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스트
포스트구조주의가 구조주의와 다른 점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사물과 사건의 표면적 현상 내부에 자리한 통일적인 심층적 구조의 ‘추상적 구조나 체계를 불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언어가 지닌 사회 문화적 역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이 언어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강조한 반면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합리적 이성의 도구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놀이에 가까운 유희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구조주의자들이 ‘로고스’ 중심적 언어의 이성적 감옥에 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미 그 감옥을 벗어난 자들이라고 비유되기도 합니다.
플라톤 철학 이래 일반적으로 서양 철학은 언어를 로고스적 기능으로 보고, 언어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발견 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 온 반면에,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로고스(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죠.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추상적 체계나 총체성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구조주의자들이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처럼 사회학적 관점에서 사회를 분석할 때, 남녀나 지배 피지배라는 이항대립의 구조로 보게 될 때는 필연적으로 우열과 차등이 형성 되게 마련이므로, 이를 수긍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데리다와 같은 학자들은 사회를 이항대립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보다는 차라리 어느 한 쪽도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요.
그러나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안에도 학자에 따라 약간씩 입장이 다르기도 합니다. 라깡과 같은 이는 사회문화의 구조 속에서 공시(共時)적인 연구를 통해 심리학의 구조를 캐고자 하는 보편론 자가 있는가하면, 푸코와 데리다와 같이 공시성 보다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상대주의자가 있습니다. 푸코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 지식 등을 구조주의적으로 분석하는데 치중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텍스트 외부보다는 텍스트 내적인 것을 구조주의적으로 분석하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철학과 사회과학을 분석하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폭넓은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구성하는 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포스트구조주의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적 사조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전 지구적 문화 현상으로서, 공시적 시대성과 통시적 역사성을 모두 지니는 광의의 개념이지요. 이제 앞에서 거론된 몇몇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상을 각각 조금씩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
<성(性)의 역사>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한 푸코는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국내외의 사회문제에 뛰어들어, 대중매체를 통해 각종 시위를 주도하거나 현장에 직접 가담하는 등 이론을 실천화하려는 사회 실천가이기도 했지요. 동성애로 인해 고민하여 자살을 시도하다가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면서 그는 정신과 광기(狂氣)의 심리 분석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술 속에서 광기, 범죄, 동성애 같은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하는 듯한 ‘문화 변동’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푸코는 <광기(狂氣)의 역사>라는 책에서 “인간이 미치는 것도 필연적이지만, 미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광기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신병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알코올 중독자가 어느 정도 치수부터 중독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만큼, 정신의 문제를 두고도 누가 과연 미친것이고 누가 미치지 않았는지를 판가름한다는 규정 자체가 전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를 감옥에 가두는 경우도 나머지 다수가 정상임을 보여주기 위한 광기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푸코에 따르면, 광기는 근대 이성주의의 산물로서 ‘광기’를 별난 것으로 몰아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을 확립했다는 것입니다. 정신 병리학은 이것에 입각해서 정신병을 ‘발명했다’고 비판합니다. 그 결과 ‘광기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문명의 사실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광기의 역사’는 광기를 규정하고 핍박하는 문화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18세기에 발전한 정신 병리학적 용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폭력적인 독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광기는 여기서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정신병리학 앞에 무참히 침묵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푸코는 강제된 침묵을 깨뜨려 그동안 억압된 광인들의 소리를 대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어 발행 된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는 범죄자의 억압된 소리를 대변 했지요. 동성애로 인하여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면서 글을 쓴 <성의 역사> 또한 억압된 성의 욕구를 폭로한 것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푸코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 한 그 이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억압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고 고발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해방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억압의 주체인 만큼 근대적 인간의 허구성을 파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성적이며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은 근대의 철학적 과학적 산물이며, 그러한 과학적 담론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적 존재이므로 그러한 구성적(허구적) 인간은 단연 해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달리말해 ‘이성적 인간’이 ‘(광기어린)자연적 인간’을 억압하고 죽이고 있으므로, 억압하는 주체로서의 이성적 인간을 다시금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치중립성을 지키는 이론적 학자라기보다는 억압의 구조에 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었지요.
이러한 그의 공격성은 근대 문화 전반에 대한 도전이요 파괴적 저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진리라고 여겨지던 과학적 이론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갈등과 억압, 그리고 우연성과 권력의 역학 등을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지식이 권력의 행사를 대신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적절한 폭로와 고발이라는 점에서 그의 논지는 아주 적절하고도 유효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푸코는 여전히 서양철학 전반을 뿌리 채 뒤흔들고 비판했던 니체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도 주목할 일입니다. 푸코는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진리마저도 담론이 만들어 낸 질서체계일 뿐이며, 권력의 의지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주장을 더욱 철저히 심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가 신의 죽음을 외쳤다면, 푸코는 인간의 죽음을 외친 것이지요.
푸코는 단순히 억압하는 기능을 하는 주권적 인간의 죽음을 외친 것만이 아니라, 근대의 인본주의적인 도덕의 파괴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어떻게 사회적 과정을 통해 형성 되는지를 발굴해내는, 자신이 고안한 ‘고고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지식 체계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고대에는 신화를 통해 지배를 정당화 했다면, 현대에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진리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푸코에게서 진리란 사회적 담론의 산물이기에 그것의 진위여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오히려 모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그 이면에 도사리는 위장된 권력의 작용을 밝히고 폭로하려는 것이 푸코의 사명이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푸코의 이론은 실천을 위한 혁명적 전략이론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학자의 본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푸코 이후의 또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다음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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