의 한 가정집에 실려갔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저녁에 잠이 깬 그는 주위의 질타가 두려운 나머지 몰래 짐을 꾸려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를 모르고 조직위원회는 가나쿠라를 실종 처리했고, 무려 54년이 지난 뒤 나머지 레이스를 허락했다. 가나쿠라는 출발선을 나선 지 54년 2일 32분 20.3초 만에 코스를 완주했다.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마라톤 대회. 세계적인 대회로 뉴욕 마라톤, 보스턴 마라톤, 런던 마라톤, 로테르담 마라톤, 베를린 마라톤 등이 있다. 아마추어(마스터스)에게는 ‘서브-3(3시간 이하로 달리는 것 클럽)’ 가입이 최고의 영예로 불린다.
마라톤 경기에도 규칙이 있다. 예선전은 없다. 모두 똑같이 같은 곳에서 출발해야 하고, 혼자 달려야 한다. 주최 측이 제공한 음식만 먹으면서 정해진 코스로만 달린다. 코스를 이탈하면 즉시 탈락이다. 그런데 레이스 도중에 급한 볼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경기 중에 일어난 생리 현상은 규정상 심판의 허가를 받으면 문제가 없다. 화장실에 다녀와도 무방하다. 볼일을 다 본 뒤 심판의 허가를 얻은 곳에서 다시 달리면 된다.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에서 잠깐 쉬고도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봉주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단 한 번 넘어졌을 뿐인데도 선두를 따라갈 수 없었다. 하물며 화장실에 갔다 온 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레이스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고도 우승한 선수가 있다.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달리기 붐을 일으킨 프랭크 쇼터가 그 주인공이다. 쇼터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유명 마라토너다. 1973년 일본에서 열렸던 비와코 마라톤 대회에서 경기 도중 심판의 허가를 얻어 화장실에 다녀오고도 우승했다. 초청 선수로 참가한 그는 출발부터 여유를 부렸다. 그러다가 10km 지점에서 마신 음료 때문에 탈이 났다. 복통 증세가 점점 아랫배를 조여왔고, 급기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근처 해우소(解憂所, 풀숲)에서 실례를 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써 2명이 앞서 나갔다. 볼일을 보고 난 쇼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전력 질주했다. 결국 선두를 따돌리고 2시간 12분 3초의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2년 서울 국제마라톤 대회 때 벌어진 일이다. 3위로 달리던 호주의 로리 위티가 ‘볼일을 보고도’ 2시간 14분 33초로 우승을 했던 것이다. 당시 그를 근접 거리에서 취재했던 기자는 “위티는 30km 지점으로 추정되는 한강의 강북 강변도로에서 대변을 손으로 받아내면서 달렸다. 그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하면서 인간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하고 느꼈다”고 말했다.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인생도 그렇다. 체코의 마라톤 영웅 에밀 자토펙(1922~2000)은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고 말했다. 마라톤의 유일한 경쟁자는 오직 자신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라톤에서 ‘볼일’ 보면 우승 못한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9.24, 끌리는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