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상단 시작(2015. 1. 30.(금) 11:00 ~ )
안 선배님이 상단을 출발하자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다. 가방에 꼬깃꼬깃 챙겨놓은 육포를 꺼내서 경필 선배와 나눠먹으며 주위 풍경을 둘러보았다. 발밑으로는 하얀 눈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상단 좌우로는 웅장한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간혹 얼음이 얼지 않은 바위를 따라 눈가루가 바람을 타고 휘감아 내려오는 걸 홀린 듯이 바라보기도 하고 아발라코프가 되어있는 얼음을 미심쩍어 하면서 등반을 대기하며 있었다.
안 선배님이 3분의 2지점에 도착했다는 무전을 듣고 슬슬 출발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자일 매듭이 있는 5 미터까지는 베이직을 걸고 올라가고 그 이후부터는 ATC에 줄을 걸고 빌레이로 올라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말등으로 가면 처음부터 빌레이로 갈 수 있었지만, 낯선 곳에 혼자 남아 있는 게 싫어 베이직을 걸고 동굴을 나와 바깥벽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했다. 다시 벽에 붙자 슬슬 고도감에 온 몸이 굳기 시작했고, N바디는 또 금세 잊어버렸다. 바짝 긴장한 채 5미터에 다다랐고 ATC(하강기)에 자일을 걸면 되겠지라고 했던 생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경사가 90도의 직벽이어서 손을 놓게 되면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고 또 양손은 바일이 매달려 있어서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두 발을 안정적으로 디딜만한 장소가 아니였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위를 살펴보니 움푹 들어가 있는 작은 테라스가 보여서 무작정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막상 보니 생각과는 또 다른 상황 이었다. 아까보다 더 올라오는 바람에 이미 자일은 내 발쪽에 길게 늘어져있고, 고도감에 온 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어서 점점 팔 힘이 빠지고 있었다. 만약 바일을 놓치거나 발을 헛디디면 추락을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밑에서는 무작정 올라가는 내가 걱정되셨는지 경필 선배의 다그침이 들렸고, 난 나대로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미쳐버리기 일부직전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큰마음을 먹고 힘겹게 머리 위로 바일을 찍고 확보기를 걸고 살짝 기댔는데, 툭하고 바일이 빠져버렸다. 그 순간 난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고 경필 선배한테 울부짖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포 질려 흐느끼면서 어떻게 ATC에 줄을 끼웠고 경필 선배에게 위에다 빨리 자일을 당기라는 무전을 하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갑자기 자일이 다시 줄줄 내려오기 시작했다. 또 다시 한번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땐 선배라는 것도 잊고 진심으로 화를 내며 빨리 줄 당기라고 소리를 질렀다.
<상단에서 내려다 본 중단>
나중에 알고 보니 위에서 계시던 선생님이 진행이 하도 안 되자 상황 파악 차 직접 내려오신 거였고, 하필 내가 매달려 있는 줄을 타고 내려오시는 바람에 자일이 늘어진 거였다. 어설픈 바일 확보와 줄 바꿔 끼기로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상태로 겨우 벽에 붙어있었는데 순간 저 위에서 빨간 잠바가 얼핏 보였다. 선생님이 오셨다는 것을 안 순간 안도감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힘이 빠져 들기도 힘들었던 팔을 들어 올려 바일로 얼음을 힘껏 찍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면서 선생님이 계신 곳까지 가려고 죽을 힘을 다해서 올라갔다. 발을 떼기 위해서 '괜찮아, 죽지 않아'라고 몇 번이고 속으로 대뇌였고, 위에 계신 선생님만 생각하면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가 가까워지자 가지고 계신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주셨다. 예전 같으면 여유 있는 선생님 모습에 약이 바짝 올랐지만, 그 때는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든든했었다.
<울면서 올라가고 있는 모습>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선생님 옆에서 한숨을 돌리고 남은 길을 가기 위해 벽에 붙자 끝도 보이지 않는 상단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이 때부터는 거짓말 하나보태지 않고 정상에 오를 때까지 바일을 찍을 때마다 발을 뗄 때마다 흐느껴 울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와 점점 지쳐가는 체력의 한계 앞에서 포기할 수도 없고 계속 가야한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고 거대한 얼음벽에서 혼자만 있는 듯 한 착각에 계속 눈물이 났다. 한편으로 이까짓 것도 못 이겨서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한편,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 거라는 왠지 모를 서러움도 밀려왔다. 오직 토왕을 오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죽을 것 같은 등반이 계속 이어지다 서서히 완만한 경사의 벽이 들어났다.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과 빨리 올라가서 쉬고 싶다는 간절함,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선생님과 선배들을 생각하자 힘이 나기 시작했다. 한발 한발 오르고 또 오르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다시 눈물이 왈칵 나오려고 했다. 정상에 다다라 고개를 든 순간 내비치는 강렬한 태양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 빌레이를 보는 민구 선배, 저 안 쪽에서 따뜻한 스프를 끓여놓고 기다리시는 안 선배님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토왕폭 정상 도착 시각 2시 20분. 등반 시작 7시간 반 만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 당시에는 성취감보다는 선생님과 선배들을 보고 밀려오는 안도감이 더 컸고, 자일을 풀자마자 따뜻한 스프를 허겁지겁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뒤쪽으로는 제법 넓은 눈밭이 있었고 앞으로는 저 멀리 설악산 전경과 속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경필선배가 등반을 마치자마자 단체 사진을 찍고 서둘러서 하강준비를 했다. 사실 하강도 만만치 않게 힘들고 위험했지만, 빙폭을 오르면서 고생했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상반은 두 번, 중단은 걸어서 하단은 한 번의 하강으로 대단원의 토왕성빙폭 등반을 마쳤다.
하단 시작 부분에 내려오니 선생님 예전 등반 동료분이 응원을 오셨고, 그 분이 가지고 오셨던 고량주는 완전 꿀맛이었다.
짐을 꾸려서 하산을 시작할 때는 5시 반쯤이었고, 소공원 도착 시간은 7시 반 쯤이었다. 하산 때도 혹시나 또 구를까 싶어서 신경을 곤두새우고 조심히 내려갔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 다리를 접질려 넘어지신 거 외에는 큰 사고 없이 하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
5. 후기를 마치며
내가 실내 암장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바위를 하게 된 것도, 빙벽을 하게 된 것도 하고 싶은 간절함보다는 어쩌다보니였다. 그렇다고 바위나 빙벽을 할 때 마다 엄청난 성취감이나 짜릿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계속 산에 가게 되고, 주말을 기다리게 될까?
수직으로 서 있는 벽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며 올라갈 때마다 속으로‘떨어지기 싫다. 죽기 싫다. 살고 싶다’라고 간절하게 바란다.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은 벽에 붙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격렬한 감정이다. 이게 바로 날 바위에 붙게 하고 얼음벽을 오르게 하는 것 같다.
토왕빙폭을 끝내고 정상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께는 다시는 안온다고 오겠다는 사람도 말리겠다고 했지만, 후기를 쓰는 지금은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한 번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겁 많고 저질 체력 빙벽 초보 여자들을 위한 TIP
1. 소공원에서 Y계곡까지는 엄~청 멀고 험하기 때문에 최대한 가방을 가볍게 하고 출발하세요. 겨울산 워킹은 보통 때보다 체력 소모가 3배 이상은 됨.
2. 눈이 쌓여 있다면 꼭! 아이젠과 스틱을 준비하세요. 안하고 오르다가 목적지 도착하기 전에 요단강 건널 수 있음.
3. 장갑은 넉넉히 챙기세요. 대략 어프로치 때 1개, 하단 등반 때 1개, 상단 등반 때 1개, 비상용 여벌.
4. 등반 중간에는 생각보다 먹을 게 땡기지 않아요. 등반 시에는 가볍고 쉽게 먹을 수 있는 간식 위주로 챙길 것.
5. 선생님 지시 사항에 귀를 잘 기울여 들으세요. 무전을 통해 전달하시 때문에 옆에 사람이 놓지더라도 잘 듣고 전달해줘야 함.
첫댓글 2014년 봄에 주말반에 있던 정문에게 산에 가보니 않겠냐고 물었다. 정문은 바위를 시작했고 1년이 채 되지않아 토왕을 했다. 토왕으로 떠나던 날 밤에 기특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해서 엉덩이 몇번 토닥거려보냈는데... 예상보다 더 큰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극복했네. 정문으로 인해 내가 뿌듯하다. ㅎㅎ
이제야 제대로 토왕등반이 끝난 기분이에요ㅎㅎ 매번 당시는 죽을 거 같은데 지나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또 가게 되네요^^
고 생 했 어 !
저 이번 주엔 쉬어도 되죠?ㅎㅎ
@임정문 헉..
남들 다 가는거보면 하고싶을걸.
@토탈리머 아마도 그렇겠죠ㅎㅎ
ㅋ눈물겨운 후기 잘 봤다.
베이직으로 가다가 하강기로 바꾸는 부분에서 줄은 늘어지고 교체는 안되고...ㅍㅎㅎ
그 상황이 겁나게 실감 난다.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우리 클럽에서 토왕정상에 가 본 사람이 총 8명이 됐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토왕정상에 가 본 사람과 못 가 본 사람"ㅎㅎ
축하한다!!!
환장하는 상황이었죠ㅎㅎ 감사해요 선배~^^
내가. 다. 눈물이 울컥하네요 ..
잘읽었어요. 정문씨. !
축하드리구요. 완등 !
실력도 안되는데 따라 나섰다가 좋은 경험하고 왔어요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후기였습니다 ㅎㅎ
응~ 고마워 직접 갔다오면 더 감동적일 거야ㅎㅎ
정문!! 고생했어!!
내가 먼저 올라갔으면 어찌됬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리에 맴도네?!
화를 내는 정문의 모습을 보게될줄이야 ㅠㅠ 근데 나한테 화낸거 맞어? 난 무전으로 자일 당기라고 전달을 정확하게 했는데 ㅠㅠ
선배가 먼저 갔으면 문제없이 잘 가셨겠죠 그 땐 너무 무서워서 그만..진심이 아니였답니다ㅎㅎ
못다한 이야기는 토요일 저녁에 하자고~~~!!!
으~~~
정문이 고생했네^^
실감나는 후기 잘봤고 못가본 사람은 언제가보나 ㅎㅎㅡ " 멋지다"
담에는 꼭 다녀오세요 저도 경필 선배하고 같이 기다릴게요^^
내년에 능무선배님하고 다녀오세요!! 제가 마중 나갈게요!!
정문 필력이 대단하네.. 토왕빙폭 완등 축하해.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냥 주절주절 썼어요 부끄럽네요ㅎㅎ
읽다보니 제가 다 찡하네요
웬지 눈물이 날 거 같기도 하고(내가 왜?)
눈물겨운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감동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담에 꼭 가는 거다?ㅎㅎ
감동적이야~!! 자랑스럽다 정문!! 팁은 잘챙길거임 고마워~ㅇ
부족한 글인데 읽어줘서 고마워요 언니 등반 못지않게 창작의 고통도 심했어요ㅎㅎ
누나 바위 시즌에도 계속 연재 부탁해요
노력해볼게ㅎㅎ
토왕폭을 등반하며 자책, 공포, 처절함, 안도, 서러움이 차례로 또는 동시에 너를 후려치고 지나갔군..
근데 또 가고 싶냐? ㅋㅋㅋ 너 완전 빙벽 전도사 됐다. ㅎㅎㅎ
나만 알기엔 너~~무 아까워서 다들 느껴봤으면 싶어서ㅎㅎ 힘든 거 벌써 다 잊어버렸어 웃으면서 단체 사진 찍은 것만 생각나ㅎㅎ 언니~ 담엔 꼭 가요 밑에서 따땃한 정종 대기해놓고 기다릴게^^
대단하다.
늘 지금의 마음으로 산다면 힘이나겠지. 완등 축하해.
네 열심히 살게요 감사해요 선배~^^ 참~ 근데 괜찮은 남자는 언제쯤..??ㅎㅎㅎ
@임정문 어디 왠만한 남자가 되겠어
토왕 완등한 여자한테. . . ㅎㅎ
나도 쎈놈으로 찾고있으니 가까운 주위도 둘러보삼.
정문양. 글 잘 읽었어. 맘속의 갈등이 교차하는듯..재미있네
등반 동안 만감이 교차되는 특이한 경험이었어요ㅎㅎ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구! 나는 겁나서 못가겠다.
후기잘봤어 ㅎ
에이~ 왜그러세요 선배님 가시면 토왕을 날라다니실 거예요ㅎㅎ
가슴이 찡하네 수고했다는 말밖에 ^^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