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야만
박 완 서
어떤 시인이 자기 동네를 똥차가 똥 푸러 오는 동네라고 읊은 걸 어느 잡지에서 우연히 보고 나는 당장 그 시인에게 친밀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시를 잘 푸를뿐더러 시인이라곤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그저 막연히 시인이란 고결하고, 청백해서 구질구질한 고장엔 절대로 발을 안 붙이고, 허공에 붕 떠서 살 수 있는, 우리네와는 사뭇 족속이 다른 특제의 고상한 인간인 걸로 알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 시인은 똥차가 똥 푸러 오는 동네에 살고 있다니 바로 우리 골목 같은 데 살고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아침마다 화장실이 아닌 뒷간에서 똥을 누고 주간지를 찢어서 밑을 씻을 게 아닌가. 허허, 그것 참, 나는 갑자기 시인을 어깨라도 툭툭 치며 친해질 수 있는 이웃사람처럼 느꼈다.
골목 안 식구들과는 아침 출근길에 만나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날씨가 좋다든가, 어젯밤 과음했더니 아직도 핑핑 돈다든가 하는 얘기를 두어 마디 주고받는 정도지, 통성명을 하거나 직업을 알린 바는 없다.
나는 그런 가벼운 인사를 할 때마다 혹시 저 사람이 시인일지도 모르지 않나, 시인의 눈에 내 모양이 어떻게 비칠까, 이렇게 넘겨짚으면서 괜히 격에도 안 맞는 신비한 미소까지 지으려고 애썼다. 시인이 제일 싫어하는 게 속물이라는 건, 들은 풍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똥차가 똥 푸러 오는 동네를 읊은 바로 그 시인을 우리 골목에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리 골목의 집들 중에 시인의 집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즐겁게 했던 것이다. 시인이나 시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짓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얼굴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집을 장만해온 이 골목 식구들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내 또래의 착실한 월급쟁이로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 일곱 시에서 여덟시 사이에 들어오고, 여자들은 또 하나같이 내 아내처럼 아이를 둘만 낳고, 기다란 홈웨어를 입고, 전자밥통 계니, 밍크담요 계니로 살림 장만하기를 좋아하는 모범 주부들이었다.
협동심이 강해서 똥차가 오면 일제히 똥을 치고, 똥 푸는 사람들에게 통 수효를 사기당할까봐 집집마다 나와서 지키고 똥 푸는 사람들과 싸움도 했다. 똥냄새로 얼굴을 찡그리고 비위를 상해하는 같잖은 여편네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우리 골목 속의 이런 착실한 사람들을 좋아했고, 그런 사람들이 이룩한 화목을 좋아했지만, 가끔가다 느닷없이 고지식한 월급쟁인 줄로만 알았던 앞집 김씨가 실은 소매치기여서 수갑을 차는 걸 봤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또 골목 계의 계주인 영애 엄마에게 정부가 생겨 남편한테 두들겨맞는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렸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도 자주 했다.
우리 골목 어느 집에 시인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이런 객쩍은 생각과 어느 만큼 닮은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은근히 우리 골목 규격품이 아닌 자유로운 얼굴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내 소망은 엉뚱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어느 일요일 우리 골목의 어느 집 앞길이 파헤쳐졌다. 하수도 고장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변소를 수세식으로 고친다는 거였다. 일꾼을 지휘하는 부부가 바빠서 그랬겠지만 구경 나온 골목 사람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거만하게 굴었다.
“여보, 우리만 이렇게 고치면 뭘 해요. 딴 집들은 다 그 야만적인 구식 뒷간 그대로니, 똥차가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들어와서 그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갈 게 아니냔 말예요. 아이 속상해.”
구경하는 동네 사람 다 들으라는 듯이 철이 엄마는 이맛살을 곱게 찌푸리고 자기 남편한테 이런 푸념을 했다.
원 세상에, 저 여자가 저럴 수가…… 지금 수세식 변소 공사를 하는 철이네는 바로 우리 옆집이었고, 철이 엄마는 똥차가 올 때마다 똥 푸는 사람과 제일 시비를 잘하는 극성 부인이었다.
똥 푸는 사람은 다섯 지게를 펐다는데, 철이 엄마는 네 지게를 푸는 걸 똑똑히 지켜보고 섰었는데 무슨 딴소리냐고 악다구니를 쳤고, 똥통을 왜 가득 채우지 않고 반밖에 안 채웠냐고 호령을 했고, 이렇게 갖은 시비를 다 해가며 자기네 똥을 다 치고 나서도 들어가지를 않았다. 동네 참견까지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남의 집 똥 푸는 델 기웃대면서, 똥통을 가득 채우지 말고 칠 부만 채우라고 안달을 했다. 똥통을 가득가득 채워가지고 겅정겅정 뛰어다니면 똥물이 골목에 엎질러질 테고, 그러면 그걸 누가 책임지고 닦아내느냐는 거였다.
이래놓으니 철이 엄마는 똥차가 왔다가 갈 때까지 골목에 버티고 서서 입을 한시도 안 다물고 입과 코로 똥냄새를 왕성하게 들이마셨기 때문에 나는 철이 엄마가 똥냄새에 대한 변태적인 기호라도 갖고 있는 줄로 알 지경이었다.
자연히 철이 엄마에 대한 내 인상은 좋은 게 못 됐다. 나는 그 여자의 천격스럽고, 수다스럽고, 인색한 것에 강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상이 천격스럽고 인색하다는 건 똥차가 똥 푸러, 오는 우리 골목에 사는 여인들의 공통의 표정이었고, 차이가 있다면 엷고 진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철이 엄마는 그 표정이 남보다 적나라하고 남보다 진한 데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나는 골목색이 가장 진한 철이 엄마를 통해 우리 골목의 구질구질한 생리에 대한 내 혐오감을 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철이 엄마가 지금 딴사람처럼 고상하게 굴고 있었다. 이맛살을 곱게 찌푸리고 입술을 뾰족하게 오므리고 있는 게 제법 귀부인다웠다. 다시는 똥냄새를 맡으며 똥 푸는 일에 상관할 것 같지도 않았고, 골목 여자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 것 같지도 않았다.
똥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똥누다가, 화장실에 흰 사기의자에 앉아 일보게 됐다고 세상에 사람이 단박 저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철이네는 자기네 화장실이 완전히 개통될 때까지 이삼 일만 우리집 뒷간을 같이 쓰자고 했다.
“그러믄요. 그러믄요, 아 이웃 좋다는 게 뭐겠어요. 염려 말고 쓰세요.”
아내는 괜히 굽실대기까지 하며 그러라고 했다.
아침이면 철이네 식구들이 먼저 우리 뒷간을 다녀가는데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식구마다 코를 쥐고 불쾌한 표정을 하고 나가는 건 정말 아니꼽고 더러워서 못 참아주겠는 광경이었다.
아내는 더욱 열심히 뒷간 청소를 하고 화장지까지 사다가 매달아놨다. 한 사흘 나는 뒷간에서 묵은 주간지를 읽는 그 아기자기한 재미마저 양보해야 했다. 주간지는 싱싱한 것보다 한물간 걸, 온장보다 토막낸 걸, 꼭 뒷간에서 뜯어맞춰가며 앍어야 제맛이 나는 법이다.
나는 몇 년째 변비가 있어 뒷간에 들어가면 적어도 삼십 분 이상은 좋이 걸렸고, 그 동안 뒤지로 비치해놓은 주간지를 통독하는 재미로 변비의 고통을 달래고 그것을 즐길 수조차 있었다. 철 지난 주간지를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흥분도 잘하고 잊어버리기도 잘 하나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람들은 박동명사건을 잊은 지 이미 오래다. 그 사람 권총 강도였던가, 뺑소니 운전사였던가, 아니지 참 대마초 가수였지, 이 정도다.
그런데 난 어느 날 뒷간에서 그가 누군지는 물론 그의 사랑을 받은 무수한 여인들까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망각된 스캔들을 들쑤성거려 새로운 냄새를 맡는 야비한 쾌락을 뒷간 말고 어디에서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에 주간지가 있는 한 단연 똥뒷간도 있어야 했다. 사흘 동안 아내는 뒷간을 화장실처럼 맨승맨숭하게 청소를 해내 이런 쾌락마저 빼앗았다.
다행히 사흘 만에 철이네 식구들은 우리 뒷간 출입을 않게 됐다. 드디어 철이네는 우리 골목에서 최초로 수세식 변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이 똥을 누는 모습과 장소의 차이로 인격의 차이까지 나 보인다는 걸 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됐다. 철이 엄마는 고상해졌다.
우리만 아니라 우리 골목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느끼는 모양으로 철이네를 경원했다. 똥차가 오는 날은 똥을 안 풀 수도 없고, 푸자니 철이네로 똥냄새가 끼칠 것이 미안스럽고, 그래 푸긴 푸면서도 괜히들 조마조마해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나한테 철이네에 대한 골목 안 소문을 종합해서 들려 줬다.
“여보, 철이네가 왜 별안간 화장실 공사를 한 줄 아슈? 그리고 그 집 식구들이 별안간 왜 그렇게 시큰둥 거만을 떠는지 모르시죠? 글쎄 그 집이 이제 곧 살판이 난대나봐요. 철이 아빠 육촌형님이 일본 사는데 이제 곧 다니러 나온다지 뭐유. 일본서 크게 돈을 벌어서 이제 내 나라에도 좀 투자를 해야겠다 싶어서 뭐 마땅한 사업이 없나 시찰 겸 온다는데 그 사람 아주 사람이 됐습디다. 그렇게 큰 부잔데도 호텔에 묵는 것보다 친척집에서 한국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맛보고 싶단대요. 그런데 친동기간은 다 이북에 있고 남한에서 제일 가까운 친척이 철이네라니 생각만 해봐요, 철이넨 큰 수가 났지 뭐예요.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더니 참 철이네야말로 금시발복을 하려나봐요. 이 더러운 골목도 곧 면하게 되겠죠. 이번에 변소만 고친 게 아니라 도배하고 칠하고 마루에 양탄자도 깔고 아주 새 집을 만들었습디다. 그러고도 매일매일 멀 그렇게 사들이는지. 여보, 당신네 일가붙이 중엔 누구 외국 나가 성공한 사람도 좀 없어요? 소식이 끊긴 사람이라도 한 사람쯤 없어요. 아유 시시해.”
며칠 있다 아내는 또 새로운 보고를 해왔다.
“여보, 여보, 왔대요. 왔어. 누군 누구예요. 철이네 교포 부자 친척이 드디어 왔다니까요. 부잔 다릅디다. 글쎄 애완용 개까지 데리고 왔습디다. 철이가 안고 나왔는데 그렇게 깜찍하게 예쁜 개는 생전 처음 봤다니까요. 크기는 꼭 주먹만한 게 사납긴 또 어찌나 사나운지 조금만 건드리면 암팡지게 짖으면서 대가리 털을 사자 새끼처럼 곤두세우는데 그 털이 꼭 새빨간 불꽃 같더라니까요.”
그후 나도 철이가 그 개를 안고 나온 걸 봤는데 털이 불꽃 같다는 건 심한 허풍이고, 갈색인데 갈색치곤 특이한 붉은기가 도는 밝은 갈색이었고, 크기는 주먹보다는 커서 우리나라에도 흔한 스피츠 새끼 젖 떨어질 때 크기만은 했다. 눈이 영리해 뵈는 예쁜 개 였다.
어느 날 아내는 또 철이네 얘기를 꺼냈다.
“글쎄 그 재일교포가 돈은 얼마나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물건은 아무것도 안 사왔다나봐요. 어째 그럴 수가 있어요? 돈은 돈이고 선물은 선물이지, 자기 입고 벗을 옷하고 큰 보루바꼬로 깡통이 한 상자더래요. 그래도 그 깡통만은 철이 줄 먹을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글쎄 그게 다 봇짱의 먹이라는군요.”
“봇짱의 먹이? 봇짱이 뭔데?”
“그 개 있잖아요. 그 조막만한 일본 개 이름이 봇짱이라는군요:’
“제기랄, 구들장은 아니고 봇짱이야.”
어느 날 내가 회사에서 돌아와 옷을 벗고 있는데 다섯 살 먹은 딸년이 제 동생을 데리고 노는 소리가 도무지 못 알아들을 소리였다. 돌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두 살짜리는 요새 걸음마가 한창이다. 비틀비틀 방 안을 맴돌다 누나나 엄마한테 가서 덥석 안긴다. 아내와 딸은 서로 제가 아기를 안고 싶어 두 손을 펴고 “이리 온, 이리 온. 엄마한테 오면 착하지” 또는 “아가 이리 온, 누나한테 오면 까까 주지, 요것 봐라 까까 봐라” 이래가면서 아기를 제 품에 안으려고 서로 경쟁을 하는 게 우리 집 일가 단란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딸애는 지금 동생한테 두 손을 벌리고 “이리 온” 대신 “오이데, 오이데”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가 무슨 소린지 의아해하며 서 있는 나한테 딸애는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아빠, 오스와리, 오스와리.”
“ 여보, 재가 지금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요? 갑자기 혀가 짧아졌나 웬일이야?”
“당신 그것도 못 알아들으세요? 호호, 개만도 못하셔.”
“뭐?”
나는 하마터면 이 버르장머리 없는 여편네한테 손찌검을 할 뻔했다. 아내도 좀 지나쳤다 싶었는지 고개를 움츠리고 눈웃음을 살살 치며 해해거렸다.
“당신도 참 농담 좀 했기로서니 뭘 그렇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세요. 무서워 죽겠네. 당신이야말로 정말 봇짱이에요.”
“뭐 또 그놈의 개 소리야.”
아내의 말인즉슨 ‘오이데’ 는 ‘이리 온’ , ‘오스와리’ 는 ‘앉아라’라는 일본말이라는 거였다. 그 봇짱이라는 일본서 데리고 온 개는 일본말밖에 못 알아듣는다고 교포 손님이 철이네 식구한테 제일 먼저 개하고 통할 간단한 일본말 교습부터 시켰다는 거였다.
그게 철이의 입을 통해 온 동네 아이들에게 퍼져 아이들마다 그 정도의 일본말을 자랑삼아 지껄이고 다닌다는 아내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구정물을 마신 듯한 께적지근한 기분으로 상을 받았다.
밥상을 보더니 돌쟁이가 덤벼들어 손으로 음식을 휘젓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딸년이 “이께나잇, 이께나잇(안 돼, 안 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아내까지 “이께나잇” 하면서 돌쟁이를 안아갔다.
맙소사, 나는 참았던 울화통이 터진 것처럼 속에서 무엇이 울컥 치밀면서 숟가락을 내던졌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손찌검 대신에 다섯 살 먹은 딸년을 끌어다가 엉덩짝을 까고 사정없이 찰싹찰싹 볼기를 쳤다. 영문을 모르는 딸은 불에 덴 듯이 울었다.
“다시 또 그런 소리 할래 안 할래? 다시 또 했단 봐라.”
나는 숨을 헐떡이며 자꾸자꾸 때렸다. 아내가 내 손에서 딸을 뻬앗아갈 때까지 때렸다. 연한 살에 내 손자국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세상에 이 어린 게 뭘 안다고, 알아도 그렇지, 자기 자식을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때려요. 아유, 무슨 사람이 이렇게 독할까.”
아내는 눈에 눈물이 다 글썽해가지고 딸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나도 곧 딸년을 때린 게 후회가 되면서 가슴이 딸년 볼기짝만큼이나 쓰리고 아팠다.
집 안에 별로 뜰이 없는 이 골목 아이들은 대개 골목 안에서 논다. 공일날이면 골목 안이 어찌나 시끄러운지 낮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차도 못 들어오는 좁은 골목이기 때문에 시끄러울 뿐 위험하지는 않으니까 어른들도 골목 안이 무슨 대운동장이나 되는 것처럼 나가 놀아라, 나가 놀아라, 하며 아이들을 집에서 내쫓는 것만 수로 안다.
모처럼의 공일날 빈둥빈둥 낮잠을 청하려니 골목 안의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귀에 거슬려 죽겠는데 점점 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슬인지 딱지를 셈하는 모양인데, “하나, 둘” 하고 세지를 않고 “이찌, 니, 상” 하는가 하면, 계집애들이 뭐가 수틀렸는지 저희끼리 싸우는데, 아이들답지 않은 걸찍한 쌍소리 끝에 꼭 “고노야로, 바가야로” 소리를 붙였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려놔도 분수가 있지. 어디서 굴러온 똥개 한 마리가 우리 골목 예쁜 아이들 말을 저 모양으로 망쳐 놨을까.
아이들은 철이나 없어서 그렇다고나 치자. 내 아내까지 그 장단에 잘 놀아나고 있었다. 내가 골목 안 아이들의 일본말을 들으며 하도 분통이 터져서
“복이 아직 멀었나? 저 왜놈의 똥개 누가 잡아다 개장국이라도 끓였으면 맛 좋겠다.”
했더니 아내는 질겁을 했다.
“여보, 봇짱이 왜 똥개예요, 일본 걘데. 봇짱이 얼마나 똑똑한 지 당신 알기나 알아요. 아무리 고깃국을 끓여줘도 여기 음식은 입에도 안 대고 가지고 온 일본 깡통 음식만 꼭 먹는다지 뭐예요. 말도 어쩌면 그렇게 일본말은 잘 알아듣고 고대로 하는지, 철이 엄만 봇짱 어르느라고 이젠 웬만한 일본말은 다 배웠겠습디다.”
참 개가 다 웃는다더니 우리나라 순종 똥개들이 들으면 웃기는커녕 울어도 시원치 않을 일이었다. 어디 똥개뿐일까. 나도 웃어도 울어도 풀릴 것 같잖은 고약한 기분이었다.
철이 엄마와 아빠는 점점 더 거만해지고 고상해져서 이제 완전히 이 골목 사람이 아니었다. 이 골목 여귀의 똥차가 대기하던 자리엔 매일 아침나절이면 전세낸 고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우아한 양장을 하고 봇짱을 품에 안은 철이 엄마와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반쯤 가린 쥐새끼처럼 작고 날렵하게 생긴 재일교포 신사를 태우고 어디론지 미끄러지듯이 사라졌다. 아내 말에 의하면 매일 관광도 다니고 쇼핑도 다닌다는 거였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아내가 침을 흘리며 부러워하는 것까지는 그대로 참아주겠는데, 철이 엄마 품에 안긴 봇짱을 쓰다듬으며 “봇짱 오하요, 봇짱 오하요” 하며 해해대는 건 정말이지 눈깔이 곤두서지 않고는 못 봐줄 광경이었다.
사람도 외국여행을 하면 그 나라 말을 인사말이라도 배우려고 애쓰는 법이거늘 개란 놈이 이 무슨 오만일까.
나는 그놈의 봇짱인지 똥갠지의 아가리를 벌리고 된장국에 만 보리밥덩이를 처넣어주면서 우리나라의 풍부한 욕을 총동원해서 퍼부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몸을 떨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내 변비가 그놈의 봇짱이 오고 나서 부쩍 더 심해진 거였다. 아침에 변소에 가 앉았으면 철이 엄마의 개 어르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이 골목의 집들은 그렇게 염치없이 서로 붙어 있었다.
“사아, 봇짱, 운도오 시마쇼오네, 이찌, 니, 상. 이찌, 니, 상(자아, 아가야, 운동하자,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개에게 어떻게 무슨 짓을 시키는지, 똥지게를 가지고 흥정을 할 때의 철이 엄마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찌, 니, 상’ 을 한없이 되풀이했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의 배설구는 튼튼한 마개로 밀봉이라도 당한 것처럼 완강하게 굳어지며, 배설물은 방향을 잃고 거꾸로 치솟으려고 했다. 이건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다. 이런 고통이 극에 달해, 내일쯤 아마 나는 뒷간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입으로 배설을 할 수밖에 없으려니 싶은 어느 무덥고 절망적인 날, 아내가 실로 시원하고도 희망적인 소식으로 나를 구원했다.
“여보, 철이네 그 교포 손님이 떠났대요. 글쎄 그런 얌체가 어디 있어요. 그 동안 실컷 얻어먹고 실컷 구경 다니고, 무슨 사업을 벌일 듯 벌일 듯 철이 아빠 감질만 내놓고 철이 엄마 뱃속에 바람만 넣어놓고는 쓰다 달다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지 뭐예요. 그 동안 철이 엄마 내외가 그 교포 친척인지 날도둑놈인지한테 들인 돈이 말도 못 한대요. 집 치장하랴, 관광시키랴, 여기 사업가들하고 교제하는 돈까지 다 철이네서 댔다는군요. 회사 하나 차리면 사장은 자네가 해줘야지 누가 해주겠나, 글쎄 이렇게 그 교포가 능청을 떨었다니 누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어요. 그래서 아까운 줄 모르고 처넣은 돈이 그게 다 제 돈도 아니고 빚이었다니, 아유 별 미친 여편네도 다 있지.”
“여보, 여보, 이제 그 남의 집 흉은 고만 좀 보고 그 교포 손님 봇짱인지 똥갠지는 데리고 갔겠지?”
내가 제일 궁금한 건 그거였다. 그러나 아내의 대답은 날 실망시켰다.
“호호호, 글쎄 구두주걱 하나 손톱깎이 하나 흘리지 않고 싹싹 쓸어가면서 봇짱은 남기고 갔다지 뭐유. 아주머니가 하도 사랑하시니 인정상 어떻게 떼어갈 수가 있냐더래요:’
“뭐야? 봇짱 하나는 남기고 떠났다구?”
내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후 다시는 뒷간에서 철이 엄마의 ‘이찌, 니, 상’ 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 해도 살 것 같았다.
철이네선 그후 며칠 인기척이라곤 안 들려 사람 사는 집 같지도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뒷간에서 변비의 고통을 주간지의 삼류 연예인의 침실 기사로 달래고 있는데 느닷없이 철이 엄마의 찢어지는 듯한 악다구니 소리가 들리고 봇짱의 깨갱깨갱 하는 처량한 비명이 들렸다.
“이 육시랄 놈의 개야, 이 우라질 놈의 개새끼야, 처먹어라, 처먹어. 어디 네놈이 언제까지 안 처먹고 견디나 두고 보자……”
철이 엄마의 욕설은 구정물을 가두었던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거침없이 솰솰솰 흘렀다. 고무신짝 같은 것으로 땅바닥과 봇짱의 뺨따귀를 번갈아가며 때리는지 찰싹찰싹하는 소리도 섞여 들렸다. 아마 지금 철이 엄마는 된장에 만 보리밥을 개 아가리에 처넣으려고 혈안이 돼 있을 것이다. 개는 눈깔을 뒤집으면서도 한사코 보리밥을 거부하리라. 둘은 지금 결사적으로 대결하고 있다. 철이 엄마가 이겨야 한다. 나는 철이 엄마 편이다. ‘철이 엄마 이겨라, 짝짝. 철이 엄마 이겨라, 짝짝.’ 나는 속으로 열심히 철이 엄마를 응원했다.
“이 육시랄 놈의 개, 이 우라질 놈의 개,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
실로 얼마 만에 듣는 철이 엄마의 싱싱한 육성인가. 똥 푸는 사람과 똥지게 수효를 갖고 다틀 때의 그 생기발랄한 철이 엄마의 목소리 였다.
내 가슴에서 오래 묵은 체증 같은 게 시원스럽게 아랫도리로 몰리더니, 뭉클하고 시원한 쾌변을 봤다.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철이 엄마의 욕설과 개의 비명은 자주자주 들렸다. 아마 아직도 그 조그만 왜구를 다스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고 꼭 그녀는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란 배워 흉내도 잘 내지만, 곧 잊기도 잘해 골목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오이데’ ‘오스와리’ ‘이찌, 니, 상’ 을 들을 수 없게 됐다.
철이네 집에서 철이 엄마의 욕설과 개의 비명이 너무 크게 담을 넘어오는 날이면 아내는 나에게 철이 엄마 흉을 보고 싶어했다.
“저 여자가 저럴 만하긴 해요. 그 동안에 진 빚에 몰려 요새 사는 게 말이 아니라거든요. 그런데 여보, 사람이 아주 죽으란 법은 없습디다. 그 봇짱 있잖우. 그게 글쎄 일본 개도 아니고 서양 무슨 순종 개래요. 지금 내다팔아도 당장 이십만원을 받을 수 있대요. 지금 그 집 형편에 이십만원이면 어디예요. 빨리 팔아서돈 마련할 생각은 안 하고 허구한 날 저렇게 두들겨패니, 저러다 죽으면 이십만원이 그냥 날아가는 거 아녜요? 아이 듣기 싫어. 동물을 저렇게 학대하다니, 야만적이야.”
철이 엄마는 변소를 수세식으로 고칠 때, 재래식 똥뒷간을 가진 우리들을 야만적이라고 했었다. 내 아내는 지금 동물 애호의 정신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철이 엄마를 야만적이란다.
아내가 쓰는 ‘야만적’ 이란 말이 괜히 나를 웃긴다. 사람들은 어째서 수세식 변소나 동물 애호 정신으로 자기가 야만적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놓으니 야만적이 아니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알 리가 없고, 야만인이 정글에 살지 않고 도시에서 리본 맨 개를 안고 활보를 하고, 몸에 풀잎을 두르지 않고 일류 재단사가 재단한 양복을 입고 수세식 변소에서 뒤를 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커피숍에 간다.
철이 엄마는 아직도 욕을 하고 봇짱을 때린다.
나는 그녀가 쉬이 개를 팔지는 않을 것을 안다. 그녀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건 돈보다 분풀이의 대상일 것이다. 그녀의 모진 채찍질에 아프게 신음할 가학의 대상일 것이다.
그런 짓은 아내 말짝으로 야만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학의 대상엔 봇짱뿐 아니라 그녀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 깨갱깨갱 하는 경망스럽고 드높은 개의 비명 밑에 가라앉은 그녀 자신의 둔중한 신음 소리를 나만은 알아들을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봇짱은 처먹으라는 우리말을 알아듣게 될 테고, 된장국에 만 보리밥의 진미를 알게 될 테고, 철이 엄마 또한 한 때의 허황한 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리라.
그녀의 요즈음의 봇짱에 대한 가학행위가 이런 자유로워지려는 몸부림의 표현이라면, 그때 가서 아마 가학행위도 끝날 것이다. 개를 십만원에 팔든 이십만원에 팔든, 그때 가서 팔아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요새 봇짱의 비명과 철이 엄마의 싱싱한 욕설 덕분에 변비로부터 놓여나 쾌변을 즐기지만, 철이 엄마가 하루속히 봇짱을 다스릴 수 있기를,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기를, 그래서 철이네가 조용해질 날을 기다린다.
나 역시 내가 변비로부터 완전히 놓여났나, 임시로 놓여났나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