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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본문/요한복음1:1,14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인간의 언어는 사고의 의상이다 라고 칼라일이 표현하였듯이 성경에 보시면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말하느니라.”(마12:34절)라고 한 말씀대로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그대로 입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언어입니다.
성경은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3:1, 7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손해와 비극를 치닫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못한 말 한마디로 자신과 타인을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고, 삶의 비극의 수래바퀴처럼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침묵은 금이라는 울타리 속에 우리들의 무관심을 감추어 왔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무대위에 오직 한 사람, 그의 사역과 그의 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언어)까지고 완벽하게 이루신 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로 갔다가 그냥 돌아와 책임추궁을 당할 때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절)라고 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속들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대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의 말씀은 예사 사람들의 말과 전혀 달랐습니다. 오직 그만이 “살리는 것이 영이니 육은 뮤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36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혀는 단물과 쓴물이 나오는 몸의 지체입니다.(약3:8)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씀 생활에는 악과 궤사가 없었으며 죽이는 독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라고 말씀하실 때 이 한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성육신하셨고 전지전능의 주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육신 하신주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3년반동안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이제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십지가에 달리셨고 마지막 운명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갈보리 산상에서 하신 말씀을 오늘 사순절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 사순절 제4번째 주일 이 아침에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일곱절로 되어 있습니다. 꼭 일곱 말씀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양은 사실 매우 적지만 그러나 크고 위대한 의미를 닮고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는 완전성 여기에서 우리가 해석하고 이래하려 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함을 제시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이땅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말과 그의 글들은 다 책에 기록하거나 또는 기념비와 같은 곳에 기록하고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져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보존된 유명, 무명의 사람들의 입술에서 나온 모든 말보다 십자가 살에서 구세주가 하신 일곱절의 말씀이 훨씬 더 유일하게 우뚝 세워져 남아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쏟아내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와 닿는 말씀으로 그분이 마지막으로 외치신 거룩하고도 장엄한 말씀입니다.
주님의 일곱절의 말씀 중에서 세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머지 네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일곱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수 있는 창문과 같은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하고 어두운 이 때에 하나님이 비추실 수 있는 빛이 투과하는 창문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한 은혜와 빛이 오늘 이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비추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다시 한번 주님의 거룩한 말씀앞에 겸손하게 마음에 새겨넣는 거룩한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거듭되는 곳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의 의중을 똑바로 응시할수 있는 특권을 가지며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가감없이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 론
1.그리스도의 피할수 없는 사역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교나 기도로, 또는 사도신경이나 찬송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일을 제정하거나 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 왔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고통당하시고 희생당하신 것을 역년즉 AD 와 BC 을 통하여 기록하였으며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믿음으로 평가 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의 중요성과 고난과 대신 당하신 희생을 극소화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중요하며 뿐 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전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될 위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주의 말씀을 연구하고 추구하는데 있어서 먼저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속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2.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본질
이 주제를 함께 나누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고 고난 당하신 분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이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리고의 인격에 관한 다양한 교리들 가운데서 인류사에 그 어떤 사람과 같지 않게 갈보리에서 죽으신 분을 우리 마음에 다시 되새겨 볼수 있는 것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바록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이나 그분께서 하신 말씀과 신분이 단순히 유익하다는 정도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같이 말한분들이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절대신성이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존재하는 교회와 기독교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관한 상반된 사상들중에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자들도 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신학자들과 특히 유니테리안 교도들은 삼위일체 즉 성부하나님,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삼위이신데 삼위가 일체이시다라고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들입니다.
분명히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외치신 말씀이 삼위중 일이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그분의 마지막 말씀 속에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마태27:4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첫째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서 세상에 왔는데 그가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 앞에 많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사상의 갈등이 있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성서는 오류없이 정확도를 가지고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된 그의 서신속에 분명한 그 증거를 볼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1, 14절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이 이상 더 해석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는 중요한 예수님의 품격과 진리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영속적이고 완전한 설명이며, 간결하나 장대하고 위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람과 같은 형상을 입으셨음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설명이나 이해를 해줄 수가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영원 이전에 존재한 말씀 즉 원어로는 로고스로 인용되고 있으며 그 말씀이 곧 육신이 된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자 사람 곧 참된 하나님이요 참된 인간의 존재인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바울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골로새서2:9절의 말씀입니다.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기자는 어떤 신화적인 인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육신의 모양으로 갖고 계신분 안에 하나님의 신성으로 가득차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떤 인간에게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완전한 신성, 곧 절대 신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반짝하는 단순한 신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의 전부 충만한 신성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전부를 육체 즉 인간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육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유형적인 육체, 곧 물질로 구성된 실제의 몸을 뜻합니다.
이제 어떤 분이 어찌 신성이 육체 안에 거할 수가 있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대답할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인간의 설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시면 그것을 잘 감안한 말씀이 있는데 딤전3:16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영원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또한 인간입니다. 그는 신인을 함께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가 지상에 있을때에도 그 어느 때라도 하나님보다 결코 못한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가 많은 반기독교적인 사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의 탄생과 그의 지상에서의 생활 전부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와 기적입니다.
이제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된 사람의 죽음으로 디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으로서 그의 죽음과 하나님으로서 땅에 사심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성경에서 그 답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고후5:18절 이하에 그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그 죽음을 통하여 화목하게 하는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하나니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풀이되는 “임마누엘”이심을 나타냅니다.(마1:23)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죄를 보상하실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한번도 제쳐놓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못해진 적도 없으십니다. 그가 다시 올 때 그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그가 우리를 대신하여(우리의 죄를)자신을 주심은(십자가에 달려)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2:13-14)”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는 탄생, 생활,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도 신인이었고 하늘에 계신 지금도 그러하며 그가 다시 오실 때에도 동일한 신인으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세상 죄를 보상하실수 있으며 죄인이 스스로 자기의 죄를 구속할 사람은 이 땅위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즉 완전한 신이며 인간인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성가운데 제2위(성자)의 죽음은 단순한 사람으로써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음의 구절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행20:28절입니다.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보다 깊은 의미는 신성과 인성의 동격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아버지를 갖지 않았으며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음을”(마1:18절) 알았습니다.
“동거하다”하는 말은 남녀가 육체적인 결합으로 당연히 아이가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과 동거하기 이전에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혈육의 근원에 대한 생리학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아버지가 새 생명(아이)을 갖기 원할 때, 이 생명은 아버지의 육적으로 생성됩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의 자궁안에 수태가 되었는데 어디서 그의 피를 얻었습니까? 우리는 의사인 누가의 손을 빌어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가운데 적어도 부분적인 해답을 얻을수 있습니다. 이 피는 “그의 (하나님)자기 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을 만드실 때에도 여인을 통하지 아니하고 생기를 불어서 만드셨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피를 신인에 주사 사람의 아버지를 갖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피로 지으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들이 비평가들이나 학자들 사이에 상이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에 있는 기록된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의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인으로 있는 동안과 십자가상에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뿌리신 그 피가 하나님의 피입니다. 인간의 피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그래서 그가 태어나고 산 생애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이런 식으로 돌아가신 것에 대하여 그것이 이미 하나님 스스로 계획하신 것이어서 나는 그의 죽음에 일점의 열등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셩의 속죄는 거의 피와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출30:10절/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레위기16:27절/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를 것이요.
민수기35:3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
죄를 속할 때 피에 의하여 했으며, 또 피를 뿌렸으며 이것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죽음의 모습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었으며(롬5:9절/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구속과 용서를 받았습니다.(엡1:7절/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가 깨끗이 씻기어 졌으며(요일1:7절/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로부터 풀려났습니다.(계1:5절/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갈보리 언덕에서 흘리신 그 예수님의 피는 죄로 가득찬 인간을 반드시 구원해야 할 목적으로 예비 된 유일하고 특별한 육신의 죽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온 하나님의 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악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우리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독생자께서 완전한 신인으로 이땅에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가셨고 그리고 메말려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아들을, 그리고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이것이 곧 갈보리 언덕에서 이룩한 것입니다.
3.예수님의 죽으심의 필요성
모든 복음주의 적 성경 학자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시고 죄많은 인간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내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엇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호하고도 독단적인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그는 죽음에 대하여 의무를 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의 불가피한 임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당연히 겪어야 했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절)“이었습니다. 그가 공생에 도중에 그에게 닥칠 죽음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시면서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죄로 가득찬 인간들의 죄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대속의 길을 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성령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테16: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가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8:31절)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9:22절입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요한3:14, 12:34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
위의 구절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똑같이 예수님의 원수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27:40-41, 막15:30-32)라고 조롱하고 모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주게서는 그가 원치 않으셨으므로 내려오려 하지 않으신 것이빈다.
”저가 남을 구한다하고 자기는 구하지 못하는 구나!“하고 조롱하면서 빈정대는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는 섬뜩하게 합니다. 이들은 영적이해에 대하여 아무 무지했던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셨으나 그 스스로는 구하지 아니하여야 할 피할수 없는 의무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남은 구하되 자신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 진리인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것은 불가피한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심령은 변화되지 않은채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확고한 주관 없이 살아가는 종교인들처럼 예수님이 이당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그 이유에 대하여 알려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배우는데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결심한 분이십니다. 이 구속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압도적인 사건으로써 십자가상에서 주께서 내려오지 않고 메달림으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감사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또 우리가 내려올 것을 개대했다면 이것은 엄청난 어리석음을 내 오인 것입니다.
구세군 창시자 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게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죽음은 절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깊이 명상하며 이 죿음이
”그의 다함이 없는 사랑“의 발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제한이 없습니다.
십자가 넘어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구나 하는 고백을 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시작하면서 십자가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받는데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임을 즉 불가피한 희생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의 죽음은 죄인의 용서를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죄를 위임한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행동이 아닙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땅에 죄인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녕 죽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했던 그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정직하다고 할찌라도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고 거역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며 또 ”죄의 삯은 사망“(롬6:23)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에서 손을 떼야 하며 모든 선한 일에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하며 그 값을 우리 스스로 감당하고 치루어야 하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엡1:7)“ 용서가 마련된 것입니다.
우리의 사함은 오직 ”그의 피“에만 있습니다. 그의 말씀으로만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갈보리 언억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구속사역 즉 그의 몸까지 내어 던졌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게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죄중에 최고의 큰 죄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에는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고 합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게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인의 화평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죄인사이의 불와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용납되지 않은 것처럼 화평도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평을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존재하는 불화는 육신의 생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습니다.(롬8:7)“ 이 소원의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불화를 낳게 하며 그리고 아직도 이 죄는 계속하여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해를 위해 바른 길을 찾는 것만이 최대의 과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여러분 스스로의 힘을 기울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1:19-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하나님의 충만 절대 신성이 인간의 몸안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1절에는 그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하십니다. 사함을 받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를 믿는 영혼만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죄인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의 순결의 결여는 씻음을 받지 못한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데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문제 대속과 순결을 위하여 이땅에 완전한 신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음은 죄인을 위한 화평과 용서의 결과를 낳았으며, 이 죽음을 감당하신 그는 말씀으로만 행한 것이 아니요, 몸소 자신을 희생하셨으며, 말뿐인 공허한 계획으로 거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대신 죽으신 것임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용서나 화평은 우리에게 불완전함을 낳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죄 때문임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히9:14절에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사람의 양심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타락했고, 병들었습니다.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믿는 순간 용서와 화평을 받은 죄인된 성도는 또한 양심의 순결을 받으며 구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일들을 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순결하기 보다는 불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불결함보다 순결함으로 변화 받게 됩니다.
더러운 양심 대신 하나님의 자녀는 이제 그 더러움에서 구출된 것을 알게되며, 이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욕망은 세상 욕망이 아니라. 그의 구원자를 향하여 치솟게 됩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롬5:8)“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죄인인 우리의 능력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제 예수 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과 화평해졌으며, 순결해졌습니다. 그러나 위험과 재난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말과 행동과 사고의 그릇된 유혹에서 아믹 면제되지 못하였습니다. 죄를 이겨 승리의 삶을 살기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생활은 죄로부터 옮겨질 스스로의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옳고 그릇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최고 죄상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 중심의 생활이 죄로부터 승리생활을 보장받게됩니다. 우리 스스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롬7:18-21절에서 구원받았어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받아도 말씀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계속해서 갈등 가운데 살게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악을 극복하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나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단순히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말씀 가운데 거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롬10:10절에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1더하기1=2라는 식의 지적인 고백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적인 고백, 신앙의 눈이 떠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우리의 삶을 지켜주십니다. 문제의 해결자로 역사하십니다. 악을 이기도록 역사하십니다. 삶의 승리할수 있도록 이기게 하십니다. 이런 축복이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알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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