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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 떠내려가지 말라
히브리서 2:1~4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서 기록자가 히브리서 1장 1절로부터 시작되어 14절까지 이르는 긴 교리적 말씀에 따른 첫 번째의 경고와 권면의 말씀입니다. 앞서서 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증거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만유의 상속자요 온 세상의 창조주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요 하나님의 내적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만물을 붙들고 계신 자요 죄인들의 죄를 온전히 정결케 하시는 일을 완수하시고 하나님의 높은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성을 한 가지 더 길게 증거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과 견줄 자가 아니요 천사들의 주군으로서 천사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천사 숭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영적 위험에서 성도들을 보호하려는 취지도 담겨 있는 교리적 진술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하심을 증거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결론적으로 첫 번째의 권면의 말씀을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이 긴 글에서 교리만 진술하지 아니하고 그 당시의 성도들의 실천적 신앙을 위하여 이렇게 권면과 경고와 격려의 말씀을 베풀곤 합니다. 우리도 이 말씀에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위한 귀한 가르침을 받아 우리의 신앙의 진보와 결실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베푼 신앙적 권면은 무엇입니까?
먼저 복음의 진리 말씀을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것입니다.
1절 전반절 말씀을 함께 읽읍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서 진술한 하나님의 아들의 탁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처럼 탁월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진술, 곧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고 완전하고 최종적이고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증거한 진리의 말씀에 더욱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적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해오셨지만, 이제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주시며 만유의 주재시며 모든 죄를 사해주시는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증거한 진리의 말씀은 더욱 유념해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념한다’라는 헬라어 ‘프로세코’라는 단어는 단순하게 듣는 정도가 아니고 마음을 기울여서 주의를 기울여서 거기에 집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물건을 손으로 단지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이 힘을 주어 물건을 꽉 쥐는 것처럼 그렇게 히브리서 편지를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들은 바 복음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마음을 다 기울여서 주의하여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 유념하라’는 말에서 ‘더욱’이라는 헬라어 단어 ‘페릿소테로스’라는 단어 역시 ‘더욱 더, 더 넘치게, 훨씬 더, 굉장하게, 심하게, 더욱 간절히’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증거해주신 복음의 진리, 곧 죄사함을 위한 대속의 진리의 말씀, 영생 부활의 진리의 말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말씀 등에 대하여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열심보다 더 주의 깊게 더 열렬한 열의를 가지고 더 간절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힘쓰고 사도들이 남긴 서신들을 더 사랑하여 읽고 그들이 영감으로 증거한 복음 진리의 말씀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간절히 듣기도 사모하고 읽기도 사모하고 묵상하며 연구하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두 번째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하고 그렇게 유념해야 하는 목적을 이어서 밝히고 있습니다.
1절 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증거한 말씀을 왜 그렇게 열렬하게 유념하여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흘러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 간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레오’인데, 그것은 ‘흘러 지나가다, 떠내려가다, 미끄러지다, 달아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배가 파도에 표류하여 떠내려가는 것이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빠져 어디론가 미끄러져 떨어져버리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의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성도들의 배가 혹시라도 거센 파도에 휩쓸려서 떠밀려내려갈 수 있기에, 그것을 막기 위하여 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에 더욱 유념하여 붙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배로 비유한다면 이 신앙의 배가 평안의 항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시련의 풍파가 배를 흔들어놓곤 합니다. 신자의 믿음의 항해에는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의 풍랑이 불어닥치기도 합니다. 세상의 부패한 풍조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기도 합니다. 신자에게도 남아 있는 내면의 타락의 본성의 풍랑이 불어닥쳐서 신앙의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배가 좌초할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또한 이단과 사이비들이나 심히 불완전하고 한쪽으로 깊이 치우쳐서 구원을 받기에는 함량 미달인 교리적 미혹의 풍랑도 우리의 신앙의 배를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과 유혹과 부패의 풍랑이 거세게 불어닥칠 때 이 모든 풍랑에 떠밀려서 소원의 항구인 천국에 도착하지 못하고 무서운 바위가 가득찬 멸망의 해안선에 부딪히거나 깊은 낙심과 침체의 모래 무지에 파묻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천국의 소원의 항구에 평안히 들어가지 못하고 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예정해주심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수고와 우리 성령님의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전적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온 힘을 다한 주의와 최선을 다한 애씀도 함께 뒤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서 평안을 누림과 동시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분별해야 하고 베풀어주신 은혜의 방도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하는 책무가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유라굴로 폭풍 속에서 건져주실 것을 친히 말씀해주셨지만 14일째 표류하던 중에 섬에 가까이 왔을 때에 새벽에 그 배의 선원들이 자기들만 도망하려고 거룻배를 몰래 내리려고 했을 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선원들의 거룻배를 내리지 못하도록 로마 군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군인들이 달려가서 그 배를 내리려는 줄을 끊어 떼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지만 그 구원을 이루는 것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에 합당하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믿음에 합당한 행실의 열매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록자의 이 권면을 마음에 두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하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의 말씀, 복음 진리의 말씀, 사도의 권면의 말씀의 돛을 달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침으로써 거센 고난과 유혹과 세상 풍조와 이단 사이비의 풍랑들과 맞서서 부지런히 땀 흘려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진대 우리가 혹 떠내려갈 수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해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를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역시 합당한 보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율법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3:14 말씀에 이르기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구약의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인 모세의 손으로 베풀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약속하신 자손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 시대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에 ‘천사들을 통하여 전달된 말씀’인 율법보다 더 우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들을 통하여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보다 더 부족한 천사들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인 구약 시대의 율법 말씀도 견고하여 흔들리지 아니한 진리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하여 범죄하거나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불순종하고 듣지 아니할 때 합당한 보응을 받았습니까? 시내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수천 명이 죽었고, 원망 불평하여 뱀에게 물려 죽었고 우상 숭배에 동참함으로써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숱한 우상 숭배와 죄악 때문에 기근과 전염병과 칼로 인하여 숱한 재난을 받았습니다.천사들이 전해준 말씀조차 확고한 것이기에 지키지 않을 때 합당한 심판이 뒤따랐습니다.
그러기에 천사보다 더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증거된 말씀인 복음을 불순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그렇습니다. 더 큰 심판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가 복음에 더욱 유념하고 이것을 심히 사랑하며 힘을 다하여 지켜야 할 이유는 주의 말씀이 지극히 큰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큰 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삶의 성공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저주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있습니다. 죄는 끈질기고 무섭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단지 십계명의 외적인 죄만 피하면 되는 것이 의가 아니요 사실 우리 안에는 무섭고 깊은 죄성이 있어서 질투와 미움과 배신과 악독이 깊이 있습니다. 이 죄악의 깊은 늪에서 누가 우리를 구출하겠습니까?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이러한 우리의 깊은 악독을 사해주시고 깊은 내면의 죄성을 뿌리째 뽑아주시고 하나님 앞에 아무 죄 없이 담대하게 서게 하시고 죄가 전혀 없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영광 중에 살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구약의 말씀이 보장해주었습니까?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증거하신 구원이요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완전히 이루시는 구원만이 이것을 완전히 성취합니다. 이 큰 구원을 우리가 복음 진리를 통하여 받았습니다. 듣고 믿음으로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한다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겠습니까? 더 큰 은혜에 대하여 배신할진대 더 큰 심판이 주어짐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의 범죄에 심판이 엄중했거늘 주의 복음을 배신한 자가 받을 심판은 얼마나 크고 중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2:25 말씀에도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라고 하였습니다. 이 배신은 하나님 말씀을 고의로 배신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한 이들이 있었으니, 특별히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유대교의 신앙으로 돌아갈 유혹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배교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강력하게 돌아가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에 우리 역시 점점 말세의 징조들이 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고 세상의 풍조에 끌려 신앙이 나태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나태함을 조심합시다.
3절의 ‘등한히 여긴다.’는 헬라어 단어 ’아멜레오’라는 ‘무시하다, 태만하다. 부주의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2:5 말씀에,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라고 하였는데, 거기서 ‘돌아보지 않다’는 말이 ‘아멜레오’ 곧 ‘등한히 여긴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잔치가 벌어지는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오라고 하나님께서 초대하지만 적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태만한 마음을 갖고 자기 일에만 급급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무슨 상황,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말씀의 잔치 자리인 예배에 최선을 다하여 모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이어서 히브리 기자는 이 큰 구원의 말씀인 복음을 결코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큰 구원의 말씀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3절 후반절입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구약 성경의 말씀 전달자들인 선지자들은 그 말씀의 수종자들로서 예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셨으니, 그는 구원의 주로서 친히 이 큰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고 확증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 큰 구원의 말씀을 주께 들은 자들이 재차 확증하였습니다. 주께 들은 자들은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3절 후반절입니다.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들은 생명의 주를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고 손으로 만졌고 그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이 큰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순교의 피로써 확증하였습니다.
셋찌로, 그 큰 구원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써 확증하였습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성령의 권능이 나타남으로써 그 따르는 표적으로써 이 큰 구원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지극히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에 말씀하셨고 그에게 들은 사도들이 순교의 피로써 확증하셨고 성령께서 따르는 표적으로 확증하셨으니, 이 구원의 말씀은 참으로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큰 구원의 진리를 등한히 여긴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큰 구원, 더 큰 은혜에는 더 큰 책임도 요구됩니다. 구원은 은혜요 전적인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 구원의 크심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는 자들이 됩시다. 또한 이 진리의 말씀, 더 큰 구원의 말씀을 붙들기를 훼방하는 모든 시험의 풍랑들에 휩쓸려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그것이 주님이 오실 날이 더 가까워지는 이 때에 더 거칠어지는 모든 풍랑을 다 이기고 우리의 항해의 최종 목적지인 천국의 항구에 마침내 도착하는 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