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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8 - 도요토미 히데요시,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성을 무혈 점령하다!
1592년 임진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은 임진왜란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만력조선지역
(萬曆朝鮮之役) 이라고 하며, 일본은 중국 연호를 쓰던 조선과는 달리 645년 다이카
(大化) 이래 천년 가까이 독자 연호를 썼기 때문에 일본 연호로 분로쿠노에키 (文祿の役 문록) 라고 합니다.
한국 교과서는 임진왜란이 엄청난 분량으로 나오지만 일본은 짧게 나오니, 영화나 대하 드라마 등에서도 전혀
언급을 않거나 고작 두세줄인게 의문인데, 32권(한국어 번역은 20권) 짜리 소설 “대망” 은 임진왜란은
1~ 2페이지 밖에 안나오지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의 죽음과 히데요시의 충격은 한권에 걸쳐 나옵니다.
일본인은 임진왜란을 쓸데없이 일으켰다며 부정적으로 보는데,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건 1591년에 간신히
얻은 아들 츠루마츠의 죽음과 맞물려 충격으로 인한 '히데요시 노망설' 도 있지만, 사실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운운한 최초기록은 1585년 부터 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대륙 침략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수없는데... 명과의 조공무역은 막대한 이익이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쇼군이 됨으로써 무역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았으니, 노부나가나 이에야스는 자력으로
통일했으므로 반대파 숙청이 쉬웠지만 히데요시는 기반이 취약한지라 외국 침략에 눈을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기 전부터 대륙 진출을 운운했으니 무력이든 무역이든 마음 속에
구상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노부나가 가문의 실질적인 실권자가 되어 도요토미
가문을 세웠으나 도쿠가와, 우에스기, 시마즈 등은 군사적 우세로 복종시킨
것이라 언제든지 뒤통수 칠수 있었으니 이들의 힘을 줄이기 위한 배출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뒤에는 명나라가 있으니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에 불과했고, 과대망상적인 심리가 보이며 조선
에 보낸 오만방자한 국서가 대표적이니 자기를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며 근거는 어머니의 태몽이고
대륙을 정복하여 제국의 정치를 억만년을 시행하겠으며 늦게 따라오는 나라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일찍이 나를 잉태할때 자모가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햇빛은 비치지 않는데가 없으니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했는데,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빼앗았으니 한번 뛰어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을 400여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의 정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니 귀국이 선구로 입조한다면 원려가 있음으로 근우가 없게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히데요시는 조선 말고도 루손 (스페인령 필리핀), 태국, 고산국(대만), 류큐(오키나와) 왕국에도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보냈으며,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 편으로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령
고아에 (내가 중국 점령후 인도까지 정복할 테니까) 거기서 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히데요시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상 앞에서 “당신은 천황가의 먼
후손이고 조부가 터를 닦았기에 거병했을 때 간토의 수많은 무사들이 일어났지만,
나는 미천한 신분에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만큼 왔으니 당신 보다 더 뛰어나다” 고 했습니다.
일본이 주자학을 전한 포로 강항의 간양록에는 명나라에 일본의 전쟁 계획을 알린 절강성 출신 약장수
허의후를 용서하면서 “예로부터 제왕 (帝王) 은 모두 초야 (草野) 에서 일어났으니
명나라에 내 근본이 천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해로운 일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후금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뿐 아니라 태국과 류큐도 조선에 참전할 계획이 있었는데, 류큐는
오래전부터 일본에 시달려 적대관계였고, 태국은 히데요시가 복속해서 명나라를 치라고 협박하자 열받아
명나라에게 같이 일본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며..... 누르하치야 조선에서 뭔가 한몫 챙겨보려는 속셈 이었습니다.
명나라는 당시 황제 만력제가 국사를 내팽개치고 파업을 벌이는 등 막장이었지만 나라는
대국이었고, 조선은 오랜 평화와 세조·연산군·중종 때의 실책으로 초기 보다는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지만 명종 시기부터 군제 개혁으로 강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과의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조선에서 관직을 받았던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와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서 조작까지
했지만 조선은 시큰둥했고.... 많는 영주들도 반대했지만 히데요시의 침략 의지를 꺽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과대망상에 부풀어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점령하겠다지만 실제 목표는 명나라까지고
1군 대장 고니시는 거기서 조선 까지로 목표를 낮추었으며..... 명나라 대군의 파견으로 전황이 어렵자
조선의 4개도, 정유재란 때는 다시 경상, 전라 및 충청의 하삼도를 얻는 것으로 목표치를 계속 내려잡았습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정치나 경제에서 이유를 찾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10년이었으나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여러 봉건 영주를 복속시킨후
권력은 무제한의 공중에 떠서 무중력적 기분이 되어 망상 세계의 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으로 독실한 기독교도 기리시단 고시니 유키나가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채 1만 8,000명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했다고
적었는데, 적국을 침략할때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는 것은 십자군 기사와 템플 기사단에서 흔히 볼수 있습니다.
김훈도 ‘칼의 노래’ 에서 천주교도인 '고니시 유키나가' 의 부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상륙해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원래 붉은 비단에 흰색 십자가 깃발을 사용했으나 1587년 금교령으로1번 깃발을 사용했는데
아쉬운지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조합한 2번 깃발도 썼으며, 3번 깃발은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사용했고, 4번 깃발은 마츠우라 다카노부, 5번 깃발은 아리마 하루노부로 1군 기리시단(기독교) 다이묘들 입니다.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인데 아버지는 요나단
이고 어머니는 막달라이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 (對馬島) 도주인 소 요시토시 (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신앙심이 매우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개신교가 구태하고 부패한 천주교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르자 예수회는 일본을 선점하려고 했으니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조총 (鳥銃) 을 전수했으며, 1600년 일본인
중에는 60만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고 조선을 침략한 15만의 왜군 가운데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세스페데스 (Cespedes) 신부는 조선에 오기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장수에게 조언을 바쳤다는데, 히데요시
는 1586년 취락제에서 코엘류등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게 되면 이교도들인 조선과
중국에 교회당을 세우고 백성들을 모두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 라고 호언장담을 하고는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고니시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왜성(倭城) 으로 왔으니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 인데, 일요일이면 왜군 진영에서“미사” 가 열렸으니“하느님의 복음이 이땅에
최초” 로 전해졌으며,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 다카야마 우콘,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요시아키, 고니시 사쿠에몬등이 일본의 기리시단 (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알려진
다이묘이니 “십자가 군기(軍旗)” 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유교 국가 “조선 침략의 선봉” 에 섰습니다!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항해기에서 많이 과장되기는 했어도....“임진왜란 당시 왜 장군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썼습니다. 대영 백과사전의 일본인 역사
편에서 블린클리는‘부산에 상륙한 25만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적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 보면 히데요시는 일본은 동생 히데나가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고자 하니, 지금 2천척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목재를 모은다면서
선교사들에게 대포와 총을 갖춘 대형 서양 선박 나우선 2척의 조달을 알선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1586년 3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와 접견했으니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 는 계획을 털어놓으면서 “성공
하면 조선과 중국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겠다” 며 회유했는데 선교사들은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 계획을 말리거나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히데요시의 계획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기록에, 가스파르 코엘류는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 기독교
를 믿는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제가 주선해 드릴테니까, 그들과 합동해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지요"
라고 제안했는데,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 신부는 "서양식 군함 및 항해사를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맞춰 제공하는 안건은 히데요시가 아니라 프로이스와 코엘류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고 기록했습니다.
대마도주가 사신을 보내 달라고 졸랐으나 조선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유성룡이 전쟁이 날수 있다고 하니
적정을 한번 살피는게 좋겠다고 해서 간신히 출발해 어렵게 오사카까지 갔는데 히데요시는
기다리지 않고 도쿄 못미쳐 오다와라성의 5만 호조군을 치러 전국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출발한 뒤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서야 돌아온 히데요시의 거만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오만한 어조 국서에 강직한 김성일은
화를 내며 강력히 거부했는데, 아런 이유는 히데요시는 항복 사절로 알았던 반면에 대마도주가 일본
국서 내용을 바꾼지라,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축하사절이었으니 서로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한후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전쟁이 날테니 준비해야 한다고 하고 부사 김성일은 히데요시는 쥐새끼
처럼 생긴게 큰 일을 할 인물이 못되니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해 혼선이 일자 유성룡이 물으니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이 난다는 소문에 겁을 먹은 경상도 백성들이 짐을 꾸려 피난길에 나서니
도로가 메워져 움직이지도 못하니 이러다간 전쟁이 나기 전에 나라가 무느지게 되었으니 그리 말한 것입니다”
조정은 집권당인 동인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지었지만 그래도 불안하니 준비를
하는데 먼저 경상감사에 김수, 전라는 이광, 충청은 윤선각을 임명해 무기를 수리하고 성곽을 보완해
쌓는데 문제는 상류층은 노역에서 빠질려고 하는지라 서민들이 주로 동원돼 원성이 자자하니 중지합니다.
의병장 곽재우 첩의 장인 이로는 친구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 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 올수 있겠나? 라며 축성에 반대했으니..... 조선 사대부 다수의 현실인식 수준이
이랬는데 그나마 쌓은 성도 왜군 수천이 반나절이면 하나씩 떨어뜨릴만한 눈가림할 정도의 평지성 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바다에서 적과 부딪치는게 수군인데 전라좌수사에 맹장 원균을 임명해 부임 도중에 누가 그는 병사
들에게 인자하지 못하다고 참소하는 바람에 유극량으로 바꾸었는데 그가 부임하는 중에 또 누가
그의 어머니 출신이 낮다고 참소해 다시 유성룡은 정음현감 이순신을 무려 6계급이나 승진시켜 내려 보냅니다.
일본 침략군 제1군은 큐슈 서부 18,700명 으로 선봉겸 평안도 주둔군이니 고니시 유키나가 7천명,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 5천명, 마쓰라 시게노부 3천명, 아리마 하루노부
2천명, 오오무라 요시아키 1천명, 고토 스미하루 7뱅명으로 영주 부터 병사들 모두 기독교도 입니다.
제2군은 큐슈 중부 22,800명 으로 선봉겸 함경도 주둔군이니 가토 기요마사 1만명, 나베시마 나오시게 1만
2천명, 사가라 요리후사 800명으로 불교도가 많았고.... 제3군은 큐슈 동부 11,000명 으로 황해도
주둔군이니, 구로다 나가마사 6천명에 오토모 요시무네 5천명으로 영주 부터 대부분이 기독교도 였습니다.
제4군은 큐슈 남부17,000명으로 강원도 주둔군이니 모리 요시나리 2천명,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 1만명, 아키즈키 다네나가 1천명, 이토 스케타카 1천명,
다카하시 누로 1천명 등으로 영주는 아니지만 병사들 중에는 기독교도들이 많았습니다.
제5군은 시코쿠 24,700명으로 충청도 주두군이니 후쿠시마 마사노리 5천명, 토다 카츠타카 4천명,
쵸소카베 모토치카 3천명, 이코마 치카마사 5천 5백명, 하치스카 이에마사7,200명 입니다.
제6군은 큐슈 북부 15,700명으로 전라도 주둔군이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만명,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1천 5백명, 타치바나 무네시게 2,500명, 타치바나 나오츠구 8백명, 쓰쿠시 히로카도
900명이고 제7군은 주코쿠 서부 3만명으로 경상도 주둔군이니 모리 데루모토와 모리 히데모토 입니다.
제8군은 주코쿠 동부 10,000명으로 한성주둔군이니 우키타 히데이에는 20세로
젊은 나이지만......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에 16만 일본군의
총대장이었는데 나카가와 히데마사와 우키타 타다이에가 젊은 대장을 보좌했습니다.
제9군은 간사이(오사카) 11,500명으로 예비군이니 도요토미 히데카츠와 호소카와 타다오키인데, 주장인
히데카츠는 히데요시의 조카(누나의 아들)로 히데요시의 측실인 요도도노(淀殿, 오다 노부나가
의 외손녀) 의 여동생인 아자이 고우 (浅井江) 와 결혼했는데 거제도에 주둔했다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수군은 9,450명으로 구키 요시타카(1,500명), 토도 타카토라(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
(1,500명), 가토 요시아키(1,000명), 명량해전에서 죽는 구루시마 미치후사(700명),
구와야마 마사하루(1,000명), 도쿠이 미치토시(700명), 스가이 에몬쇼(250명),
호리우치 요지요사 (850명) 에 스기와카 덴사부로 (650명) 이상 합계 16만여명 입니다.
히데요시는 사쓰마 (가고시마) 는 옛 영주 시마즈씨에게 통치를 허락했으나, 북규슈는 심복들을
배치했으니, 구마모토 북부는 가토 기요마사 구마모토 남부와 나가사키는 고니시 유키나가,
오이타는 구로다 나가마사였으니 이들 3명이 임진왜란때 총 9군중 제 1,2,3 군으로 선봉이 됩니다.
조선군은 16세부터 60세 까지 천민이나 노비를 제외한 양인들은 병역 의무가 있었으니 장부상 경기도 19,300명,
충청도 10,800명, 경상도 77,000명, 전라도 25,000명, 함경도 10,200명 강원도 2천명, 평안도 17,00명,
황해도 8,800명 합계 172,000 명이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때는 전란의 피해로 "3만 8천명" 으로 줄어듭니다.
임진왜란의 대장은 20세인 우키타 히데이에고, 정유재란의 대장은 15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인 것은 저들이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이며, 제2군은 대장이 1만 2천 나베시마가 아니고 1만으로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인 가토 기요마사이며 4군도 대장은 1만명 시마즈 요시히로가 아니라 2천명에 불과한 모리 요시나리 입니다.
그러니까 믿을수 있는 자를 대장을 시킨 것인데, 그렇다고 2군 대장인 가토가 나베시마의 1만 2천 병사를
지휘할 권한은 없으니 그냥 배속만 된지라.... 그 병력들은 실제로도 자기들 영주인
나베시마의 지휘를 받았으니, 조선은 왕의 군사들이지만 일본은 영주 개인의 군사들인 것이 크게 다릅니다.
일본은 우리 생각보다 굉장히 큰 나라니 규슈 남단 사쓰마 번에서 일본 중앙인 교토까지 거리만 해도 우리나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두만강 까지의 거리를 넘어서는지라.... 교토 보다 훨씬 더 먼 도쿄와 또 그 보다
훨씬 더 먼 동북지방의 병사들은 임진왜란에 동원하지 못하는데 오다와라 정벌전에서 참전을
미루다가 미운 털이 박힌 센다이 다테 마사무네는 벌충하기 위함인지 소수 병사로 스스로 오기는 했습니다.
평시에 고쿠다카(쌀) 100석당 1명을 군사로 동원하고, 전시에는 30~40석 당 1명을 동원한다는 전제로 계산해
보면, 히데요시 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이 50만을 상회하게 되니
오다와라성 호죠씨 정벌에 20만 밖에 더 동원하지 않은 것은 보급 능력상의 한계를 고려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동일본의 장수들은 히데요시가 신뢰할 수 없었고 영지도 너무 멀어서 병사들이 후쿠오카
까지 걸어오자면 몇달은 걸리니 동원할 메리트가 없었는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이 고쿠다카가 거대한 다이묘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습니다.
도쿠가와는 배부른 호랑이였기에 조선으로 갈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에야스는 영지를 교체한지 1년
남짓이고 또 호조가 통치했던 영민들은 반항적이라 새 영지 안정화 때문에 참전은 불가능하기는 했습니다.
히데요시와 동고동락하며 성장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고쿠다카 11만석 다이묘였고,
가토 기요마사는 24만, 가토 요시아키는 10만석으로 간토 256만석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고쿠 112만석
모리 데루모토 보다 못하지만 통일과정에서 전공을 세워 대대손손 자랑할 출세였고 고쿠다카 1만석
이면 다이묘 영주로, 그 지역의 왕이니 궂이 머나먼 적지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리는 없었습니다.
서일본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으니 히젠 나고야성이 건축된 것이나,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이 전선
기지로 사용된 것에서 알수 있듯, 조선과 가까운 규슈, 주고쿠 등의 서일본 다이묘들은 최전선에
설 것이 뻔한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임진왜란에 주력으로 투입된 왜군의 상당수는 서일본 소속이었습니다.
쓰시마 섬은 완전한 재앙이었으니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이 일어나며 조선은 일본 세견선의
수를 30척으로 대폭 줄였고 '대마도주(소 가문)' 만을 무역 파트너로 삼았으니, 쓰시마는 논이
없어 생산력이 부족한지라 조선과 무역하며, 조선 쌀을 들여오는 것이 중요했는데 전쟁으로 모두
다 날아가버리고 또 군대가 거쳐가면서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점령된 조선땅 보다도 더 처참했습니다.
무리한 전쟁 준비 때문에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대역사가 이뤄졌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히데요시
에게 간언할만한 사람이 없었고, 다들 히데요시의 위광에 위압당했으며, 임기응변에 귀재
히데요시가 불만을 살살 달래주는 한편,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마구 을러대는등 밀당을
엄청나게 잘했기 때문에, 히데요시 가신들 조차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프로이스의 설명입니다.
1590년 조선은 대마도주의 거듭된 요청에 히데요시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생계를 위해 전쟁을 막고자했던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항복하라고 한 히데요시의 말을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전국통일 축하 기념으로 통신사를 파견하라 속였고 조선은 일본 정세를 확인하려 파견한 것입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서 통신사들이 항복하러 온줄 알았고 통신사를 무례히 대했지만, 통신사는 전국
통일 축하하러 온 건지라 당연히 말이 엇갈렸는데,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답서로 보낸 국서
에서 조선 국왕이 입조할 것이며, 명을 칠테니 조선이 앞장서라 (정명향도 征明嚮導) 고 요구했습니다.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문장을 순화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이며, 명에 들어가는 길을 빌려 달라(가도입명
假途入明) 고 문서 조작을 가했지만 길을 빌려 달라는 것도 조선 측에서 받아들일수 없는지라 묵살합니다.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조선 사신에게 보내는 답서에 자신이 명을 칠것이라는 말을 분명히 적어
넣게 하자 주위에서 “일단은 좋은 말만 써서 보내고 저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쳐들어가자” 고 했는데,
히데요시는“그러면 자고있는 사람 목을 치는 것과 뭐가 다르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써서 보내 주고
상대방이 미리 준비를 다 한 뒤에 승부를 내야지.” 라며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라는 것을 써넣게 했다고 합니다.
명나라 허의후(許宜後) 가 사츠마로 표류해 약장수로 살면서 명을 공격하려는 것을 알리려다가 교토로 압송되자,
기밀을 누설했으니 삶아 죽여야 한다는 부하들에게 히데요시는 “저 사람은 명나라를 위해 알리는게 이치상
당연하지. 빈 틈을 노리는건 내 본뜻이 아니다. 명나라에도 전쟁을 대비하게한들 좀 어떤가.”라며 허의후에게
죄를 묻지 않고 밀고한 사람에게 “같은 명나라 사람이 밀고하다니 너야말로 추악한 놈이다” 라고 욕했다고 합니다.
조선도 전쟁에 대비해 조치를 취했지만 규모를 오판( 1만~2만 정도?) 한데다가 전쟁 경험이 없고 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이라 초기에는 동래성, 경주성, 영천성등 경상도 지역 모든 성읍들을 잃고, 전쟁에서
박살이 나는데 일본의 압도적인 무력에 연패를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까지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통영의 경상 우수영은 판옥선이 50척, 해남의 전라우수영과 부산의 경상 좌수영이 30척,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25척 정도인데,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은 전쟁 13개월 전에 부임한지라 전쟁 준비를 했지만
경상 우수영 원균은 3개월 전에 부임해 본영과 휘하 20개 진을 순시하다가 전쟁이 터지니 전혀 준비를 못했습니다.
부산의 경상좌수영 박홍은 잘한다고 해서 임기가 연장되었는데.... 대마도주가 전쟁을 경고한데다가
부산의 왜관에 상주하며 무역하던 300여명의 왜인들이 모두 철수하니 이제 전쟁이 임박
했으니..... 박홍은 배를 대마도 근처에 보내 적정을 정탐해야 하는데도 전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 수군 사망자는 단 3명이고, 명량해전은 2명에 불과한 이유는 조선군 판옥선은 대포
20여문을 싣고 150명이 타는 크고 높으며 튼튼한 군함인데 비해 일본군 세키부네는
조총수 20여명을 포함 70여명이 타는 작고 낮은 수송선이니 해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일본 수군의 배는 전투선이라기 보다는 병력 수송선으로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인데 비해
조선군 대포는 600~1000 미터이니, 300~400미터 쯤 거리를 두고 조선군이 포격하면 조선
수군은 배나 사람에 전혀 피해 없이 적선을 포로 격침할수 있는지라 사망자가 2~3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8천 7백명을 태운
700척 수송함대가 오후에 부산 영도에 상륙했는데, 부산진첨사 정발은 사냥 중에 보고는 처음에는
세견선이라 생각했다가 숫자가 많음을 보고 황급히 돌아와 배를 바다에 가라앉히고 성문을 닫아겁니다.
다음날 새벽에 일본군 선발대가 부산진에 무혈 상륙해 부산진성에 조총을 쏘는데 이는 첫째는
성 수비의 허실을 살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본대의 상륙을 엄호하기 위함이니
그런중에 본대가 상륙해 공격하니 정발은 열심히 씨웠지만 2시간만에 성은 어이없이 함락됩니다.
다음날 고니시군은 대장 이하 모두 기독교도들인지라 십자가 군기를 앞세우고 걸어서 정오경에 동래성에 도착해
병사들을 점시 휴식시킨후 공격하는데, 경상 좌병사 이각은 겁을 집어먹고 사전에 성을 빠져나가 도주해
버렸으며 부사 송상현이 의연하게 대처해 군민이 함께 싸웠지만 이번에도 공격 두세시간반에 허무하게 함락됩니다.
조선의 최일선으로 큰 성인 동래성이라면 한달 정도는 버텨 주어야 하며 아니면 열흘 그도 아니면 3~
4일은 지켜야하는데, 불과 두세시간만에 함락된 것은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니....
일본 사신을 맞는 곳이라 학문이 높은 유학자를 임명하니 전쟁에 문외한이었는데, 두만강에서
여진족과 싸운 경험 많은 무장을 배치해 성을 요새화 해야 했지만 조선 조정에는 그런 마인드는 없었습니다.
최일선인 경상좌수영 박홍은 평소에 30척 판옥선을 모아 포격 훈련을 실시해야 함에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때라도 10여척이라도 출동시켜 700척 수송선단에 포격했으면 700척 밀집대형이라
조준할 필요도 없이 격침시키니 바람에 불이라도 번지면 일본군의 부산 상륙 자체를 저지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홍은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않고 산에 올라 멀리 동래성에 연기가 오르는걸 보고는 서울에 있는 부모
처자를 피란시킬 생각으로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침몰시킨후 1만명 수군을 해산하고 혼자 말을 타고
도주해 버리니 이후 7년간 전쟁에서 경상좌수영 수군은 단 한번도 거론되지 않으니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한가지 다행은 박홍이 원균과 서울 조정에 사람을 보내니 말을 탄 전령이 서울에 도착해 전쟁이 났음을
아뢰자 조정은 어리둥절했으니, 하루면 도착할 봉화가 오르지 않았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몇시간 후에야 비로소 남산에 봉화가 도착하니 중도에 여러 봉화꾼들의 기강 해이가 이 정도 였습니다.
조선은 16세부터 60세까지 양인들은 군적에 올라 병역 의무가 있었고 제승방략 제도를 실시했으니
민간에 소집령을 내려 군사와 농민등 대구에 5만여명이 모였으니 서울에서 대장이 내려와
이들을 지휘해야 하는데..... 조정을 이일을 임명했지만 그는 데리고 갈 하사관 3백명을 요청합니다.
병조에서는 서울 주둔군 중에서 뽑지 않고 민가에 동원령을 내리니 대부분 겁을 집어먹고 도주해 버리니, 소집에
응한 자들도 유생이니 과거시함 준비해야 한다며 책을 들고 있거나 배가 아프다는둥 사흘이 지나도 열명도
뽑지 못한지라 답답한 유성룡이 부관이 남아서 뽑으라 하니 이일은 수하 오륙명만 데리고 나흘만에야 출발합니다.
고니시군이 북상하니 밀양의 박진등이 막으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바로 뚫려 버렸고, 경상 좌병사 이각이 본영
인 울산으로도 가지 않고 도주한 바람에 대장이 없는 울산성 좌병영도 전투라고 할 것도 없이 허무하게 무느
졌으며, 4월 18일 제2군 가토군 2만 2천이 부산에 상륙하니 고니시를 태우고 왔던 배가 되돌아가 다시 온 것입니다.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니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서문으로 달아나고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성을 나가니 함락되는데, 창원의 경상 우병사 조대곤
은 병력 2백여명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못하는데 병력이 2백명에 불과했다면 군사들이 달아난 것이라?
대구에 급히 모인 5만명 조선군은 먼저 밥을 먹이자면 쌀과 부식에 간장과 솥과 그릇에 수저를 준비해야지만
대량으로 준비된게 없었으며, 이들이 잘 집도 없고 텐트도 충분치 않으니 대부분 들판에서 노숙해야
하는데, 서울에서 대장은 오지 않고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문에 비까지 내리니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립니다.
순변사 이일이 5~6명 수하를 데리고 상주에 도착하니 목사를 비롯 관리와 주민들이 도망쳐버렸고 대구에 5만명이
흩어져버렸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부산진성이나 동래성이 2~3일만 버텨주었으면 아니면 경상 좌병사 이각이
이삼일만 저지했더라면 그도 아니면 이일이 첫날 바로 출발했더라면 저 5만명 조선군을 지휘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일은 병사가 없는지라 늙은 관리에게 창고 문을 열게 한뒤 쌀과 포목을 꺼낸후 달아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발표하니 몇백명이 모이자 훈련에 들어가는데, 도중에 한 사람이 일본군 척후 두어명을 발견하고 이일에게 보고
하니 이일은 벌써 일본군이 올리 없다면서 군심을 어지럽힌다고 처형하니 그후 일본군이 접근해도 누구도 보고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군이 닥치자 모두들 흩어지는데 이일은 군복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으로 달아납니다.
새벽 4시에 텅빈 조령을 넘어온 1만 8천 고니시군은 4월 28일 오후 1시에 충주에 도착한후 본대는
중앙을 맡아 진군하고 소 요시토시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으로 또 아리마 하루노부의 별동대가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8천명이라는 설과 1만 6천명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신립은 조령에 군대를 배치하면 야음을 틈타 도망
갈 것을 우려해 달천 앞에 배수진을 쳤는데, 두만강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방식대로 기마대를 돌진시킬 생각
이었지만 논이 많고 습지도 있어 질척거리는지라 기마대가 옆으로 나란히 설수도 없었고 달리기는 더 어려웠습니다.
상주에서 이일 처럼 일본군 정찰병의 출현 사실을 보고한 병사는 군심을 어지럽힌다고 신립이 죽여
버렸으니 그 후에 적의 선봉이 나타나도 보고하는 자가 없는지라 조선군은 적군이 눈 앞
달천평야에 대거 나타나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전투는 갑자기 시작됩니다.
논 사이 비좁은 길로 열을 지어 돌격시키니 숫자가 부족했으며 또 조선 기병은 적진을 돌파하는 중무장 기병이
아니라 갑옷도 입지않은 경무장이니 적진으로 달려가 활을 쏘고 옆으로 돌아 후퇴하는 방식인데, 논이 많은
곳이라 황대가 아닌 일렬 종대로 몇개 열의 소수가 돌진하니 좌우군에 포위되어 적군의 조총에 모두 쓰러집니다.
기마대가 패사하고 일본군 좌익과 우익이 조선군을 포위하려고 하니 조선군 보병은 뒤돌아 달아나다가 탄천과
금강에 빠져 죽고 일부는 달아나는데 일본군은 조선군 3천명의 목을 베고 기백명 포로를 잡았는데
전투 시간은 두세시간에 불과했고 가토군은 산 위에서 관전하면서 고니시군의 용맹함에 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경상 우수영 원균은 전쟁 3개월 전에 부임해 본영과 예하 8관 16포를 시찰하는 중에 전쟁이 터진지라
전쟁 준비를 전혀 못했는데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함선이 밀어닥치자 고작 배 한척을 몰고
노량으로 도망쳤으며 70척 판옥선과 군량에 대포는 불질러 바다에 빠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군 사망자 3명, 명량해전 2명에서 보듯 일본군 조총은 사거리가 100미터
인데 비해 조선군 대포는 평균 800미터니 300 미터 거리에서 포격하면
조선군의 배나 사람은 거의 피해 없이 적선을 격침할수 있는데 왜 함대를 출진시키지 못했느냐?
70척 함선은 본영에 10여척 그리고 8관 16포등 24곳에 2~3 척씩 흩어져 있었는데 배를 띄우려면 첫째
상비군이 얼마 없으니 동원령을 발령해 어민들을 소집해야 하는데 시일이 걸리고, 둘째 배에
대포는 있다손 치더라도 화약과 포탄을 실어야 하며 셋째 쌀과 부식에 솥이며 그릇 등 여러 가지를
실어야 하는데 미처 준비할 시간이 없으니 배를 불질러 바다에 가라앉힌 것으로 사전 준비를 못했다는...
원균의 거듭된 출진 요청에 이순신은 전쟁 발발 20여일이 지난 인 5월 4일(양력 6월 13일) 판옥선 24척에 작은
배인 협선 15척으로 출진해 5일 당포에 도착했으며 원균은 늦게야 1척 판옥선을 이끌고 왔고 그후 기효근
등 경상 우수영 장수들이 3척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본대에 합류하니 판옥선 28척에 협선 17척입니다.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거제도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도도 다카토라의 적선 30여척 발견하고는 재빨리 이를
동서로 포위한후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맹렬한 포격을 가해 적선 26척 격침이라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원균의 경상 우수영도 격침된 일본군 26척의 배 중에 5척의 배를 분쇄하는 전과를 세우니... 항구를 빠져나와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척에 불과했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들은 육지로 달아났는데 조선군 피해는 부상자 1명입니다.
같은 날 합포해전(왜선 5척)과 5월 8일 적진포 해전(왜선 13척) 역시 대승이었으며 귀환했다가 2차 출진은
5월 29일 사천해전(왜선 17척) 과 6월 2일 당포해전(왜선 21척) 에 승리후 6월 5일 당항포
해전은 전라우수영 이억기 25척이 처음으로 합류하니 이순신 23척과 원균이 3척등 판옥선이 51척입니다.
왜선은 26척으로 당항포 북쪽 들판에 함안군수 유숭인의 육군 1,000 여명이 있었으니 왜적들이 당항포에
배를 정박시키고 내려서 마을에서 약탈을 하는 것을 보고 달려온 것이라는데, 정찰선을 포구에
들여보내니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기로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합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군도 조총을 쏘아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니 아군은 일본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선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뒤, 적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여 격침
시켰으며 배를 타지 못하고 육지로 도주한 왜군은 유숭인의 육군에 저지당하니 6월 7일 율포 해전(왜선 7척) 입니다.
그런데 모두 7번의 전투는 우리가 알고있는 그런 종류의 해전은 아니며 최초의 해전은 한달 후인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인데..... 해전이라고 하면 양군의 함대가 전투를 위해 서로 접근해 바다에서 포격하며 맞붙는 것입니다.
일곱차례 해전은 왜군이 항구로 들어와 배를 정박한후 모두 내려서 마을을 약탈하는 중에 조선 수군이 갑자기 나타나
항구를 봉쇄하면... 그제서야 놀라 약탈을 중지하고 달려와 배에 올라타 항구를 빠져나가 도망치려다가 조선군
대포 포격으로 침몰했고, 미처 배에 올라타지 못한 왜군은 육지로 도망치니 조선 수군에 의한 일방적인 살육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왜군 수군이 서쪽으로 진격하기 위해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다가 동진하는 조선
수군과 싸운게 아니니.... 부산의 경상 좌수영 30척과 통영의 경상 우수영 70척 합계 100척 판옥선이 단
한척도 일본군과 해전을 하지않고 스스로 바다에 침몰시켰으니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조선 수군은 없어진 것입니다.
경상도에 주둔한 육군인 이각의 경상 좌병영과 조대곤의 경상 우병영 병사들도 단 한차례도 왜군과 전투를 하지
않고 모두 도주해버렸으니.... 경상도 땅에는 수군과 육군이 모두 사라져 버린지라 전투는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왜군 육군은 물론이고 심지어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1,600명도 더 이상 해전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 보고
육지에 상륙해 육로를 걸어서 서울로 올라가 버렸으니, 저들 왜선들이 이제는 할 일이 전혀 없자
배를 정박하고 마을에 들어가 약탈에 열중하는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선 수군이 돌연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선조가 4월 30일 한성을 떠나면서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에 한강을 방어하게 하고 우의정 이양원을 한양수비
를 맡겼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배가 없어 한강을 건너지 못하자 기병 서넛이 강에 뛰어드니 놀란 김명원은 대포
를 강물에 쳐넣고 도주했으며, 한성의 조선 병사들을 성벽에 세워두었더니 밤사이에 내려와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
왜군은 수도 한성 입성시 처절한 대 전투를 에상했으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대문으로 가토 기요마사는 남대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이 열려있고 조선군이 보이지 않으며 민간인의 왕래 조차 없자 가토는 성 안에 조선군의 매복이
있다고 여겨 반나절을 머뭇거리다가 아무래도 이상해 정찰병을 들여 보내니 모두 도망치고 서울이 텅 비어있더라는?

첫댓글 자료 너무 잘 보았습니다...고맙습니다.
주자학에만 빠져 살게 아니라...... 스스로
군사력을 갖추어서 경상도 해안에서
왜적을 물리칠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