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투철한 역사관으로 인간을 탐구한 역작 ‘사기’ 중국 24史 중 최고로 평가
사기의 가장 큰 비중 ‘열전’ ‘신구의 삼업 바르게’교훈 줘 역대 고승전 기술의 모본
역사는 어떤 일이나 현상(사물)이 진행되거나 존재해 온 추이 또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 혹은 기록이기도 하다. 때문에 역사는 역사적 흔적에 대한 역사가의 기록과 그것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기술된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가의 역사 서술에 의해서였다. 때문에 하늘은 아무에게나 역사를 기술하게 하지 않았다. 오직 역사적 진실과 역사적 사실을 온전히 기술할 수 있는 이에게 역사 기술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인간학의 보물창고
서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역사(Histories apodexis)>라는 책을 남겼다. 이와 달리 동양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마천은 <사기(130권)>라는 역사서를 남겼다. 역사를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으로부터 ‘역사를 집필하라’는 유언을 들었다(기원전 110년).
2년 뒤 사마천은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태사령이 되어 천제(天帝)에 제사를 드리는 봉선(封禪)에 참여하였다. 그는 나라의 장서가 있는 석실금궤(石室金櫃)에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수집하여 필생의 역작이자 ‘인간학의 보물창고’인 <사기>(기원전104~93)의 집필을 시작하였다.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의 사후에 <태사공서(太史公書)> 혹은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불렸는데 이중 <태사공기>의 약칭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전한(前漢)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하지 못해 투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사마천은 홀로 무제 앞에 나아가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세 가지 형벌 중 하나를 고르게 하였다. 그는 1) 법에 따른 주살과 2) 돈 50만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수도 없자 결국 3) 궁형을 선택하였다.
남성을 거세당하는 치욕을 견뎌내며 사마천은 <사기>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한무제의 곁에 있게 되었다(기원전 93년). 약 15년 여 년동안 그는 전설의 황제(皇帝)시대에서 한무제에 이르는 2000년의 역사를 통사체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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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의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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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투철한 역사관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 치밀한 구성과 정확한 기술을 통해 흥미롭게 전개해 가고 있다. 이 때문에 <사기>는 중국의 정신적 유산이자 중국 역사의 전형으로 평가받아 중국 역사의 집대성이라 할 24사(史)의 머리에 자리하고 있다.
오제(五帝)로부터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권력을 행하던 왕조나 제왕들의 사적을 인물별로 연대순으로 엮어 기록한 ‘본기(本紀)’ 12편, 간단한 서문과 압축적인 문장으로 해당 인물과 사건을 기록한 ‘표(表)’10편, 제도와 과학 및 민생과 치수 등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기록한 ‘서(書)’ 8편, 황제 다음의 2인자였던 봉건 제후들의 이야기를 다룬 ‘세가(世家)’ 30편, 왕과 제후들을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사적을 기록한 ‘열전(列傳) 70편’ 등 총 130편, 52만 6천 5백자로 되어 있다.
역사기술의 전범
사마천 이전에도 역사서는 서술되었다. 하지만 기전체의 통사인 <사기> 이전의 중국 사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1975년에 발견된 <운몽진간(雲夢秦簡)>에 포함된 연표에 의하면 <사기> 이전에도 연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역사서 즉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다섯 형식으로 편집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사마천이 수립한 역사 기술의 전범이자 역사서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하면서도 그 체재를 비판한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나 그를 지지하는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劉知幾)의 <사통(史通)> 조차도 사마천의 체재에 의거하여 비판하고 이를 보완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의 ‘본기’를 중국 고대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 전욱(顓頊, 高陽), 제곡(帝嚳, 高辛), 요(堯), 순(舜)의 본기를 담아 ‘오제본기’를 기술하였다. 그가 중국 역사의 시원을 이들로까지 끌어올려고 했던 것은 신화의 역사화 시도였다. 또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에 편입하였으며 그 순서도 ‘고조본기’ 앞에 둠으로써 항우가 진나라를 무너뜨린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무제 사후 유약하고 무능하며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혜제(惠帝)를 밀어내고 실질적으로 천하를 통치했던 여(치)태후를 ‘본기’에 수록했다. 이것은 사마천이 한 제국 성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그의 현실적 역사관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고는 <사기>의 체재를 원용하여 90년 뒤에 <한서>를 지으면서 <사기>의 통사체를 단대사체(斷代史體)로 바꾸었다. 그는 사마천의 파격적이고 임의적인 체재의 설정을 과감하게 부정하고 자신의 방식에 맞추어 <한서>를 서술하였다. 반고는 전통적 역사서술 방식대로 개인적 감정을 철저히 밀쳐내고 객관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반고는 <한서>에서 ‘고조본기’를 서두에 두고 ‘혜제본기’를 복원시키며 ‘항우본기’와 ‘여태후본기’를 배제하였다.
또 한나라를 배반한 제후 왕인 오왕 비(濞), 회남왕 유장(劉長)과 유안(劉晏), 형산왕 유사(劉賜) 등을 ‘열전’에서 배제하였고, 한나라 초기 공신들에 불과한 소하(蕭何), 조삼(曹參), 장량(張良),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을 ‘세가’에서 제외시켰으며, 공자(孔子), 진섭(陳涉), 외척들을 ‘세가’에서 배제시켰다. 그 결과 육조시대에는 <한서>가 <사기>보다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나라 역사가인 유시기는 이를 적극적으로 원용하여 <사통(史通)>을 편찬하였다.
열전, 고승전 기술의 모범
‘열전’에서 ‘열’이 배열 혹은 서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전’은 전기 또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열전’ 속의 개인의 전기를 개인의 역사로 확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라고 해서 주인공의 삶을 모두 기술하지는 않는다. 그는 ‘관안열전’에서 관중과 안영의 생애는 무시하고 단지 그들의 개성을 보여주는 두 일화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중니 제자열전’에서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은 후반부터 이름만 나열하고 있다.
<사기>의 ‘열전’ 70편은 격동과 파란의 시대를 살다 간 인물 70인들의 전기를 담고 있다. 제후 왕들은 천하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을 품고 일치(一治) 일란(一亂)의 전쟁을 이어갔다. 이들에게는 그들의 야심을 실현시켜 줄 실력자 그룹이 필요하였다. 이들은 통치자의 사상을 실현시킬 사상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전략가, 전략을 승리로 이끌 장수, 세 치 혀 하나로 출세하여 천하를 제 손 안에 쥐락 펴락 하였던 세객(說客) 등 다양한 인물들이다. 여기에서 사마천은 ‘열전’ 에서 해당 인물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특징을 제시하기 위해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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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의 <사기>는 그가 궁형을 당하는 고초까지 겪어가며 완성시킨 중국 최초의 통사다. 그러다 보니 <사기>는 오랫동안 두고 읽힌 고전이다. 정조는 친히 즐겨읽는 구절을 편집해 <사기영선>을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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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보필하였던 이들의 전기를 담은 ‘열전’은 <사기>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여기에는 짐승 소리를 흉내 내는 재주로 맹상군의 목숨을 구한 모수(毛遂), 진나라의 동방 진출을 막기 위해 여섯 나라의 동맹을 위한 합종책(合縱策)을 제안하여 15년간 6개국의 재상을 역임한 소진(蘇秦), 6개국의 동맹을 허물고 진나라와 횡적인 동맹을 구축하는 연횡책(連橫策)을 제시하여 진나라 중심 천하통일의 결정적 발판을 마련해낸 장의(張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전기를 집대성해 놓았다.
이처럼 사마천이 시도한 이 ‘열전’ 즉 ‘전기’ 형식은 이후 남북조 시대의 양(梁)나라에서 간행된 혜교(慧皎)의 <고승전>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 고승전은 다시 당나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송나라 찬녕(贊寧)의 <송고승전> 등으로 이어지면서 구법승과 전법승의 역사라고 할 불교사의 주요한 사서로 자리매김 되었다. 고려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역시 <사기> ‘열전’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며, 일연의 <삼국유사> ‘의해’편 속의 조목 역시 ‘열전’의 기술방식을 계승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반문
동양역사학의 전범이자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는 기전체로 쓴 중국 고대 통사이다. 여기에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보면 이들 중에서 본기와 세가와 열전, 세 편은 서로 보완하면서 처음과 끝을 하나로 꿰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열전’의 ‘화식열전’은 큰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말하고 있어 현대판 경영학 원론으로 삼을 수 있다. 또 ‘편작 창공열전’은 한의학의 역사와 임상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한의학의 명편이어서 건강을 위한 필독서로 삼을 수 있다. 이외에도 중국 고대 점술의 실상을 보여주는 ‘일자열전’과 ‘귀책열전’, 문학의 장르인 한부(韓賦)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사마상여열전’,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관계사를 보여주는 ‘조선열전’ 등도 있다.
이렇게 보면 사마천의 <사기>는 천하 경영의 왕도이자 인간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깊은 인간 이해가 담겨 있고 넓은 세계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인간학과 고전학을 아우르고 있는 인문학의 가로축인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예술로 뻗어가는 가로의 씨줄과 인문학의 세로축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으로 세워가는 세로의 날줄로 짜여진 한 편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이자 장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학덕과 덕행이 높은 승려인 고승의 전기를 담은 역대의 여러 고승전의 기술 형식은 모두 <사기>의 ‘열전’ 형식을 원용하여 변용한 것이다.
한 인물의 전기 형식이 모두 ‘열전’을 전범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사기>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되묻고 있다. ‘인생을 허비한 죄’ 즉 ‘인생을 낭비한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의식하며 나의 몸과 말과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첫댓글 _()_
이 <사기>를 <천자문>을 쓰면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