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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시 122:1-9절
제 목 : 평안과 형통함이 있는 삶
일 시 : 2022. 12. 4.
시편 122:1-9/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평안과 형통은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바라는 가장 큰 소원입니다. 인사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는 곧 샬롬(평안,안녕)입니다. 중국사람들의 인사에도 일루평안(잘 다녀와 조심해서 다녀와)라는 인사와 일루평안 일루순펑(길 조심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기를 바래)이라는 인사가 있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Good moning(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이라는 인사를 합니다. 일종의 평안과 안녕을 빌거나 물어 보는 인사를 합니다.
또는 God bless you(신의 가호가 있기를, 신의 축복이 있기를)라는 말을 습관처럼 합니다. 이 인사는 중세시대 유럽에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누가 기침을 하면 증상이 흑사병과 유사했기 때문에 곧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또는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만사형통]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잘 이루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요즘도 어떤 집 대문에는 (입춘대길 만사형통)이라는 글씨를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미신입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볼 수 있습니다.
평안이란 샬롬이라고 하는데 안전한, 즉(상징적으로)잘 있는, 행복한, (추상명사로)안녕, 즉 건강, 번창, 평안, 평화로운, 평화롭게, 번영하다(번창, 번영하는)이라는 뜻입니다. 평안이란 안정하고 평화롭다는 뜻으로 전쟁과 다툼과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형통이란 솨바르 라고 하는데 안전(진정한, 또는 거짓의), -풍부함, 평화(롭게), 번영, 조용함 이라는 뜻이며, 형통하다란 솨라 라고 하는데 잔잔하다, 즉 안전하거나 성공적인, -행복하다, 번창하다, 안전하다라는 뜻입니다. 형통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평안(샬롬)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형통이 필요하며, 모든 사람들이 평안과 형통을 염원합니다. 왜냐하면 평안과 형통은 천국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가장 큰 특징 세 가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의는 불의와 악이 없는 의로움을 의미하며, 평강은 평안과 형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희락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평안과 형통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영원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문제는 평안과 형통을 바라고 소원하지만 그것을 받아 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과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그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시는 다윗의 시로써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기쁨에 대해서(1-5절까지) 기록하였고, 2)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는(6-9절까지) 내용입니다.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사람 다윗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다윗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여호와의 집(성전)에 올라가자 라고 말할 때 가장 기쁘다고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면에서 그러했습니다. 1) 첫 번째는 다윗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찾았기 때문이며, 2) 다윗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13년 동안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면서 날마다 생사를 오가는 위기와 고통을 당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지키시고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오랜 고난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어느 장소로 가자고 말할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합니까? 밥 먹으러 호텔이나 뷔페식당으로 가자 라고 말하면 가장 기쁩니까? 아니면 제주도나 유명한 관광지로 여행을 가자고 말하면 가장 기쁩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장소로 가자고 말할 때 가장 기쁩니까? 당연히 다윗처럼 예배당에 가자 라고 할 때가 가장 기쁘시겠죠? 그렇습니까? 다윗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여호와의 집, 즉 성전에 올라가자 라고 말할 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처럼 성도의 참된 기쁨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이 계신 성전에서 찾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참된 기쁨이 없어야 합니다. 시16: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가까이 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출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발이라는 뜻으로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술집에 다니고 호텔에 다니고 관광지를 밟는 발이 아니라 성전을 밟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섰도다 라는 단어는 분사+완료형의 복합시제로 여전히 서 있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발이 항상 예루살렘 성문 안에 있다는 뜻으로 그곳을 마치 자신의 집을 드나들듯이 자주 다니고 그곳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런 표현입니다. 시84:1-2,10-12/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세상 어떤 건물이나 장소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잘 짜여진 성읍이란 계획된 도시라는 뜻입니다. 도시를 건설할 때 오래 동안 연구를 하고 계획을 세워서 세워진 도시가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어오고 있습니다. 1) 이 성이 오늘날의 도시와 같이 그 건물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성이라는 뜻이며, 2) 이 성은 안정감있게 잘 지어진 성이라는 뜻이며, 3) 이 표현은 그 성이 포로시대 이후 재건되었던 사실을(느 4:6참조)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해석이 가장 적합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민족이요, 과거부터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과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성이 인구밀도가 높고 그 결과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도시와 같이 건설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그만큼 좋아하고 선호하는 도시라는 뜻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나라는 대도시중심으로 몰려들고 대도시를 선호합니다. 우리 나라도 서울을 가장 좋아합니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지파들이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며 곧 여호와의 지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례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지켜 왔던 삼대절기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리로 올라가는 도다 라고 했는데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던 약속과 규례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례여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선하신 은혜를 상기하였고 동시에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였습니다. 즉, 시편 기자는 이 구절과 다음 구절에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이며, 여호와의 처소로서 1년에 3번 큰 절기 때 그 곳으로 모든 거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일 뿐 아니라 다윗 왕가의 통치가 이루어졌던 통치의 중심지였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을 각각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보좌입니다. 그런데 그 보좌는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은 시온 성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보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판단의 보좌라고 했는데 보좌란 공의를 집행하는 자리를 뜻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보좌는 왕의 좌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심판관과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뜻합니다. 즉 예루살렘이 모든 백성에게 공정한 법의 혜택을 베풀어 주던 공의의 도시였다는 사실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다시 한번 그곳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의 중심지였다는 뜻입니다.
다윗 집의 보좌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법을 집행하였던 다윗 가문이 그 같은 일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재판관들은 공의의 재판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또 공의의 재판이 시행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셈이 되었습니다(사 9:7; 11:3-5). 한편 이 직무(여호와의 공의로운 재판)를 위임받지 않았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도 그런 재판과 통치를 하고 싶어했으며, 결국에는 마귀의 유혹과 충동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시는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을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와 재판을 반역하는 것으로 결국 압살롬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진다는 뜻입니다.
6. 드디어 평안과 형통함을 얻는 비결이 소개됩니다.
6-8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1) 먼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예루솰람)속에도 샬롬과 동일 어원인 솰람이 들어 있습니다. 강조용법이며, 일종의 언어유희(play of words)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는 평안, 샬롬은 예루살렘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성이며 동시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도성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은 모세가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천국의 지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하여 전 세계를 다스리시고 경배를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게 됩니다. 히11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은 이 땅에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사모하지 않았고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도성(천국)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본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위에 있는 어머니입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지고 태어난 고향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천국 즉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디자인하시고 계획하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2)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먼저 네 성 안에 라고 했는데 문자적인 뜻은 성벽들 안에는 라는 뜻으로 성벽들이란 많은 숫자의 군사들이 들어 있는 요새, 특히 성벽을 따라 그 밑을 빙 돌아가며 낮게 판 참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결국 여기서 성벽들이란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이 땅에 있는 가장 견고한 요새라는 것을 강조한 용어입니다. 어떤 적들의 공격으로부터도 지킬 수 있는 견고한 방어적 요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영적으로도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천상적인 의미의 요새라는 뜻입니다.
네 성 안에는 라고 했는데 그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고 통치하는 장소로서 궁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예루살렘)에는 형통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천년왕국을 비롯해서 주님이 다스리는 집이나 도시나 나라나 개인에게는 평안이 있고 형통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도시와 나라와 마을은 곧 아무리 화려하고 부요하고 번성하여도 그 장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장소입니다. 그곳을 탐내거나 좋아하거나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조카 롯을 같이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 두 가정은 크게 번성했습니다. 동시에 소와 양과 짐승의 떼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즉 예루살렘은 협소해졌습니다. 문제는 양을 치는 종들이 서로 자신의 짐승에게 좋은 풀을 먹이려고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불러서 우리가 머물러 있는 장소(예루살렘이)협소하니 우리 서로 헤어져야 되겠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제안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조카 롯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너무나 광활하고 풍부하고 기름진 땅으로 보여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택하여 그곳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롯이 보기에 척박하게 보였던 지금의 예루살렘 땅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의 땅인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롯은 자신의 눈에 보기에는 애굽 같고 기름지고 아름답게 보였던 멸망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면서 일구었던 집과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아내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장소는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곳은 멸망의 땅이며 바벨론입니다.
3)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형제와 친구들에게 예루살렘의 비밀을 말합니다.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네 가운데란 곧 예루살렘성안에 라는 뜻입니다. 왜 예루살렘 성안에는 평안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 안에는 지성소가 있으며 지성소 안에는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대죄악을 덮고 있는 속죄소 위에는 어린양의 피가 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죽으실 어린 양 예수님이 속죄소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장소와 그 장소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는 예수님의 피가 뿌려진 곳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화(평)목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다는 것은 곧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근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영원한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안에 계시기 때문에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7.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곧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인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복은 예루살렘 때문이며 예수님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심령,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인생, 예수님이 없는 집,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도시와 나라는 아무리 융성하고 번성해도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도시와 나라와 모임에게는 사탄을 섬기고 숭배하고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동성애와 같은 죄악을 행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거기에 복이 임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예루살렘이 있으며, 예루살렘을 구합니까?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님을 사모하고 구합니까? 그렇다면 거기에는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고 복이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과 장소와 도시와 나라에는 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평안을 구하십시오. 즉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렇게 하심으로 참된 평안과 형통이 영원히 지속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 홀로 앉으십시오
1. 시122:1-9절을 읽고 자신이 평안과 형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는지 생각해봅시다.
▨ 함께 나누십시오.
1.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안과 형통을 추구하고 바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2. 다윗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디로 가자라고 말할 때 기뻐하였습니까?
3. 내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라는 말씀의 뜻은?
4. 심판의 보좌를 다윗집의 보좌라고 표현한 이유는?
5.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6. 예루살렘 안에 평안과 형통함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7. 왜 예루살렘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까?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1.평안과 형통이 천국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2.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3.예루살렘 성전을 출입하는것 곧 성전에 들어가는것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4.다윗의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보좌라는 뜻입니다
5.다윗의 성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도성을 상징하며 모세가 보았던 새하늘과 새땅 곧 천국을 상징하며 천국의 지부로서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예수님만을 경배하는곳이기 때문입니다
6.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거하시며 통치하이고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7.예루살렘 성안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안에는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안에는 법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대 죄악을 덮고 있는 속죄소위에는 어린양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죽으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속죄소안에 계시고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있어 예수님의 피로 죄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