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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6-17 고난과 영광
우리는 하나님께 해드린 것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체면도 염치도 없습니다.
당당히 좋은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를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는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고 하시는 증거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를 감정의 고조나 신내림과 같은 무아지경에 빠지는 상태로 하느냐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 하지 않습니다. 17절을 봅니다.
이 말씀에서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고난을 위해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하고, 영광을 취하기 위해 없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7절의 핵심은 예수님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모든 가치를 공유한다는 뜻에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영광을 받는 상속자인데 그 상속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되어지는 모든 믿음의 삶이 곧 영광이고 고난이라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0월 4일 새벽 화성시 봉담읍의 아파트에서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죽이려고 둔기를 휘둘렀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죽지 않고 남편은 살인 미수죄에 2년 형을 받았습니다. 사건 내용은 이렇습니다.
300 백만 원의 월급을 받는 38세의 남편은 2008년 초 은행에서 1억5천만 원을 대출받아 내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풋풋한 새집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행복감은 잠시 아파트 값이 그 해 말부터 끝없이 떨어졌습니다.
반대로 이자는 치솟았고 급기야 사채를 빌렸는데, 눈덩이 같이 불어나는 이자가 월급보다 많게 되었습니다.
내 집을 마련하고도 일명 가난케 되는 하우스 푸어의 전형이었던 것입니다.
월급으로 감당이 안 되는 사채 빚에 시달리다가 온 식구가 다 죽자고 둔기를 휘둘렀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머리에 피 흘리던 아내가 목숨을 버리지 말고 차리리 집을 버리자며 매달려 참극은 면한 것입니다.
이 가장이 직장이 없어서 이 모양 이 꼴로 추락한 것입니까? 이 가장이 허황되게 도박이나 주식에 손을 댔기 때문입니까?
성실하게 일하는 회사원이었고 오직 가정 밖에 모르는 따뜻한 남편이고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서민들이 이렇게 처절하게 사는데 대출 이자를 꼭 올려야 합니까?
올리려면 예금이자도 올려야지요? 그러면 돈 있는 사람들이 전세 값이라도 올리지 않을 것 아닙니까?
비싸서 분양도 안 되는데 대형 건설사에는 싼 값으로 마구 대출해주어 건설 경기만 부양하면 뭐합니까?
우리는 현재 300만원의 월급을 받는 가장이 집을 소유하는 것이 과욕인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망해도 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혼자입니다.
많은 돈이 있고 친구가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 혼자라고 생각이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입니다.
큰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갈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 인간은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군중 속에 고독한 존재, 소란 속에 외로운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영광과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 사건을 접하면서 제가 살고 있는 현실과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올해 저는 사례비 160만원에 목회 활동비로 90만원, 합계 250만원을 교회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성 가족부에서 매달 10 만원씩 유신이 양육보조금이 나왔습니다. 제 총 수입은 260만원입니다.
그것 가지고 제일 먼저 십일조와 감사헌금, 선교헌금, 비전헌금, 주일헌금으로 54만원 이상을 고정헌금으로 드립니다.
여기에 절기 때가 되면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10만원에서 30만원이 추가 됩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이 따로 외부 선교하는 기관으로 4만원을 보냅니다.
우리 식구들 보험료 등으로 54만원이 지출되고, 공과금으로 15만원정도 지출됩니다.
피아노와 영어를 배우는 하영이 교육비로 30만원이 지출되고 부모님 용돈과 가족 회비로 30만원이 지출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과 전도 대상자들을 위한 접대비와 선물비로 20만원 정도가 지출됩니다.
이렇게 하면 고정 지출이 220만원이 넘습니다. 그럼 아내가 나머지 30여만원을 가지고 살림을 합니다.
찬거리도 사고 용돈도 씁니다. 제 용돈은 올해 10만원 한번 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중에 저보다 훨씬 적은 생활비로 살고 있는 분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제가 누리는 이 모든 삶의 혜택에 대해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잊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집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지금껏 삶을 한탄하거나 아내에게 폭력을 써 본적이 없습니다.
아내 또한 저에게 더 많은 돈이나 더 좋은 집을 요구해 본적도 없습니다.
지금 껏 사는 것에 대한 기쁨을 잃은 적도 없습니다. 늘 만족하며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온가족을 몰살하려 했던 그 남편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저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그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저도 가족을 부양해야 합니다. 그도 돈이 필요하고 저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가 저보다 50만 원정도의 소득이 많고 그에게는 직장인이라면 그렇듯이 보너스도 있을 것입니다.
지출 비교에 있어서 그의 자동차 유지비용을 제 헌금하고 비교해도 그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사람과 저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조금 더 비교를 해보면 그가 34살에 아파트를 장만했을 때, 저는 그 나이에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상가 한 칸에 전기 판넬 깔은 곳이 보금자리였고 9 개월 후에 15평 빌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병든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 때 제 사례비는 일정치 않았습니다. 대략 60만원이었습니다.
대소변 냄새로 좁은 실내는 좋지 않는 냄새로 쩌들었고, 매일 같이 바퀴 벌레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연막탄을 펴면 백 마리 이상씩 세까맣게 죽습니다. 새벽 예배 갈려고 불키는 순간 마퀴벌레들이 잽싸게 구석을 향해 달립니다.
밥그릇에 붙어있는 바퀴벌레를 보고 아내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감사했었습니다. 냄새나고 바퀴벌레가 우글대었지만 행복했었습니다.
그런 집이었지만 누우면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고 아내의 따뜻한 등이 느껴지고 새근거리는 하영이가 품에 있었습니다.
가난 중에도 주님이 거기 계셨습니다., 저의 부부의 마음에는 언제나 성령께서 내주 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 삶이 고난이라 생각되었는데 이제 돌이켜 보면 그것은 모두 저희 부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의 시간이 영광스러웠다고 오늘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개 가족 동반사는 수면제나, 번개탄을 펴놓고 죽는데 그 남편은 왜 둔기를 선택했을까?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쳐다보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데도 둔기를 휘둘렀던 것일까?
아무리 극단적인 선택의 순간이어도, 사랑하는 가족을 때려서 죽이는 것은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울분이 쌓였던 것입니다. 돈 벌어오라고, 무능하다고 구박 당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 부부는 고난을 영광으로 나누지 못하고 비참한 저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사랑에는 증오라는 독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과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정신적으로 병들고, 믿었던 사람 때문에 절망을 합니다. 그게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장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냉혹한 현실을 이기고 영광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아도 고난을 이기는 사람이 있고 영광스럽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살펴보면 그 사람들에게 고난이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고생해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고 나면 시간이 없다는 것과 외로움의 현실에 절망을 하게 됩니다.
젊은 날은 돈이 없고 그래서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돈을 모았는데 그러나 죽을 날이 가까운 것입니다.
고난이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그나마 젊음과 바꾼 재산을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뺏깁니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에게 버려진 채 비참하게 노년을 보내는 분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자식들에게 주지 않고 꼭 붙들고 끝까지 붙들고 있는 지혜롭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도 외롭고 서럽기는 내 마찬가지입니다.
시름과 무료함을 잊기 위해 갖는 것이라고는 하루 종일 바둑에 빠져있거나 매일 같이 산으로 출근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덜컥하고 고목나무 쓰러지듯이 넘어지는 날이 옵니다. 영광이 없습니다.
그것은 멋진 노년이라기보다 결국 죽음을 기다리기 위해 하루하루를 소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끝입니다. 묘지의 터는 크고 화려함의 차이는 나지만 인간은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땅 속에 눕습니다.
다 똑같습니다. 죽음의 저주를 풀지 못하는 어떤 화려한 인생도 결국 영광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고난뿐만 아니라 영광도 함께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세월 속에서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상속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면 “ 봤냐? , 죽어 봤냐고? ” 따지며 아예 말을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죽음 너머가 비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섭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터부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평소에 말로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 까짓 것 죽으면 그만이다. 짧고 굵게 살다가 죽겠다,
까짓 것 죽기 밖에 더 하겠냐‘고 호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본심이 아닙니다.
막상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리면 떱니다. 막 웁니다. 소처럼 웁니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소리도 지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모면하려고 전 재산을 털어서 수술하고 민간요법을 찾아 해멥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얼마나 비정하고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터부시 하며 죽으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무섭고 떨리는 것은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죽음 너머에는 인간이 상상도 못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을 인정하는 종교도 있고 죽으면 그냥 몽땅 없어진다고 하는 종교도 있지만 지옥만은 모든 종교가 인정합니다.
왜 지옥만은 인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스스로를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든 안 하든 천국과 지옥은 분명 존재합니다. 성경은 천국보다 지옥 얘기를 더 많이 합니다.
지옥갈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도 천국과 지옥 얘기를 잘 안합니다.
성도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죽어 봐야 안다’고 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어도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고, 죽음을 앞둔 강도에게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죽음은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오늘을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존귀히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도 귀하게 보시지만 죽음은 더욱 귀하게 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이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인사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여관입니다. 서울에 가면 26명의 왕이 500년 동안 살았던 궁궐들이 즐비합니다.
창경궁, 청덕궁, 덕수궁, 경복궁 등 왕들이 백성의 고혈을 빼내 영원히 살려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그냥 빈집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집은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거기가 진짜 집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있는 집들은 다 여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나그네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천국을 빼 버려도 윤리와 도덕적으로 최고의 종교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삶의 종교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빼 버린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에서 죽으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주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정수이고, 최고의 축복이고 최고의 보상이고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천국과 지옥 예기하는 목사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뭔가 무식한 목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미국 가서 성공학, 가정학, 인간 관계학, 상담학으로 박사학위 받은 목사들만 똑똑한 목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 속에는 미국을 찬미하는 것만 있지 천국을 찬미하고 그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최고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당신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으니 이제 편히 눈 감으십시오.’ 그런 말일까요? 아닙니다.
‘천국이 당신 눈앞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중 나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는 목사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우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천국 길을 아는 성도는 죽음이 실제로 두렵지 않으면 그날이 오면 영광스럽게 이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각을 조금 넓혀 보겠습니다. 현재 북한에는 인구의 2%인 48 만명 이상이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순교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탈북자들의 의해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산화가 된지 67년의 세월이 자났음에도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그들은 숨어서 신앙을 지켰으며 그것을 후손들에게 몰래 승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숨을 걸고 말입니다.
올 초 1990년 대 중반 평양에서 순교한 한 성도의 이야기가 빛과 소금지에 실렸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재단사로 일을 하면서 공산당의 눈을 피해 40년 이상 대를 이어 신앙을 지켜온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이렇게 증언 하였습니다. “ 토요일 저녁마다 작은 아파트의 뒤쪽 방에서 가족들이 모였죠.
아주 조용해야 했어요. 기도하고 찬양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 속삭였죠. 소리를 죽이기 위해서 이불로 머리를 덮기도 했어요.“
모임은 가족에서 친구로, 이웃으로 커져갔고 끝내 낌새를 챈 당국의 급습으로 아버지와 삼촌이 체포되어 공개처형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급히 산으로 도망했고, 국경선을 통과해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딸은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 가기 전 항상 그랬듯이 아버지가 절 안아 주시며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식사 때마다 언젠가는 정부가 알아내고 체포될 것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치러야 할 신앙의 대가에 대해 경고하셨어요. 죽음이 닥쳐도 예수님을 따를 거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기독교 박해 지수 세계 제 1위의 북한, 그 심장부에 살면서 어떻게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
성도 여러분 무엇이 진짜 교회일까요? 어떻게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일까요?
지금 남한에서는 예배마다 수백 명, 수천 명이 심지어 수만 명이 모입니다. 하지만 예배는 흥행에 목마른 공연처럼 되어가고 가정은 부모가 삶으로 녹여내고 사랑으로 자녀에게 전달하는 신앙의 전수가 없는 그저 공허한 합숙소가 되었습니다.
비교를 해 봅시다. 북한과 남한중에 어느 쪽이 신앙 생활하기가 어렵습니까?
어느 쪽이 더 많은 고난을 감래하고 있습니까? 어느 쪽이 신앙생활 하기가 위험합니까?
여러분은 북한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더 큰 고난과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북한과 남한 다 위기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의 결국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관과 같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살면서 교회 잘 다니느냐가 축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의 극히 일부입니다. 축복의 진짜 알맹이는 주님과 함께 천국을 상속 받는 것입니다.
이 천국을 상속 받기 위해 북한은 위협을 이겨야 되고 우리는 유혹을 이겨야 하는 것으로 고난이 짐지워져 있습니다.
북한은 위협을 실제적인 신앙의 적으로 경험되고 있지만 남한은 유혹을 실제적인 신앙의 적으로 경험되지 못합니다.
북한은 발각되면 곧바로 총살이지만 우리는 발각 되면 교회를 그만 나가면 됩니다. 다른 교회로 적을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목숨을 걸었고 우리는 손가락 하나 걸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신앙에 최고점에 대해 주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버리며 천국을 소유하는 북한과 천국이 있으면 좋고 말면 그만인 우리와 누가 위험합니까?
우리가 훨씬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목숨을 맡긴 상태입니다.
큰 집 사고, 이 몸뚱이 보신하고 평안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붙들기 위해 목숨 내놓고 믿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게으름의 유혹을 이기고 목숨 걸고 불평과 불만의 유혹을 이기고 목숨 걸고 서운함과 속상함을 이기는 겁니다.
목숨 걸고 분노를 누르고, 목숨 걸고 욕심을 뿌리치고, 목숨 걸고 음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예배하고 목숨 걸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목숨 걸고 불신 남편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만큼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더 큰 고난이 없고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
가정 보다 어려운 선교지가 없고 신앙의 부모님만큼 훌륭한 목사도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5달란트 맡은자나 2달란트 맡은자가 받은 칭찬은 똑같이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위협 앞에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유혹 앞에 목숨을 내놓는 것에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고난입니다.
더 큰 고난을 받고자 산속에 들어가서 금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광을 받고자 목사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대표기도 맡았으면 목숨 걸고 하시고, 예배 안내 하시고, 교회 청소 하는 겁니다.
목숨 걸고 성가대 시간 지키고 목숨 걸고 아이들 살피는 것이 교사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 작은 것에 목숨을 거는 것만큼 어려운 고난이 없고 그것만큼 찬란한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에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담대히 증거해 주며,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릴 것이며 죽어 세상 떠나는 날 천국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과 영광된 길에 승리자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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