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
정약용과 박지원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의 이름에서 난 어느 정도의 친근감을 느꼈었다. 그들의 학문이나 성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이할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난 지금껏 심심치 않게 그들의 업적과 일생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 만큼 두 학자가 우리 역사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물들임에는 틀림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항상 무엇인가를 연구하시던 할아버지 덕택에 어릴 적부터 그의 이름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또‘정약용은 한마디로 천재야.’라고 말씀하시던 국사선생님의 말씀도 나에게 그에 대한 강한 인상을 주었다. 박지원에 관해서는 그의 훌륭한 저서들 이야기를 주로 많이 들어왔다. 그의 글이 패관잡서로 규정되어 모두 불태워질 뻔 한 것을 그의 후손이 목숨을 걸고 보존하여 우리가 지금 그의 훌륭한 문체를 공부할 수 있으며, 후대에 와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굉장한 학자라는 칭찬을 중, 고등학교시절 여러 번 들은 바 있다. 또 두 인물 모두 실학자라는 공통점도 있기에 이번 그들에 대한 생각의 정리가 어느 정도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업의 중심자료로 제시된 정약용의 <문체책>과 박지원의 <옥갑야화>를 읽고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두 자료를 연계하여 볼 때 <문체책>은 당시 세도(世道)에 거스르는 박지원의 풍자적이고 혁신적인 문체를 비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처음엔 단순히 이 두 학자가 서로 배타적인 관계였구나, 혹은 정약용은 혁신적인 것을 수용하는데 인색한 약간은 보수적인 학자였구나, 라는 생각에서 일단 이 두 학자의 사상과 관계, 이러한 글들이 나오기까지의 배경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1)정약용&박지원
1)정약용
정약용은 정조 때에 활동했던 남인계열의 실학자로 농업중심의 개혁을 추진했던 중농학파, 경세치용학파 학자이다. 정치, 경제, 지리,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과 학문성과로 인해 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라 불린다. 그는 토지제도 부문에서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인 여전론을 주장하며 정전제를 제시했다. 정치적으로는 민본적 왕도정치를 이상적으로 보고 향촌단위의 방위체제 강화와, 백성의 의사가 반영되고 백성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개선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관리나, 임금모두가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학자였다. ‘애절량’을 비롯한 그의 여러 시에서 백성의 괴로움을 느끼고 그를 해결하고자했던 정약용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에는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전론>,<탕론>,<원목> 등이 있다.
2)박지원
박지원은 상공업중심의 개혁을 추진했던 중상학파, 이용후생학파, 북학파 실학자이다. 그는 노론(老論)의 명문세신(名門世臣)가문 출신으로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다. 그는 농업 생산력증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수레, 선박의 이용과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의 문학작품에는 <양반전>,<호질>,<열하일기>,<민옹전> 등이 있으며, 그는 독특한 문체나 표현기법을 사용하여 모순된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치열한 문학정신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간단하게 정리해본 정약용과 박지원의 사상과 행적이다. 두 사람 모두가 실학이라는 같은 학문을 지지하고 있지만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당파가 다르고, 또 탐닉해있는 학문의 갈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점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옥갑야화>와 <문체책>을 다시 보았다.
“전하의 성스러운 학문이 높고 명철하여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천고에 뛰어나시니, 제왕들은 물론하고 초야에 있는 선비일지라도 능히 그 문턱에 미칠이가 적습니다.”
<문체책>에서 정약용은 정조의 문풍을 칭송하며 다른 어느 것도 그것에 따를 수 없음을 말하였다.
“세도(世道)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한번 그 길이 트이면 더욱 낮은 데로 흘러내려서 막을 수 없다가 마침내 신화를 뒤덮게 된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이를 단절시키고 크게 소통시킨다면 오히려 폐단을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정조의 문체를 옳은 것으로, 그것에 벗어나는 것은 그른 것으로 구분하여 그른 것은 한시바삐 그 흐름을 끊어, 다른 곳으로 퍼져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이 이 글에서 단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전에 없던 새로운 산문체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박지원의 문체였다. 연암은 현대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학자중 하나이고 그의 문학 또한 긍정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또 과거에도 그 개혁성을 인정받던 실학자였다. 다산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왕의 것을 거스르는 모든 문체이고, 그것은 혹 직접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연암의 문체와 같은 새로운 것을 포괄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문제의 쟁점이 된 연암의 문체와 그의 사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2)연암의 문체와 사상
연암 박지원은고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현을 반박하며 참다운 문학의 의미는 고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대와 경험에 맞는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던 학자였다. 또한 그는 '글로써 놀이를 일 삼는다'라고 말하며 문학작품 을 통해 자기반성을 꾀하고 그릇된 사회를 해학과 기지로 조롱하고 풍자하였다. 이처럼 그는 문체라는 형식면에서 또 글의 내용 면에서 모두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것을 시도하는 진보적인 학자였다. <옥갑야화>에서도 연암의 개혁적인 성격과 풍자적 문체가 잘 드러난다. <옥갑야화>는 연암의 저서 <열하일기> 총 26권중 10권 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열하일기>는 연암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세속적인 문체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반청(反淸) 의식으로 인해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이에 수록된 <옥갑야화>는 외국과의 교역과 그들과의 상행위를 보여주고, 나라 안에서의 수레 운용실시 등을 주장하는 작가의 실학적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또 주인공의 행동의 변화가 양이나 범위에 있어 크고 넓으며 북벌론자인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옥갑야화>의 내용 중 가장 현실 문제와 직결되는 이야기는 바로 ‘허생전’이다. 허생전은 여러 현실 문제와 집권층의 무능을 풍자한 소설로, 허생이 상행위를 하여 일확천금을 얻는 장면은 그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당시 경제구조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부각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허생의 축재는 정상적 상행위를 통해 이뤄 진 것이 아니라, 매점매석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행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겨우 만금으로써 온 나라의 경제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짐작할 수 있구나" 라는 허생의 발언을 통해 당시의 유통구조가 단지 만금만으로도 물화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취약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이토록 쉽게 물화가 정체되는 원인은 운송수단의 미비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허생의 불합리한 축재는 국가경제 개선을 위한 상공업 활성화와 그를 위한 운송수단 확충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 허생과 도적들과의 대화와 사건을 통해 조선후기 사회 혼란의 원인이 생존을 위협하는 가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적들은 당시 양민들을 대변하는 것이고, 양민들을 도적 때로 몰아가는 원인은 극도의 빈곤이며, 경제적 궁핍의 해결과 안정된 삶의 보장을 통해 그들은 충분히 교화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국제무역과 국내 상공업의 활성화라며 다시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허생은 글을 아는 자 모두를 섬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데 이것은 글을 아는 자들 소수가 자신의 지식을 무기 삼아 그곳에서도 사대부 행세를 하며, 상층으로 군림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허생과 이완의 대화를 통해 작가는 북벌을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진정한 북벌의지가 없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집권층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북학론보다 북벌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벌론은 애초부터 실현성이 전혀 없는 집권층의 기만책에 불과했고 연암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에 강한 비판을 가한 것이다. 허생이 북벌의 총참모인 이완 장군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나라의 미더운 신하가 이런 꼴이냐?”고 꾸짖는 장면은 그 비판의 절정을 이룬다 할 수 있다.
결국 연암은 허생전을 통해, 양민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극도의 가난이 사회 문제의 시작이며 그 원인은 유통구조의 취약성이라는 나라 경제 구조에 있으니, 운송수단의 확충과 국제무역, 국내 상업의 활성화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나라의 부흥을 위해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연암의 북학론 또한 글 전체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연암은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두 제시하며 이러한 방법을 알려주었는데도 화이론의 고정관념에 얽매어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는 집권층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연암은 허생전을 통해 방법을 알고도 현실 문제를 타개할 마음이 없어 지지부진하고 있는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연암은 그의 또 다른 소설인 <호질>에서도 위선적 학자 북곽선생을 제시하여 당시 타락한 양반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연암은, 당시 사회의 모순과 양반들의 그릇됨을 해학과 풍자의 문체를 통해 낱낱이 드러내고, 또 통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연암의 소설들은 대부분 ‘내가 어디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러이러하더라.’ 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자신의 생각을 글 표면에 바로 드러내지 않고 우의적으로 숨겨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자신의 풍자가 당시 시대의 검열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의 도식이나 교훈에서 벗어나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여러 소설들을 통해 연암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사회 변혁을 촉구했었으며 자신의 문체를 이용해 그 뚜렷한 의지를 드러냈었던 개혁적 실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연암은 정조의 ‘문체반정’의 표적이 된다. 정조는 명, 청에서 들여온 패사소품서에 대한 반입 금지령을 내리고 당시 유행하던 소설식 문체를 타락한 문풍이라 비판하며 이를 바로잡는다는 명목 하에 예부터 내려오는 순정문장으로 회귀하려는 보수적인 문예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연암과 <열하일기>를 타락한 문체의 근원으로 지목해 엄중히 문책하면서 순정한 문체를 쓸 것을 요구하고, 올바른 문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라며 결국 1792년 연암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연암은 반성문하나 제출하지 않고 문학작품이 아닌 <과농소초>라는 농업 학술서를 바쳤을 뿐이었다. 정조의 ‘문체반정’ 정책에 옹호하며 연암식의 문체를 비판한 글이 정약용의 <문체책>이다. 난 그의 문체를 통해 박지원은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타개할 의지가 있는 진보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학자를 제지하고 억누르려는 정책에 동참하는 정약용이 조금은 보수적인 학자이거나, 쉽게 권력에 타협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난 다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그를 논할 때 결코 정조를 빼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약용의 성향과 정조와 그와의 관계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한다.
(3)다산은 연암에비해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학자인가?
개혁세력을 제지하고 왕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세력은 온건파, 혹은 보수파의 성향을 지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난 다산 또한 그러한 무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여러 저서들의 성격과 내용을 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지방수령들이 가장 갖추어야 할 것은 청렴결백이며, 선비들도 놀고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데 근본을 두고 있는 다산의 애국애민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백성을 무서워하고 떠받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과히 혁신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또다른 저서인 <흠흠신서>에서는 "우리 나라의 형벌제도는 너무도 가혹하고 잔인해서 사람의 기본권리조차 무시한다. 참혹한 고문 같은 것은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이 또한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바꾸고자했던 혁신적인 주장임에 틀림없다. 또 다산은 서기 1817년에는 '경세유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경세유표'는 조선의 정치, 토지, 조세 제도 등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형편에 맞도록 고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산의 이 모든 저서에는 기본적으로 묵은 인습을 타파하고 백성들이 행복하고 나라가 부강해질 새로운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기본 주장이 담겨져 있었다. 만능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모든 분야에서 박식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다산은 당시의 환경에서는 생각하기조차 하기 힘들었을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고,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던 인물이었다.그는 결코 보수적이지 않은, 실천적이고 혁신적인 실학자이자 참다운 관리였다.또 다산은 백성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우리 역사나 문화에 대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를 쓸 때도 격과 율에 까다로운 중국 시에서 벗어나 높새바람(高鳥風), 마파람(馬兒風), 뇌물(人情)등 수없이 많은 전라도 토속어를 시어로 활용하였다.우리 감정과 우리 숨결에 맞는 '조선시'를 짓겠다하던 다산답게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중국의 고시에서 구절을 인용하여 시작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어를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론을 펼치기도 했었다.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도 유명한데,그의 학문체계는 유학의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유형원, 이익 사상을 계승하여 양명학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이의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실천윤리와 홍대용, 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을 흡수, 정리하였고 이기론에서는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혼합하여 받아 들였다. 그의 이러한 학풍을 통해 난 그가 기존의 주장이나,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는 배타적인 인물 또한 결코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그는 여러 다른 학자들의 주장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여 실학을 집대성 하였고,심지어 문체면에서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던 연암 등의 사상까지도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는데 이용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받을 점은 수용하되 그릇된 점은 가차 없이 배격하는 것이 다산의 의도였을까? 이토록 혁신적이고 포용적인 학자인 다산이 왜 연암의 문체를 배격했는지, 의아했다. 연암의 문체는 더 나은 사회상을 제시하는 획기적인 것이 분명했고, 그러한 면에서는 다산이 그의 여러 저서에서 제시한 혁신적인 사회 개혁적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의 긍정적인 변화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자신과 분명한 공통점을 지닌 연암의 문체를 왜 다산은 비판했던 것일까? 다산이 혁신적인 연암의 문체를 비판한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단순히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 다산은 정조의 ‘문체반정’을 옹호하는 글을 썼던 것일까?
(4)정조와 정약용
연암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신하였다면, 다산은 정조에게 친우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다산과 정조는 도저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군신이면서 사제였고 또 정치적 학문적 동지의 관계였다. 다산은 정조의 의지와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며 정조에게 헌신을 다했었고, 정조 역시 다산이 ‘서학쟁이’란 비난을 들으며 정적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 마다 그를 지켜주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사실상 노론의 음모에 영향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고, 노론측은 정조 또한 즉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숱한 노력을 가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는 영,정조 시기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 부른다. 그러나 조선후기 정조 연간은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왕권강화를 주창하며 노쇠한 조선사회의 대개혁을 모색했던 정조와, 신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당시 기득권 세력인 노론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시기였다. 당시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던 정조는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노론 벽파에 대항하여 자신의 개혁정책의 수행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개혁세력을 찾고 있었다.그 때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하였고 강고하게 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여 벽파(僻派)로 남게 되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남인 학파야 말로 정조의 정치를 뒷받침 하는 핵심적인 힘이었고,그 한 가운데에 다산이 있었다.물론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통해 박지원과 그의 제자들, 즉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정조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 또한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해 세도를 바로잡고자 하였다.그러나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였으며, 그가 펼친 탕평책의 일환이었다.정조는 천주교 문제에 연루된 남인의 단점을, 청나라의 북학과 패관 소품체에 심취해 있는 노론의 문제점과 대비시켜 서로를 견제케 하며 당쟁이 재연할 기미가 엿보일 때마다 이를 조정하는 ‘중재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 첨예했던 당시에 문체의 다양화는 곧 의식의 다양화를 의미했었고, 그것은 강력한 왕권을 원하던 정조의 정치이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정조는 박지원이라는 노론 학자의 풍자적인 문체 자체를 염려했던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왕권의 약화를 걱정했던 것이다.그리고 정조의 훌륭한 조력자인 정약용이 그의 뜻을 뒷받침했던 것이다.다산의 이러한 충성과 그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서 다산의 형이 목숨을 잃고,다산이 유배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 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판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조도,다산도 연암의 문체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며 비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나라의 임금의, 그것도 정조와 같은 문치주의자의 문체를 위협할 만큼 신선한 연암의 문체가 자꾸만 여러곳으로 퍼져나가 그를 추종하는 새로운 무리들이 생겨나는 현상을 배척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비판했던 것일 것이다.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조에게, 문체는 곧 권력이었다.한나라의 군주로서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흔드는 것은 분명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새로운 문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파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조는 그 근원인 연암을 질책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그러한 정조와 각별한 군신관계였던 다산도 정조의 권력을 지키는데 힘쓰기 위해 그의 의견을 옹호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그것은 맹목적인 권력에의 아첨도 아니고,보수적인 온건파의 배타의식은 더더욱 아니다.신권이 왕권보다 우위에 있을 때 민초들은 더 큰 고통을 겪는다.왕권이 강해야 백성들이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다산의 행동은 자신이 진심으로 섬기는 왕을 돕고,왕의 입지를 굳건히 하도록 하여 그의 평화상태를 장기간 유지하게 하는 충신으로서의 최고의 행동이자 그의 입장에서 백성을 위하는 최선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5)결론
처음 정약용의<문체책>과 박지원의<옥갑야화>를 읽고,단순히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문제라 쉽게 단정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그 외의 여러 자료를 접해보고 나서 그 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지금은 그 어떠한 결론도 쉽사리 떠오르지가 않는다. 두 인물모두가 실학자이고,동시대의 인물이고,여타의 이유로 해서 처음엔 이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그런데 하나, 둘 그들에 관한 자료를 접하면 접할 수록 과연 어떠한 관점에서,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두 학자를 비교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각자 다른 잣대로 평가 할 때 두 인물의 행동 모두가 그들의 최선책이었다.그 자신 또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실학자였지만,인간적인 도리와 의리를 우선시하여 자신이 섬기는 군주를 도와 그의 정치목적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한 정약용이나,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현실개혁을 위한 의지나,냉철한 비판을 우선시했던 박지원,이 둘의 상황, 행동모두가 타당성 있고,가히 훌륭하다 할 만 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만약 다산의 앞에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은 연암체등의 신문체를 배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그가 <문체책>을 제시하며 ‘문체반정’을 옹호했던 것은 그것이 정조의 정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자신의 것이 아닌 새 문체를 타고 퍼져가는 새 사상을 잠재우고자 했던 정조의 의도를 다산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또 왕으로서 정조의 힘이 확고해야만 백성들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감소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연암의 새로운 문체를 ‘연암체’라 추종하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나기도 했었는데,난 연암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문체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당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그것을 개선하고자 했던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다만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체가 자연스레 사용되었던 것이지,연암이 일부러 그러한 문체를 가지고 사회를 비판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군신관계에서 충신의 도리를 생각한다면 정약용의 행동이 옳았고, 사회문화와 문학의 발전을 위하는 면에서는 박지원의 행동이 옳았다. 중요한 것은 두 인물 모두 당시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했고, 비록 그 방법은 달랐지만 백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했던 훌륭한 학자였다는 것이다.결국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한 곳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 상이한 두 인물을 놓고 공통분모를 찾아 그들을 비교하려했던 나의 의도 자체가 무리한 시도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