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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泉隱寺)
(*)천은사가 원주에도 있다는데,
이 글에서 다루는 절은 지리산 천은사다.
나는 천은사(泉隱寺)를 20년 간격으로 세 번 찾아 갔다.
처음은 1970년 가을이었다.
그때 송광사, 화엄사도 갔지만 워낙 유명한 절들이고
마침 단풍철에 먼지 휘날리게 관광객이 몰려 들어,
남은 기억이라곤 절 아래 마을(寺下村) 여관에서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며, 섰다 앉았다 한
(고스톱 보급되기 전임) 기억뿐이었다.
내 가슴에 깊이 남은 곳은 천은사(泉隱寺)로
이름 그대로 샘 조차 숨어든 듯 그윽하고 고요한 절이었다.
하얗게 센 눈썹이 길게 자라 휘감겨 돌아간 주지 스님이
천은사의 보물-금동불감(金銅佛龕)을 보여주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절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 불감(佛龕)이 보물로 지정되기 전이었다.
스님이 조심조심 불감의 문을 열어 가며 보여 주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내가 무슨 안목이 있었겠나?
진지한 스님 태도에 맞추어 대단한 것을 보고 있는 듯
표정관리나 했을 뿐이다.
두 번째는 90년대 초 여름인데 엄청나게 몰려 와 있었다.
아마 노고단, 성삼재로 자동차길이 뚫려 교통이 편해진 탓일 게다.
자동차를 일주문 지나 절 코 앞까지 끌고 와 세워 놓고는,
절보다는 절 앞 계곡에 내려가 발들을 담그는데 그냥 담그는 것이 아니었다.
90년대 초면 산에서 불 피우면 안 된다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우리 한국인은 마른 음식 째작거리면 먹은 것 같지 않고,
끓이고, 지지고, 구워가지고 또 쌈을 싸먹어야 성질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원한 골짜기에 퍼 질러 앉고 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아수라장(阿修羅場)이었다.
추억이나 간직하고 있을 것을 괜히 왔다 싶었다.
이런 천은사를 이번 여름에 세 번째로 찾아갔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 많이 좋아졌다.
1970년 당시처럼이야 될 수 없지만,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절 주위가 꽤 정화되고, 관람객들도 기본 예의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완전히야 되겠느냐마는)
괜히 폼을 잡으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화엄사에 비하여,
우물가 새악시 같이 수줍은 천은사(泉隱寺)의 매력이 되살아 나는 듯 했다.
이걸 두고 우리 사회/문화의 자정능력(自淨能力)이라고 해야 할지?
그 동안 너무 개판 쳤으니 반성하는 국면으로 넘어 간 것인지?
아무튼 웰빙 시대를 맞아 문화에 대한 인식능력과 태도가
비단 이곳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향상된 것은 틀림없다.
이제 이번에 천은사에서 찍은 사진 소개한다.
요금 받는 곳
고창과 장성 사이에도 방장산이 있다지만,
위 사진 중 방장산(方丈山)이라 함은 지리산(智異山)의 또 다른 이름이다.
오른 쪽 아래 팻말에 여기는 천은사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입장료를 징수하니, 남원, 함양 방면은 19번 국도를 이용하시오
라고 써 놓았다.
돈 내고 지나가던지, 싫으면 돌아가라는 뜻이다.
그 동안 그냥 길난 대로 따라 갈 뿐인데 천은사에서
입장료는 괜히 왜 받고 그러느냐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입장료 시비 이전에 (누가 옳은지 따지기 골치 아프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자동차길 따위는 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느리게 (슬로우하게) 살 필요가 있지 않는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던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굽어 보며 아직 개발이 덜 되었군 이라고..
현 대통령이 그랬다고들 하지만 설마 그러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어쨌던 나는 천은사가 목적이므로 돈을 기꺼이(?) 내고 들어갔다.
절 가는 길
주차장을 일주문 앞에 몇 십 미터? 근 백미터? 가까이 띄워 놓아
제법 절 들어가는 기분이 난다.
천은제(泉隱堤) 저수지
주차장 옆-아래 쪽으로 저수지가 있다.
90년대 초에 왔을 때는 정나미가 떨어져 이거저거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기억을 더듬으니 1970년에는 이런 저수지가 없었던 것 같다.
찾아 보니 과연 1980년대 초에 만든 저수지다.
1970년엔 이 자리에 산을 일궈 만든 밭과 농가가 몇 있었을 것이다.
일주문(一柱門)
사진: 일주문-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글씨는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로 추사 김정희한테
그것도 글씨라고 썼느냐고 욕먹은 사람이다.
동국진체(東國眞體)라 함은 우리나라 고유의 글씨체다.
우리 고유양식이 말은 좋지만, 중국 북경에서 그 세련된 문화를
직접 보고 온 추사에게는 넘쳐 흐르는 촌티 그 자체였나 보다.
그 추사도 제주도 귀양을 마치고 나오면서 뭔가 느꼈는지
이광사의 글씨도 괜찮은 걸 그랬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이 천은사(泉隱寺) 글씨에는 전설이 있다.
임란(壬亂) 때 절이 불타고, 난이 끝난 후 중건(重建)하는데,
샘에 큰 구렁이가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
절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泉隱寺)라고 바꾸자
이번엔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가
지리산 천은사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 주어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재앙이 그만 그쳤다나 어쨌다나.
사진: 일주문 현판-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왼쪽 아래에 원교(圓嶠)라고 쓴 낙관이 있다.
전설과 연결해서 보니 물이 뚝뚝 흘러 내리는 듯도 하다.
글씨를 물 흐르듯 써서 샘이 다시 솟아 났는지?
감로천이 유명한데 글씨도 냇물 같아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이제 와서 누가 알겠는가?
일주문을 지나니 계곡 물 위로 시멘트로 만든 무지개 다리가 걸려 있다.
사진: 무지개 다리(虹橋)
전에 나는 무지개 돌다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 홍교(虹橋)에는 다리 가운데 아래 쪽으로
무언가 삐죽이 돌출한 것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다름아닌 남성기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뻗쳐오르는 남성기의 성력(性力)으로 다리에 붙기 쉬운 잡귀를
막으려는 의도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한 바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요강에 구멍 쉽게 낼 정도로 성력이 왕성했지만,
오늘 날 남성은 정자 수가 자꾸만 감소하여 인류의 미래가 어두울 정도다.
이런 남자의 성력 가지고 벽사(僻邪)는 택도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천은사 시멘트 아치 교에는 그런 거 달려 있지 않다.
남성기 따위 없더라도 시멘트 독(毒) 때문에 잡귀가 붙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무지개 다리 위 정자는 이름도 수홍루(垂虹樓-무지개가 걸린 누각)고,
수홍루를 지나면 천왕문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사진: 천왕문 앞 돌계단
천은사에서도 한국 절의 전형적 배치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일주문을 지나,
성(聖) 과 속(俗)이 갈라 지는 개울을 건너,
계단을 통해 천왕문으로 올라가고
다시 한 단계 위 보제루를 지나 본당 앞 마당에 이르면서
차츰차츰 높아 진다.
천왕문 계단 올라가지 전 왼쪽에
천은사 이름의 근원이 되는 감로천이 있다.
사진: 감로천(甘露泉)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처음에는 이 절을 감로사(甘露寺)라고 하였다.
이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다고 한다.
그러다 앞서 일주문 현판에서 설명한 대로 샘이 끊겨 천은사(泉隱寺)라고 했다고 한다.
천은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 중에는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
-도선(道詵) 대사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선 대사가 실존 인물인지는 불분명한 상태다.
그렇다고 하면 아 그러세요 하고 지나가면 될 뿐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자리에 절이 있던 것은 확실하겠으나
오늘 날 모습은 1775년 혜암 대사가 중창(重創)한 대로라고 한다.
사천왕(四天王)
높은 계단을 다 올라가면 사천왕문으로 들어서는데,
천왕문 안 양쪽에 천왕을 각각 둘 씩 모셔 놓았다.
사천왕(四天王)은 불교에서 상상하는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면서,
수미산 꼭대기 도솔천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한다.
따라서 불법과 신자를 악귀로부터 막는 역할을 한다.
이상은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그렇다는 이야기고,
역사적 해설을 하면 인도에 원래부터 있던 지방신들이
불교에 흡수당하면서 한 자리씩 차지한 것이다.
요즈음 기업 M&A 할 때 전에 있던 사람들
웬만하면 계속 써서 마찰을 줄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팔부대중(八部大衆), 금강역사(金剛力士)등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쓰다보니 사천왕을 고용 승계된 경비원 취급하게 되어 죄송하게 되었다.
사진: 왼쪽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오른쪽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그냥 봐서는 누가 누군지 몰라,
들고 있는 물건-지물(持物)로 구별할 수 밖에 없는데
남방증장천은 용을, 서방광목천은 탑을 들고 있다.
사진: 왼쪽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오른쪽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북방다문천은 비파같이 생긴 악기를, 동방지국천은 칼을 들고 있다.
요즘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절의 사천왕을 보면
이 천은사 사천왕과 한 틀에서 찍어 낸 듯 한 것이 꽤 있다.
이렇게 생긴 천왕이 표준도상이라도 된 것일까?
사입처가 같은 것인 지도 모르지.
보제루(普濟樓)
사천왕문을 지나면 요즘 새로 만든 듯한 석등이 나오고
그 너머 높직한 축대 위에 보제루가 있다.
사진: 보제루와 석등
여기서도 눈 높이 법칙이 적용된다.
사진: 보제루 기둥. 보제루에는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너머 단청칠한 집은 운고루로 범종과 법고를 두었다.
보제루를 지나면 중심 법당 앞 마당이 나온다.
중심법당 극락전을 마주보는 자리, 보제루로 보면 안쪽으로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 보제루(普濟樓) 현판
현판 왼쪽 아래에 갑진동이삼만서(甲辰冬李三晩書)라고 글쓴 이를 밝혔다.
이삼만(李三晩), 이삼만…
어디서 들었는데..곰곰이 생각하니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읽은 적 있다.
완당-추사가 제주도 귀양가면서 전주 근처를 지날 때다.
추사가 글씨 잘 쓰고 또 조선 제일의 감식안으로 유명한지라,
전주 일대에서 글씨 꽤 쓴다는 이삼만(李三晩)이라는 노인이
자기 글씨를 한 번 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추사 눈에는 글씨가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추사는 성격이 까칠했다.
시원찮더라도 에둘러 이야기하면 좋을 것을
“영감! 글씨 가지고 그럭저럭 밥은 먹겠소!” 해 버린다.
이 소리 들은 이삼만(李三晩) 노인의 제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펄펄 뛴다.
추사가 서울에 있을 때야 삼한갑족(三韓甲族) 경주 김씨,
영조의 외손에, 정순왕후 친정 집안으로 세도가 시퍼렇겠으나,
영조는 진작 승하하고 정순왕후도 죽고 나서,
정쟁에 몰려 귀양가는 처지에서야, 때리면 맞아야지 별 수 있겠나?
이걸 이삼만(李三晩)이 극구 말려 겨우 봉변을 면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보제루(普濟樓) 현판은 그 이삼만이 쓴 글씨다.
추사에게 보였던 그 글씨는 아닐 것이다.
추사 눈에는 ‘밥이나 겨우 먹을 솜씨’ 인지 몰라도
내 눈에는 단정하니 괜찮은 것 같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사진: 극락보전(極樂寶殿)과 앞 마당
잔디도 심지 않고, 돌도 깔지 않은 흙마당이지만,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전형적 한국 조원술이다.
극락보전 현판은 누구 글씨인 지 모르겠다.
주련은 성당 김돈희 글씨라고 한다.
이름이 대웅전이 아니고 극락전이라는 데서, 석가여래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극락전 아미타불과 후불탱화(後佛撑畵)
후불탱(後佛撑)은 보물 924호다.
세밀히 부분부분 나누어 찍고 싶었으나,
부처님을 찍지 마시오 란 경고 팻말 때문에
눈치껏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었다.
왜 찍지 말라는 것인지?
촬영을 금하는 것은 카메라 플래시에 그림이 상할까,
그리고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보아 그런 것인데,
플래쉬 죽이고 얌전히 살짝 누르면 괜찮다.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들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이리 저리 돌리면 선전도 되고 그런 것이다.
회승당(會僧堂), 설선당(說禪堂), 첨성각(瞻星閣)
사진: 극락보전 뒤쪽에서 본 마당과 가람배치
극락전에서 앞 마당을 바라보며 정면에 보제루,
왼쪽에 설선당(說禪堂), 오른 쪽에 회승당(會僧堂),
회승당 뒤쪽으로 한칸 올라가 극락전과 같은 평면에
첨성각(瞻星閣)을 둔 것은 우리나라 가람의 전형적 배치다.
설선당(說禪堂)은 글자 그대로 선(禪)을 설(說)하는 곳이다.
절에 따라 지혜의 칼로 무명(無明)을 벤다는 뜻인
심검당(尋劍堂)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회승당(會僧堂)은 스님들이 모여 살림하는 곳이다.
첨성각(瞻星閣)은 글자로야 별을 보는 집이지만
그보다는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일 게다.
범종(梵鐘)
보제루 동쪽에 운조루가 있고 그 안에 종이 매달려 있다.
사진: 천은사 범종. 최근 것으로 에밀레 종과 같은 모양이다.
요즈음 새로 종 매다는 절이 많은데,
대부분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이나
상원사 종을 그대로 본뜨고 있다.
1300 년 전에야 상원사 종, 에밀레 종이 대단했고 지금도 아름답지만,
우리 시대는 새롭게 만들어야지, 옛날 것 베껴 내기만 한다면 아쉬운 일 아닌가?
우리가 전통을 딛고 새로운 창조를 할 역량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온고(溫故),법고(法古)는 그 자체보다, 지신(知新),창신(創新)을 이룰 때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이야 어쩔 수 없고
모방도 열심히 하다 보면 변증법의 법칙대로,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질 날도 올 것이다.
내 생애에 그 날을 볼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관음보살(觀音菩薩)
중심 법당인 극락전 뒤쪽으로 서쪽부터 차례로
삼성전, 관음전, 팔상전, 응진전이 있다.
삼성전(三聖殿)은 우리나라 토속신-산신령 등이
불교에 들어가 한 자리 차지한 곳이다.
관음전은 관음보살,
팔상전은 부처님 생전 여덟 모습을 그린 그림을 모신 곳,
응진전은 천은사 조사(祖師)들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사진: 천은사 관음전 관음보살.
얼굴을 세어 보니 방법에 따라 11면(面)도 같고 12면 같기도 하다.
통상 11면 관세음보살 아닌가?
생김새에서 어쩐지 밀교(密敎) 냄새가 나는 듯 하다.
천은사는 조계종 산하(傘下)고, 조계종에서는 밀교를 거의 미신 취급한다는데.
돌담, 돌축대
천은사에서 돌담, 돌축대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천은사 오기 전날 들른 화엄사에서 본 돌 축대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진은 화엄사 돌 축대다.
얼마 들였는지 몰라도 돈 엄청 썼을 것 같다.
거대한 돌을 쌓으면서 그래도 일직선으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쓴 노력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쩐지 어색하다.
사진은 천은사 돌 축대 찍은 사진 중 하나다.
이런 것이 좋아 보이려면 나이를 어느 정도 먹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런 축대를 쌓을 (돈 보다) 정서를 상실해 버린 것이 아닐까?
이상으로 천은사 배관(拜觀)을 마치고 나오는데,
보제루 앞 꽃밭에 나리 꽃이 피어 있고,
그 위로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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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컴 하고 아주 잘 보았구요 감사합니다,
글과 사진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