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 요한의 제자들은 어떤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에 관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논쟁이 유대인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정결 예식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정결 예식에 반대하여 요한과 예수가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또는 요한과 예수가 각자 따로 행하는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지 않다. 본문에서는 '결례'의 뜻인 헬라어 '카다리스모스'가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변론'의 뜻인 헬라어 '제테시스'에 대해 바울은 '위험하고 쓸데 없으며 분노에 찬 논쟁'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요한의 제자는 유대인과 더불어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의 의의와 효력에 대해서 바리새파와 엣세네파 그리고 예수가 행하시는 세례와 비교하여 변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제자들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질 것인가에 관한 변론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라고 하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은 것은 예수를 깎아 내리고자하는 그들의 의도를 반영한다. 요단강 저편인 베다니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고 또한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빚을 진 자요, 감사해야 할 자였지만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명성을 떨어 뜨리는 경쟁자로 나선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결례에 대한 논쟁을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져왔을 때, 그것은 단순한 논쟁 거리가 아니라 예수께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변화되었다.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 - 역시 예수의 이름을 피하고 있다. '증거하다'의 뜻인 헬라어 '메마르튀레카스'는 현재 완료로서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으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세례를 주매 - 원문에는 이 말 앞에 '보라', '보옵소서'의 뜻인 헬라어 감탄사 '이데'가 붙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혹은 그의 제자들이)가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대해서 상당히 흥분하고 분노를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더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콘타이'(' )는 연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 갈릴리 사역 동안의 예수의 호소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 목적어가 생략된 문장이다. 대화의 내용상 세례를 베푸는 자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받은 사람은 (1) 요한 자신이나 (2) 예수 그리키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 그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 예수의 제자들 등도 포함 된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높아가는 예수의 명성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모든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 그 기욍을 두고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요 3:28]"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대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자신을 메시야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모든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언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말한 바'는 세례 요한이 예수께 대해 이미 여러번 증거하였던 사실을 나타낸다. 너희니라 - 이 말은 원문상 강조법으로서 '너희가 내 설교를 귀담아 듣고 그 의미를 헤아렸다면 이미 너희들 스스로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시사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우려대로 그의 가르침과 세례를 고지식 하게 추종하는 인물이 1세기 중엽까지도 상당히 존재했음에 분명하다. 예컨대 에베소에서 사역 했던 알롄산드리아의 아볼로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 후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바 있다.
.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이며, 신랑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상징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 본절에서의 강조점은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보다는 신랑인 예수와 그 친구인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있다. 세례 요한은자신이 아니라 그긔스도가 새 이스라엘의 주인이심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 히브리어에서 '쇼쉐벤'은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역할과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 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의 신랑의 들러리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 까지도 담당했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잔치에 있어서 그 중매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바울도 역시 자기 자신이 정결한 처녀인 성도들을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올 담당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등장했던 연회장도 신랑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그 잔치를 주관하였을 것이 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돕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형으로 마치 물이 컵의 끝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처럼 세례 요한의 기쁨이 가득 차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의 기쁨은 완벽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했던 일 곧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바라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