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7:12~17)
사무엘이 전쟁까지 마치고 나서
그동안 태풍처럼 몰아친 여러 역경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 온 것을 기억하기 위해
큰 바위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칭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과 동기로 그렇게 한 것이다.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의심 받는
137미터짜리 예수상과는 다른 것이다.
에벤에셀 바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장치가 내겐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더니
나의 아내, 그리고 피부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어린 시절 매우 어려웠을 때 찾아와 밀접도움을 주셨던 각인이 떠올랐다.
아내는
내가 형편 없는 모습으로 인해
스스로 깊은 자책을 하다
이윽고 '혹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존재가 아닌가?'의 지경까지 이르거나 할 때
그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동아줄 같은 존재이다.
더 없이 순전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딸인 나의 아내,
그 소중한 존재를 내게 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 주시는지를
확신하게 되는 그런 존재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가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어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지만
아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기에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 중요한 기억의 장치가 된다.
그 다음으로
때때로 돈이 없어 밥을 굶거나
겨울에 점퍼를 입지 못하고 학비를 단 한번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했던 생활.
차라리 그런 물리적인 빈곤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마음을 잡지 못해 심각하게 방황하는 아버지를 수 년 동안 보며
마음을 조리고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얻었던 절망적인 시절에
하나님은 정말 친밀하게 내 곁에 계셨다.
나의 순진한 기도들을 친절하게 여러 모양으로 응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사진 앞에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을 무릎 꿇고 기도했다.
절망적인 상황이 수 없이 밀어 닥쳤지만
하나님과 내가 은밀한 대화를 주고 받듯이
그 문제들이 기적처럼 해결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었다.
그 산소호흡기와도 같은 생명의 호스가 있었기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시간을 버텨 지금 여기까지 왔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은혜를 받았더라.'로 끝나면 안 되며 '지금 은혜를 받고 있다.'라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사무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늘 응답해 주시고, 이스라엘에게 평안함의 축복을 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일부로 '침묵'하시는 분은 아니신 것 같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메시지와 은혜를 느끼고 있는가?
하나님과 소통하는가? 하나님 말씀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 은혜의 기억장치는
그저 추억을 담은 물건이 아니라
오늘까지 은혜가 이어지게 하는 매개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