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태를 다듬으며
이향숙
모든 사물에는 그에 맞는 환경이 있다. 지난여름은 유난히 덥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긴 여름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발생했고, 때아닌 가뭄과 홍수로 지구촌 모두가 몸살을 앓았다. 곡물값은 치솟고, 먹거리가 부족해 굶어 죽는 이들도 있었다. 곡식이 자라려면 적당한 비가 필수다. 농부가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거름을 준다 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식은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작은 텃밭에 콩을 심었다. 유난히 길었던 여름, 폭염, 그리고 비 없는 날들이 이어지며 쭉정이가 많았다. 수확한 콩을 소반에 올렸다. 예전에 할머니가 콩을 다듬던 모습이 떠올라 나도 상 위에 놓고 골라내기로 했다. 돌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며 먹을 수 있는 콩만 가려냈다. 허리가 뒤틀려 오래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이런 일이 이렇게 고된 일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나 힘든 기색 없이 이 일을 해내셨다. 가족의 먹거리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으셨는지 새삼 느껴졌다.
‘가장 늦게 서리를 맞아야 수확한다’ 하여 서리태라 불리는 이 콩. 그러나 이번 수확은 형편없었다. 쭉정이투성이였다. 소반 위에 있는 볼품없는 콩들을 바라보았다.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쪼그라든 알맹이가 대부분이었다. 불볕더위 속에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겨우겨우 살아남은 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이만큼 자라준 것이 대견했다. 나였으면 진작 쓰러지고 말았을 것 같다.
한편, 지인의 논두렁에 심은 서리태는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논에 물이 흐르니 가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벼에 준 거름을 논둑의 콩도 함께 섭취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둑 위의 콩도 주렁주렁 달려 알알이 영글고 있었다.
말라붙은 내 콩꼬투리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조화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서리태의 생명력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모든 생명은 자연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교훈을 준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말이다.
지인의 논두렁에 핀 서리태는 단지 잘 자란 콩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의 소중함과 자연의 순환이 빚어낸 조화였다. 우리는 자연과 함께 자연의 흐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농작물의 성장과 우리의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자연을 존중하고 환경을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은 단지 농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과 삶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쪼그라든 작은 콩알들을 보며,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집은 밥을 굶을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길이 막혔다. 여자는 아이를 키우고 살림해야 한다는 편견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딸은 적당히 키워 시집보내는 존재였고, 아들만이 외지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이런 불공평한 대우가 억울하고 분했다. 내게도 적당히 비가 내리고 거름을 주었더라면, 지금보다 튼실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쭈그러진 콩알을 고르며, 그것들이 생명의 흔적임을 떠올렸다. 아무리 작고 쭈글쭈글하더라도 이 콩들도 한때는 싹을 틔우고 자라던 존재였다. 콩을 다듬다 보니,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쭉정이 같았던 내 삶도 돌아보니, 전부 버릴 것만은 아니었다. 배움은 막혔지만, 그 대신 나는 집안일을 배우고 가족을 돌보며 나름의 열매를 맺었다. 크고 튼실한 알은 아니더라도, 작은 알맹이로서 내가 품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날 밤, 내 삶에도 다시 비가 내리기를 소망했다. 더 이상 쪼그라든 모습에만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그 속에서 다시 성장해 나가기로 다짐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밤하늘에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서리태처럼, 나도 늦더라도 언젠가는 단단히 여물 날이 오리라 믿으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