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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활동 스크랩 조선폭도토벌지 [朝鮮暴徒討伐誌]
문대식 추천 0 조회 1,039 17.01.23 1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폭도토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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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주차군사령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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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폭동의 기인(起因) 및 경과의 개요
제1장 폭동의 기인
1.구한국 적년(積年)의 폐단에서 온 무질서
원래부터 구한국 정치의 문란은 그 극에 달하여 있었으나, 특히 사법·행정의 제도는 다같이 이폐(弛廢)되어, 초적야도(草賊野盜)의 무리가 심히 많았다. 그 중 화적(火賊)이라 창하는 것은 총기를 휴대하고 수명 내지 수10 명이 집단을 이루어 구한국 전토 각지를 횡행하여 약탈 포학을 마음놓고 자행 하였으나, 위정자는 끝내 그것을 소탕하지 못하였다. 또 그 군대라 칭하는 것도 이들 화적에 비하면 그 인원의 다과(多寡), 무기의 정부(精否) 등은 천양지판이었으나, 그 소질에 있어서는 거의 그들 화적과 대차가 없었다. 그들 군대는 지방 무뢰한들이 그저 의식(衣食)을 얻기 위하여 병영(兵營)에 투신한데 불과하므로, 실제 그 병원(兵員)의 대부분은 병기를 악용하여 혹은 재화(財貨)를 강청하거나, 또는 부녀자를 욕보이는 등 추악한 행위를 감행하여, 도리어 양민들의 고혈을 빠는 해충이었다. 또 경찰도 거의가 오직 권문폭리(權門暴吏)의 수족(手足)이 되어, 그 주구나포(誅求羅捕)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무 대소의 관리들도 역시 성심성의 군국을 생각하는 자 적고, 관직을 일종의 영업으로 보고 자기의 구복(口腹)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고, 또 그 영달(榮達)을 꾀해 주구(誅求)의 세력 범위를 확대시키는 데 힘쓰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뇌물이 공공연히 횡행하고 중상모략이 끊이지 않아 반대파는 그대로 매장해 버리는 상황으로, 그 양민이 도탄에서 허덕이는 점에 이르러서는 음양교졸(陰陽巧拙)의 차는 있을망정 거의 전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역대의 왕자(王者) 또한 그 대개는 왕위(王位)를 사치유일(奢侈遊逸)에 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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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도구로 삼아 관직을 팔아 내탕금(內帑金)을 증가시키는 데 힘썼고, 왕족도 대개 이와 같아 그 안중에는 창생이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밖에 창생(蒼生)의 적으로서 유생(儒生)과 양반(兩班)이 있다. 유생이란 원래 경학(經學)을 닦아 공맹의 가르침을 조술(租述)하는 것이 그 사명이었으나, 결국에는 학문으로써 서로 다투어 곡학아세(曲學阿世), 권력에 부수하려 들고, 혹은 헛되이 강개(慷慨)하는 언론을 펴서 그것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하여 제각기 이(利)만을 좇을 뿐 공익을 돌보는 자 적었다. 양반은 그 가문이 높아 자주 궁중에 접근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혹은 관직매매(官職賣買)의 중개도 하고, 혹은 자기의 영달을 얻기 위해 음모와 모함을 일삼아, 심지어는 평지에 풍파를 일으켜 그 틈을 타서 출세해 보려는 자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이 양자는 사민중의 상위에 있었으므로, 오만하기 짝이 없고 유타를 일삼아 농공상은 노예시·학대하여 양민에게 고통을 준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므로 일반 창생은 끊임없이 동서남북에서 압박을 받아 오늘의 부자(富者)가 반드시 내일의 유복을 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흉악이 처벌되지 않고 충절이 칭찬 받지를 못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는 독립 진취의 기상은 멸각(滅却)되고 상하 똑같이 소위 취생몽사의 기풍에 젖어, 그것이 적년의 폐정 습관이 되어 식산흥업(殖産興業)의 길이 여기서 두절되고, 문물(文物)이 날이 지남에 따라 퇴폐되어 더욱 더 쇠망의 근원을 깊게 했다. 즉 전일에 있어서 구한국의 상하는 겨우 하급 인민과 일부 청백한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 심정과 결과에 있어서는 거의 적도(賊徒)에 유(類)하지 않는 자 없고, 전토(全土)를 그들에게 유린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전국 도처에 이미 분규 소란이 터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 소리가 비교적 크지 않았던 까닭은 오직 구린 자가 자신은 그 구린내를 모르는 데 기인했을 뿐이다.
2. 일본 세력 부식 후의 동요
폐정의 인습이 전술한 바와 같아 명치 27~28년 전쟁의 동기가 된 동학당(東學黨) 일파의 소란으로 번지고, 이어 명치 38년 11월에 체결된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에 의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거두어 한국을 보호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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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 주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이래로 궁중을 근원으로 한 배일 수단에 관한 각종 음모는 재야원로(在野元老) 혹은 양반 유생들의 선동에 의해 부단히 치열하게 강구되어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삼남 지방은 고래로부터 유생과 양반의 독점적 무대였었던 관계로, 이 지방에서 경기도 방면에 걸쳐 배일사상의 전파가 가장 빠르고, 그리고 가장 깊었었다. 즉 명치 39년 5월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을 명분 삼아 암암리에 각국 사신의 동정을 구해 비도(匪徒) 2백 여 명으로 충청남도 홍주성(洪州城)에 웅거, 스스로 의군(義軍)이라 칭하고, 반기를 든 양반 민종식(閔宗植)은 비교적 완강해서 토벌하러 갔던 우리 헌병 과 경찰관도 조속히 그를 진정(鎭定)시킬 수 없었고, 한국 군대 역시 그것을 담당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우리 수비병 약 반대대(半大隊)와 기병 약간을 파견해서 그를 진압시켰다.
그보다 앞서 홍주의 비도들과 호응해서 경상북도 안동 부근에서 일어난 유생 70~80명이 가담하고 있는 폭도와, 전라북도 순창 부근에서 소란을 기도한 노유(老儒) 최익현은 함께 홍주 평정 후 한국 군대에 의해 진정되었다.
그 후 서정의 개혁이 착실히 진척되고, 재무의 쇄신, 경무기관의 확장 등 제반 시설이 더욱더 면목을 새롭게 함에 따라, 지방의 우민(愚民)들은 자칫 하면 그 취지를 오해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이들 신정의 진척과 이해가 상반 되는 관속들은 은근히 그들을 선동했으므로 각지에서 시시로 작은 소요가 발생했으나, 그것은 전부 하나의 우발 사건으로 끝나고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권모술수를 성공의 비결로 오신하고 있는 한황(韓皇)은 시종 재외(在外) 망명자와 기맥을 통해 제종 음모를 강구, 일한 관계를 파괴하려는 생각에서 이미 그 외교의 일체를 통털어 제국에 위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치 40년 7월 상순 비밀리에 그 사신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해아(海牙)로 파견, 열국에 애소하여 일본의 굴레를 벗으려다가 폭로되었다. 그러자 우리 외무대신을 한국에 파견시켜 한황의 양위(讓位), 내각의 교질(交迭)이 단행되자 물정(物情)이 소란해지고 유언(流言)이 백출하고, 혹은 이로써 일본이 강압적 수단을 쓰는 것이라 보고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앞장서서 민심을 선동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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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불온도(不穩度)가 높아져, 7월 19일에는 경성부(京城府) 종로(鍾路)와 대한문전에서 불상사를 야기 시켜 경성 시가 거리에 유혈의 참극을 연출하기에 이르렀으나, 경비의 만전으로 동월 23일로써 거의 평정 상태로 회복되었다. 동월 24일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은 무사히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8월 1일 한국 군대의 해산이 실시되자, 때마침 시위보병(侍衛步兵) 제1연대(第一聯隊) 제1대대(第一大隊)와 그에 인접하고 있는 동(同) 제2연대(第二聯隊) 제1대대(第一大隊)는 해산 식장에 이르기 전에 제1연대 제1대 대장의 자살을 유발(誘發), 각기 병영에서 폭발되어 교관인 일본 장교 등 에게 박해를 가하려고 찾아다니다가 병영(兵營)을 접수차 출장한 아군대에 대해 반항했으나 잠시 후 그것을 진정시켰다.
이 충돌에서 그는 다대한 사상과 포로를 냈으나 일부는 도주해서 각지로 분산했고, 폭발의 진상은 각지에 오전(誤傅)되어 드디어 그후 수년에 걸쳐 소란의 동기가 되었다. 그 밀사 사건이 폭로된 후 한황의 양위 신협약의 체결에 즈음해서도 아직 현저한 동란은 없었고, 겨우 7월 22일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에서 봉기한 약 3백 명의 비도(匪徒)가 있었으나, 우리 경찰관의 힘에 의해 곧 진압된 외에는 감히 무기를 동원하는 따위의 큰 소요는 없었다. 그러나 8월 1일 경성에서 있었던 소충돌 이래 불온한 공기는 갑자기 증가, 각지에 만연해서 8월 6일에는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진위대(鎭衛隊)의 폭동이 되고, 동월 10일에는 경기도(京畿道) 강화도(江華島) 분견대(分遣隊)의 반항이 되고, 기타 경기·강원·충청·황해·경상·전라 등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폭도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밖의 군대에 있어서는 경비가 적절했으므로 다행히 무사히 해산을 끝내기는 했다. 그러나 원래 한국의 병영은 부랑 무뢰한들의 수용소 같은 느낌이 있었으므로, 군대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이들 병정은 거리로 쫓겨 나오게 되자, 위험사상(危險思想)을 지방에 전파시키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도 없고 또 항심(恒心)도 없는 그들의 대개는 정업에 종사하는 자가 적어 군대 해산할 당시 관급(官給)한 다소의 은사금(恩賜金)은 곧 주식(酒食)에다 소모해 버리고, 드디어는 갈 곳이 없어 비도(匪徒)의 무리로 투신하게 되는 기운을 조장하게 되어, 각 지방의 동란을 더욱 더 확대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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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 병사를 많이 포섭한 비도는 일반 폭도에 비해 적어도 대오를 짜 가지고 전투하는 방법과 사격술을 알고 있으므로 그 저항력이 비교적 완강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후일 헌병 보조원 제도를 실시하게 되자 해산병을 위해 생계상의 광명을 주게 되어 감연히 이에 응하는 자가 적지 않았고, 일단 폭도에 투신했던 자도 또한 꼬리를 물고 그것을 희망하는 자 많게 되었다. 원래 그들 잡배(雜輩)들을 깊이 신용할 수는 없었으나, 이들을 토벌대로 이용하는 통역으로 삼아 관민의 의사소통을 꾀하고 밀정으로 삼아 폭도 소재지를 검찰시키는 등 직접 간접으로 토벌상에 효과를 가져온 점이 적지 않았다.
폭도의 기인(起因)은 대략 전술한 바와 같으며, 이것을 약언(約言)하면 즉 다음과 같다.
① 한국 군대의 해산에 즈음하여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고, 또는 단체 해산 후 은사금을 소비해서 의식에 궁한 장교 하사졸을 주뇌(主腦)로 해서 그에 부화뇌동하여 그 배하로 모인 자.
② 지방에서 명망이 높은 유생 또는 양반으로서 완고하고 시세의 추이를 모르며, 새로운 시정 방침을 좋아하지 않아 도당을 모아서 궐기한 자.
③ 정치적 야심을 품고 만일을 요행 삼아 다른 소요에 편승한 자.
④ 종래 화적이라 칭하고 각지를 횡행하며 약탈을 일삼던 자로서 시세를 이용해서 의병이라 자칭한 자.
이 밖에 함경남도(咸鏡南道) 갑산군(甲山郡) 부근에서 일진회원(一進會員)의 전횡을 규탄하고 서로 결속해서 폭발한 일파가 있었으나, 곧 위의 4항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결의를 하고 자진 폭도가 되는 자가 비교적 적지 않았으나, 소요의 선동함에 있어 야소교 신도가 유력했던 점, 그리고 아직도 배후에는 그들의 불평과 사대사상을 이용해서 감언으로써 그를 조종하여 자기의 세력을 확장해서 그 이익을 꾀하는 선교사가 존재했던 것은 실로 덮어 버릴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폭도 유별은 상기와 같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진정한 목적에 있어서는 명(名)과 이(利),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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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아니라, 그 부하들은 똑같이 무지몽매한 무리들로서 오직 의식을 얻기 위해 뇌동한 자, 또는 강박에 견디지 못해 일시 이에 가담한 자에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안중에는 처음부터 군국(君國)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충군애국을 표방하고 국권 회복이란 미명 아래 각처를 횡행했는데, 그 다소 강대한 것도 겨우 I~2회의 충돌로 다소의 손해를 받으면 곧 그 전의(戰意)를 잃고 오로지 우리 예봉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따라서 그 집산(集散)이 일정치 않아 시리(時利)가 없으면 곧 양민으로 분장해서 그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시 일어나 적(賊)이 되는 등은, 일면 우리 토벌대의 정예에 대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한편 의군(義軍)이란 이름 밑에서 그 사리(私利)를 취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看破)할 수가 있다.
요컨대 비단(匪團)의 행동은 언제나 토벌 부대의 이목을 피해 각지로 횡행해서 놀랄 만한 신속과 정확성을 가지고 우리 행동을 찰지(察知)하고, 토민의 원조와 지리적 편의에 의해 수시수처(隨時隨處)에 출몰해서 그 폭행을 함부로 하고, 도처에서 금전 미곡을 강제 징발해서 오직 그 사복만을 채우려고 힘쓰는 데 지나지 않았다. 간혹 우리 수비대를 습격하고 또는 군대에 대해 교전을 감행해 오는 수가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은 우리 병수(兵數)가 가장 근소한 틈을 타는 경우에 한했었다. 그러므로 이것의 토벌 행동은 분명(奔命)에 지쳐 버리는 수가 많고, 일거 섬멸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어 마침내 그 섬멸 시기를 길게 끌게 되고 말았다.
대저 명치 40년 7월, 사건이 발생되었을 때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겨우 1개 사단 뿐으로서 경성(京城) 부근의 수비는 자연 불완전하였으므로 급거 평양 및 북관(北關) 방면에서 군대를 초치(招致)하는 등 임기응변의 수단을 취해 완전 배치에 힘을 썼다.
그 후 동월 말에는 보병 제12여단이 도착하고 동 10월에는 기병 1연대의 증파가 있었고, 다음 해인 41년 5월에는 보병 2연대가 도한(渡韓)하여, 병력이 점차 증가됨에 따라 토벌 행동이 더욱 용이하게 되어 진압 효과도 또한 점차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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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 진압 경과의 개요 일람표]
연
월별
폭도가 점거한 주요 지방
주요한 폭도 괴수 및 폭도의 개수
토벌대를 파견한 주요 부대
토벌 결과의 개요
39년
(1906년)
5월
충청남도
홍주성
(洪州城)
민종식(閔宗植) 이하 약 500명
보병 제 60연대 대대장 전중소좌(田中少佐)가 지휘하는 보병 2중대, 기관총 2, 기병 반소대, 헌병, 경찰관 및 한국 군대 약간
약 반수의 손상을 주고 수괴를 놓쳤으나 며칠 안 가서 헌병에게 잡혔다.
6월
전라북도
순창(淳昌)부근
최익현(崔益鉉) 이하 약 450명
남원(南原) 및 전주(全州)의 한국 진위대
수괴 이하 전원 투항

경상북도
평해(平海)부근
신돌석(申乭石) 이하 약 1천명
대구(大邱) 및 원주(原州)의 한국 진위대 약 300명
그저 구축했을 뿐
40년
(1907년)
7월
경성(京城)시가의 동요
(한황 양위에 즈음해서)
폭민(暴民) 및 탈주병 약간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야포병 중대 기타 경찰관 전원을 출동시켜 시가를 경호하다
경찰관 및 양민에 약간의 피해가 있었으나 포화를 열지 않고 일시 진정되었다.

경성시(京城市)
시위보병 제1·제2연대의 각 제1대대 군대 해산에 있어 반란
보병 제51연대 판부소좌(坂部少佐)가 인솔하는 보병 3중대, 기관총2, 공병 약간
약 800명에게 손상을 주었다. 기타는 사방으로 도망쳐 후일 폭도에 투신
8월
강원도
원주(原州)
원주진위대 군대 해산 반란
충주(忠州) 수비 대장 이궁소위(二宮少尉) 이하 19명
거류민 및 경찰관을 수용해서 충주로 귀환

경기도
강화도(江華島)
강화도분견대 폭민 도합 약 800명
보병 제14연대 대기소위(大崎少尉) 이하 보병 1소대, 기관총 2
그저 구축해 버렸을 뿐

강원도
원주(原州)부근
민긍호(閔肯鎬) 이하 약 1000명
보병 제47연대. 하림소좌(下林少佐)가 인솔하는 보병 2중대, 기관총 4, 공병 1소대
각처에서 약간의 폭도를 죽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해서 토벌 효과는 현저하지 못했다. 상기 토벌대중 불

충청북도
우동(右同)
보병 제51연대 족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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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 부근

좌(足達中佐)가 인솔하는 보병 3중대, 기관총 4, 기병·공병 각 1소대
파 소좌(不破)가 인솔하는 부대는 임무종료 후 그 수비지 대전(大田)으로 귀환하고 하림(下林)·족달(足達) 2지대는 9월 하순경까지 토벌을 속행해서 그 부근은 일시 진압이 되었으므로 그 편성을 풀고 하림지대는 수원(水原)으로, 족달 지대는 경성으로 귀환.
강원도
강릉(江陵)·춘천(春川)·삼척(三陟)부근
김덕제(金德濟) 이하 약 500명
보병 제50연대의 2중대, 동 제51연대의 1중대, 기관총 2
경기도
이천(利川)·장호원(長湖院)·여주(驪州)·양주(楊州) 부근
민긍호(閔肯鎬)의 부하 약간
보병 제14연대 불파소좌(不破少佐)가 인솔하는 보병 2중대, 동제 51연대의 1중대
9월
경상북도
문경(聞慶)부근
이강년(李康䄵)이하 약600명
신돌석(申乭石)이하 약 300명
보병 제14연대장 국지대좌(菊池大佐)가 인솔하는 동 연대 및 동 제47연대의 대부분, 기병반소대, 산포병 1소대, 공병 약간
약간의 손상을 주어 일시 동 지방은 정온을 찾았다.

경기도
양주(楊州)·파주(坡州)·적성(積城) 부근
조인환(曺仁煥)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진묵(金溱黙) 이하 약 100명
보병 제51연대 전변대위(田邊大尉)가 인솔하는 보병 1중대와 반소대, 산포병 1소대, 공병 1분대
보병 제52연대의 1중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타방면으로 도망쳐 적세(賊勢)는 재연될 현세
10월
강원도
양양(襄陽)·춘천(春川) 부근
충청북도
쌍호(雙湖) 부근
경상북도
송면장(松面場) 부근
이언용(李彦用) 이완채(李完蔡) 이구채(李求蔡) 지용기(池龍起) 이인재(李寅在) 신창현(申昌鉉) 등이 인솔하는 200 내지 600명의 집당
10여 곳에 배치한 각 수비대, 보병
제50연대의 1중대
각지에서 약간의 손상을 주어 일시 정온해졌다.
경기도
적성(積城) 부근
왕회종(王會種) 이하 약 400명
보병 제50연대 제8중대
폭도의 소굴 심원사(深源寺)를 불태웠다.
경상남도
김동식(金東植)
진주(晋州)파견대
고광순(高光珣)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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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월
지리산(智異山)
고광순(高光珣) 이하 약 300명

수십명을 죽이고 군거지를 불태워 다소 정온해졌다.
전라북도
순창(淳昌)·임실(任實)·진안(鎭安)·용담(龍潭) 부근
김동식(金東植) 이석용(李錫庸) 이하 약 300명
10여개소에 있는 각 수비대
폭도의 출몰이 교묘해서 토벌 효과 현저하지 못함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 부근
이강년(李康䄵) 이하 약 600명
보병 제13연대 적사소좌(赤司少佐)가 인솔하는 보병3중대 기관총2
다대한 손해를 주고 폭도의 소굴을 전복시킴
강원도
고모곡(古毛谷) 부근
이인영(李麟榮) 방관일(方觀一) 정대일(鄭大一) 이하 약 700명
보병 제51연대, 판부소좌(坂部少佐)가 인솔하는 보병1중대, 기산포병, 공병 각 1소대
약간의 수괴를 죽였다.
함경남도
삼수(三水)부근
차도선(車道善) 이하 약 400명
혜산진(惠山鎭)·갑산(甲山) 수비대 및 기병 약간
진압하지 못하고 이듬해로 넘어감
황해도
서흥(瑞興)부근
김수민(金秀民) 이하 약 500명
황주(黃州)·해주(海州)·서흥(瑞興) 등의 각 수비대

41년
(1908년)
1
월부터 3
월까지
경기도
임진강(臨津江) 유역 일대
허위(許蔿)이하 약 400명
보병제 47연대 제5중대 기타 십수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아직 진정시키지는 못했음.
황해도
철도선에서 일대의 지역
거의 계통이 없는 초적(草賊)이 각처에서 봉기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민긍호(閔肯鎬) 이하 약간의 주모자를 죽였으나 강원도·경상북도에 걸쳐 횡행한 이강년(李康䄵)은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다.
강원도
주천(酒泉)·낭천(狼川)·횡성(橫城)·인제(麟蹄)·춘천(春川) 부근
민긍호(閔肯鎬) 이하 약 700명
충청남북도
음성·청주·
계통없는 초적 약 400명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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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월부터 12월까지
제천(堤川)·공주(公州) 부근
토벌 결과 점차 평온해졌다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안동(安東)·예천(禮泉)·영주(榮州)·경주(慶州) 부근
신돌석(申乭石) 김성운(金成雲) 유시영(柳時榮) 이하 약 400명
십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진정(鎭定)하지 못했음.
경상남도
가야산(伽倻山) 부근, 전라남도 일대
김동식(金東植) 기삼연(奇參衍) 이하 약 600명
십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약간의 손해를 주었으나 진정하지 못했음.
함경남도
갑산(甲山)부근
차도선(車道善) 이하 약 400명
보병 제50연대, 삼목소좌(三木少佐)가 인솔하는 보병2중대, 기병1소대
차도선(車道善) 이하 귀순함.
경기도
임진강(臨津江) 유역 일대
강화도(江華島)일원
허위(許蔿)·김수민(金秀民)이하 약 500명
십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허위(許蔿)를 생포
황해도
철도선 이서 일대의 지역
민효식(閔孝植) 허덕천(許德天) 이하 약 600명
십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토벌의 효과 현저하지 못함.
강원도
금강산(金剛山)부근
이강년(李康䄵) 이하 약 1000명
십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김원식(金元植) 기타 약간의 수괴를 죽이고 점차 정온해져 감
충청북도
제천(堤川)부근

이강년(李康䄵) 이하 100명
제천수비대장 이하 29명
이강년(李康䄵)을 생포
충청남도
정산(定山)·청양(靑陽)·유구(維鳩) 부근
계통없는 초적(草賊) 약400명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아직 진정시키지 못함.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 소백산(小白山) 부근
변학기(邊鶴基) 이하 약 1000명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일월산(日月山)·소백산(小白山) 부근은 폭도의 소굴로 산각벽원(僻遠), 도저히 섬멸을 기할 수 없으므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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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 수비망을 엄중히 하여 경계를 엄중히 했음.
경상남도
지리산 부근
유명국(柳明國) 이하 약400명
십여개소에 배치된 각 수비대
유명국(柳明國) 이하 약간의 수괴를 생포하고 수비망을 엄밀히 했다.
전라남북도 거의 일원에 걸친 지역
이학사(李學士) 이하 약 1500명
20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토벌 결과 현저하지 못했다.
평안남북 양도의 동부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및 그 부근
양혁진(梁嚇鎭) 이하 약400명 홍범도(洪範圖) 이하 약800명
10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10여개소에 배치한 각 수비대
점차 정온해졌다.

홍범도(洪範圖)는 노령(露領)으로 도망치고 그 후 점차 평온해졌다.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
이번윤(李範允)의 부하 약 500명
회령(會寧)·경흥(慶興)·웅기(雄基)·청진(淸津)의 각 수비대
무기를 버리고 대안(對岸)으로 도망쳤다.
42년
(19 09 년)

경기도
양주(楊州)·영평(永平)·연천(連川)·삭녕(朔寧) 부근
이은찬(李殷贊) 이하 약 500명
10여 곳에 배치한 각 수비대
이은찬(李殷贊)을 포박했으나 수명 수괴가 있어 완전히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황해도
금천(金川)·배천(白川)·연안(延安)·황주(黃州)·온정원(溫井院) 부근



전라남북도 거의 일원에 걸친 지역
전해산(全海山) 이학사(李學士) 심남일(沈南一) 이하 약 300명
수십 군데에 배치한 수비대 헌병
8월에 남한 대토벌을 실시해 수괴 심남일(沈南一) 이하 2000여명을 사상 포획 또는 자수 투강시켜 거의 평온 상태로 돌아갔다. 기타 제도(諸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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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혀 주도적인 수괴를 잃어 다소 초적(草賊)의 출몰은 있었으나 대체로 평온했다
43년
(19
10
년)

경상북도
소백산(小白山)부근
최성천(崔聖天)이하 약 300명
임시 파견 보병 제1연대 제3대대

최성천(崔聖天) 이하 약간의 수괴를 포획하여 거의 진정시켰다.

황해도
개성(開城)·해주(海州)·서흥(瑞興)의 다각형 지역내
이진용(李鎭龍)김정환(金貞煥) 이하 약 500명
보병 제29연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7중대 및 기병·공병 약간
100여 명을 잡았으나 수괴를 놓쳐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기타 제조(諸道)에서는 다소 초적이 출몰했으나 대체로 평온하였다.
44년
(19
11
년)

황해도
해주(海州)·평산(平山)·곡산(谷山) 부근
이용진(李龍鎭)한정만(韓貞滿)김정환(金正煥)채응언(蔡應彦) 이하 약 500명
보병 제3여단장 중촌소장(中村少將)이 지휘하는 보병16중대, 기병2중대 및 헌병·경찰관 약간
수괴는 놓쳤으나 약 250명의 폭도를 잡고 그 후 수비대 경계망을 엄중히 하자 적세(賊勢)는 질식되고 말았다.
폭도 토벌은 원래 보통 전투와 같지 않아 그들이 만약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기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을 소탕하는 것은 극히 쉬웠겠으나 그들은 마치 파리떼 같아 아무런 저항력도 없어 오히려 그것을 섬멸하기는 곤란했다. 더구나 선토(鮮土)의 기후는 하동(夏冬)은 길고 춘추(春秋)는 짧으며 한서는 다같이 극렬해서 야외 행동에 적지 않은 고통을 느꼈고, 또 촌락이란 어디나 한빈(寒貧)해서 물자가 적고 교통 또한 심히 불편하였으므로 군수품의 조달 수송에 심대한 곤란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폭도가 일차 노략한 지방은 한층 더 심했다. 특히 사건 발생 당초에 있어서는 우리의 배비(配備)가 아직 완벽하지 못해서 경보에 접할 때마다 원격지에 있는 주둔처에서 비교적 강대한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진정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맛보며 겨우 필수품의 공급을 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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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곤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대의 사기는 극히 왕성해서, 적의 존재를 알게 되면 하시를 막론하고 또 길의 험난을 돌보지 않고 맹렬 과감하게 그것을 추격, 연일연야 거의 휴양(休養)을 폐하고 토벌에 종사한 점 또한 적지 않았다.
그 후 우리 병력이 점차 증가되고 수비 배치처도 증가시켜 경계망을 두껍게 하고, 진정담당구역(鎭定擔當區域)을 정하여 그것을 수비대에 배분시키게 됨에 따라 지방의 진무(鎭撫), 적도의 토벌은 다같이 현저한 공을 이루게 되었다.
헌병과 경찰과는 군대에 수반하여 행동을 같이해서 일체의 노고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폭동의 초두(初頭) 병력 배치가 아직 충분치 못했을 시기에 있어서는 폭도들은 그 고립무원 상태에 있는 틈을 타 흉포를 극했으므로, 비참한 참해를 입어 그 화가 처자에 미친 자도 또한 적지 않아 이 점 가장 동정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명치 40년 10월 칙령(勅令)으로 주둔 헌병에 관한 제도를 개정함과 동시에 현저하게 그것을 증원하고, 이듬 해 41년 6월에 다시 헌병보조원(憲兵補助員)을 창설하여 점차 지방에 배속시키자 당시 그 배치를 두껍게 했던 군대와 상응, 폭도의 진압과 지방 치안 유지에 다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주둔군 사령관은 명치 40년 9월 한국민 일반에 대한 고시(告示)를 발하여 한국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비도(匪徒)를 격멸해서 서민대중을 도탄에서 구하려고 한다는 목적을 밝히고, 비도에 대해서는 귀순하는 자는 감히 그 죄를 묻지 않고, 또 그것을 포박하거나 그 소재를 밀고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중상을 줄 것이나, 만약 완고하게 깨닫지 못하고 비도에 투신하거나 또는 그것을 은피시키고 혹은 흉기를 장익(藏匿)시키는 자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뿐아니라, 그 책임은 현행범의 촌읍(村邑)으로 돌려 부락 전체를 엄중하게 처치할 것을 밝혀 깨우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 폭도는 그 복장이 양민과 다름이 없는 자가 많을 뿐 아니라 시리(時利)가 없으면 곧 무기를 버리고 양민을 가장하여 우리의 예봉을 피하는 수단을 취하였다. 그리고 특히 사건 발생 초에 있어서는 원주민도 그들 폭도에 동정하여 그것을 비호하는 경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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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으므로, 토벌대는 이상 고시(告示)에 의하여 그 책임을 현행범 촌읍으로 돌려 주륙(誅戮)을 가하고, 또는 전촌을 소각하는 등 처치를 단행하여 충청북도 제천(堤川)지방 같은 곳은 거의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원래 그들 폭도와 그 폭도를 비호한 원주민의 죄라고는 하지만 무고한 양민에 대하여서는 크게 동정해 마지않는 점이 있었다.
즉, 그 가재를 불태우고 혹은 부형을 살해당한 자는 원한을 품게 되고, 또 폭도에 가담해서 활로를 얻으려는 자가 생기게 되어, 폭도의 강압에 못 이겨 투신한 자와 상응해서 폭도의 기세는 더욱 더 증식하게 되었다.
이에 이르자 군사령관은 수시로 훈령을 내려 토벌대는 엄하게 양비(良匪)를 감별(鑑別)해서 옥석혼효(玉石混淆)의 잘못이 없도록 하게하고 또 소각해 버리는 방법을 꾀하도록 하였다.
교통이 지극히 불편한 한국에 있어서 각 토벌 기관의 연락은 심히 곤란하여 사건 발생시마다 기동의 민활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왕 호기를 놓쳐 유감이 적지 않았으므로, 전신미설(電信未設) 지방 중 중요한 곳에 점차 경비 전화선 가설 계획을 세워 명치 41년 5월부터 통감부(統監府) 통신관리국(通信管理局)의 손에 의하여 실행에 착수하였다. 이로부터 앞서 40년 5월부터 내부치도국(內部治道局)은 조선내 주요 도로의 치도 공사를 실행 중으로, 아직 그 제1차 계획에 의한 도로의 전부 개수(改修)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동월부터 제2차 계획 공사에 착수하고 각 지방에 권유해서 착수시킨 지방도로의 개수사업 등이 점차 교통에 편리를 주었으므로, 폭도 진압상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고, 특히 이 공사에는 가급적 폭도 귀순자를 사역하였으므로 더욱 더 그 성적을 양호하게 하였다.
한국 정부는 명치 40년 7월, 경성(京城) 소요가 발생하였을 즈음 조칙(詔勅)을 발하여 토민(土民)의 망동을 훈계하고, 동년 9월 다시 전국민을 효유(曉諭)하고, 아울러 선유사(宣諭使)를 지방 각도에 파견하였다. 또한 한국 장교 지휘하에 한국 순검(巡檢) 약 50인의 일대를 조직하여 우리 수비 대장의 감시하에 토벌 특히 폭도 수괴 체포에 종사시키고, 또 총포·화약취체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동년 11월 자위단규칙(自衛團規則)을 발포하여 그 설립을 장려하고, 귀순자에게는 면죄문빙(免罪文憑)을 교부한다는 조칙을 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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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41년 2월에는 다시 순검대 2대를 편성 증파하고, 동년 4월에는 신문지취체규칙(新聞紙取締規則)을 개정 추가하여 치안의 방해를 억제하고, 10월에는 결사(結社) 취체를 여행하여 불량자를 해산시키고, 또 학회령(學會令)을 실시하여 학회를 빙자하여 질서 안녕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다음 42년 9월에는 경비선(警備船)을 창설하여 연안 및 도서에 토벌 진무를 맡게 하였다.
이들 여러 시설 중 혹은 민심의 감응이 현저하지 못하였고 혹은 관위(官威) 또는 집단력을 악용하는 자가 생겼고, 혹은 부정행위가 수반하는 등 사고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폭도 진압상 다소의 효과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요컨대 우리 토벌 기관의 끊임없는 분투노력은 서정(庶政)의 개선긴장과 발맞추어 점차 그 효과를 올려, 드디어는 거의 그들 폭도를 일소하여 오늘의 평화를 보기에 이른 것이다.
그 동안 토벌 충돌에 의한 피아의 손해는 명치 39년 3월 이후 44년 6월에 이르는 동안에 있어서 우리 토벌대(수비 헌병 및 경관)의 전사 1백 36명, 부상 2백 77명으로, 토벌 행동에 기인하는 우리 병사자도 역시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있어서의 폭도의 손상은 사자 1만 7천 7백 79명, 부상 3천 7백 6명, 포로 2천 1백 39명을 내고, 기타 검거에 의하거나 또는 자수 귀순한 폭도의 수도 현저하게 많았다. 만약 일선 양민의 손해를 따진 다면 그것은 극히 다대해서 소재 일본인으로서 폭도에 학살된 수는 토벌대의 전사자의 수배에 달하고, 선민(鮮民)의 손해는 도저히 그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일인의 손해의 수십 배가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2편 명치 39년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제1장 충청남도 홍주(洪州)에 일어난 폭도 토벌
폭도의 수괴(首魁) 민종식(閔宗植)은 민영상(閔泳商)의 아들로, 전참판종이품(前叅判從二品)의 관직을 가져, 민씨 일문 중에서 그 종주(宗主)였다. 수년 전부터 충청남도 정산군(定山郡) 천장리(天庄里)(정산 남방 약 2천m)에 은퇴하고 있었으나, 의연 중앙 및 지방에 대해 성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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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은 38년 11월 체결된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에 반대하여 지방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한국 전토를 소요의 불바다로 만들어, 열국의 간섭을 불러 일으켜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획책하였다. 39년 3월 상순경 그 거주지인 천장리(天庄里)를 근거로 군용품의 수집, 동지의 규합, 그리고 격문과 각국 사신에게 보내는 애소문(哀訴文)의 기안(起案) 등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헌병이 그것을 탐지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13일 야반에 동지 3백 40명을 이끌고 청양(靑陽)을 거처 홍주(洪州)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우리 헌병이 그곳에 다수 주둔하고 있다는 유언에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려 보령(保寧)으로 향하던 도중 17일 미명 합천(合川 ; 청양 서방 약 20리)에서 우리 헌병의 습격을 받아 도당 다수는 포박을 당하고 민은 겨우 몸을 피하여 도망쳤다. 그는 재차 보령군(保寧郡) 청라면(靑羅面 ; 보령 동남 약 10리 반) 부근을 근거지로 은밀히 여러 곳을 배회하여 인민을 선동하고, 또는 원 관리였던 자를 권유 가맹시켜 5월 14일 남포군(藍浦郡)에서 봉기, 동 군수 및 보령 군수에게 병기(兵器)·인마(人馬)·금품을 강청하고, 혹은 일본인을 포박하는 등 횡포를 극하게 되었다. 그 후 그 세력은 점차 증대하여 그 수 약 2백 50에 달하였고, 19일 오후 5시 대거 홍주성을 습격하였다. 그 곳 주재 헌병 2명 및 우편국원 등은 남문 성벽에 의거, 성내에 있던 구식 한국 화포를 이용하여 항전하였으나, 폭도 역시 구식 화포 2문과 신식 소총으로 공격하여 왔다. 그래서 점차 우리 탄약은 결핍되어 방어 곤란에 빠져 드디어 거류민 전원을 보호하고 북문에서 덕산(德山)으로 퇴각하였다.
폭도는 성내외의 민가 관아에서 병기·양식·탄약 등을 징발하고 스스로 창의군(倡義軍)이라 칭하고 전원 약 5백을 동서남복의 각 진군(鎭軍) 및 시위대로 구분하여 홍주성(洪州城)에 의거하였다. 경찰관과 헌병대는 수차 다음 표와 같이 인원을 파견하여 폭도 진압에 힘썼으나 주효하지 못하고 겨우 홍주성의 일부를 포위하는데 그치고 결국 군대의 출동을 보게 되었다.
헌병과 경찰관의 진압이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주둔군 사령관은 한국 정부에 대하여 누차 소요 병력을 파견하여 속히 진정시킬 것을 재촉했으나, 그도 여의치 않아 이등(伊藤)통감은 한민(韓民)에 대한 일본의 위신을 보이기 위해 주둔군 사령관에게 출병(出兵)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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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및 헌병대의 파견]
진압을 위해 파견된 관서(官署)
파견 인원
누계
진압에 착수한 월일
적 요
공주경무고문지부(公州警務顧問支部)
경부 이하 6명
6
5월 20일
실패
수원헌병분대(水原憲兵分隊)
조장(曺長) 이하 6명
12
5월 21일
실패, 예산(禮山)으로 퇴각
경성경무고문부(京城警務顧問部)
동원(桐原) 경시(警視) 및 한국 경무관 부하 20
34
22일
증원
수원헌병분대(水原憲兵分隊)
분대장 이하 14명
48
24일
정오(正午)부터 공격, 격전 4일간에 미쳤으나 실패
경성헌병대
일지(日枝)헌병대위 이하 26명
131
28일
정찰목적으로 토방(土方) 경부 이하 7명을 홍주 서문 방면으로 파견, 동문 외 월계(月溪) 동방에서 포위당해 동경부외 2명 행방불명이 되었다
공주진위대
(公州鎭衛隊)
한병 57명

24일

군사령관은 재경성(在京城)남부수비대 사령관 동조소장(東條少將)에게 필요한 병력을 홍주 방면으로 파견하여 헌병 및 경찰관과 협력하여 비도를 진압하되 가급적이면 그것을 생포하도록 힘쓰라 훈령하였다. 동시에 헌병대장 소산대좌(小山大佐)에게 홍주에 있는 헌병을 위의 파견부대와 협력시켜, 필요하다면 그 부대장의 지휘를 받도록 명하였다.
남부수비대 사령관은 곧 보병 제60연대장에게 대대장 소좌전중(田中新助)을 지휘관으로 하는 보병 2중대(제2·제4 중대)[기관총 2정을 따르게 함], 기병 반소대로 된 1지대(一支隊)를 편성하여 홍주성으로 보내고, 동시에 전주수비대의 보병 1소대로 하여금 그에 협력시켰다.
지대(支隊)는 27일 오후 7시 30분 서대문역에 승차, 오후 11시 천안역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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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밤 기병은 신례원(新禮院)에, 주력은 신창(新昌)에 숙영하였다. 29일 본대 선두에서 행진하고 있던 지대장(支隊長)은 오후 6시 30분 천전리(川前里 ; 홍주 동방 약 200m) 남방 약 300m의 세거리에 도착 적정을 정찰한 결과, 홍주성을 완전히 포위하기 위해 그 서방(西方)을 우회하여 주력으로써 월계(月溪) 및 그 부근을 점령하여 결성(結城)으로 통하는 도로를 눌러야 한다고 결심했다. 30일 포위선을 형성하는 동안 폭도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총포를 난발하였으나 성벽이 높아 성내의 사정은 전혀 불명이었다.
지대장은 폭도를 위협함과 동시에 그 상황을 정찰하고자 오전 11시 40분 성의 서면(西面)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또 기관총은 성의 북방에 두어 동서북 3 문루(門樓) 위의 감시병을 사격하여 쫓아 버린 다음, 다시 기관총의 위치를 바꾸어 성의 서남 방면을 사격시켜 제2중대도 전진, 서남면의 적에게 수회(數回)의 일제 사격을 가하여 적에게 약간의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이에 있어 지대장은 폭도에게 항복을 권고하려고 사자(使者)를 구하였으나, 적임자가 없어 드디어 실력으로써 공항(攻陷)시키기로 결심, 일부로써 적의 주요한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서쪽 방향의 적을 견제하고 주력으로써 동문 및 북문을 파괴하고 성내로 돌입하기 위해 제대(諸隊)를 배치시켰다.
31일 오전 2시 30분 등소위(藤少尉)가 인솔하는 제2중대의 1소대는 서문 밖 독립 가옥에 방화하고 맹렬한 사격으로써 적을 견제하고, 성기병소위(星騎兵少尉)는 오전 2시 50분 폭파병을 이끌고 동문으로 진격, 총화 투석을 무릅쓰고 오전 3시 10분 대폭성(大爆聲)과 함께 문짝을 비산(飛散)시켜 돌입구를 터놓자 돌격대는 곧 성내로 돌입하였다. 북문은 오전 3시 30분 폭파하였다.
폭도는 우리의 신속 과감한 돌입으로 인해 크게 혼란을 일으켜 그 대부분은 가옥내에서 우리를 사격하고 다른 일부는 큰 길에서 종사(縱射)를 해 와 마침내 시가전을 야기하였다. 이때 날은 아직 새지 않아 수색이 곤란하였으므로, 우선 적의 퇴로를 막기 위해 제4중대는 주로 동문에서 남문을 거쳐 서문에 이르는 성벽을, 제2중대는 주로 서문에서 북문을 거처 동문에 이르는 성벽을 점령하고, 헌병 및 경찰관의 일부는 동문과 북문을 감시하였다.
동이 틀 무렵부터 옥내 수색을 개시하여 사력을 다해서 저항하는 자는 사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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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은 자는 포획하여 오전 7시 30분 성내외의 수색을 끝냈다.
이 전투에서 우리 편에서는 한국 순검 1명이 전사하고 보병 1명이 부상하였다. 폭도는 시체 82, 포로 1백 45로 수괴 민종식(閔宗植) 이하 약간을 도망쳐 나가게 한 것은 유감이었다.
지대장은 헌병 및 경찰관으로 하여금 성내의 질서 회복을 담당시키고, 포로는 취조 결과 70여 명을 석방하고 80여 명을 경성(京城)으로 압송하고, 지대는 경성으로 귀환하여 편대를 풀었다.
민종식(閔宗植)은 그 이후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으나 우리 헌병과 경찰관의 주도 면밀한 수색으로 11월 20일 공주군(公州郡) 탑산리(塔山里)에서 포박되어 40년 7월 평리원(平理院)에서 사형에 처하여졌으나, 그 당시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청으로 1등을 감하여 종신 유형에 처하여져 진도(珍島)에서 형의 집행을 받다가 다음 12월 특사로 석방됐다.
민종식(閔宗植)이 거사를 하자 궁중(宮中)에서도 다액의 군자금을 대어 준 듯했고, 또 그 일당에는 윤석봉(尹錫鳳)·황영수(黃英秀)·정재호(鄭在鎬)·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김덕진(金德鎭)·박윤식(朴潤植)·신현두(申鉉斗)·김상덕(金相悳)·남운식(南雲植)·이전영(李傳榮) 등 지명의 인사들도 가입되어 있었다.
제2장 전라도에서 일어난 폭도 토벌
폭도의 수괴 최익현(崔益鉉)은 일찌기 참정(叅政 : 내각 총리대신 상당) 또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등 관력이 있어 유생(儒生)들 사이에서는 크게 명망이 있는 노유(老儒)로서 수천의 문제자들이 있었다.
명치 38년 일한차관계약(日韓借款契約)이 체결되자 크게 반대론을 제창하고 또 배일(排日)에 관한 상소를 하며, 경성(京域)에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통문(通文)을 13도에 발송, 크게 유생들을 선동하였으므로 치안 방해라는 죄명으로 경성 이외로 추방된 열렬한 배일주의자다.
최익현(崔益鉉)은 39년 5월 전 낙안(樂安 ; 목하 순천군에 병합되다.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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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약 30리 반) 군수였던 정삼품 신보균(正三品林炳瓚) 상모(相謀)하여 민종식 (閔宗植)과 동일한 목적하에 서로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그는 도당 백 수십 인을 규합, 6월 초순 전라북도 태인군(泰仁郡)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월 8일 동도 순창(淳昌) 및 전라남도 담양(潭陽)을 점령하자 이에 응하는 자 그 수 약 4백 50에 달하여, 전라남도 동북 곡성 지방을 횡행하여 관아를 습격하고 세금을 약탈하며 총기를 빼앗고 관헌의 구치자를 석방 하는 등 횡포를 극하였다.
폭도가 태안군에서 봉기하자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는 경찰관을 파견 수괴를 잡으려 하였으나,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다시 일한경찰관(日韓警察官) 일행 9을 순창(淳昌)으로 파견, 그를 추급(追及)하였으나 도리어 폭도에게 포위를 당하는 비경(悲境)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폭도는 동복(同福)·곡성(谷城) 방면에서 다시 순창(淳昌)으로 진출한 시기를 이용 6월 11일 남원(南原) 및 전주(全州)의 진위대를 풀어 전주(全州)·남원(南原)·광주(光州)의 방면에서 요로(要路)를 차단하고 순창을 포위시켜 교전, 반일(半日) 만에 폭도는 기진맥진 전원 투항하였다.
16일 우리 헌병은 최 이하를 경성으로 압송하고 8월 4일 최익현을 감금 3년에, 신보균을 동 2년에 처하고, 이하들도 각각 처벌하고, 최는 대마도(對馬島)에서 복역하다가 40년 1월 형지(刑地)에서 병사하였다.
제3장 경상북도에서 일어난 폭도 토벌
폭도의 수괴 김도현(金道鉉)·신돌석(申乭石)·정용기(鄭鏞基) 및 이하현(李夏鉉)은 원래 화적(火賊)의 두령으로서 성질이 포악한 무뢰한이었으나, 민종식(閔宗植)과 최익현(崔益鉉) 등과 간접적으로 기맥을 통하여 이름을 의병(義兵)에 빌어 오로지 약탈을 일삼던 자들이다.
김도현(金道鉉)은 39년 1월 영양(英陽)에서 폭도 약 1백을 모아 봉기하였으나 며칠 후에 대구 진위대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4월 하순부터 신돌석(申乭石)은 영해(寧海)에서, 이하현(李夏鉉)은 진실(眞實)에서, 정용기(鄭鏞基)는 영덕(盈德)에서 봉기하여 그 수 2백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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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 명으로 5월 상순부터 6월에 이르는 동안 임현내면(臨縣內面) 안동 동방 약10리 반 청송(靑松)·의성(義城)·이전평(梨田坪 ; 청송의 동남 약40리)·영덕(盈德)·영해(寧海)·영양(英陽) 및 강원도 평해(平海)·울진(尉珍)·삼척(三陟) 등 각지에 걸쳐 출몰 횡행하여 금전·총기 등을 약탈하였다.
한국정부는 6월 상순 토벌을 위해 대구진위대 정위(正蔚) 박두영(朴斗榮)이 지휘하는 2백의 한병(韓兵)을 영덕 방면에서, 또 원주진위대에서 참령(叅領) 이승칠(李承七)이 지휘하는 1백 명을 남진시켜 서로 협력하여 평해(平海) 부근에 적과 충돌하였으나, 그저 구축해 버렸을 뿐 그 수괴를 놓쳐 버렸으므로 일시적 소강(小康)을 유지하였을 따름이었다.
제3편 명치 40년 한황(韓皇)의 양위(讓位) 및 군대 해산
제1장 밀사사건 폭로로 한황의 양위에 따른 경성 시가의 동요
궁중을 원천(源泉)으로 하는 배일(排日)에 관한 각종 음모는 재외망명자(在外亡命者) 재경파역대관(在京罷役大官) 및 기타에 의하여 끊임없이 강구되어 왔다. 마침내 명치 40년 7월 3일 소위 밀사라 칭하는 전참찬(前叅贊) 이상설(李相卨)·전평리원검사(前平理院檢事) 이준(李儁)·재로공사관(在露公使官) 서기관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은 해아(海牙)에서 만국평화회의에 참렬(叅列)을 요구하는 사건이 폭로되어 크게 일본의 여론을 격앙(激昻)시켜, 우리 정부는 임외무대신(林外務大臣)을 한국으로 파견, 마침내 황위의 선양(禪讓) 및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의 발표에 이어 군대의 해산을 보게 되었다.
밀사사건이 보도되자 한국 조정의 상하는 대경실색, 원로대신 수십 명은 그 실체(失體)에 관하여 통감(統監)에게 애원서를 드리고, 재야 중요 단체(일진회 제외)도 역시 원로 17~18명의 연서로 통감에게 애소하였다. 통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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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히 함구하고 이에 대답이 없었다. 이에 있어 경성(京城)의 상하는 축일(逐日) 비분 우려의 빛이 짙어져 갔다.
우리 정부는 한국의 불법에 관하여 대처할 방침이 결정되어 사변(事變)에 응할 만반준비를 완료하였다.
시국이 점차 진전되자, 7월 17일부터 경성(京城) 시중의 상황은 불온상태로 기울어져, 종로(鍾路) 기타 곳곳에 ‘임진란을 보라! 을미지사(乙未之事 ; 민비 암살건)는 여하?’ ‘일본인의 포학은 저지할 바를 몰라 우리들의 도탄은 안전(眼前)에 있다’ 등의 벽보를 붙이는 자가 있었다. 다음 18일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양위되어 일본으로 잡혀간다는 설이 전하여지자, 시중은 더욱 더 불온한 광경을 나타내어, 종로 부근 주요한 거리에서는 각호가 폐점(閉店)하고, 야간이 되자 다수 한인이 종로로 모여 비장 극렬한 언사로써 ‘이번 사건은 국가의 안위에 관한다’ 운운, 노방연설을 하고 ‘사직이 위태롭다’고 통곡을 하고, 나라의 종말을 외치며 울부짖었다. 오후 11시경이 되자 군중은 점차 왕성(王城) 부근으로 모여들고, 또 왕성 대한문(大韓門) 북방 도로상에 결사회(決死會)라 칭하는 일군은 결사 연맹부를 작성 가맹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18일 밤, 황제 양위 결정되다.
19일 아침부터 많은 한민(韓民)이 종로에 군집하여 광태(狂態)를 연출하고 혹은 격렬한 노방연설을 하며, 혹은 한국 군대를 향해 그 기개가 없음을 책하여 은근히 폭동을 도발하고, 혹은 경찰관의 제지에 항거하여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때 마침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의 병영으로 가서 거짓
‘황제는 지금 일본으로 잡혀가느라고 인천으로 향하는 중이다.’
고 전한 자가 있어 그 소식을 들은 한병(韓兵) 약 1백 명은 간부의 제지도 듣지 않고 병영에서 탈출, 2대로 나뉘어 1대는 종로 순사 파출소를 습격, 그것을 파괴하고, 다른 1대는 경비에 종사하고 있는 경찰관을 사격하여 경찰관 및 일한(日韓)인 수명을 사상시켰다.
그날 밤 폭도의 일군은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 국민신문사(國民新聞社)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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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건물을 파괴하고 사원을 구타 부상시키는 등 횡포를 극했으나, 우리 병력의 경비로 대사에 이르지 않고 중지되었다. 한국선제(韓國先帝)는 이 날 폭동발생을 우려하여 이등통감(伊藤統監)에게 그 진압을 위임하였다.
통감은 평양징상대(平壞徵上隊 ;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시위 보병 제2연대 제3대대로 포덕문(布德門) 밖에 있었다)가 그날 함 12시를 기하여 포덕문에서 왕성으로 진입하려는 기도가 있음을 알고 군사령관에게 그 제지를 명하였다.
군사령관은 곧 재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를 시켜 포덕문을 점령하고 징상대의 입문을 방지시키고, 나머지 재경 제부대에 긴급 집합을 명하여 군사령부로 모으고 야포병(野砲兵) 중대는 왜성대(倭城臺)에 포진을 펴도록 명령하였다.
한황(韓皇)은 그날 밤 늦게 그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하여금 한국 군대를 순시시켜 소요를 일으키지 말도록 설득을 하였다. 시위여단장(侍衛旅團長)은 각 대장에게 명하여 병졸에게 지급하였던 탄약을 반납시켰다. 동시에 한황은 정령(正領) 어담(魚潭)을 군사령부로 보내 포덕문 부근 일본병의 철거를 요구하였으나, 군사령관은 평양징상대의 불온한 기도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군사령관은 그날 밤 영(英)·미(美) 양국 영사관에 호위병을 보내 그것을 보호하였다.
20일 오전 9시 위 양식 끝나다.
이보다 앞서 군사령관은 사변에 대비하기 위해 청양수비대에서 보병 1대를 경성(京城)으로 소치(召致)하였다. 그 부대는 20일 아침 경성(京城)에 도착 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성내는 정온하여 정오가 되어도 아무런 폭동의 징후가 없었으므로, 그때부터 왕성(王城) 부근을 점령하고 있던 보병 2중대 군사령부 안에 있던 보병1중대 및 왜성대 부근의 포병 중대는 그 위치에 머무르게 하고 다른 부대는 각기 숙영지(宿營地)로 복귀시켰다. 이에 따라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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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불온화 되어 ‘결사회’라 칭하는 일단의 군집이 남대문에 나타나
“폐하는 오늘 일본으로 출발” 운운
하고 외치며 남대문 정거장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발걸음을 돌려 서소문 밖에 있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저택을 불사르고, 삼삼오오 광화문에 이르러 거기서 각 대신이 의정부(議政府)에서 돌아가는 귀로를 습격하려다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오후 4시 북서전동(北署磚洞)에 있는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저택을 경호하고 있던 경무청원의 사격에 의하여 사산하였다.
그날 시위보병대 병졸 약 30명이 종로 순사 파출소를 향해 사격을 감행하다가 우리 군대가 나타나자 곧 도주하였다.
남대문·서대문 양 정거장, 서대문 밖에 있는 일본 포병영의 소각 및 한강 철교 파괴 등이 빈번하였다.
시위보병 제2연대 제2대 [창광동(昌廣洞)에 있음]의 병졸은 무질서하여져 점차로 창을 파괴하고 기타 소란을 피웠으나 극력 이를 진무시킨데 반하여, 폭민은 그 부대를 창가로 접근 격려 도발하였다. 따라서 하사 이하 인심이 동요되어 우리 기병 척후를 향해 돌을 던지고 혹은 영내에서 저격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경성위수사단(京城衛戍師團)은 1소대를 양 정거장에 파견하고 따로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의 저택에 보기병(步騎兵)을 파견하여 위급에 대비하고 포병대병영의 마구·마필을 왜성대로 옮기고, 또 한국군 군부 안에 있는 탄약고와 용산에 있는 한국 병기창도 온화한 수단을 써서 우리 군대가 교대 수비를 하고, 한강 철교에 감시초를 배치하였다.
21일 오후 10시경 전 내부대신 이지용(李趾鎔)·이근택(李根澤) 및 이근호(李根澔)의 저택은 결사회원에 의해 소훼(燒毁)되고 말았다.
22일 한황(韓皇)의 양위는 진정한 양위가 아니라 일시 황태자로 하여금 제위(帝位)를 대리시켰다가 시기를 보아 다시 구태로 복귀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참여하였던 궁내대신 박영효(朴泳孝)·시종원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군무국 과원 참령 이갑(李甲)·시종무관 정령 어담(魚潭)·정위 임재덕(林在德) 및 전 홍문관(弘文館) 학사 남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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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廷哲 ; 원로(元老)]을 체포하였다.
24일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이 성립되어 발표되고, 동시에 군대 헌병 및 경찰관의 행동을 통일하여 일시 경성 위수사령관 강기중장(岡崎中將)의 구처(區處)를 받게 하였다. 또 신문의 취체도 엄하게 하고, 한인에게 총포·화약 매매를 금하는 등 질서와 치안 유지에 필요한 방법을 강구하였기 때문에, 8월 1일 군대 해산에 이르기까지 경성 천지는 일시 평온으로 돌아갔다.
제2장 한국 군대 해산 및 그에 수반한 군대의 반란
한국정부는 명치 27년의 개혁에 즈음하여 육군 각부국(各部局) 편제(編制)의 모범을 우리 나라에서 따 용병(傭兵)에 의한 군대를 설치하고, 그 후 수차 개혁을 거쳐 법문상(法文上) 모병령(募兵令)에 의하여 국민의 의무로 정하였으나, 사실은 의연 용병(傭兵)이었고, 명치 40년 8월 군대 해산 전에 있어서의 육군 편제 및 배치표는 부도에 표시한 바와 같고, 또 해산 후 존치한 부대는 부표 제1과 같다.
1. 경성(京城)시위대의 해산 및 그 일부 반란
해아(海牙)밀사사건이 폭로되자 황제의 양위에 이어 한국정부는 군대를 해산하려고 묘의(廟議)를 결하여, 7월 31일 군대 해산의 조칙(詔勅)을 발포하였다. 그 요지에 말하기를,
‘국사 다난한 이때에 있어 용비(冗費)를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업에 응용하는 것은 오늘의 급무다. 현재의 군대는 용병으로 조직되어 국가 완전 방위를 함에는 부족하므로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치(選置)하고 기타는 일시 해산하고 타일 징병법에 의한 유력한 군대를 편제할 것이다. 그대 장졸들의 숙적의 노고에 대하여 사금(賜金)을 분여 (分與)하겠으니 장교·하사·졸은 본지를 받아 각기 취업하여 그르침이 없도록 하라,’
이에 있어 8월 1일 한국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는 각 대장을 장곡천정(長谷川町)의 군사령관저(대환정)로 소집하여 군대 해산의 소칙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시위 보병 제1 ·제2연대의 제2·제3대대, 기병대·포병대 및 공병대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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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대로 훈련원(경성 동대문 연병장에 있다)에 이르러 해산식을 실시하고, 동시에 사금(賜金)을 수령하고 해산하였으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朴昇煥)은 대장 소집 때 징병하고 불참, 대리로서 고참 중대장을 열석시켰다. 이것은 미리 일의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대리가 귀영하여 군대 해산의 조칙을 보고 하여도 일실(一室)에 농거해 있으면서 나오지 않아, 대대장 대리는 가까스로 병원(兵員)을 집합하여 해산식장으로 떠나려고 하는 순간 한발의 총성은 대대장의 자살을 알리고, 동시에 집합하였던 각 중대는 갑자기 동요를 일으켜 탄약고를 파괴 하고 탄약을 분배, 혹은 몰래 감추어 가지고 있던 탄약으로 곧 일본 교관에게 덤벼 옥상과 창에서 사격을 개시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 옆에 있던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도 총성에 응하여 곧 혼란상태를 빚어내 양 병영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외 주위에 감시병을 배치하고 시가를 향해 난사를 퍼부었다. 이때 마침 전기 병영을 수령(受領)할 임무를 띠고 파견된 보병 제51연대 제10중대 (1소대 결)는 이 사격을 받아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정문 부근에서 서로 대치하였다.
강기사단장(岡畸師團長)은 군사령관의 명에 의하여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판부소좌(坂部少佐)에게 제9중대 기관총 및 공병 약간을 주어 양 병영의 진압을 명하였다. 동 소좌는 오전 10시 20분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 후문을 향해 공격을 개시, 남대문 누상(樓上)에 배치한 기관총 2의 협력을 얻어 장병과 창안에 있는 한병을 맹렬하게 사격하였다. 오전 10시 40분 제12중대가 증원되고 제10중대 역시 정문을 향하여 공격 전진하였다. 제9중대장 미원대위(梶原大尉)는 이미 부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挺身), 부하를 이끌고 영내로 돌진 순간 저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나, 공병대 제12중대가 이에 속행하여 공병은 병영의 일부를 폭파하고 보병은 백병(白兵)으로 한병을 영외로 구축하여 오전 10시 50분 병영 전부를 점령하였다.
궤란된 한병은 사방으로 분산하여 그 일부는 소의문(昭義門) 밖 야소교회당 고지에서 우리 남대문 정거장 위병을 향해 사격을 가해 왔으나 곧 격퇴 하였다. 이 전투에 있어서 아군의 손해는 전사 미원대위(梶原大尉) 이하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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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장교 이하 21명이고, 한병(韓兵)의 전사는 장교 이하 70여 명, 부상은, 장교 이하 1백 4명, 포로 6백 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경성 시가는 곧 평정으로 돌아갔으나 해산한 군인의 대부분은 지방으로 도망쳐 폭도의 무리에게 투신 오래 화근의 불길이 종식되지 않은 불씨가 되었다.
2. 지방진위대(地方鎭衛隊)의 해산
지방진위대 해산을 위하여 8월 1일 전보로 각 대대장을 경성(京城)으로 소집, 군부에서 대신으로부터 조칙을 전달하고 동시에 은사금(恩賜金)을 휴행 귀대시켜 해산을 실시, 8월 3일 수원 진위대의 해산을 비롯하여 9월 3일 북청(北靑)진위대의 해산으로써 종결하였다. 그리고 그간 강원도 원주진위대 및 경기도·강화도 분견대의 반란이 있었던 외에는 다소 동요는 있었으나 대개 평온리에 해산하였다.
3. 원주진위대의 반란
8월 1일 군대 해산의 풍평(風評)에 이어 경성시위대의 반란 기타의 와전(한병 및 충의의 국민은 전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이 원주진위대에 달하자 영내 일반이 동요를 일으켜 대대장 참령 홍유형(洪裕馨)은 극력 부하를 훈유하였으나 도리어 부하의 반항심을 높혔다.
대대장 홍이 8월 2일 군부의 전명(電命)에 의하여 상경하자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는 불평 동지들을 선동하여 대대장 대리 정위(正尉) 김덕제(金德濟)를 협박하여 여당으로 삼은 다음 전원이 폭도화하여 총기 탄약을 분배하고 지방 무뢰한들까지 규합하여 무기를 주었다. 일부는 8월 3일 대대장 홍을 도중 지평(砥平)에서 만나 대대를 지휘하여 경성으로 진출하라고 협박하였으나, 홍은 그들을 속여 밤중에 여주(驪州)로 도망쳐 난을 면하고 상경할 수가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같은 날 죽산(竹山)에 이르러 동지를 규합하고, 그 대부분은 원주 일본 거류민 및 경무분견소를 습격 가옥을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동지의 규합 등 횡포를 극하였다. 8월 5일 충주 수비대장 이궁소위(二官少尉)는 부하 19명을 인솔하고 정찰차 막 원주로 들어가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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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병과 폭도에게 들켜 교전 약 2시간 후 원주 서방 고지로 피난하고 있는 거류민 및 경무관을 수용하여 충주로 귀환하였다. 폭도로 화한 반란병 및 폭민은 동일 이후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각 지방을 횡행 약탈하고, 원주 병영에는 한사람의 병졸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긍호(閔肯鎬) 김덕제(金德濟)등이 폭도의 수괴가 되어 교묘하게 우리 토벌대의 예봉을 피하여 적염(賊焰)의 진정을 오래 끌게 한 사항은 제4편에서 상술하겠다.
4. 강화도(江華島)분견대의 반란
강화도분견대는 비교적 군기(軍紀)가 정립되고 기개도 있었다. 군대 해산의 소식이 전하여지자 분개하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있을때 원 진위대 참교(叅校) 유명규(劉明奎)라는 자가 있어 군수와 일진회원(一進會員)을 강화부 동문 밖에서 모살(謀殺)하고 줄기차게 분견대 병졸을 선동하였다. 이 교사(敎唆)로 영내가 동요되어 장교의 진무를 듣지 않고 무기고·탄약고를 깨고 총기 탄약을 탈취하여 지방 폭민들과 휩쓸려 반란을 일으켰다.
이상과 같은 상황을 조금도 모르는 진위대 교관 소창대위(小倉大尉)는 분견대 해산의 임무를 띠고 대기소위(大崎少尉) 이하 보병 1소대 기관총 2를 이끌고 8월 10일 경성(京城)을 떠나 인천에서 수로(水路) 강화도로 향하였다. 오후 4시 갑곶동(甲串洞)에 도착 상륙지 부근의 상황을 시찰하였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으므로 막 상륙을 개시하려고 하였을 때 갑곶동 동측 성벽에 잠복하고 있던 반란병 약 50이 돌연 총안(銃眼)으로 맹렬한 사격을 개시하였다. 소창 대위는 부하를 이끌고 상륙을 강행, 반란병을 구축하고 갑곶동 북측 고지를 점령하고 다시 계속 추격하여 강화부 동문 밖에 이르렀다. 반란병은 폭민과 합쳐 그 수 약 8백에 달하여 성벽에 의거 견고하게 방어하고 있을 때, 이미 일몰이 되어 소대의 일부로써 동문 부근의 감시를 담당시키고 주력은 갑곶동 북측 고지에서 야영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아군은 즉사6, 부상5를 냈다.
11일 새벽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오전 7시경 폭도의 일부는 총기를 버리고, 대부분은 그것을 휴대하고 사방으로 궤주하기 시작하여 소대는 성내로 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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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를 점령하고 무기 탄약의 압수, 폭도 검거에 착수하였다.
10일 강화도분견대가 반란하였다는 연락을 받은 군사령관은 보병 제14연대 제1대 대장 적사소좌(赤司小佐)에게 제1·제3중대, 기관총 2, 공병 1소대를 주어 진압시키도록 명하였다. 동대는 11일 오후 6시 강화도에 상륙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진압된 후이었으므로 선견 소대와 협력 12일 미명부터 폭도의 수색 질서 회복에 힘쓰고 1중대를 수비로 잔치(殘置)하고 13일 용산(龍山)으로 복귀 하였다.
제4편 명치 40년 지방에서의 폭도 토벌
제1장 8월 강원도·충청북도 및 그 부근에서의 토벌
8월 1일 군대 해산의 소식이 강원도 원주 진위대에 달하자 전편 제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대장 홍우형(洪祐馨)이 상경한 후 전병원(全兵員)이 모두 폭도화하여 원주를 약탈하고, 8월 5일에는 병영에서 탈주하였다. 김덕제(金德濟)는 그 일부를 이끌고 평창(平昌)·강릉(江陸) 방면에서 양양(襄陽)·간성(杆城)·고성(高城)·통천(通川)·흡곡(歙谷) 지방에 걸쳐 도량하고, 민긍호(閔肯鎬)는 전체의 수괴가 되어 수다한 소집단(小集團)으로 분할하여 제천(堤川)·충주(忠州)·죽산(竹山)·장호원(長湖院)·여주(驪州)·홍천(洪川) 등 각 지방으로 은현출물(隱顯出沒)하여 횡포를 자행하였고, 이와 부화뇌동한 무뢰한도 많아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䄵)·김생산(金生山)·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이 그 주된 자다.
원주진위대 반란이란 보고를 접한 군사령관은 6일 재 경성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임소좌(林少佐)를 지휘관으로 한 보병 2중대, 기관총 4, 공병 1소대로 된 1지대를 편성하여 원주 부근 진정을 일임하였다.
지대(支隊)는 7일 경성(京城)을 떠나 도중 폭도와 조우(遭遇)하지 않고 이수두(二水頭)·지평(砥平)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 지형을 살피자 토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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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를 받고 있는 그들 폭도의 첩보(諜報) 근무는 극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탐지하고 은현 출몰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 소탕에 힘썼음에도 불구하고 수일 동안 조금도 얻은 바가 없었다. 12일 약 2백의 폭도가 여주(驪州)를 습격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하여 일본경찰관과 그 가족을 참살하고, 토민을 선동 유혹하여 무리를 모으고 음죽(陰竹)을 거쳐 장호원(長湖院)에 이르러 그 수 1천이라 칭하여 양민을 위협하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이들 정보는 용이하게 원주 지대장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군사령관은 강릉 부근 해안선 일본 거류민 보호를 위해 원산(元山)수비대에서 보병 제50연대 제11중대장 전중대위(田中大尉)를 파견하여 폭도 진압을 명하였다. 그 부대는 군함 갈성(葛城)에 편승하고 12일 원산을 출발, 13일 강릉(江陵)에 상륙, 그 지방 부근을 경비하였다.
15일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정찰을 위하여 평창(平昌) 방면으로 나갔던 좌등(佐藤)대위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결)의 척후는 방림역(芳林驛)에서 강릉 파견대에서 나온 척후와 연락하였다. 또 동시에 제천(堤川) 방면으로 나간 말안중위(末安中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그날 밤 제천(堤川)에서 폭도 약 3백 50과 충돌, 교전 4시간 후 겨우 그들을 격파하였으나, 밤중에 재차 포위를 당하여 탄약이 다하도록 교전하다가 충주로 퇴각하였다.
그날 폭도 약 3백이 죽산(竹山)을 습격 일본인을 참살하고 횡포·약탈을 자행하였다.
16일 충주(忠州)수비대에서 파견한 전선(電線) 검사의 호위병 임(林) 이하 6명은 장호원(長湖院)에서 폭도와 만나 겨우 격퇴하였으나 인부 2명이 살해되었다.
충주에는 이궁소위(二宮少尉)가 인솔하는 1소대가 수비하고 있었으나 그 지방 부근이 더욱더 불온지므로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재경 보병 제51연대에서 노택대위(蘆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증파하였다. 이 부대는 16일 경성(京城)을 출발 충주(忠州)로 향하는 도중 18일 오후 장호원(長湖院)에서 약 1백 50의 폭도와 만나 그것을 궤란시키고 19일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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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에서 전선 검사를 위하여 파견한 공병 1분대는 19일 이천(利川) 동남 약 20리 지점에서 폭도의 습격을 받아 가까스로 그것을 격퇴하였다.
원주(原州)와 충주(忠州) 부근의 폭도의 세력이 일익 창궐하여 각지로 전파되는 상태에 있어, 이에 대한 하림지대(下林支隊)의 행동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군사령관은 장래를 고려하여 맹렬하게 응징적 토벌을 실시할 필요성을 인정, 보병 제51연대 부족중좌(附足中佐)에게 동 연대 제2대대 (2중대 결)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공병 1소대를 주어 지대를 편성하여 18일 경성(京城)을 출발, 조치원까지 철도 수송을 하고, 그 후 충주(忠州)를 거쳐 청풍(淸風)·제천(境川)·영월(寧越)·평창(平昌) 부근의 폭도 소탕을 명하였다. 그리고, 그 지대장은 충주 도착 후는 충주수비대 및 하림지대(下林支隊)를 지휘하고, 또 필요에 따라서는 강릉 파견대까지도 지휘시켰다. 동시에 재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에서 경택대위(境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춘천수비대에 증가하여 그 주력을 홍천(洪川)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원산(元山) 수비 보병 제50연대에서 우진강대위(宇津江大尉)에게 1중대와 기관총 2를 주어 해로 삼척(三陟)으로 파견하여 그 주력을 정선(旌善)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또 재 대전(大田) 보병 제14연대에서 안동 부근으로 파견한 서강대위(西岡大尉)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결)는 그 주력을 영주(榮州)로, 일부를 고직령(高直嶺) 부근으로 진출시켜 각기 족달지대(足達支隊)와 책응하여 동작시켰다.
족달지대(足達支隊)는 18일 오전 11시 조치원에 하차, 청주(淸州)로 향하였다. 청주 이북은 일반으로 불온하여 음성(陰城)·괴산(槐山) 부근에 폭도 집합의 정보가 있어, 지대는 주력으로써 음성(陰城)을 1중대로써 괴산(槐山)을 거쳐 도중 폭도와 조우하는 일 없이 21일 밤 충주에 도착하였다. 생각컨대 폭도는 그 관용수단(寬容手段)을 써서 양민으로 분장하고 혹은 산곡(山谷)에 은도(隱逃)하였을 것이다.
21일 경택대위(境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춘천(春川)에, 우진강대위(宇津江大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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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솔하는 1부대는 삼척(三陟)에 도착하여 각각 소명(所命)의 배비(配備)를 취하였다. 양말(糧秣) 호위로서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충주(忠州)로 향한 보병 제 50연대의 하사 이하 7명은 20일 장호원(長湖院) 동남방 약 10리쯤 되는 촌락에서 약 3백의 폭도에게 포위되어 가까스로 이를 격퇴하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22일 충주(忠州)를 출발 귀로 선편(船便)으로 한강 항행중 여주(驪州) 하류 약 40리에 있는 이포(梨浦) 부근에서 양안(兩眼)으로부터 약 80명의 폭도에게 습격을 받아 우리 병졸 1명이 전사하고, 분대는 상륙하여 그 폭도를 공격하려고 하자 폭도들이 육박해 와 이에 격투가 시작되어 그 십여 명을 죽였으나, 적은 더욱더 증가하여 중과부적으로 일조(一條)의 혈로를 열고 여주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24일 여주에 도착, 26일 경성(京城)에 귀환하였다.
21일 군사령관은 이천(利川)·장호원(長湖院)·여주(驪州)방면 토벌을 위해 다시 재 대전(在大田) 보병 제14연대 제3대대장 불파소좌(不破少佐)에게 제9중대 소유(小柳)대위 및 수원을 수비하고 있는 제3중대 야촌(野村) 대위를 배속시켜 그 방면으로 파견하고, 또 동시에 재 경성(在京城) 보병 제51연대 제9중대를 양근(陽根)·이천(利川) 방면으로 파견, 불파토벌대(不破討伐隊)에 책응시켰다.
족달지대(足達支隊)는 우선 제천(堤川)과 영월에 있는 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2종대(二縱隊)가 되어 22일 오후 3시 충주(忠州)에서 떠나, 그 주력은 청풍(淸風)을 거쳐 제천(堤川)으로,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는 주포(周浦)를 거쳐 제천(堤川)으로 향하게 하였다. 또 따로 1소대를 장호원(長湖院) 방향으로 파견하여 대전(大田)에서 나오는 불파토벌대와 책응시켰다.
원주에 있는 하림지대(下林支隊)의 행동에 책응하기 위하여 좌등대위(佐藤大尉)에게 보병 1중대(1소대 결)와 기관총 2를 주어 안흥(安興)을 거쳐 평창(平昌) 방향으로, 또 평도중위(平島中尉)에게 보병 1소대와 공병 약간을 주어 주천(酒泉) 방향으로 파견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의 주력은 도중 폭도와 조우하는 일 없이 22일 청풍(淸風)에, 23일 오전 6시에는 제천(堤川)에 도착하였다. 주포(周浦)·제천(堤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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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전진하던 제2중대는 박달령(朴達嶺) 부근에서 악 1백 명의 폭도와 만나 이를 구축하면서 전진하였다. 23일 오전 5시에 제천(堤川)에 도착, 촌락에 의거하여 저항하는 약간의 폭도를 격파하여 그 30명을 죽이고 본대에 합류하였다. 이래 제천(堤川)은 폭도의 근거지로서 전촌이 폭도의 편을 들어 그 북방 고지에는 산병호(散兵壕)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대장은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해 버렸다.
제천에 있는 폭도는 15일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내어 보낸 말안소대(末安小隊)를 곤경에 빠뜨린 이래 점차 증가하여 그 수 6백에 달하고 충주(忠州)를 점령하겠다고 호언하였다. 22일 오전 9시경 2부로 나뉘어, 그 하나는 제천(堤川)·청풍(淸風) 가도를, 주력은 제천(堤川)·주포(周浦) 가도를 잡아 충주(忠州)를 향하여 출발하고, 또 그날, 오후 강릉(江陵)에서 왔다고 칭하는 폭도 약 2백은 오후 6시 충주를 향해 전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족달지대(足達支隊)가 제천으로 전진 중 극히 소수의 폭도와 조우하였을 뿐이었던 것은 폭도의 경계가 교묘하여 우리 예봉을 피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 폭도는 수괴 민긍호(閔肯鎬)의 부하들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과연 충주를 습격하였으나 동지 수비대장의 적당한 배비(配備)로 인하여 격퇴당하고, 사상 20여를 내고 대부분은 충주·청풍 가도 방향으로, 일부는 장호원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삽화 제10 참조)
이래 여주(驪州)는 민후(閔后)의 출생지로서 그 횡사 이래 배일사상이 극히 왕성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폭도가 봉기하자 그에 가담하여 탄약 양식 등을 공급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재 원주 하림(下林) 지대장은 답곡대위(畓谷大尉)가 인솔하는 중대를 24일 동지에 파견하여 폭도에 편드는 부락을 소각시켰다.
불파토벌대(不破討伐隊)는 소류중대(小柳中隊)를 죽산(竹山)·음죽(陰竹)을 거쳐 능촌중대(能村中隊)는 양지(陽智)·이천(利川)을 거처 각기 부근을 소탕하면서 전진, 26일 장호원에서 서로 만나 여주(驪州)·지평(砥平)·이포(梨浦)·이천(利川)을 소탕하고, 30일 이천(利川) 서방 약 2000m인 설봉산(雪峰山) 부근에서 원(元) 시위 보병 제1연대 중대장 허준(許俊)이 인솔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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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백의 폭도를 궤주시키고, 31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고 각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전선수리(電線修理) 호위로서 경성(京城)에서 이천 방면으로 파견한 중촌소위(中村少尉)가 이끄는 1소대는 30일 이천 북방 고지에서 약 4백의 폭도와 조우 그것을 격파하였다. 폭도의 일부는 광주 가도로 패주하고, 그 주력은 설봉산 방면으로 궤주하여 불파(不破)토벌대에게 다시 타격을 받았다.
불파토벌대에 책응할 임무를 띠고 경성에서 양근(楊根)·이천(利川) 방면으로 파견된 명석중대(明石中隊)는 23일 양근(楊根)에 도착, 24일 양근 동북 약 20리에 있는 폭도의 소굴인 장수동(長壽洞) 연안막(蓮安幕)을 습격, 궤란하는 폭도를 추격하여 용문사(龍門寺) 근거지를 무찔러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 폭도는 사상 50을 유기하고 산란하였다.
27일 광탄(廣灘)으로 전진하고, 30일에는 산지동(山地洞 ; 광탄 북방 약30 리) 서북방 약 10리의 무명촌(無名村) 및 고조리(古兆里)에 있는 약 5백의 폭도를 엄습하여 대타격을 주었다. 폭도는 사상자 1백 여를 유기하고 문호(汶湖) 방향으로 도망쳐, 9월 3일 우리 추격에 견디지 못해 드디어 사방으로 산란하였다. 중대는 동일 고안(高安)에서 숙영하고 5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삼척(三陟)에 상륙한 우진강대위(宇津江大尉)가 이끄는 1부대는 24일 정선(旌善)으로 향하여 전진, 28일 영월(寧越)로 들어가 족달지대(足達支隊)의 주력과 연락하고, 그 후 주력을 삼척(三陟)에 두고 울진(蔚珍)·고직령(古直嶺) 방면을 수색하였다. 강릉파견대도 그 주력을 강릉에 두고 평창(平昌) 부근에 있는 족달지대(足達支隊)의 분견대와 연락하여 구간령(久間嶺) 부근의 적도를 진압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와 책응하여야 할 재안동(在安東)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진보(眞寶) 부근을 토벌한 후 영주(榮州)로 진출하였다.
27일 풍기(豊基)로 전진할 때 마침 동지 경무분견소를 습격, 우리 경관 1명을 참살한 폭도 약 3백과 충돌, 그것을 서방으로 격퇴시켰다. 그런데 폭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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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경 중대가 취사를 하고 있을 때 재차 대세(隊勢)를 정돈하고 역습하여 와서 약 1시간 교전 후 쌍방이 다같이 현상대로 철야하고, 다음 28일 오전 5시부터 중대는 공격을 개시 이것을 서남방으로 격퇴하였다. 그 후 그 부근을 소탕하고 영주(榮州)로 귀환하였다. 이 폭도는 29일 순흥(順興)경무분견소를 31일에는 봉화(奉化)경무분견소를 습격, 그것을 소각하는 등 횡포를 극하였다.
30일 청주(淸州)에서 충주(忠州)로 탄약·양식을 수송 중이었던 호위 하사 이하 7명은 괴산(槐山) 남방 약 2000m 지점인 남정자(南亭子) 부근에서 폭도 약 3백에게 급습을 당하여 탄약 양식을 유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또 족달지대(足達支隊)에서 파견된 괴산 분견대도 동일 폭도의 습격을 받아 충주로 퇴각하였다. 이에 있어 재 충주 족달지대장(足達支隊長)은 보병 제 47연대 제6중대장 성호기대위(城戶崎大尉)에게 보병 2소대를 주어 괴산(槐山)으로 급행시켰다. 이 부대는 31일 오전 3시 괴산(槐山) 동단(東端)에 도착, 폭도가 동지에 노영하고 있음을 찰지(察知)하고 맹렬히 이를 기습하여 궤란으로 몰아넣고, 동시에 전일(前日) 폭도에게 빼앗겼던 탄약·양식의 대부분을 회수하였다. 폭도는 시체 40을 유기하고 사방으로 산란하였다.
이상, 각대의 협동 동작은 대개 원활치가 못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했음은 각대가 파견된 지방 상호의 거리가 멀고 전기적통신(電氣的通信)을 못하여, 지방에 있어서는 전혀 타 부대의 행동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연락에 중점을 두지 않게 되어 비목(鼻目)간에 접근하였을 때에도 연락을 하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동작을 하는 기관(奇觀)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개 집단적으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경계망이 엉성하여서 마치 같은 지방을 시일을 따로 하여 시위적 행동을 취한 것 같은 결과를 보여 도리어 폭도로 하여금 예봉을 피하기 쉽게 만든 느낌이 있었다. 또 야간 행동은 노고만 많았을 뿐 도리어 폭도의 행동에 자유를 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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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9월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1. 강원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족달지대(足達支隊)에 속하는 재 영월(寧越) 보병 제51연대의 석흑중대(石黑中隊)는 순흥(順興)·풍기(豊基)·단양(丹陽) 방면을 소탕하고, 9월 3일 영월군(寧越郡) 하동면(下東面) 밀동(密洞)에서 폭도 약 1백과 조우(遭遇), 그것을 격퇴하였다.
4일 영주(榮州)에 있는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안동 부근 봉서루(鳳棲樓)에서 약간의 폭도와 충돌 그것을 격퇴하고 그 근거지를 소각하였다.
간성(杆城) 부근 폭도 토벌을 위하여 원산(元山) 보병 제50연대에서 보병 1소대를 해로로 장전점(長箭店)에 상륙시켰다. 이 소대는 고성(高城) 부근에 있는 폭도를 소탕하고, 5일 간성(干城)으로 들어가 창암점(窓岩店) 및 그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고, 13일 다시 장전점(長箭店)으로 귀환, 그 후 그 곳에서 경비에 임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의 행동에 책응하여야 할 재(在) 춘천 경택중대(境澤中隊)는 그 주력을 홍천(洪川)으로 진출시켜 동지 부근을 소탕 중이었으나, 7일 폭도 약 6백이 둘로 나뉘어 남북 양방면에서 홍천(洪川)을 습격하였다. 중대는 일부로써 남방에서 오는 폭도를 막게 하고, 주력은 북방에서 내습하는 폭도를 공격하여 이것을 인제(麟蹄)·횡성 (橫城) 2방면으로 격퇴하였다. 폭도는 시체 20을 유기하고 우리 부대의 급추격에 견디지 못해 사산하여 산중으로 도망쳤다.
하림지대장(下林支隊長)은 원주(原州) 부근에 있는 폭도의 일부가 원주(原州)동방 약 20리에 있는 갈곡(葛谷) 고지 위에 약 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 5채 및 산병호(散兵壕)·녹시(鹿柴) 등을 구축 중이라는 정보를 듣고 8일 다기소대(多崎小隊)를 파견 동지방의 폭도를 구축하고 건물을 소각했다.
9일 홍천(洪川)에 있던 경택중대(境澤中隊)가 춘천(春川)으로 귀환하자 다음 10일 약 2백의 폭도가 재차 홍천(洪川)을 습격 그것을 소각하였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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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약 4백의 폭도가 낭천(狼川)을 습격 군아(郡衙)의 총기 탄약을 약탈하고 기타 가평(加平) 부근에 폭도가 출몰하여 춘천(春川)주위에 적세가 왕성하여졌다. 19일 경택 중대(境澤中隊)는 경성(京城)에서 파견된 보병 제52연대 제1, 2중대(長謙田大尉)와 교대하고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20일 춘천(春川) 남방 약10리인 정족(鼎足) 부근에 약 3백의 폭도가 출몰함을 알고 겸전중대(謙田中隊)는 부하 2소대로 토벌케 하여 그 5명을 죽이고 동방 대룡산(大龍山)으로 궤주시켰다.
울진(蔚珍) 부근 폭도를 토벌하기 위하여 재삼척(在三陟) 파견대는 일 선해환(扇海丸)을 타고 해로(海路) 울진에 상륙 전 원주(原州)진위대 부(附) 보병 참령 박준성(朴準成)이 지휘하는 폭도 약 1백 명을 공격 궤란에 빠뜨리고 동일 오후 삼척으로 귀환하였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근거로 하는 적괴(賊魁) 동고록(董高錄)은 폭도 약 4백을 이끌고 화천(化川)·북창(北倉)·인제(麟蹄)·양구(楊口) 부근에 걸쳐 출몰 약탈하므로 원산(元山) 보병 제50연대에서 중야중위(中野中尉)가 인솔한 1소대를 그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그 소대는 13일 원산을 출발 철령(鐵嶺)·회양·(淮陽)·화천(化川)·북창(北倉)을 경유, 19일 장안사(長安寺)에 도착 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약 3일 전에 통구현리(通口鐵里) 방면으로 도주한 후이었으므로 다시 장전점(長縣店)으로 나와 해안선을 따라 원산(元山)으로 귀환하였다.
충주수비대는 폭도 수색을 위하여 17일 이궁소대(二宮小隊)를 노음면(老陰面) 및 음성(陰城)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그 소대는 도중 좌악리(佐樂里 ; 노음면 남방 약 10리) 및 원대(院垈)에서 각 약 30의 폭도를 기습, 그것을 궤주시키고 원대(院垈)의 소굴을 소각하였다. 18일 음성(陰城)에 도착 무극장(無極場) 부근에 폭도 집합이라는 정보를 얻어 19일 무극장(無極場)을 향하여 전진 중 사정리(沙亭里)에서 약 200의 폭도와 조우그 중 16을 사살하고 그들을 무극장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충주로 귀환하였다.
19일 장호원(長湖院)수비대는 동지 동남방면에서 약 4백의 폭도의 습격을 받아 교전2시간 후 그것을 격퇴하였다. 폭도는 시체 10을 유기하고 동남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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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주하였다. 원주(原州)의 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정찰을 위하여 파견된 평도소대(平島小隊)는 22일 원주(原州) 서방 문막(文幕) 부근에서 폭도 약 1백을 야습하여 그중 10을 사살하고 궤주시켰다.
원주(原州) 부근의 폭도는 원래 횡성군(橫城郡) 갑천면(甲川面) 갑천리(甲川里) 부근 및 그 동방 약 2리에 있는 봉복사(鳳腹寺)를 근거지로 하여 부근 부락에서 물자를 약탈하고 동영준비(冬營準備)를 하면서 있다는 정보에 접한 하림지대장(下林支隊長)은 좌등대위(佐藤大尉)에게 보병 2소대와 기관총 2를 주어 토벌시켰다. 이 부대는 22일 횡성(橫城)에 도착, 23일 오후 1시 갑천리(甲川里) 및 봉복사(鳳腹寺)에 있는 폭도 약 3백 50을 습격, 그 중 50를 사살하고 동방산지(東方山地)로 궤멸시키고, 봉복사를 불태워 버리고 24일 원주로 귀환하였다.
양식 호위로서 경성(京城)에서 한강의 흐름을 따라 충주(忠州)로 향한 보병 제51연대의 탕천중위(湯淺中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24일 새벽 양근(楊根) 서북방 약 10리 지점인 사탄(沙灘)에서 숙영 중 그 동북 고지 및 서방에서 약 2백의 폭도의 습격을 받아 교전 2시간 후 격퇴하였다. 폭도는 시체 20을 유기하고 각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탕천소대(湯淺小隊)는 25일 오후 2시경 양근(楊根) 상류 약 10리반 거리인 구포(龜浦) 부근에서 약 2백의 폭도와 조우 그것을 구포 서방 고지로 구축하고 있었다. 그때 원주 하림대(下林隊)와 수비 교대차 경성(京城)에서 파견된 보병 제51연대 중대 전변대위(田邊大尉)는 그날 양근(楊根)을 출발 자포(紫浦)로 향해 행군 중이었는데 구포 방면에서 나는 총성을 듣고 그 부근을 정찰시켰던 바 신천(新川) 동남 고지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폭도 약 3백이 점차 구포 방면으로 전진하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1소대를 구포 방면으로 우회시켜 탕천 소대와 연락, 3면에서 합세 공격을 하여 적 27을 죽이고 동방으로 궤주케 하였다.
29일 전변중대(田邊中隊)와 탕천소대(湯淺小隊)는 여주(驪州)에서 숙영 중 적괴 김봉기(金鳳基)가 인솔하는 폭도 약 4백의 습격을 받아 전변중대와 탕천소대는 교전 약 2시간 후 적 28을 사살하고 여주 서남 북성산(北城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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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면으로 궤주시켰다.
30일 하림지대(下林支隊) 및 족달지대(足達支隊)는 그 편성이 풀려 하림지대(下林支隊)는 10월 3일 원주 출발 여주·이천 경유 수원(水原)에 이르러 그곳을 수비하고, 족달지대(足達支隊)는 영죽(永竹)에서 약간의 폭도를 소탕하고 10월 3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2. 경상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강원도에 있는 폭도는 9월 그 주력을 경상북도 북부로 이동한 듯 3일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폭도 약 6백은 문경(聞慶)을 습격 전선(電線)을 파괴하고 횡포 약탈을 극해, 재류 일본인 경무분견소 및 우편국원 등 난을 함창(咸昌)으로 피하였다. 5일 이 보고에 접한 군사령관은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에 명하여 국지대좌(菊池大佐)에게 보병 제14연대 및 보병 제47연대의 대부분, 그리고 기병 반 소대, 산포병 1대, 공병 약간을 주어 문경 부근 토벌을 명하였다. 동시에 족달 지대에 훈령을 내려 이에 책응케 했다.
토벌대는 그를 5종대(五縱隊)로 나누어, 제1종대는 보병 제14연대 중대장 등전대위(藤田大尉)가 이끌고 영천(永川)에서 청송(靑松)·진실(眞實) 부근을 소탕하면서 12일 영양(英陽)에 도달, 13일에는 봉화(奉化) 부근의 폭도를 소멸하였다. 제2종대는 보병 제14연대장 정택소좌(井澤少佐)가 이를 인솔하고 대구(大邱)를 떠나 안동(安東)으로 향한 다음, 일부를 봉화(奉化)·풍기(豊基) 및 예천(醴泉)으로 분견(分遣)하고, 제3종대는 보병 제14연대장 국지대좌(菊池大佐)가 이를 인솔하고 해평(海平)·낙동(洛東)·대봉(臺封)을 경유, 12일에 문경(聞慶)을 찔렀다. 제4종대는 보병 제14연대 중대장 수야대위(水野大尉)가 이를 인솔하고 봉화(奉化)에서 옥산(玉山) 및 상주(尙州)를 경유, 함창(咸昌) 북방에서 소수의 적을 구축한 다음 문경(聞慶) 부근을 정찰하고, 10일 다시 상주(尙州)로 돌아와 11일 대봉(臺封)에서 국지연대(菊池聯隊)와 합세하였다. 제5종대는 재 대전(大田) 보병 제47연대장 생전중좌(生田中佐)가 이를 인솔하고 옥천(沃川)에서 관기장(官基場 ; 옥천 동 북방)을 경유 10일 화령장(化寧場)에 이르러 그 부근에서 출몰 약탈을 자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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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폭도의 근거지가 청계사(淸溪寺)임을 알고 12일 새벽 청계사를 습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괴산(槐山)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다. 그래서 화녕장(化寧場)에 1소대를 수비군으로 잔류시키고 13일 함창(咸昌)을 향해 전진하였다.
족달지대(足達支隊)는 우선 충주 보병 제51연대 제8중대에서 청안(淸安)·수안보(水安堡)·판교리(板橋里)에 각 1소대를 분견(分遣)하고, 단양(丹陽)에는 보병 제51연대 석흑중대(石黑中隊)를 위치시키고 그 1소대를 풍기(豊基)로 분견(分遣)하고, 제천(堤川)에는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의 1소대를 수비로 두었다.
수안보(水安堡)에 있는 소대는 폭도 약간이 문경에 머물러 있고, 그 일부는 조령관(烏嶺關)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9일 오전 2시 야밤을 무릅쓰고 폭도를 급습하여 거의 그것을 격멸시켰다.
족달지대(足達支隊)에서 청안(淸安)으로 분견되었던 횡정(橫井) 소위가 인솔하는 1소대는 청안(淸安) 서북방 약 10리 반인 반탄(盤灘)에 폭도 약 5백이 침입한 것을 알고 12일 그들의 식사시를 노려 습격 대타격을 주었다. 폭도는 당황하여 서쪽으로 궤주하고 일부는 반탄(盤灘) 북방 약 300m 고지에 머물러 응전하기 약 1시간 만에 드디어 시체를 유기하고 북방으로 궤주하였다.
국지종대(菊池縱隊)는 함창(咸昌)에서 수야종대(水野縱隊)와 합세하여 13일 문경 (聞慶) 부근에서 숙영하고 폭도가 대성사(大成寺 ; 문경 동북 산 중) 및 금룡사(金龍寺 ; 문경 동방 약 40리) 부근에 집합한 것을 알고 불파소좌(不破少佐)에게 보병 1중대, 기관총 2를 주어 그것을 소탕시키게 하였다. 불파소좌(不破少佐)의 일대는 대성사와 금룡사 부근의 폭도 약간을 소탕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이미 영천(榮川)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대봉(臺封)에 있던 송야중대(松野中隊)는 삼해리(三害里)를 경유 대성사(大成寺) 부근을 정찰 중 적성(赤城) 부근에 폭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14일 적성시장의 동서남 3방면에서 촌락을 포위하고 돌격을 하자, 폭도는 당황하여 시장 동북방 고지로 퇴각,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의 맹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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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에 의하여 사상 15를 유기하고 드디어 영천(榮川)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것으로 반란병이 다수 섞여 있었다.
제1종대는 15일 영양(英陽)을 떠나 영양 동북 20리 지점에서 적괴(賊魁) 신돌석(申乭石)이 인솔하는 폭도 약 150을 엄습하였다. 폭도는 시체 12를 유기하고 영덕(盈德) 가도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또 동일 동 종대의 석환소대(石丸小隊)는 영양(英陽) 북방에서 폭도 50~60을 추격 그를 공격하여 북방으로 궤주시켰다.
제2종대는 주력을 영주(榮州)에 두고 일부를 풍기(豊基)로 내보내 죽령(竹嶺)·단양(丹陽) 및 적성(赤城) 사이를 정찰 소탕에 종사하였으나 드디어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20일 군사령관은 토벌대의 일부로 경상북도 해안에 있는 폭도를 소탕시켰고 그 나머지 부대는 각기 수비지로 귀환시켰다.
국지대좌(菊池大佐)는 그 제 3대대장 강택소좌(江澤少佐)가 인솔하는 제11중대 (1소대 결) 및 제12중대에게 명하여 24일 영천(榮川)을 떠나 영춘(永春)·영월(寧越) 방면을 소탕시켰다. 제10중대에게는 25일 춘화(春化)를 떠나 울진(蔚珍)·영해(寧海)·영덕(盈德) 부근을 소탕시켜 점차 영일(迎日)·울산(蔚山)으로 남하시켰으나 적정(賊情)을 얻지 못하고 10월 5일 대대본부는 부산(釜山)에, 제11, 12중대는 밀양(密陽) 및 삼랑진(三浪津)에 이르러 그 후 각기 그 지방 수비에 임하고, 제10중대는 울산에 머물고 있었다.
25일 저녁 영주(榮州)를 수비하고 있던 서강중대(西岡中隊)는 죽령(竹嶺)을 넘어 영춘(永春)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약 3백 명의 폭도와 충돌 교전 약 1시간 후 그것을 궤주시켰다. 이 폭도는 이강년(李康䄵)이 지휘하는 집단으로 원 안동진위대의 해산병을 가담시키고 있는 폭도는 우리의 맹렬한 추격에 의하여 지리멸렬 사상 약 50을 유기하고 산간으로 도주하였다.
3. 경기도(京畿道)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8월 하순 양근(楊根) 부근에서 명적중대(明石中隊)에 의하여 소탕된 수괴(首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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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환(曺仁煥)이 인솔하는 폭도는 9월 상순 경기도 양주(楊州) 및 파주(坡州) 부근으로 이용하여 약탈 횡포를 극하여 경원(京元)·경의(京義)가도 부근에 적세가 만만치 않았다. 그로 인하여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중대장 전변대위(田邊大尉)에게 제1중대 및 제10중대의 반소대, 임시 산포 1소대, 공병 1분대를 주어 양주(楊州) 부근을 또 보병 제52연대 제12중대에게는 파주 부근을 토벌시켰다.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7일 경성(京城)을 떠나 수종대(數縱隊)로 나뉘어 8일 오전 4시 30분경 양주(楊州)에 있는 폭도를 포위 공격하여 그 16을 사살하였으나 대부분은 암야(暗夜) 아군의 포위를 찰지하고 양주 동방 및 북방 산지로 도주하였다.
겸전중대(謙田中隊)는 8일 경성 출발 파주 경유 전진을 계속하였으나 도중 폭도와 조우하지 못하고 석우리(石隅里)에 도착하여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와 연락하였다.
8일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양주(楊州) 토벌 후 폭도를 수색하면서 가라비리(加羅非里)로 향하여 전진중 동지 서북방 석적리(石積里)쪽에서 보통 한인(韓人)으로 분장한 남녀가 삼삼오오(三三五五) 계속 아군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장한 폭도임을 간파하고 곧 총포탄의 사격을 가하였다. 그 때 마침 겸전중대(謙田中隊)는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에 나타나 포위 태세를 취하였으나 겨우 그 중 10여 명을 사살하였을 뿐 폭도는 방향을 바꾸어 북방으로 도주하였다.
9일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가라비리(加羅非里)를 출발 선업리(仙業里)애 도착하였을 때 양주(楊州) 및 파주(坡州)의 폭도는 적성(積城) 부근에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야행군으로 전진 10일 새벽 적성을 포위하고 포격을 개시하였으나 성내는 적막하기만 하고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적괴(賊魁) 권준(權俊 적성 출신)이 인솔하는 폭도 약 3백은 어제 밤 동방을 향해 도주하였다고 한다. 겸전중대(謙田中隊)는 9일 신산리(莘山里)를 향하여 전진하였으나 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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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얻지 못하고 11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전변토벌대(田邊討伐隊)는 도주하는 폭도의 주력이 영평(永平) 서남 약 20리에 있는 산내리(山內里)에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12일 적성을 떠나 일부는 영평을 경유 경원 가도를 남하시키고, 주력은 산내리(山內里)를 향하여 전진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경원 가도의 동방으로 도주하여 버린 후 였으므로 15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적성(積城)에 있었던 폭도의 수괴(首魁) 왕희종(王會鐘)과 김진묵(金溱默)은 11일부터 13일에 걸쳐 적성(積城)·삭녕(朔寧)·안협(安峽)·토산(兎山) 등 각 지방을 약탈하고 장정을 모집 그 수는 4백에 이르렀다. 그리고 임진강 유역 일대의 땅 및 경원 가도 김화(金化) 부근은 특히 배일사상이 강렬하여 주민의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재 평양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상전대위(上田大尉)는 부하 1소대를 인솔하고 평양에서 기차편으로 금천(金川)에 하차하여 구화장(九化場)을 경유 토산(兎山)으로 향하고, 또 동 중대에서 신제(新溪)에 파견하였던 중촌소대(中村小隊)에게 명하여 시변리(市邊里)를 경유 토산(兎山)으로 나아가 상전부대(上田部隊)와 책응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상전대위(上田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 및 중촌소대(中村小隊)는 도중 아무런 소득 없이 25일 토산(兎山)에 도착하였다. 중촌 소대는 19일 시변리(市邊里)에서 폭도 약 60을 공격하여 그를 토산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0일 중대와 합류 21일 밤 중대는 안협(安峽)을 야습하였으나 이미 폭도의 대부분은 철원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아무 소득없이 25일 각기 수비지로 귀환 하였다.
재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는 금성(金城) 수비를 위하여 21일 경성을 떠나 양주(楊州)·적성(積城)을 거쳐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3일 토산(兎山)에서 숙영하였다. 그 때 안협(安峽)에 있던 폭도 약 2백은 그 후 철원을 습격 우리 우편 사무원을 참살하였다는 보고에 접하고 24일 철원을 향하여 전진 중 석교(石橋) 서방에서 폭도 약 1백 명과 조우 그 14명을 사살하고 또 석교 촌민이 전부 폭도의 편임을 알고 그 촌락을 소각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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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마갈지(馬乫地) 부근의 폭도를 소탕하면서 25일 오전 철원에 도착 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김화(金化) 수비 보병 제51연대 제6중대는 수비 교대를 위하여 새로 파견된 보병 제50연대 제6중대의 1소대와 협력하여 철원 부근 폭도 토벌을 목적으로 25일 김화(金化)를 떠났다. 일몰 후 철원에 도착 백정중대(白井中隊)와 합류하여 그날 밤 폭도 약 8백이 철원 남방 약 3리 지점인 심원사(深源寺)에 집합하고 있는 것을 정찰하고, 백정중대(白井中隊)와 협력하여 26일 야반부터 행동을 개시 각 방면에서 심원사를 포위하는 등 전진하였다.
서천중대(西川中隊)는 27일 오전 3시 법화동(法化洞)에서 약 1백 50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중 20을 사살하고 궤주시키고, 오전 5시에 심원사(深源寺)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약 1시간 전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백정중대(白井中隊)와 아부소대(阿部小隊)는 다같이 폭도와 조우하지 않고 전후하여 심원사에 도착, 다시 철원을 향하여 귀환하는 도중 오후 3시 대광리(大光里) 동북방에서 약 2백 50의 폭도와 충돌하여 그중 80은 사살하고 잔여는 산곡(山谷)으로 궤주시켰다. 28일 각대는 그 수비지로 귀환했다.
4. 전라남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민종식(閔宗植) 및 최익현(崔益鉉)의 무리는 전년 충청남도 홍주(洪州), 전라북도 남원(南原) 등지에서 봉기하여 민종식과 최익현을 포박 처형되었으나 그 도당이었던 유생 백낙구(白樂九)·기우만(奇宇萬)·고광순(高光詢) 등은 무지한 주민을 유혹 선동하고 비직관리(非職官吏)를 자주하여 비도 50여 명을 규합, 39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구례(求禮)·광양(光陽)·장성(長城) 등 각군의 관아를 습격 약탈 참살을 감행하였다. 다음 40년 2월에는 남원(南原)에서 적괴(賊魁) 박재호(朴在浩)가 부하 약70명을 이끌고 남원진위대를 습격 일시 이를 점령하였으나 동 진위대의 공격으로 곧 패주하였다. 다시 그해 4월에는 최익현(崔益鉉)의 부하였던 경상남도의 유생 이광선(李光先)이란 자가 폭도 약 1백여 명을 이끌고 능주(綾州)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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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하였으나 그곳 주재 순사에게 격퇴당하였다. 6월에는 기우만(奇宇萬)이 장성(長城)에서 포박되고 그 여당의 대개는 해산하여 일시 민심이 안정되고 폭도들의 기세는 꺾이었었으나, 7월 경성(京城)에서 한병(韓兵)의 폭동이 일어나고 이어 각 진위대가 해산되자 전라 양도에서 폭도의 기세가 재연되어 완미(頑迷)한 유생(儒生)이 그늘에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무산(無産) 부랑(浮浪)의 무리가 이에 부화뇌동하여 40년 겨울부터 41년 및 42년에 걸쳐 폭동은 가장 창궐하였다.
9월 상순 광주(光州) 부근에서 곡성(谷城)·담양(潭陽)·창평(昌平)·옥과(玉果)에 걸쳐 민정(民情)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10일에 이르자 드디어 일군의 폭도는 순창 우편국을 습격 약탈하고, 15일에는 약 2백의 폭도가 동복(同福)순사 주재소를 습격, 19일에는 구례(求禮) 및 영광(靈兆)의 분견소가 습격당하였는데, 이 폭도의 수괴(首魁)는 김동식(金東値)·고광순(高光珣) 등으로 전라남북도에 있어서 폭도의 선구자였다.
9월 하순 약 3백의 폭도가 계룡산(鷄龍山) 백암동(白岩洞) 부근에서 봉기하였다.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25일 연산(連山)분견소에서 파견된 일부대는 약 6시간 교전을 하였으나 이를 격퇴하지 못하고, 다시 공주(公州)수비대에서 1소대를 증파하고 26일 이를 야습하여 진산(珍山) 방면으로 격퇴하였으나 그들은 27일 재차 진산(珍山)을 습격, 그 주력을 용담(龍潭) 서방 20리 지점에 집합하여 부락민을 규합 그 세력은 더욱더 강대하여 졌다.
9월 상순 녹도(鹿島 ; 남포 서방 약 16해리)에 폭도가 봉기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군산(群山)수비대에서 파견한 척후 3명은 순사 1, 일본인 수명과 함께 폭도 약 2백에게 포위되어 참살당하였다. 이에 군산 수비대장은 하사 이하 18명을 인솔하고 경찰관 일행과 함께 13일 군산을 떠나 14일 녹도(鹿島)에 도착 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도주한 후였으므로 폭도의 부락 및 어선을 소각하고 피해자의 유해를 거두어 귀환하였다. 녹도에 있어서의 폭도의 대부분은 그 후 안면도(安眠島)·보령(保寧)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상 기술한 외에 9월 중에 있었던 소충돌을 표시하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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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수원(水原)수비대의1소대
9월 4일
충청북도 진천(鎭川)
약
150
사
30

청주(淸州)수비대의 하사이하 11명
15일
충청북도 미원(米院)
약
300
사
30

광주(廣州) 수비대장 이하 17명
16일
경기도 분원리 (分院里)
약
400
사
20
폭도의 수괴 조인환 (曹仁煥) 이 이끄는것
원주(原州)하림지대(下林支隊)에서 내보낸 하사 이하12명

강원도
20동 부근
약
20
사
5

영양(英陽)수비대의 1소대
9월 22일
경상북도
영양(英陽) 동북 40리 지점
약
90
사
18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소대
22일
경기도 양지(陽智)
약
200
사
23

대전(大田)수비대의 1소대
24일
충청남도 천안(天安) 및 성환(成歡) 부근
약
50
사
15

보병 제47연대의 1소대
24일
충청남도 부강(芙江)
약
70
사
8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7명
28일
황해도 직동(稗洞)
약간
사
10

진천(鎭川)수비대
29일
충청남도 목천(木川)
약
30
사
4

성주(星州)수비대장 이하 10명
29일
경상북도 두산(斗山)
약
30
사
3

제3장 10월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1. 강원도·충청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강릉(江陵)수비대에서 양양(襄陽) 부근으로 내 보낸 하사 이하 14명의 정찰대는 경찰관 암원경부(岩元警部)의 일행과 함께 10월 1일 양양(襄陽)에 도착하였다. 지난 8월 이래 대화역(大和驛) 부근 및 봉평면(蓬坪面) 내에 출몰 횡행하는 폭도가 전부 기린면(麒麟面) 부근으로 집합 중이라는 정보에 접하고 우선 현창리(縣倉里)를 공격하려고 양식, 피복의 일부를 서림(西林)에 남겨두고, 경장(輕裝)으로 오후 5시 30분 그곳을 떠나, 종침령(從沈嶺)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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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2시 각등(角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지 못하고 정찰대가 다시 현창리 남단에 이르자 약 5,6m거리에서 약40의 폭도와 충돌, 격투 끝에 그 20여를 죽이고 잔여를 궤주시켰다.
정찰대는 곧 북부 현창리(縣倉里) 및 창촌리(蒼村里)에 있는 폭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전진중, 폭도는 이미 현창리 북방 및 서방 고지에 진지를 점령하고 우리의 전진을 저지하였다. 정찰대는 분진(奮進), 전면의 폭도를 격퇴하였으나, 다시 동방 및 서방에서 쏘아대는 십자화(十字火)로 인하여 전진 불능에 빠졌을 때, 하늘은 아직 밝지 않아 폭도의 병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화력에 의하여 판단할 때 적어도 3백은 되었다. 그리고 점차 포위당하는 형세가 되었으므로 정찰대는 산병선(散兵線)을 연장하고 혹은 급사격을 하여 폭도의 근접을 방지하였다. 대전 약 2시간 만에 암원경부(岩元警部)는 전사하고, 날이 밝았을 때 폭도 약 2백은 다시 남방에서 아군에게 배사(背射)를 가하게 되고 또 나팔을 불며 돌격을 감행하여 왔다.
정찰대는 병력과 휴대 탄약의 관계상 폭도를 격퇴할 가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멸 직전 상태에 놓이게 되므로 결연 폭도의 박약부(薄弱部)를 돌파, 현창리(縣倉里) 서남 고지로 후퇴, 점차 퇴각하여 폭도와 접촉을 끊고, 오후 10시 진부(珍富) 서북방 약 80리 지점인 생둔(生屯)에 도착하였다. 다음 그 곳 면장을 시켜 진부분견대에 증원대와 탄약의 청구를 하고, 4일 오후 하사 이하 7명과 탄약의 보급을 얻어 다시 현창리로 향하는 도중 각등(角謄)에서 정보를 듣고 급거 출동하여 온 강릉수비중대와 합세하여 현창리(縣倉里)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인제(麟蹄) 방면으로 도주한 후였으므로 중대는 1소대를 양양(襄陽) 부근에 잔류시키고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9월 하순 쌍호(雙湖) 장양리(長楊里) 부근에 폭도의 도량이 심하므로,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의전소장(依田少將)은 백암장(白岩場)·장호원(長湖院)·음성(陰城)·청안(淸安)·오근장(梧根場)·병천(並川)·직산(稷山)·양성(陽城)의 각 수비대를 통일 계획하에 쌍호(雙湖)를 목표로 하여 포위적 토벌을 맡은 각 종대(縱隊)의 병력은 보병 2소대 내지 반소대로 하고 그에 공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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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특설 순검 약간을 따르게 하였다.
각 종대는 6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8일 오후 오근장종대(梧根場縱隊) 및 양성종대(陽城縱隊)는 화산동(花山洞) 부근에서 약50~60의 적을 협격하고, 또 같은 날 장호원종대(長湖院縱隊)와 백암장종대(白岩場縱隊)도 만죽(晩竹)부근에서 약 40~50의 적을 협격하였다. 음성종대(陰城縱隊)는 동일 장양리(長楊里) 서방 2000m 지점에서 폭도 40을 엄습하여 그 14를 죽이고 각 종대는 같은 날 오후 4시 쌍호를 포위하였으나 적을 보지 못하고 피차 정보만을 교환하였다. 이것을 종합하면 폭도의 대부분은 우리 계획을 찰지하고 그달 1일부터 5일에 이르는 사이에 청주(淸州)·청안(淸安) 지구를 통과하여 미원(米院) 방향으로 도주한 듯 예기의 효과를 얻지 못하고 9일 각기 수 비지로 귀환하였다.
함창(咸昌)수비대에서 파견한 정찰대는 10일 의상동(義尙洞)에서 폭도 약 3백과 충돌하여 격전 3시간 후 그 30을 죽이고 그것을 송면장(松面場)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9일 적도(賊徒) 약 50이 화령장(化寧場) 부근에 출몰 약탈을 자행하고 송면장(松面場) 부근에도 적이 나타났다는 경보가 빈번하였다. 이에 있어, 상주 수비대장 산전소좌(山田少佐)는 그 소탕을 획책하고 장교 이하 12내지 20명으로 된 5종대를 편성하여 11일 송면장으로 향하여 포위적 행동을 실시하였다.
각 종대와 충돌한 폭도는 합계 약 8백이고, 그에게 준 손해 또 1백에 달하였으나, 대부분은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도주하였기 때문에 섬멸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 폭도의 수괴는 이언용(李彦用)·이완채(李完蔡)·이구채(李求蔡) 등이었다.
춘천(春川) 부근에서 창의대장(倡義大將)이라 칭하는 지용기(池龍起) 및 총수(總帥)라 칭하는 이인재(李寅在), 양근(楊根) 부근에 있는 신창현(申昌鉉) 등의 수괴는 약간의 부하를 지휘하여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철원 부근에서는 김화(金化)·금성(金城)의 수비대의 압박을 당하고 있던 왕회종(王會鐘) 및 김수묵(金壽默)의 무리가 경원가도(京元街道)의 동부로 잡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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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春川)·낭천(狼川)·양구(楊口) 부근에 출몰하였다. 강기사단장(岡崎師團長)은 그 지방 부근의 소탕을 위하여 재 경성 보병 제 55연대 제 5중대에 기병·공병 약간을 붙여 토벌시켰다.
이 토벌대는 2일 경성(京城)을 떠나 고안(高安)·양근(楊根)·용두(龍頭)를 경유 전진하여, 5일 춘천 수비대에서 나온 등원소대(藤原小隊)와 연락하고, 홍천(洪川) 서방 약 10리 지점인 오류정(梧柳亭) 부근에서 약 60의 적을 공격하여 그 6을 죽이고 궤주시켰다.
7일 등원소대(藤原小隊)는 춘천(春川)으로 귀환하였다. 토벌대는 홍천(洪川)을 떠나 일몰시(日沒時) 유목동(楡木洞)에 도달하자 폭도 약 70이 동지 동서남쪽 고지 산정(山頂)을 점령하고 아군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과 충돌하였으나, 일몰(日沒)로 인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현재 대형대로 철야하였다가 8일 새벽에 그를 인제(麟蹄)·춘천 2방면으로 궤주시켰다.
9일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인제로 전진하여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에서 파견된 삼포소대(三浦小隊)와 연락하고 동일 서호리(西湖里)·광치령(廣峙嶺)을 경유 양구(楊口)에 도착, 그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10일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에서 파견한 삼우소대(森友小隊)와 연락하고 삼포소대(三浦小隊)와 함께 3개의 다른 도로를 잡아 낭천(狼川)으로 향하였다.
오후 3시경 삼포소대는 낭천(狼川) 동방 약 10리 지점에서 먼저 폭도 약 50과 만나 공격하는 한편 소림토벌대와 삼우 소대도 약간의 폭도와 만났는데, 그 수 2백 헤아려 맹렬히 추격했으나, 거리가 멀어 겨우 그 8명을 사살했을 뿐 나머지를 동방으로 놓쳐 버렸다. 이 폭도의 수괴는 지용기(池龍起)였다.
소림토벌대(小林討伐隊)는 12일 낭천을 출발 죽둔리(竹屯里)를 경유, 13일 청평천(淸平川)에 도착 동지 부근을 소탕하고 16일 경성으로 귀환하였다.
삼포(三浦) 삼우소대(森友小隊)도 13일 각기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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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음성(陰城) 가도상 신대(新垈) 부근에 폭도 약 5백이 집합, 장차 대소원(大召院)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얻은 충주 수비대장은 15일 장교 이하 23명을 정찰을 위하여 신대(新垈) 부근으로 파견하였다.
정찰대는 오추 4시 망청보(望淸甫)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방호동(芳湖洞) 방면으로 도주하였음을 알고 야행군으로 그것을 추적하여 16일 오후 5시 폭도 약 2백 50을 추급하고 그 12를 사살하고 신전(薪田) 방면으로 격퇴하였다.
17일 오후 충주(忠州)를 떠나 한강을 따라 용산(龍山)으로 향하여 하행중이던 육군 환자 운송선은 천포(泉浦) 하류 약 10리 지점인 법천(法泉) 서쪽에 이르자, 동지 남방 고지에 폭도 약 1백이 출현하여 운송선에 대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이 배에 타고 있는 호위병은 즉각 응사하여 가까스로 격퇴 하였으나, 사공은 전부 상륙하여 도주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도보를 이용하여 장호원으로 피난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는 다음 18일 장교 이하 25명을 법천(法泉) 부근으로 보내 정찰을 하게 하였다.
이 정찰대가 오후 3시 반 흥호리(興湖里) 서북방 1천m 고지에 도착, 흥호리에 약 4백의 폭도가 집합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동남방으로 퇴각 중이었으므로 그것을 추격 궤란시켰다.
영월(寧越)에서 제천(堤川)으로 향한 연락병은 제천 동방 약20리 반 지점에 있는 창동리(蒼洞里) 부근에서 폭도 약 80의 습격을 받아 제천에서 출동 시킨 연락병의 증원으로 겨우 폭도를 서방으로 격퇴시켰다.
이상과 같이 한강 연안에 있어서의 폭도의 출몰은 수운(水運)에 의한 수송을 방해함으로써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23일 재 경성 보병 제51연대 제11중대에 기병 약간을 붙여 한강 연안 토벌을 맡겼다. 이 토벌대는 그 1소대를 한강 좌안에, 주력은 우안에서 강을 따라 전진, 26일 복포(伏浦)·노대곡(魯大谷) 부근을 소탕하고, 27일에는 양근(楊根) 북방 사나사(舍那寺)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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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백 50의 폭도를 습격 궤란시키고 사나사(舍那寺)를 소각해 버렸다.
한강 좌안을 전진하고 있던 소대는 26일 광주(廣州) 동방 약 30리 지점인 관음방(觀音坊)에서 약 2백의 폭도를 습격 궤주시키고, 31일 다같이 충주에 도착하였다.
이상 말한 외 10월 중에 충돌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삽화 제 17참조)
[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성환(成歡)수비대의 1소대
10월 2일
경기도
안성(安城) 부근
약
300
사
6

수원수비대의 정찰대
6일
경기도
진위(振威) 동방
약 30리 지점
약
30
사
8

영월수비대(寧越守備隊)
6일
강원도
영월(寧越)
약
400
사
15

보은(報恩)수비대장 이하 18명
7일
충청북도
보은(報恩) 북방 남악리(南嶽里)
약
300
사
10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6명
8일
황해도
배천(白川) 서방 약
1,000m의 악촌(嶽村)
약
30
사상약간
수괴 김창호 (金昌鎬) 인솔
보병 제14연대의 1소대
9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부근
약
30
사
4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6명
10일
황해도
연안(延安) 부근
약
150
사
5

영천(永州)수비대의 하사 이하 10명
15일
경상남도
자인(慈仁) 남방 약
20리의 지점
약
150
사
40
수괴 김세순 (金世淳) 포박
장호원(長湖院)수비대장 이하 16명
18일
경기도
음죽(陰竹) 서남방 약
3000m 부근
약
70
사
1

토산(兎山)수비대 장교 이하 10명
19일
황해도
토산북동 약 30리
약
50
사
4

진부분견대(珍富分遣隊)
19일
강원도
진부(珍富) 부근
약
250
사
4

청주(淸州)수비대의 정찰대
20일
충청북도
청주(淸州) 서북 금성동(金城洞)
약
60
사
7

고성분견대(高城分遣隊)
20일
강원도
고성(高城) 부근
약
350
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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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점(長箭店)수비대의
장교 이하 7명
20일
강원도
통천(通川)
약
80
사
2

보병 제50연대의 1소대
21일
강원도
원주(原州) 동남 유치(杻峙)
약
300
사
30

보병 제47연대의 1소대
21일
충청남도
천안(天安) 동방
약 20리 부근
약
50
사
15

전주수비대(全州守備隊)의 1분대
22일
전라북도
진안(鎭安) 부근
약
100
사
15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6명
24일
황해도
해주(海州) 동방 약 40리 갈암(葛岩)
약간
사
14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의 1소대
26일
강원도
횡성(橫城) 서방 둔촌(屯村)
약
300
사
35

청송(淸松)수비대의 상등병 이하 5명
29일
경상북도
청송(淸松)
약
30
사
2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의 1소대
30일
강원도
충주(忠州) 청풍도상 음실
약
300
사
16

삼척수비대(三陟守備隊)의 1소대
30일
강원도
삼척군 말노면 정동(鼎洞)
약
500
사
11

수원수비대의 소대장 이하 23명
30일
경기도
죽산(竹山) 부근
약
200
사
22

충주(忠州)·평창(平昌)간 전선 가설 엄호소대(掩護小隊)
31일
강원도
박달령(朴達嶺) 부근
약
400
불명

2. 경기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10월 4일 포천(抱川) 동방 약20리 반에 있는 현등사(懸燈寺) 부근에 폭도 집합이라는 보고에 접한 청평천(淸平川)수비대는 목촌소위(木材少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파견하였다.
이 소대는 동일 현등사 남방 약 20리 지점인 대봉동(臺峰洞) 부근에서 약 50의 폭도를 구축하고 5일 포천(抱川)수비대에서 파견한 1소대와 협력하여 현등사의 폭도를 공격 궤주시켰다.
철원(鐵原) 부근에 폭도 집합이라는 보고에 접한 금성(金城) 수비대장은 부하 42명을 인솔하고 그곳 부근을 소탕하기 위하여 15일 밤 금성(金城) 출발, 16일 미명에 철원(鐵原)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밤새 도주하였고, 다시 심원사(深源寺)부근에 폭도집합이라는 보고를 얻어 17일 불의에 심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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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약 3백의 폭도와 접전 격투하여 그 40을 사살하고 궤주시켰다. 심원사는 장래의 화근을 끊기 위하여 소각하여 버렸다.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임진강에 출몰하는 폭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재 경성 보병 제50연대 재8중대에게 기병 장교 이하 10기를 따르게 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토벌대는 25일 경성을 떠나 고양(高陽)을 경유 26일 파주(坡州)로 들어가 27일 3중대로 편성, 적성(積城)을 향하여 전진하였다.
그 우종대(右縱隊)인 소대는 갈동(葛洞)·매곡(梅谷)·신암동(莘岩洞)에서 약간의 폭도를 구축하고 그 소굴을 불태우고, 28일 마전(麻田) 및 고문리(古文里) 부근을 수색하면서 연천(漣川)으로 들어가 폭도 약 2백과 만나 그 60을 사살하고 궤주시켰다. 29일에서 11월 4일에 걸쳐 삭녕(朔寧)·이천(伊川)·철원(鐵原) 부근을 소탕하고, 5일부터 그 1소대를 영평(永平)·포천(抱川)을 경유시켜 하송우(下松隅) 남방 약 30리 지점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의 폭도를 소탕시키고 의정부로 나오게 하고, 주력은 마전(麻田) 부근에 재차 적세가 성하다는 보고에 의하여 동지에 이르러 약 4백의 폭도를 공격하여 그 30을 사살하고 궤주시킨 다음, 삭녕(朔寧)을 거쳐 9일 의정부에 이르러 분진(分進)시켰던 소대와 합류,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3. 경상남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9월 전라도에서 봉기하였던 김동식(業東植)·고광순(高光詢)의 배하는 10월 경상남도로 침입하여 거창(居昌)·안의(安義) 부근에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진주(晋州) 경무 고문의 토벌이 여의치 않아 진해만(鎭海灣)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에서 파견된 진주 파견대는 10월 4일 산전소위(山田少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산청(山淸)·안의(安義) 방면으로 파견하고, 남원(南原)수비대는 하사 이하 12명을 안의(安義) 방면으로 급행시켜 그와 책응케 했다.
산전소대(山田小隊)는 8일 오후 거창(居昌) 서북방 약 60리 지점인 월성(月城)에서 폭도 약 3백과 만나 그 수 10을 사상시키고 서방(西方)으로 궤주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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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수비대에서 전선 수리 호위를 위하여 안의(安義) 방면으로 파견하였던 1분대는 7일 안의 부근에서 폭도 약3백과 충돌하여 그 6명을 사살하고 서북방으로 격퇴시켰다.
거창(居昌)·안의(安義) 부근의 폭도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칠불사(七佛寺)를 근거로 4일 하동경무서(河東警務署)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시시로 남하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진주 파견대장 소관대위(小山大尉)는 하동(河東) 방면을 정찰한 결과 폭도 약 3백이 칠불사(七佛寺)·연곡사(鷰谷寺)·문수동(文殊洞)에 있음을 알고 16일간 화개장(花開場)에 이르러 광주(光州) 수비대장 목야대위(木野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와 연락하고 17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 공격하여 수괴(首魁) 고광순(高光詢) 이하 22명을 사살하고 수10을 부상시키고 연곡사는 소각하였다.
폭도는 거의 지리멸렬 여러 곳으로 궤주하였다.
그 후 경상남도의 폭도의 주력은 전라도로 이동, 거의 정온을 되찾았다.
4. 전라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10월 2일 폭도 약 70이 전라북도 임실(任實) 부근에 출몰하여 동지 주재 일본 교사 1명을 참살하고, 또 3일에는 금산(錦山)부근에 약 1백 명의 폭도가 출몰하여 우편국·세무서 및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우고 수명을 참살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영동수비대(永同守備隊)는 4일 정상소위(井上少尉) 이하 20명을 금산(錦山)으로 파견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이동 후이었으므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였다.
5일 폭도 약 1백이 진산(珍山)을 습격, 약탈을 자행한다는 보고에 접한 전주수비대(全州守備隊)는 6일 1소대를 파견하여 이를 궤란시켰다.
전라 양도 접경에 있는 순창(淳昌)·구례(求禮)에서 이북 임실(任實)·진안(鎭安)·용담(龍潭) 및 전라북도·충청남도의 접경에 있는 금산(錦山)·진산(珍山)·연산(連山) 부근에 폭도의 출몰이 빈번하였다. 그래서 남부수비대 관구 사령관은 그 토벌을 계획하고 목포(木浦)·성주(星州)·영동(永同)·대전(大田)·공주(公州)·군산(群山)·광주(光州)의 각 수비대에서 장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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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는 반소대 내지 1소대의 병력으로써 각각 중산(中山)·용담(龍潭)·금산(錦山)·진산(珍山)·인천(仁川)·판교(板橋)·고산(高山)으로 보내 포위적 토벌 행동을 실시하였다.
각 토벌대는 13일 행동을 개시하여 각기 목적지로 향하여 소탕에 종사하였으나 더 이상 적정(敵情)에 대하여 얻는 바 없이 17일 목적지에 도착, 빈 손으로 다시 원 수비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는 폭도들이 각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얻어 주력을 경상도 거창 방면으로 이동시키고 나머지는 양민을 가장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안(鎭安) 부근에 폭도 약 3백이 집합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전주 수비대는 20일 특무조장(特務曹長) 이하 30명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시켰다. 이 토벌대는 즉일 진안(鎭安)에 도착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용담(龍潭)·삼가(三街)·고산(高山) 부근을 수색하다가 22일 심원암(深院庵) 부근에 폭도 집합의 보고를 얻고 동지로 향하여 전진 중 폭도 약 1백과 만나 이를 공격 그 15를 사살하고 남방으로 궤주시켰다.
그들은 어느 한 지방을 습격하려고 할 때에는 미리 일시(日時)를 기하여 실행하고, 목적을 달하면 다시 집합지와 일시를 정한 다음 몇 사람씩 분산하여 양민(良民)으로 가장, 우리의 예봉을 벗어나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제4장 11·12월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1. 강원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10월 하순 한강 연안의 폭도를 소탕하고, 충주에 도착한 적창토벌대(赤倉討伐隊)는 11월 1일 충주 수비관구 사령관 산촌소좌(山村少佐)로부터 다시 신수정점(新水亭店) 및 고모곡(古毛谷) 부근의 폭도 소탕의 명을 받고 즉일 출발 박달령(朴達嶺)·주포(周浦)를 경유 2일 신수평점(新水平店)에 도착하였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4일 원주(原州)에 도착, 고모곡(古毛谷) 부근 토벌을 위하여 4일 경성(京城)을 출발한 판부지대(坂部支隊)에 책응하기 위하여 6일 다시 원주에서 떠나 횡성(橫城)을 경유 고모곡(古毛谷)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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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풍수원(楓樹院)에 이르렀을 때 다시 삼산리(三山里)부근에 폭도 집합의 정보를 얻고 그리로 향하여 급진하였으나, 이미 도주한 후였다. 동지에서 판부지대(坂部支隊)와 연락하고, 8일 지평(砥平)으로 향하는 도중 삼산리(三山里) 서남 약 20리 지점인 노안산(魯安山) 속에 약 2백의 폭도가 잠복 중임을 정지(偵知)하고 그를 급습, 그 28을 사살하고 궤주시킨 다음 1소대를 지평(砥平)으로 분진(分進)시키고 중대는 이수두(二水頭)에 머물렀다.
강기(岡崎) 제13사단장은 지평(砥平)·횡성(橫城)간, 고모곡(古毛谷) 부근의 폭도 토벌을 위하여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판부소좌(坂部少佐)에게 동 제 12중대,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임시 산포 1소대 및 공병 제13대대의 1소대를 지휘시켜 토벌을 명하였다.
판부지대(坂部支隊)는 4일 경성(京城)을 떠나 고안(高安)·양근(楊根)을 경유 6일 광탄(廣灘)에 도착 7일 새벽 뇌성호우(雷聲豪雨)를 무릅쓰고, 지평(砥平) 동방 ‘구둔치 재’에 도착하였을 때 폭도 약 1백 50은 그 고개마루 각처에 구축한 산병호에서 아군을 향해 난사를 하여 왔으므로, 지대는 일부로써 그를 공격하여 궤주시켰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폭도의 주력은 삼산(三山)·석실(石室)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어제 각 방면으로 도주를 한 듯하고 ‘구둔치 재’에 있던 자는 그 감시부대였다고 한다.
지대는 폭도를 추격하여 오후 석실(石室)을 소탕하고 도중 약간의 폭도를 죽이고 삼산(三山)에 이르러 적창토벌대(赤倉討伐隊)와 연락하였다. 삼산(三山)·석실(石室) 부근에 있던 폭도는 약 7백으로 수괴(首魁)는 이인영(李麟榮)·방관일(方觀一)·정대일(鄭大一)이라고 한다.
8일 삼산(三山)·석실(石室) 부근 산곡에 있는 부대를 수색하여 약간의 폭도를 구축하고 10일 이천(利川) 수비를 맡아 지대의 편성을 풀고 동지에 이르렀다.
이상 말한 외 11,12월 중의 충돌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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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평창(平昌)수비대의 장교 이하 8명
11월 2일
평창군(平昌郡) 하구리(河口里)
약
200
사
13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의 장교 이하 12명
5일
지평(砥平) 서방 지덕리(芝德里)
약
30
사
10

예천(醴泉)수비대 장교 이하 14명
6일
단양(丹陽)의 남일리(南一里)
약
300
불명

강릉(江陵)수비대의 하사이하 6명
6일
양양(襄陽)부근
약
500
사
40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
7일
단양군 남면(南面) 괴평리(槐坪里)
약
300
사
50

임계분견대(臨溪分遣隊)
7일
임계역(臨溪驛)
약
100
사
8

충주(忠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38명
12일
목계(牧溪) 부근
약
800
사
31
수괴 김군필(金君必) 인솔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의 1소대
18일
삼척군(三陟郡) 황지리(黃池里)
약
600
사
50
수괴 김생산(金生山) 생포
충주(忠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40명
17일
청풍(淸風) 부근
약
300
불명

강릉(江陵)수비대의 장교 이하 30명
19일
강릉(江陵) 북방 약 20리 반
약
60
사
3

금성(金城)수비대장 이하 37명
19일
삼거리(三街里)부근
약
150
사
38

강릉(江陵)수비대의 장교 이하 30명
19일
강릉군(江陵郡) 연곡면(連谷面)
약
220
사
14
수괴 이기영(李起榮)을 사살
청평천수비대(淸平川守備隊)
20일
양구(楊口)
약
200
사
15

청평천수비대(淸平川守備隊)
21일
양구군(楊口郡) 방산면(方山面)
약
250
사
13

인제(麟蹄)수비대의 정찰
21일
인제 동북30리 반
약
400
사
20

단양(丹陽)수비대장 이하 20명
22일
단양(丹陽) 서북 각기리(角基里)
약
300
사
21

충주(忠州)수비대 장교 이하 21명
23일
대화역(大和驛)
약
270
사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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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소대
26일
영춘(永春) 서남 약 20리 지점
약
150
사
30

홍천수비대(洪川守備隊)
27일
홍천(洪川) 서남 양덕원(陽德院)
약
200
사
19

홍천(洪川)수비대의 1소대
27일
홍천(洪川) 서남 약 30리 남창동
약
200
사
19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
27일
28일
강릉
약
1000
사
180

양양분견대(襄陽分遣隊)
12월 1일
양양(襄陽) 서북방산중
약
80
사
2

제천(提川)수비대장 이하 49명
2일
청풍(淸風) 북방 40리의 마곡(馬谷)
약
300
사
20

음성(陰城)수비대의 장교 이하 11명
4일
음성군(陰城郡) 두의면(豆衣面)
약
30
사
2

음성(陰城)수비대의 장교이하 15명
4일
음성(陰城) 북방 신전(薪田)
약
50
사
9

회현(灰峴)수비대장 이하 반소대
4일
장전점(長箭店) 서남 약 50리
약
100
사
9

정선(旌善) 분견초 하사 이하 7명
5일
정선(旌善)
약
50
사
30

이수두(二水頭)수비대
5일
양평군 하북면(下北面) 진목리(眞木里)
약
50
사
11

임시 파견 기병 제2중대장 이하 27명
5일
뚝섬
약
100
사
5

마석우리수비대(磨石隅里守備隊)
5일
마석우리(磨石隅里)
약
120
사
7

장전점(長箭店)수비대의 하사 이하 8명
7일
장전점 서방 모평리 (茅坪里)
약
130
사
6

원주(原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6명
8일
원주 동북 약 40리의 학곡(鶴谷)
약
70
사
13

충주(忠州)수비대의 특무 순검대의 일부
9일
순흥(順興) 부근
약
150
사
2

제천(提川)수비대장 이하 26명
10일
충주(忠州) 동방 약 50리 지점
약
50
사
9

양양(襄陽)수비대의 하사 이하 12명
13일
양양(襄陽) 북방 모덕리(慕德里)
약
13
사
1

원주(原州)수비대의 1소
14일
횡성군(橫城郡) 청일
약
300
사
48
수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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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晴日) 남류동리(南柳洞里)




기석(韓基錫)을 사살
충주(忠州)수비대의 특설순검대 경시 이하 25명
16일
영춘(永春)
약
80
사
14

동 특설순검대의 1부
17일
충주군(忠州郡) 월약산(月藥山)
약
40
약간
수괴 이한창(李韓昌) 생포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의 1소대
19일
횡성(橫城) 동북 약 60리 지점
약
300
사
107
수괴 민긍호(閔肯鎬) 인솔
평창(平昌)수비대의 1소대
19일
횡성군 둔내면(屯內面)
약
150
사
5

진부수비대(珍富守備隊)의 1소대
19일
진부(珍富) 서북 약 100리 지점
약
300
사
50
적괴를 사살
영월(寧越) 및 제천(堤川)수비대에서 나온 각1소대
20일
영월군(寧越郡) 수주면(水周面)
약
300
사
72

금성(金城)수비대의 1소대
20일
양구(楊口)
약
50
사
22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23일
광주군(廣州郡) 악생면(樂生面) 판교리(板橋里)
약
20
사
7

이수두수비대(二水頭守備隊)
26일
포천군(抱川郡) 내동면(內洞面) 진목리(眞木里) 부근
약
250
사
90

영월(寧越)수비대의 토벌대
26일
영월(寧越) 북방 약 20리 지점
약
200
사
30

홍천수비대(洪川守備隊)
28일
횡선군(橫城郡) 청룡면(靑龍面) 추동리(楸洞里)
약
30
사
22
수괴 한갑복(韓甲復) 사살
진부(珍富)수비대장 이하 35명
29일
진부(珍富) 북방 신흥동(新興洞)
약
30
사
4

2. 경상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11월로 들어서자, 적괴 이강년(李康䄵)·신돌석(申乭石)의 도당은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부근에서 예천(醴泉)에 걸쳐 약탈 횡포를 극하여 민심의 황폐가 극심하였으므로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은 재(在) 대구 보병 제 14연대 제1대대장 적사소좌(赤司少佐)에게 제3중대(1소대 결) 및 기관총 2를, 그리고 안동 및 영주수비대에 소속시켰던 동 연대 제4중대와 상주수비대로 있는
- 717 -
보병 제47연대 제1중대를 일시 그에게 지휘권을 주어 토벌을 명하였다.
적사토벌대(赤司討伐隊)는 11월 15일 대구를 떠나 18일 풍기(豊基)에 도착, 후등중대(後藤中隊)에게 중대장이 지휘하는 1소대를 예천(醴泉)으로, 권천소위(蜷川少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안동(安東)으로, 하야중위(河野中尉)가 인솔하는 1소대는 영주(榮州)에 배수시켜 수비에 임하게 하고, 기타 주력은 전부 영주(榮州)에 집결하였다.
토벌대장은 25일 폭도 5백이 서벽리(西碧里) 서북방 일대에 있는 산곡에 잠복중임을 정찰하고, 조사중대(鳥飼中隊)를 영춘(永春)·영월(寧越) 중반 방향에서 시야중대(矢野中隊)는 황지리(黃池里) 고직령(古直嶺) 사이로 정진 시켰다.
26일 오전 조사중대(鳥飼中隊)는 영춘(永春) 동남 약 30리 지점이 산령(山嶺)에 도달하였을 때 이강년(李康䄵)이 지휘하는 약 5백의 폭도와 조우(遭遇)하여 이것을 공격하여 그 60을 사살하고 북방으로 궤주시켰다.
하야(河野) 중위가 인솔하는 1소대는 동일 오후 영춘(永春) 남방 약 10리 지점인 산곡에서 폭도 약 2백과 충돌, 그 35를 사살하고 그를 궤란시켰다.
시야중대(矢野中隊)에 속하고 있는 웅택소대(熊澤小隊)는 24일 행동을 개시하여 25일 소천면(小川面) 현동(縣洞)에서 폭도 약 70을 공격, 그 20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울진(蔚珍) 방향으로 궤주시키고, 27일 울진군(蔚珍郡) 탕실(湯實) 부근에서 약 7백의 폭도를 야습하여 그 34를 죽이고, 28일 다시 궤주하고 있는 폭도를 추격 그 22를 사살하였다. 소대(小隊)는 다시 추격을 속행하여 탑일(塔日)에서 약 1백 20의 폭도를 습격, 그 14를 죽이고, 봉화(奉化) 방면으로 궤주시키고 29일 장구(長驅)하여 봉화군(奉化郡) 두내(斗內)에 이르러 야음을 타 약 1백의 폭도를 기습하여 그 19를 사살하고 나머지는 궤주시키고 12월 2일 영주(榮州)로 귀착하였다.
11월 하순 적사토벌대장(赤司討伐隊長)은 그 주력을 서벽리(西碧里)로 옮기고, 26일 이래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고 있는 폭도는 영월(寧越) 동방에 집합하고, 그 일부는 영춘(永春) 부근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정찰한 조사중대(鳥飼中隊)를 영월(寧越) 방향에서 전진시키고, 시야중대(矢野中隊)는
- 718 -
고직령(古直嶺) 방향에서 영월 동방 곡지(谷地)를 향하여 행동을 개시 시키고, 또 영월·삼척 수비대를 시켜 이에 책응케 하였다.
11월 하순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폭도는 영월 동방 곡지(谷地)에서 매포리(梅浦里)를 경유 제천(境川) 방면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한 듯하였고 따로 수괴(首魁) 이도총(李都總)이 인솔하는 폭도가 정선(旌善) 부근에 있음을 안 적사토벌대(赤司討伐隊)에 속하고 있는 조사중대(鳥飼中隊) 및 시야중대(矢野中隊)는 12월 8일 증산리(甑山里)에서 약 2백 50의 폭도를 포위 공격하여 그 72를 사살하고, 9일 아침 도사동(道士洞)에 숙영중인 폭도를 습격, 그 1백 30을 사살하고 궤란시켰다. 또 시야중대(矢野中隊)에서 분진(分進)한 1소대는 8일 증산리(甑山里) 서남 약20리 지점인 촌락에서 약 1백 30의 폭도를 공격하여 그 40을 사살하고 9일 찰곡(察谷)에서 폭도의 숙영지를 습격 거의 섬멸시켰다.
그 후 폭도는 울진(蔚珍) 서북방 산지로 도주하고 일부는 울진으로 들어와 어선을 약탈하여 아군이 공격을 하면 배로 도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적사토벌대(赤司討伐隊)는 그 폭도를 소탕하기 위하여 다시 각 중대를 출동시켰다. 시야중대(矢野中隊)의 1소대는 15일 대평(大坪)에서 출발, 16일 탕실(湯實)에서 숙영중인 폭도를 급습하여 적괴 김정원(金正元) 이하 90명을 사상시키고, 기타를 궤주시켰다. 시야중대장(矢野中隊長)이 인솔하는 1소대는 18일 탕실(湯實) 동방 곡지(谷地)에서 패잔 폭도를 공격, 그 10수 명을 사살하고, 또 다른 1소대는 19일 울진(蔚珍) 서북방 약 20리 지점에서 약간의 폭도를 소탕하고, 조사중대(鳥飼中隊)는 16일 이래 일월산(一月山) 주변을 소탕하였다.
이 토벌에 있어서 적괴의 일부는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도망하였으나 대개는 토벌에 복종하고 잡배는 흩어져 정업으로 들어간 듯하며, 삼척(三陟)·정선(旌善) 이남지구에서는 폭도의 소굴은 완전히 전복되어 25일 적사토벌대(赤司討伐隊)는 편성을 풀고 각대는 그 수비대로 귀환하였다.
이상 서술한 외 11,12월 중에 있던 충돌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삽화 제20 참조)
- 719 -
[경상북도 및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함창(咸昌)수비대의 1소대
11월 1일
상주군(尙州郡) 장암리(壯岩里)
약
20
사
2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3일
죽령(竹嶺) 북록(北麓)
약
400
사
8

안동(安東)수비대의 1소대
11일
춘양면(春陽面)
약
200
사
16

안동(安東)수비대의 하사 이하 8명
23일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위동(渭洞)
약
100
사
20

함창(咸昌)수비대의 장교 이하 16명
30일
풍기(豊基) 서남단
약
120
사
7

청송(靑松)수비대의 영덕 분견대(盈德分遣隊)하사 이하 10명
12월 5일
영덕군 서면 주방동(周坊洞)
약
150
사
4

금천(金泉)수비대의 하사 이하 14명
10일
금천(金泉) 서방 약 10리 지점
약
70
사
20

충주(忠州)수비대의 특설 순검대
10일
풍기군 창악면(昌樂面) 이동(利洞)
약
20
사
7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
11일
청하(淸河)
불명


수괴 정환직(鄭煥直)을 생포함
문경(聞慶)수비대의 장교 이하 14명
13일
함창(咸昌) 서북방 신용암(新龍岩)
약
80
사
12

3. 전라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전주파견(全州派遣) 기병대장 희다소좌(喜多少佐) 이하 60기는 정찰을 위하여 11월 2일 전주(全州)를 떠나 도중 아무런 적정(敵情)도 얻지 못하고, 5일 목포(木浦)에 도착, 7일 동지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9일 정읍(井邑)에 도착, 내장사(內藏寺) 부근에 약 3백의 폭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 그를 습격하였으나 대부분을 놓치고, 겨우 3명을 사살하고 7명을 포로로 잡았다. 폭도는 장성 방면으로 궤주하고 말았다. 그 수괴는 김의관(金議官)으로
- 720 -
무장(茂長) 부근에 있는 김동신(金東臣)과 기맥을 통하여 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였다. 기병대는 10일 전주로 귀환하였다.
이상 서술한 외에 11,12월 중의 충돌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삽화 제21참조)
[전라북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순창수비대(淳昌守備隊)
11월13일
순창(淳昌) 동북 화탄리(花灘里)
약
22
사
2

전주(全州)수비기병 장교 이하 30기
15일
전주(全州) 서북 삼례(參禮)
약
100
사
1

임실(任實)분견대의 상등병이하 5명
19일
임실(任實)남방 약20리
약
20
사
12

폭도의 근거지를 습격 수괴를사살
강경수비대장(江景守備隊長) 이하 14명
23일
여산(礪山) 부근
약간



강경수비대에서 파견된 척후
12월 4일
은산장(恩山場)
약
50
사
3

영동(永同)수비대에서 파견된 하사 이하 4명
8일
무주(茂朱)
약
300
사
30

수괴 양재구(梁在九)를 생포
전주(全州)수비기병 장교 이하 8기
9일
고산(高山)
약간



군산(群山)수비기병 하사 이하 7기
9일
익산(益山)
약
40
사
7

고창(高敞)수비대의 하사 이하 10명
9일
장성(長成) 남방 오동리(梧洞里)
약
150
사
13

전주(全州)수비기병 장교 이하 8기
10일
인천(仁川) 동남 용평(龍坪)
약
30
사
10

광주(光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12일
장성(長成) 동북 백양산(白羊山)
약
50
사
10

공주(公州)수비대의 하사 이하 9명
14일
계룡산(鷄龍山)
약
100
사
35

고산기병(高山騎兵) 정지 척후(停止斥候)
19일
고산(高山)
약
300
사
23

- 721 -
함양(咸陽)수비대의 척후
20일
안의(安義) 부근
약
50
사
20

강릉(江陵)수비대의 하사 이하 10명
25일
은진(恩津) 동방 약10리
약
100
사
30

4. 함경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전부터 함경도는 정온 상태에 있었으나, 11월이 되자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안산면(安山面) 작수동(作水洞)에서 토민 약 70명이 도당을 모아 면장을 살해함으로써 난을 시작하여, 그후 41년에 걸쳐 그 기세가 자못 불길 같았었다. 대저 이 지방의 인민은 일진회원(一進會員)의 전횡에 분개하여 상시 그들과 반목 상태에 있었는데, 안산면장(安山面長)은 일진회원으로서 인민들에게 단발(斷髮)을 강요하고, 시장세(市場稅) 혹은 축전비(祝典費)를 거두어 사복을 채우고, 또 일반 인민을 강박(强迫)하여 일진회에 가입시키려는 등 독재적인 행동이 심하였다. 또 이 지방 인민은 대개 사냥에 의하여 생계를 세우고 있었는데, 본년 9월 발포(發布)한 총포 화약 단속법에 의하여 총기를 압수당하게 되자, 토민은 일진회가 그 생계를 박탈함이라 오해하고 격분에 잠겨 있다가 갑산군(甲山郡)의 차도선(車道善)이란 자가 북청군(北靑郡)의 태양욱(太陽郁)이란 자를 여당(與黨)으로 삼아 토민을 선동하여, ‘하늘이 일진회도를 누르기 위해 나로 하여금 의를 안산(安山)에서 일으키게 하여 회도를 살륙함으로써 국운을 회복시키려 한다’고 표방하고, 드디어 11월 16일 먼저 안산 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살해함으로서 폭동의 발단이 됐다.
22일 후치령(厚峙嶺)에서 목재창(木材廠) 고원 총기 호위병 2 및 경찰관 등이 폭도에게 살해를 당하고, 23일 북청에서 혜산진(惠山鎭)으로 향한 신곡소위(新谷小尉)와 졸병 2 및 우편 호위병은 후치령(厚峙嶺)에서 폭도에게 살해되었다. 따라서 24일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에서 궁부대위(宮部大尉) 이하 57명을 후치령 부근으로 급파하였다. 그 부대가 25일 오후 후치령에 달하였을 때 폭도 약 3백이 도로의 동소에 걸치는 산정을 점령하고 사격하는 것과 충돌, 궁부(宮部) 부대는 적설을 배제하고 공격, 그 20을 사살 하고 신점(新店) 방면으로 궤주시켰다.
- 722 -
12월 중순 북청(北靑)·갑산(甲山) 가도에 있는 장항리(獐項里) 부근에 폭도가 출몰하여 15일 화물 호위병 및 우편 호위병 등이 폭도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으므로, 즉일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에서 청저대위(靑砥大尉) 이하 50명을 파견 토벌시켰다. 이 부대는 16일 장항리(獐項里) 부근에서 폭도 약 1백 명을 공격하여 그 2명을 사살하고 남방으로 격퇴시켰다.
상순 이래 혜산진(惠山鎭)·삼수(三水) 부근에 불온한 공기가 나타나 18일 함흥수비대(咸興守備隊)에서 상월(上月) 기병 소위 이하 16기를 삼수(三水) 부근으로 파견했다. 이 부대는 26일 삼수(三水) 남방 중평장(仲坪場)에서 약간의 폭도와 충돌, 그 3명을 사살하고 삼수 방향으로 격퇴했다.
31일에는 혜산진(惠山鎭) 및 갑산(甲山)의 수비대와 협박하여 삼수(三水)를 포위 공격하였다. 차도선(車道善)이 인솔하는 폭도 약 4백은 삼수(三水) 성벽에 의거 완강히 저항하여 약 3시간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구축하지 못하고 탄약 결핍으로 암야를 이용 혜산진으로 퇴각하였다.
5. 황해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전부터 황해도는 초적(草賊)·야도(夜盜)가 많은 곳으로 백주에도 화기를 들고 약탈을 자행하는 자 있었으나, 10월 상순 배천(白川)에 김창진(金昌鎭)이라는 자 있어 적도 약 30을 규합, 동 군청·경무 분견소·우편국 등을 습격하고 군청의 병기 태반을 탈취하여 부하에게 분배하고 계속 연안(延安)을 습격하였으나, 수일 후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에게 격파 당하였다. 그 후는 소수의 적단(賊團)이 각처에서 의병이라 칭하고 부화뇌동하여 폭동을 하게 되었다. 이제 11,12월 중에 있어서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시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토산(兎山)수비대장 이하 23명
11월 5일
이천(伊川)
약
200
사

21

황주(黃州)수비대의 1소대
8일
달마산(達摩山)
약
100
사상약간

평양(平壤)수비대의 1소대
9일
신천(信川) 서방 약
약
15
사
3

- 723 -


40리 성당촌(成當村)




평양수비대의 1소대
11일
신천(信川) 서방 약30리의 장양(長陽) 면
약
50
사상약간

황주(黃州)수비대의 1소대
12일
서흥(瑞興)의 서쪽 60리 지점
약
450
사
20

황주수비대의 1소대
14일
15일
사리원(沙里院) 남방 20리 부근
약
100
사
2

개성(開城)수비대의 장교 이하 36명
15일
장단(長湍) 부근 석주원(石柱院)
약
100
사
20

개성수비대의 장교 이하 36명
17일
졸랑리(卒浪里)
약
300
사
60
수괴 김수민(金秀民)이 인솔
은율(殷栗)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20명
18일
장연부근(長淵附近)
약
150
사
21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20일
가려주(佳驪州) 북방 귀당(龜塘)
약
100
사
10

연안(延安)수비대 하사 이하 9명
20일
연안(延安) 동방 성호(星湖)
약
8
사
4

곡산분견대장(谷山分遣隊長) 이하 7명
24일
곡산(谷山) 동북방 50리 생왕리(生旺里)
약
100
사
8

곡산분견대장 이하 7명
27일
곡산(谷山) 동북방 문성장(文城場)
약
300
사
13

서흥(瑞興)수비대장 이하 54명
28일
윤두리(尹頭里)
약
100
사
40

연안(延安)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28일
사동(沙洞) 부근
약
20
사
10

신천(信川)수비대의 장교 이하 6명
28일
문화(文化)
약
30
사
15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30일
지석장(支石場) 동방 20리 송성리(松成里)
약
100
사
10

삭녕(朔寧)수비대의 하사 이하 5명
30일
삭녕(朔寧) 동남 시욱리(始郁里)
약
50
사
5

안주(安州)수비대의 1소대
12월 6일
맹산(孟山) 부근
약
200
사상
40

이천(伊川)수비대의 반소대
7일
지석장(支石場) 동방 직동(直洞)
약
15
사
4

삭녕(朔寧)수비대의 하사 이하 8명
12일
토산(兎山) 동방 약 50
약
80
사
2

- 724 -


리의부소동(釜沼洞)



적성(積城)수비대의 1소대
12일
적성(積城) 동방 눌목리(訥木里)
약
200
사
13

신천(信川)수비대의 장교 이하 6명
14일
장연(長淵) 동방 약 20리 지점
약
60
사
5

신천(信川)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15일
해주(海州) 동방 약30리의 금산면(錦山面)
약
150
사
40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19일
탁영대(濯纓臺) 북방 약 40리 부근
약
40
사
23

장단(長湍)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23일
온정원(溫井院)북방 부근
약
100
사
35

장단(長湍)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29일
해주(海州) 서방 취야장(翠野場) 부근
약
40
사
16

제5편 명치 41년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제1장 폭동 개황
명치 41년 초두에 있어서의 폭도의 정세는 전년 추동(秋冬) 경부터 귀순 권장, 토벌 여행 결과 전년 말부터의 추세를 계속하여 점차 정온으로 향하여 매달 충돌, 폭도의 총수는 1월에는 약 9천 명이었던 것이 2월에는 겨우 1천 9백여 명으로 줄고, 폭도의 집단도 역시 대개 수명 내지 수십명으로 되고 간혹 1백명 이상의 대집단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것은 전에 비하면 그 출몰이 격감된 것이었다.
동월 이후 전라남도 장성(長城) 부근의 수괴 이진사(李進士), 함경남도 갑산(甲山) 부근의 수괴 차도선(車道善) 등이 계속 귀순하고, 전라북도의 수괴 기삼연(奇三衍), 강원도의 수괴 민긍호(閔肯鎬) 등은 생포 또는 사살되어 적세는 크게 꺾이어 일시 평정도 시간문제로 되었었다. 그런데 3월 하순 전 한국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이었던 미국인(美國人) 스티븐스씨가 미국에서 배일주의(排日主義)의 한인의 손에 살해되고, 그 소식이 한국내에 전하여 지자 이것이 동기가 되어 형세 일변, 적세는 다시 격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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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 봉기 이후 미증유의 기세로써 그 소요 구역이 확대되어, 5월에는 이미 수비대 및 헌병 경찰과 충돌한 폭도의 총수는 약 1만 1천 4백에 달하고, 1백 명 내지 8백 명의 적군(賊群)은 함경남도 갑산(甲山)·고원(高原), 평안북도 강계(江界), 평안남도 영원(寧遠), 황해도 곡산(谷山), 강원도 이천(伊川)·평강(平康)·화천(化川)·양양(襄陽)·울진(蔚珍)·평해(平海), 경기도 양주(楊州)·포천(抱川)·파주(坡州), 충청북도 괴산(槐山), 경상북도 봉화(奉化), 전라북도 무주(茂朱)·태인(泰仁)·정읍(井邑), 전라남도 나주(羅州)·동복(同福) 등 각 지방에서 횡행하여, 6월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을 통하여 수괴 2백 41, 폭도 3만 1천 2백 45명에 이르러, 곧 우리 수비대로 격파하여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때문에 각 지방은 일시 적세가 재연될 기운에 있었다. 이 때를 당하여 앞서 본국에서 증파된 1천 1백 여 명의 헌병은 이미 도착하고, 보병 제23 및 27, 2연대 역시 점차 상륙을 끝내 각 요소에 배치되고, 또 각 토벌 기관의 통일을 얻어 서로 협력하여 적도의 소굴에 대하여 엄준한 토벌을 가하였으므로, 비도(匪徒)의 집단은 곧 궤멸하여 적괴(賊魁) 이하 전사하는 자 부지기수여서 6,7월 이래 적도는 한층 그 기세를 잃고 허위(許蔿)·이강년(李康䄵) 이하 약 30명의 수괴는 육속 포박 되고 귀순하는 자 역시 적지 않았다. 이에 있어 40년에 폭도가 봉기한 이후 점차 그 소요 구역을 확대하여 일시는 전국을 뒤덮던 적염(賊焰)도 점차 소멸되어 강원도·경상북도·충청북도 같은, 일시 적세가 창궐을 극하였던 지방도 점차 진정되고, 평안남도 및 북도에는 그 일부에 초적(草賊)이 출몰하는데 그치고, 함경남북도는 일부에 저명한 수괴(首魁)가 있어 끊임없이 대언 호어, 무지한 민중을 선동하였으나 그 부하는 극히 미약하여 겨우 우리 경비가 박약한 신아산(新阿山)을 일차 습격하였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전라북도에 있어서는 적세는 의연 감퇴함이 없이 추수기에 즈음하여 재연될 경향을 보이고, 그 기맥이 인접한 충청남도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수비대는 그에 대하여 일층 경계를 엄중히 하여 그 피해를 극소에 그치게 하였다. 따라서 41년말에 있어서는 경기·황해·전라·경상도 지방을 제외 하고는 대체로 진정되어, 그 잔존 폭도의 실질은 대개 재물 약탈을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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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한국 고래의 초적과 그 내용을 같이 하여 깊이 심산계곡으로 은거 하여 겨우 그 여명을 보존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본 년도에 있어서의 토벌 행동은 병력 증가 기타 관계로 인하여 전년과 같이 비교적 큰 집단을 장시일에 걸쳐 소탕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 수비대를 분살 배치, 구역제를 취하여 봉기하면 토벌해 버릴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으므로 토벌의 효과도 양호하여 비도의 기세는 크게 떨치지를 못하였다.
제2장 1월에서 3월까지에 이르는 토벌
1. 경기도에 있어서의 토벌
전년 임진강 유역에 출몰한 폭도의 수괴는 강원도 방면에서 침입한 조인환(曺仁煥) 및 적성(積城) 출신인 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默)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본년으로 들어오자 정계(政界)의 실각자인 전 참정 허위(許蔿)를 총수괴(總首魁)로 한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民)·김응두(金應斗)·이인영(李寅榮) 및 이은찬(李殷贊)의 무리, 강원도 혹은 황해도에서 각기 부하 약간을 이끌고 서로 투합(投合)하여 임진강 유역 일대에서 출몰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허위(許蔿)는 배일(排日)을 빙자하고 정의를 표방하고 또 군율(軍律)을 규정하고 겁탈·폭행을 다스렸다고 하지만, 그 내정(內情)에 있어서는 조금도 종래의 폭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즉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마음대로 물자의 조달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 군표는 모부호(某富豪)에게 가서 돈으로 바꾸라 하고 만약 그것을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타일 엄벌로써 보복하겠다’는 따위였었다.
1월 19일 북부 수비관구 사령관 강기중장(岡崎中將)은 막료 2명을 거느리고 재 경성 보병 제51연대 제7중대를 이끌고 포천(拖川) 부근 폭도의 소탕을 실시하였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21일 경성(京城)으로 귀환하였다.
1월 중순 구화장(九化場) 부근에 폭도가 도량, 그것을 토벌하기 위하여 개성 수비대 전상대위(田上大尉)는 부하 26명과 한국 장교 이하 15명을 인솔하고 20일 개성을 출발 거문리(巨文里)를 경유 전진하여 21일 열은(悅隱) 부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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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 집합의 보고를 받았다. 그 후 계속 전진하여 열은동(悅隱洞) 및 그 서북방 고지에 진을 치고 구식포(舊式砲) 약간을 가지고 있는 약 3백 명의 폭도와 충돌 그 수괴 원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부향관(附餉官)이었던 현덕호(玄德鎬) 이하 28명을 사살하여 궤주시키고, 다시 패잔 폭도를 추격하여 22일 송탄(松灘) 부근에서 약 50의 폭도를 궤란시키고, 23일 구석리(九石里) 부근 패잔 폭도 퇴각중인 자를 추격하여 그 5명을 사살하고 남방으로 산란시키고 24일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이상 외에 각 수비대가 1월에서 3월에 이르는 사이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및 그 부근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기병 제17연대 장교 척후
1월 4일
송파진(松坡鎭) 남방 지곡(池谷)
약
30
사
2

광주분견대(廣州分遣隊)
4일
광주(廣州)서북 약 30리
약
20
사
8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
4일
토산(兎山) 서남 40리 지점
약
100
사
20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장교 척후
7일
광주(廣州) 동남 경안(慶安)
약
20
사
1

청평천수비대(淸平川守備隊)
8일
대보산(大報山)의 서 10리
약
40
사
5

영평(永平)수비대 장교 이하 23명
9일
동두천(東豆川) 동남방
약
200
사
20

지평분견대(砥坪分遣隊) 상등병 이하 6, 순사 5
9일
지평(砥平)서남 20리 반 지점
약
30
사
5

보병 제47연대 제9중대
10일
발안장(發安場)
약
80
사상
25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의 1소대
10일
지평(砥平) 동방 약 10리 지점
약
100
사
60

진위수비대(振威守備隊)
14일
진위(振威) 서남 약 40리 지점
약
20
사
4

- 728 -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15일
적성(積城) 남방 감파(甘波)
약
80
사
9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연천수비대(漣川守備隊)
15일
동두천(南豆川)
약
300
사
80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16일
여주(驪州) 동북 약 30리 반 지점
약
40
사
20

수원수비대(水原守備隊)
21일
수원(水原) 남방 약 80리 해창(海蒼)
약
50
사
2

개성수비대(開城守備隊) 의 1소대
23일
배천(白川) 부근
약
50
사
6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의 1소대
24일
적성(積城) 동방 약 20리 지점
약
150
사
21

마석(磨石) 우리(隅里) 수비대 하사 이하 8명
26일
마석우리(磨石隅里) 동방 10리
약
50
사상
36

우편호위병(郵便護衛兵) 5명
27일
고양(高陽)·양주(楊州)간 부곡하리(釜谷下里)
약
100


가까스로 격퇴
양근수비대(楊根守備隊)
28일
지평(砥平) 동북 약 30리 반 지점
약
100
사상
40
수괴 이인영(李仁榮) 인솔
장호원분견대(長湖院分遣隊)
29일
움죽(陰竹) 서방 약 20리 지점
약
40
사
34

장호원분견대
2월 1일
장호원(長湖院) 동방 천포(泉浦)
약
50
사
21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7일
적성(積城) 남방 약 30리 지점
약
80
사상
80

조치원(鳥致院)기병대의 1척후
7일
금량장(金良場) 북방 10리 지점
약
100
사
5

지평분견대(砥平分遣隊)
7일
지평(砥平) 서남 약 30리 지점
약
40
사상
35

장단수비대(長湍守備隊)
11일
장단(長湍)
약
100
사상
19

장단수비대
23일
장단(長湍) 북방 약 20리 지점
약
50
사
19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
23일
연천(漣川) 북방 약 20리 반 지점
약
50
사
20

이수두수비대(二水頭守備隊)
26일
가평(加平) 서남 약 40리 지점
약
150
사
42

- 729 -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27일
동두천(東豆川) 북방
약
60
불명


이수두수비대(二水頭守備隊)
27일
운정동(雲井洞) 서북 10리 지점
약
90
사
18

개성수비대(開城守備隊)
3월 8일
임진진(臨津鎭) 동북 10리 지점
약
100
사상
51

삭녕(朔寧)수비대
8일
삭녕(朔寧) 남방 50리
약
100
사
5

개성(開城)수비대의 척후
8일
개성
(開城) 동방 약 10리
약
10
사
2

개성(開城)수비대의 척후
11일
삭녕(朔寧) 남방 30리 지점
약
10
사
7

송파진(松坡鎭)정지 척후
11일
송파진(松坡鎭) 서방 가산리(佳山里)
약
30
불명


진위(振威)수비대의 척후
13일
진위(振威) 서방 40리 지점
약
15
사
6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18일
파주(坡州) 동북 20리 지점
약
30
사
15
허위(許蔿)의 배하
남양(南陽)수비대의 척후
20일
남양(南陽) 북방 10리 지점
약
14
사상
2

영평(永平)수비대의 척후 4
20일
연천(漣川) 남방 10리 지점
약
30


겨우 격퇴
연천(漣川)수비대의 병졸 7
20일
연천(漣川) 동방 20리 지점
약
20
사
10

이수두수비대(二水頭守備隊)
21일
가평(加平) 서방 30리 지점
약
50
사
3
수괴 임내봉(林來鳳) 생포
가평분견대(加平分遣隊)
22일
가평(加平) 북방 약 30리 지점
약
200
사
18

수원(水原)수비대의 병졸 3
23일
수원(水原) 남방 80리 지점
약
10
사
1

영평(永平)수비대의 병졸4
29일
영평(永平) 서방 10리 지점
약
150
사상
30

송파진(松坡鎭) 정지 척후
31일
송파진(松坡鎭) 서남 20리 지점
약
40


고전후 궤주시킴
- 730 -
2. 황해도에 있어서의 토벌
41년으로 들어서자 황해도 철도 연선 이서에서 폭도는 더욱더 화적적(火賊的) 약탈을 자행하여 그 기세가 만연 상태에 있었으므로, 토벌 행동도 일층 극렬해졌다. 지금 1월부터 3월에 이르는 사이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한
부대(병력)
충동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삭녕(朔寧)수비대의 하사 이하 15명
1월 4일
토산(兎山) 부근
약
100
사 20

해주(海州)수비대 하사 이하 15명
7일
해주(海州) 서북 상림동(桑林洞)
약
30
약간

신계수비대(新溪守備隊)
7일
신계(新溪) 수안동(遂安洞)
약
30
사 12

해주(海州)수비대 하사 이하 15명
8일
해주(海州) 부근
약
30
약간

신천(信川)수비대의 1소대
9일
해주(海州) 부근
약
100
약간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척후 3명
10일
태탄(苔灘) 부근
약
100
약간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척후 3명
11일
태탄(苔灘) 부근
약
10
사 5

풍천헌병분견소(豊川憲兵分遣所)
11일
문화(文化) 부근
약
80
사 11

해주(海州)수비대의 하사 이하 3명
17일
해주(海州) 서방 약 70리
약
40
사 3

해주(海州)수비대의 1소대
19일
해주(海州) 동남 청단역(靑丹驛)
약
50
사 8

곡산분견대(谷山分遣隊)
20일
곡산(谷山) 서북 140리 지점
약
60
사 3

서흥수비대(瑞興守備隊)
22일
성북산(城北山) 부근
약
70
사 10

해주(海州)수비대 하사 이하 3명
22일
검단(檢丹) 부근
약
10
사 3

서흥수비대(瑞興守備隊)
23일
누천(漏川) 부근
약
12
사상 2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25일
해주(海州) 서북 약 80리
약
40
사 4

곡산분견대(谷山分遣隊) 하사 이하 6명
26일
곡산(谷山) 남방 40리 지점
약
50
사 32

- 731 -
장연수비대(長淵守備隊)
29일
장연(長淵) 서방 약 30리 지점
약
30
사 2

신천수비대(信川守備隊)
30일
신천(信川) 서북 50리 지점
약
40
사 5

장연수비대(長淵守備隊)
31일
장연(長淵) 남방 40리 지점
약
30
사 7

옹진헌병분견소(瓮津憲兵分遣所)

2월 1일
옹진(瓮津) 부근
약
30
사 2

송화헌병분견소(松禾憲兵分遣所) 하사 이하 3명
1일
달마산(達磨山) 남방 10리 지점
약
30
사 1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1일
재령(載寧) 부근
약
50
사 20

송화(松禾)헌병분견대 하사 이하 3명
2일
달마산(達磨山) 부근
약
30
사 2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8 일
신계(新溪) 동남 약 40리
약
100
사 21

이천수비대
15일
시변리(市邊里) 부근
약
40
사 5

달천수비대(達泉守備隊) 척후 3명
20일
수교(水橋) 부근
약
40
사 5

배천수비대(白川守備隊)
22일
배천(白川) 북방
20리 반
약
60
사 7

개성(開城)수비대의 1소대
22일
금천(金川) 동북 50리
약
17
사상15

신천(信川)수비대 하사 이하 5명
3월 1일
신천(信川) 남방 약
30리 지점
약
90
사 23

연안수비대(延安守備隊)
4일
연안(延安) 동북 20리 지점
약
30
사상10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4일
해주(海州) 서남방
약
50
사상11

연안수비대(延安守備隊)
6일
배천(白川) 동남 40리 지점
약
50
사 14

온정원수비대(溫井院守備隊)
8일
온정원(溫井院) 부근
약
100
사상29

달천수비대(達泉守備隊)
9일
달천(達泉) 부근
약
120
사상21

해주(海州)수비대의 1소대
17일
해주 서북 50리
약
250
사 36

- 732 -
탁영대(濯纓臺) 정지척후
18일
탁영대(濯纓臺) 북방
10리 지점
약
60
사상10

온정원수비대(溫井院守備隊)
23일
온정원(溫井院) 서부
30리 지점
약
100
사 32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25일
해주(海州) 동남
60리 지점
약
200
사 20

3. 강원도에 있어서의 토벌
지방 폭동에 있어서 가장 창궐을 극하였던 강원도는 전년 누차에 걸친 토벌에 의하여 다소 효과를 거두었으나, 그래도 울진(蔚珍)·영월(寧越)·원주(原州)·횡성(橫城)·홍천(洪川) 부근에 적세(賊勢)는 극히 왕성한 것이 있었다.
1월 2일 양구(楊口) 수비대장 등강소위(藤江少尉)는 폭도 1천 2백~1천 3백이 임당리(林塘里) 부근에 집합하여 있음을 정찰하여 알고 부하 12명을 인솔, 즉일 출발하여 동결된 산지(山地)를 넘어 임당리(林塘里)를 향하여 전진 중, 3일 오후 3시 반경 폭도가 수개 집단으로 나뉘어 범동리(犯洞里) 및 자작현(自作峴)의 동서 양단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 있음을 알고 그 측면에서 교묘하게 그것을 공격, 그 70을 사살하고 2백여를 부상시켜 정오경에 그를 북방으로 궤주케 하였다. 이 폭도의 수괴는 민긍호(閔肯鎬)·이인령(李寅令)·정환하(鄭煥夏)·신돌석(申乭石)·오영환(吳泳煥) 등이었다.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 한국순사대 권경시(權警視) 이하 15명은 2월 이래 원주 부근의 수색에 종사하고 있었다. 2월 28일 강림(講林)에서 숙영중, 강림(講林) 동방 10리 거리에 있는 등자치(登子峙) 부근에 민긍호(閔肯鎬)의 부하가 잠복하여 있는 것을 탐지하고 다음 29일 오전 6시 폭풍우를 무릅쓰고 강림(講林)에서 출발 사자산(獅子山)·구룡산(九龍山)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登子峙)로 전진하였다. 그러자 동지 북방 약 10리 지점인 궐덕리(蕨德里)에 민이 부하 90명과 함께 잠복하여 있는 것을 탐지하고, 오전 11시 궐덕리 동남 양 방면에서 그 부락을 포위하는 태세로 공격을 개시하자, 폭도의 일부는 동지 서방 고지를 점령하고 대부분은 촌락 위벽(圍壁)에 의거하여 완강히
- 733 -
저항하였다. 순사대는 수회에 걸쳐 돌격을 반복하여 그 20명을 사살하고, 수괴 (首魁) 민긍호(閔肯鎬)를 포박하자 패잔 폭도는 동북방으로 궤주하고 순사대는 동야 강림(講林)으로 귀환 숙영하였다.
동야 민긍호의 부하 약 60명이 강림으로 역습하여 와 용감한 동작으로 수괴(首魁)를 탈환하려고 하자 순사대는 그날 종일에 걸친 전투로 그 약간이 부상을 당하고 또 피로가 심하여 자칫하면 혼란 상태에 빠지려 하였으나, 권경시(權警視)는 경사대를 선발하여 동촌 서남 고지를 점령하여 폭도의 측면을 공격시키고 주력은 촌락 안에서 극력 방어하였다. 그때 피아의 거리는 겨우 10수 미터로 접근하고, 폭도 중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자가 있었다.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그곳에서 소리를 치시오”하고,
이때 포박당하고 있던 민긍호(閔肯鎬)는 도주를 하려고 하였으므로 사살 하였다. 그리고 폭도도 그 수괴를 구해낼 수 없음을 알고 시체 11을 유기하고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한국 순사 4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전년 8월부터 강원도를 주로 하고 기타 충청·경상북도에 걸쳐 가장 창궐을 극하고 또 폭동의 수창자였던 원원주진위대부(元原州鎭衛隊附)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말로는 이렇게 하여 종말을 고하고, 그 후 기타 수괴 임형순(任馨順)·이연년(李延䄵)·한상열(韓相說)·한갑복(韓甲福) 등도 서로 전후하여 사살되어 점차 적세는 정온하여졌다.
이상 외에 1월부터 3월에 이르는 동안에 있어서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
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평창(平昌)수비대장 이하 22명
1월 3일
평창(平昌) 북방
약 60리 지점
약 70
사 16

낭천(狼川)수비대 하사
이하 22명
6일
낭천(狼川) 동남
약 50리 지점
200
사 20

- 734 -
양구수비대(楊口守備隊)
6일
낭천(狼川) 동남
약 20리 지점
약
10
사 2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
7일
낙풍역(樂豊驛) 부근
약
500
사 38

낭천수비대(狼川守備隊)
8일
낭천(狼川) 서남
창리(倉里)
약
200
사 30

포천수비대(抱川守備隊)
9일
포천(抱川) 서북방
약
200
사 20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10일
횡성(橫城) 서방
약
40
사 21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17일
인제(麟蹄) 북방
봉기(鳳基)
약
100
사 30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
17일
홍천(洪川) 부근
약
40
사 31

진부수비대(珍富守備隊)
21일
유목정(楡木亭) 부근
약
50
사 22

인제수비대(麟蹄守備隊)
2월 5일
인제(麟蹄) 북방
60리 지점
약
150
사 1

평강수비대(平康守備隊)
14일
철원(鐵原) 서방 약
40리 지점
약
50
사 8

원주(原州)수비대 하사이하 11명
22일
문막(文幕) 부근
약
60
사상22

지포수비대(芝浦守備隊)
22일
지포(芝浦) 서방
20리 지점
약
100
사 8

진부수비대(珍富守備隊)
25일
청동(淸洞) 부근
약
30
사 11

영월수비대(寧越守備隊)
3월 1일
증산리(甑山里) 부근
약
50
사 20

제천(堤川)수비대의 척후
4일
주천(酒泉) 서방
10리 지점
약
30
사 4

횡성수비대(橫城守備隊)
5일
횡성(橫城) 동복
40리 지점
약
150
사 52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 배속 순사대(巡査隊)
6일
대화역(大和驛) 북방
약
40
사 8

안흥분견대(安興分遣隊)
하사 이하 11명
7일
횡성(橫城) 동방
약
60
사 32

춘천(春川)수비대의 부속 기병대
13일
춘천(春川) 동북
30리 지점
약
20
사 5

횡성수비대의 1분대
13일
횡성(橫城) 북방
40리 지점
약
150
사 43

- 735 -
횡성수비대의 1분대
13일
횡성(橫城) 북방
40리 지점
약
100
사상 50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15일
김화(金化) 남방
약
30
사 8

평강수비대(平康守備隊)
16일
철원(鐵原) 서북방
10리 지점
약
20
사 2

춘천(春川)수비대의 병졸 3명
20일
홍천(洪川) 서북방
20리 지점
약
30
사 3
춘천수비대군의전사
이천(伊川)수비대의 척후
22일
이천(伊川) 동북방
약 40리 지점
약
200
사상 40

평강(平康)수비대의 병졸 7명
25일
평강(平康) 남방
10리 지점

15
사 5

4. 충청북도 및 충청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충청도의 폭동은 전년에 비하여 다소 침정(沈靜) 상태가 되어 그 대부분은 계통 없는 초적(草賊)의 비류(匪類)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1월에서 3월에 이르는 사이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남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
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음성수비대(陰城守備隊)
1월12일
음성(陰城) 서남
약 30리 지점
약
70
사 20

보은수비대(報恩守備隊)
20일
보은(報恩) 동북
30리 지점
약
100
사 30

청주수비대(淸州守備隊) 졸 2명
27일
청주(淸州) 동북 세
교(細橋)

13
사 2

음성(陰城)수비대 장교 이하 12명
29일
무극장(無極場) 부근
약
40
사 6

충주(忠州)파견기병대 하사 이하 7기(騎)
31일
용당(龍堂) 부근
약
60
사상40

제천수비대(堤川守備隊)
2월16일
제천(堤川) 동북
30리 지점

27
사 3

음성수비대(陰城守備隊)
25일
청안(淸安) 서북방
약
40
사 7

청주수비대(淸州守備隊) 졸 2명
25일
세교(細橋) 부근
약
70
사상 7

- 736 -
보은수비대(報恩守備隊)
3월12일
미원(米院) 북방
20리 지점
약
60
사상
8

단양수비대(丹陽守備隊)
24일
단양(丹陽) 부근
약
70
사
2

청주수비대(淸州守備隊)
졸 2명
28일
청주(淸州) 북방
20리 지점
약
20
사
3

공주(公州)수비대의 1소대
1월 7일
계룡산(鷄龍山)
약
50
사
20

공주수비대의 1소대
7일
청양(靑陽) 남방
약 20리
약
400
사
18

공주수비대의 1소대
8일
은진(恩津) 부근
약
150
사
20

연산헌병대(連山憲兵隊)
15일
연산(連山) 남방
약 30리 지점
약
60
사
2

공주(公州)수비대의 척후
19일
은진(恩津) 부근
약
150
사
15

조치원수비기병대(鳥致院守備騎兵隊)
21일
공주(公州) 서북
약 20리 지점
약
50
사
15

공주수비대(公州守備隊)
28일
은진(恩津) 서남
약 10리 지점
약
70
사
23

공주파견기병대(公州派遣騎兵隊)
31일
공주(公州) 서북
약 30리 반
약
50
사
15

노성(魯城) 정지 척후
2월17일
노성(魯城) 동북
20리 반 지점
약
70
사
22

공주파견기병대(公州派遣騎兵隊)
3월16일
청양(靑陽) 부근

15
사
5

공주수비대(公州守備隊)
28일
공주(公州) 동북방
20리 지점
약
150
사
27

강경수비대(江景守備隊)
28일
공주(公州) 서방
80리 지점

25
사
3

공주파견기병대(公州派遣騎兵隊)
29일
공주(公州) 동북
20리 지점
약
40
사상
7

5. 경상북도에 있어서의 토벌
경상북도 북부 일월산(日月山)에서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폭도는 전년 적사토벌대(赤司討伐隊)에게 대타격을 받고 제천(堤川) 방면으로 도피하였기
- 737 -
때문에 일시 그 지방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나, 본년으로 들어서자 적괴(賊魁) 신돌석(申乭石)·김성운(金成雲)·유시영(柳時榮) 등이 인솔하는 폭도가 잠입하여 약탈 횡행을 극하여 다시 소란의 도가니로 화하고 말았다.
상주(尙州) 수비대장 산전소좌(山田少佐)는 일월산(日月山) 부근의 토벌을 획책하고 영천(榮川)·예천(醴泉)·함창(咸昌)·상주(尙州)·안동(安東)의 각 수비대에서 장교 이하 15내지 20명으로 구성된 6종대(縱隊)를 편성하여 2월 15일부터 행동을 개시시켰다. 그러나 폭도는 수명씩의 소군(小群)으로 분산하여 은익하고 있었으므로 토벌대는 용이하게 수색 단서를 얻지 못하고 행동 지역 안 각 촌락을 면밀하게 검거하여 행동 6일 만에 약 100의 폭도를 사살하였을 뿐이었다.
이 토벌로 인하여 신돌석(申乭石)은 영해(寧海) 방면으로, 김성운(金成雲)은 울진(蔚珍) 방면으로, 유시영(柳時榮)은 영양(英陽)·안동(安東)간의 지구로 도피한 듯하여, 산전소좌(山田小佐)는 재차 안동(安東)·영양(英陽) 사이의 지점에 대하여 제2차 토벌을 계획하고 24일부터 행동을 개시 6일 만에 약 1백 50의 폭도를 사살하고 29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어 각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이상 외에 1월부터 3월에 이르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및 그 부근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
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예천수비대(醴泉守備隊)
1월 3일
예천(醴泉) 북방
30리 지점
약
100
사상
35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
10일
평해(平海) 서남
약 30리
약
70
사
16

안동수비대
11일
평해(平海)
약
80
사
28

흥해수비대(興海守備隊)
13일
청하(淸河)
약
150
사
19

- 738 -
김천수비대(金泉守備隊)
16일
김천(金泉) 서북방
30리 지점
약
30
사
10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
17일
영천(永川) 북방
30리 지점
약
50
사상
18

경주(慶州)수비대의 척후
20일
경주(慶州) 북방
70리 지점
약
100
사상
27

흥해수비대(興海守備隊)
20일
흥해 서방 10리 지점
약
30
사
15

영천(榮川)수비대의 척후
21일
봉화(奉化) 동방
약 50리 지점
약
50
사
11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
21일
안동(安東) 동남
100리 지점
약
200
사
8

경주(慶州)수비대의 척후
21일
경주(慶州) 북방
약 80리 지점
약
50
사
11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23일
일월산(日月山) 북
록(北麓)
약
40
사
9

예천(醴泉)수비대 장교 이하 13명
27일
봉화(奉化) 남방
약 10리 지점
약
10
사
2

군위수비대(軍威守備隊)
2월 1일
의성(義城) 북방
약
30
사
3

경주수비대(慶州守備隊)
12일
흥해(興海) 서방 수
성동(水城洞)
약
30
사
6

밀양수비대(密陽守備隊)
13일
밀양(密陽) 동방 약
50리 표충사(表忠寺)
약
50
사상
32

청하수비대(淸河守備隊)
14일
청하(淸河) 부근
약
60
사상
23

군위수비대(軍威守備隊)
15일
의성(義城) 동남
약 40리 지점
약
20
사
1

화령장수비대(化寧場守備隊)
24일
화녕장(化寧場) 북방
40리 지점
약
50
사
7

울산수비대(蔚山守備隊)
3월 2일
울산(蔚山) 서남 약
20리 지점

15
사상
6

포항수비대(浦項守備隊)
6일
흥해(興海) 부근
약
40
사상
25

포항수비대
14일
흥해(興海) 부근
약
150
사상
37

- 739 -
함창수비대(咸昌守備隊)
15일
송면장(松面場) 서남 부근
약
40
사
27

자인수비대(慈仁守備隊)
15일
자인(慈仁) 동방 약 50리 지점
약
10
사
2

자인수비대(慈仁守備隊)
17일
자인(慈仁) 동방 약 50리 지점
약
30
사
3

포항수비대(浦項守備隊)
17일
흥해(興海) 서방
40리 지점
약
20
사
8

울산수비대(蔚山守備隊)
19일
언양(彦陽) 부근
약
100
사상
20

지례(知禮)수비대 하사 이하 5명
19일
지례(知禮) 서북 부근
약
150
사상
13

포항(浦項) 및 경주수비대
(慶州守備隊)
19일
인비(仁庇) 부근
약
120
사상
28

울산수비대(蔚山守備隊)
20일
경주(慶州) 서남
40리 지점

48
사상
41

울산수비대
21일
경주(慶州) 동방
40리 지점
약
60
사상
54

지례수비대(知禮守備隊)
24일
지례(知禮) 남방
30리 지점
약
20
사상
8

함창수비대(咸昌守備隊)
25일
송면장(松面場) 부근
약
10
사
6

김천수비대(金泉守備隊)
25일
지례(知禮) 서방 약 20리 반 지점
약
150
사
30

흥해수비대(興海守備隊)
25일
흥해(興海) 부근
약
50
사상
20

6. 경상남도 및 전라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전년 10월 경상남도 지리산 부근을 근거로 한 수괴 김동식(金東植), 고광순이 인솔하는 폭도는 진주파견대(晋州派遣隊)에 의하여 그 소굴을 전복 당하고, 고광순 이하 약간을 잃어 일시 그 지방은 정온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본년으로 들어서자 김동식은 의연 동지 부근에 잠복하여 교묘하게 그 종적을 감추면서 은근히 그 세력 부식에 노력하는 듯하였고, 또 적괴 기삼연은 전라남도 함평 담양 부근에서 활동을 개시하여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1월 22일 광주(光州)·장성(長城)·영광(靈光)·함평(咸平)에 있던 폭도
- 740 -
약 3백이 서로 호응하여 함평(咸平)을 습격하였다.
함평(咸平) 및 학교(鶴橋)에 파견되어 있던 헌병대는 서로 협력하여 방전, 가까스로 그것을 격퇴시켰으나, 그 후 나주(羅州)·무안(務安) 부근이 더욱더 불온상태로 빠져 들어가므로 1월 30일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항길소장(恒吉少將)은 재조치원(在鳥致院) 덕영기병대위(德永騎兵大尉) 이하 70기를 나주(羅州) 방면으로 파견 시위행동을 시켰다.
1월 이래 경상남도·전라남도에 있어서 폭도의 도량(跳梁)은 점차 활발하여져 누차 헌병 경찰 관서를 습격하고 각지의 수비대가 이를 토벌하였으나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2월 초순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은 보병 제 14연대장 국지대좌(菊池大佐)에게 그 지방의 토벌을 명하였다.
국지대좌(菊地大佐)는 재 대구 보병 제14연대 제1중대 및 합천(陜川)·함양(咸陽)·남원(南原)·구례(求禮)·임실(任實)·하동(河東)·진주(晋州)·순창(淳昌)·장성(長城)·고창(高敞)·영광(靈光)·고부(古阜)·전주(全州)·나주(羅州) 등 각지를 수비하고 있는 보기병대를 지휘하여, 2월 7일부터 포위적 행동을 개시, 수괴(首魁) 이석용(李錫庸)·김용구(金容球) 이하 2백 7명을 사살하고, 3월 7일 토벌대의 편성을 풀어 각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이상 외에 1월부터 3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남도·전라남도 및 그 부근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
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전주 파견 기병대 장교 이하 13기
1월4일
죽동(竹洞) 부근
약 100
사 18

치로(治爐)분견초
12일
가야산(伽倻山) 부근
약 300
사상 8

고부(古阜)수비대
16일
무장(茂長) 부근
약 200
사상 60

영광(靈光)수비대
25일
영광(靈光) 동방 약 40리
약 80
사상 19

광주(光州)수비대
26일
광주(光州) 서북
약 30리반
약 300
사 40

왜관(倭舘)수비대
27일
무주(茂朱) 동남 30리
약 50
사상 19

- 741 -
광주(光州)수비대
27일
장성(長成) 서남 40리
약
40
사
2

광주수비대
28일
영광(靈光) 동남 불
갑산(佛甲山)
약
60
사
5

순창(淳昌)수비대
30일
담양 서남 10리
약
400
사
30

영동(永同)수비대
2월 5일
무주(茂朱) 부근
약
40
사
4

함양(咸陽)수비대
6일
의신(義信) 부근
약
50
사
19

합천(陜川)수비대
12일
치로(治爐) 서방 부근

32
사
8

영광(靈光)수비대
15일
사창(社倉) 부근
약
80
사
22

조치원파견기병대
18일
정읍(井邑)
동방 30리
약
50
사
5

조치원수비대
18일
무장(茂長) 부근

34
사
29

조치원파견기병대 및 장성(長城)수비대
20일
장성(長城) 서방 20리
약
150
사
72

전주(全州)수비대
20일
전주(全州) 남방 40리
약
30
사
2

영동(永同)수비대
25일
무풍장(茂豊場) 부근
약
60
사상
22

전주(全州)파견기병대
25일
태인(泰仁) 동남 30리
약
60
사
7

전주파견기병대
3월 9일
나주(羅州) 북방 40리
약
60
사
27

광주(光州)수비대
9일
박산(朴山) 부근
약
30
사상
15

조치원파견기병대
14일
영광(靈光) 서방
약
100
사상
52

함양(咸陽)수비대
14일
안의(安義) 서북 부근
약
100
사
5

조치원파견기병대
16일
광주(光州) 남방 50리
약
40
사
14

조치원파견기병대
21일
광주(光州) 서방 50리
약
50
사
5

조치원파견기병대
22일
담양(潭陽) 부근
약
50
사
12

함양(咸陽)수비대
27일
함양(咸陽) 서북 50리
약
30
사
5

광주(光州)수비대
29일
광주(光州) 서방 20리
약
60
사
5

하동(河東)수비대
31일
하동(河東) 동북 30리
약
20
사
6

- 742 -
7. 함경남도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토벌
전년 12월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에서 토민(土民)이 일진회원의 전횡에 분개하여 폭동을 일으켜 차도선(車道善)이 인솔하는 약 4백의 폭도가 삼수성(三水城)에 웅거하여 완강히 저항, 그를 토벌키 위하여 파견된 상월기병소대(上月騎兵小隊) 및 혜산진(惠山鎭)·갑산(甲山)의 각 수비대가 협력하여 공격하였으나, 탄약 결핍으로 일시 혜산진(惠山鎭)으로 퇴각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동부 수비관구 사령관 환정소장(丸井少將)은 재북청(在北靑)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삼목소좌(三木少佐)에게 북청(北靑)수비대의 장교 이하 보기병 18명과 장항리(獐項里)에 파견되어 있는 청지대위(靑砥大尉) 이하 50명 및 성진(城津) 수비대장 중촌대위(中村大尉) 이하 80명, 그리고 또 함흥에서 북청(北靑)으로 분견(分遣)되어 있는 풍도기병소위(豊島騎兵小尉) 이하 26기를 지휘시켜 토벌케 하였다.
1월 9일 청지대(靑砥隊)는 중평장(仲坪場) 남방 약 2000m인 운봉(雲峰)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폭도 약 4백과 충돌, 이를 공격하여 그 50명을 사살 궤란시키고, 계속 중평장(仲坪場)을 점령하였다. 동일 중촌대(中村隊)는 중평(仲坪)으로, 삼목대(三木隊)는 먼저 혜산진(惠山鎭)으로 퇴각한 부대와 합류 신동(新同)에 도착하고, 풍도기병소대(豊島騎兵小隊)는 삼수(三水)의 정찰을 맡았다.
10일 각대는 3면에서 삼수성(三水城)으로 육박하자 성내는 적막하기 짝이 없고 폭도는 하나도 보이지 않으며, 민가는 모조리 불타 잔연(殘烟)만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폭도들이 교묘하게 우리 포위선을 이탈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 약 3백의 폭도가 우리 수비가 박약한 갑산(甲山)을 습격, 그곳 우편국을 파괴하고 약탈 참살을 감행하여, 수비대 하사 이하 10명은 분전 9시간에 13을 사살, 가까스로 이를 이리사(二里社) 방향으로 궤주시켰다.
삼목소좌(三木少佐)는 11일 갑산(甲山)의 변을 듣고 청지대(靑砥隊)에게 삼수(三水) 부근의 수색을 맡기고 중촌대(中村隊)와 함께 갑산(甲山)으로 급행하였다. 그 후 폭도의 주력이 이리사(二里社) 부근에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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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대(靑砥隊)에게는 신풍리(新豊里) 동방에서, 중촌대(中村隊)는 갑산(甲山)에서 이리사(二里社)를 협격시켰으나 이미 적의 종적은 없어 19일 갑산(甲山)으로 귀환하였다.
2월 5일 신풍리(新豊里) 분견소장 촌산중위(村山中尉)는 그곳 부근의 면장을 시켜 수괴 차도선(車道善)에게 귀순을 권고시켰던 바, 6일 서신(書信)으로써 폭동의 기인(起因)은 첫째는 총기의 압수, 둘째는 일진회원(一進會員)의 비행이라 답하여 왔으므로, 북청수비구 사령관 산본대좌(山本大佐)는 널리 그 오해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효유문(曉諭文)을 공시하였다. 그래서 12일 차도선(車道善)은 일단 귀순의 뜻을 표시하였으나 이리저리 시일을 천연시켜 실행을 하지 않아 그 성의가 의심스러웠으므로, 25일 북청수비대에서 삼산소좌(杉山少佐)를 파견하여 직접 권유를 하였다. 그러나 그 태도가 극히 오만불손하였으므로 28일 삼산소좌(杉山少佐)는 보병 1소대, 기병 1소대, 산포 3문을 지휘하여 교별리(橋別里)에 있는 차도선(車道善)의 도당 약 3백을 급습하자 폭도는 시체 20을 유기하고 갑산(甲山)·단천(端川) 방향으로 궤주하였다.
3월 7일 차도선(車道善)은 장진(長津)의 폭도 약 2백 50을 이끌고 신풍리(新豊里)로 나와 촌산중위(村山中尉)와 회견하고 재차 귀순의 뜻을 표하고, 또 폭도의 귀순 권고 및 총기 수집에 관하여 분주 노력할 것을 서약하였으므로, 가면죄증(假免罪證)을 주어 그 실행으로 옮기게 하는 한편, 17일 북청(北靑)에서 출장나온 오촌중좌(奧村中佐)는 차도선(車道善) 이하 귀순 수속을 끝내고 총기 150을 압수하였다. 이때 완강히 저항하는 태양욱(太陽郁)은 참살(斬殺)하였다. 그리고 차도선(車道善)은 그 후 아군이 폭도 귀순 권고의 보조로 이용하기 위하여 억류하고 기타는 전부 석방하였다.
그 후 차도선(車道善)의 부하로서 귀순하지 않은 양혁진(梁嚇鎭)은 장진(長津) 부근에서, 홍원(洪原) 출신인 한영준(韓永俊)은 삼수(三水) 부근에서 폭도를 모집하고, 또 차도선(車道善)의 여당이었던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인 홍범위(洪範圍)는 갑산(甲山)·삼수(三水) 양군에 걸쳐 폭동을 일삼았다.
이상 외에 1월에서 3월에 이르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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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
[함경남도·평안남도 및 그 부근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양덕수비대(陽德守備隊)
1월15일
양덕 남방 30리
약 80
사 5

함흥(咸興)에서 파견된 상월기병소위(上月騎兵少尉) 이하 8기
15일
이원(利原) 서북 10리반 문평리(文坪里)
약 70
사 5

단천(端川) 분견초장(分遣哨長) 하사 이하 9명
19일
단천(端川) 서방 30리 상가원리(上加元里)
약 50
사 5

단천 분견초장 하사 이하 9명
22일
단천(端川) 북방 30리 지점
약 400
사 10

단천 분견초장 하사 이하 9명
24일
단천(端川) 북방 70리 상농리(上農里)
약 200
사 18

북청(北靑)수비대에 하사 이하 16명
24일
단천(端川) 북방 60리 지점
약 70
사 15

장진(長津)수비대에서 파견한 기병 소위 이하 10기
24일
결물리(袂物里) 동북50리 운상동(雲上洞)
약 50
사 11

강계수비대(江界守備隊)
28일
용림면(龍林面)
약 70
사 3

북청(北靑)에서 파견한 1소대
2월 2일
금창(金昌)
약 200
사 15

장진(長津)수비대에서 파견한 하사 이하 6명
10일
산양리(山羊里) 동북 장항리(獐項里)
약 150
사 10

갑산(甲山)수비대 입강소위(入江少尉) 이하 20명
21일
갑산(甲山) 동북 10리 세곡(細谷)
약 200
사 10

영원수비대(寧遠守備隊)
21일
영원(寧遠) 동남 70리
약 140
사 60

양덕수비대(陽德守備隊)
3월 5일
지경리(地境里)
약 80
사 5

삼등수비대(三登守備隊)
14일
평양(平壤) 남방 10리
약 80
사 10

영원수비대(寧遠守備隊)
14일
희천(熙川) 동방 20리
약 60
사상 22

원산수비대(元山守備隊)
15일
고원(高原) 서북 50리 지점
약 60
사상 15

고원(高原) 주재 순사 및 우편 호위병 4명
25일
고원(高原)
약 150
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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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산수비대(孟山守備隊)
28일
영원(寧遠) 동남 30리 지점
약 150
사 40

제3장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토벌
1. 경기도에 있어서의 토벌
전년 경기도·황해도 접경에 있는 졸랑리(卒浪里) 부근에서 봉기한 적도(賊徒)의 수괴 김수민(金秀民)은 11월 17일 개 수비대에게 격파되어, 그 후 열은동(悅隱洞) 부근에 은신하여 교묘하게 양민을 선동, 세력 확대에 노력하고 있었으나, 본년으로 들어서자 도당 약 3백이라 칭하고, 20내지 30의 소집단이 되어 각지를 횡행하였다. 특히 4월 16일, 구화장(九化場) 헌병분견소를 습격하고, 병기 탄약을 횡탈함을 비롯하여 장단(長湍)·양합리(兩合里)·풍덕(豊德) 부근에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래서 이를 토벌키 위하여 장단(長湍), 구화장(九化場)·양합리(兩合里)·개성(開城)·풍덕(豊德)의 각 수비대 헌병 등이 협력하여 실시, 수차 그 소집단을 궤란시켜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아직 그 뿌리는 뽑지 못하였다.
임진강(臨津江) 유역에 있는 수괴(首魁) 허위(許蔿)는 누차 통고문(通告文)을 발하여 납세 또는 미곡 반출의 정지를 명하고 군자양식(軍資糧食)의 징발을 감행하고, 혹은 한인 순사·헌병 보조원에게 협박장을 보내고, 통신 선로의 저해, 관공서의 습격 등 그 난동이 심하였으므로, 6월 11일 축산(杻山)헌병분견소와 철원헌병분견소의 하사 이하 15명은 영평(永平)에 잠복하고 있는 수괴 허위(許蔿)를 생포하자 그 후 다소 정온상태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구화장(九化場) 부근에 있는 폭도의 일부는 점차 남하하여 10월 상순 강화도로 침입하여 재류 일본인을 참살하고 해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10월 하순 제13사단과 교대하여 수비를 맡은 제6사단장 서도중장(西島中將)은 그것을 토벌하기 위하여 재용산(在龍山) 보병 제13연대에서 소산소위(小山少尉) 이하 30명을 강화도로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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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토벌대(小山討伐隊)는 10월 29일 경성(京城)을 떠나, 다음 30일 오전에 강화도 광성(廣城)에 상륙하여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에 웅거하고 있는 폭도 1백과 충돌, 연속 1주야에 걸쳐 공격을 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고 31일 밤 강화부(江華府)로 퇴각, 증원대(增援隊)의 내착을 기다렸다. 제6사단장은 다시 보병 제13연대에서 도변중위(渡邊中尉)이하 20명 및 공병 15명을 31일 강화도로 급행시켰다. 이 부대는 11월 1일 광성(廣城)에 상륙, 곧 전등사의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그 후 소산대(小山隊)는 장봉도(長蜂島) 방면으로, 도변대(渡邊隊)는 헌병과 협력하여 별입산(別立山)·산이포(山伊浦) 방면으로 행동을 개시하여 수색하였으나 별무 소득이었다.
제6사단장은 다시 동도(同島)의 소탕을 획책하고 11월 26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개성수비대(開城守備隊)에서 장교 이하30명, 용산(龍山)보병부대에서 장교 이하 70명,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에서 장교 이하 34명, 연안수비대(延安守備隊)에서 장교 이하 7명을 8종대로 나누어 강화도 동부에서 제 1일에는 송산동(松山洞)·서문외(西門外)·하일(河逸)의 선에, 제2일에는 인화선(寅火線)·종로(鍾路)·정포(井浦)의 선에, 제3일은 그 이서(以西)의 교동도(喬洞島)·매음도(妹音島) 전부에 걸쳐 토벌 행동을 실시시켰다.
이 토벌 행동중 11월 26일 용산부대에 속하는 산본특무조장(山本特務曹長) 이하 7명은 정두동(亭頭洞)에서 약 20명의 폭도와 지척에서 충돌하여 특무 조장은 전사하고 상등병 3명은 부상을 당하였으나, 겨우 이를 서북방으로 격퇴하였다. 또 도변대(渡邊隊)는 동일 산문동(山門洞)에서 약 20의 폭도를 발견, 그 4명을 사살한 것 외에는 소득이 없어 특무 조장 이하 15명을 강화부의 수비로 남기고 기타는 29일 각 수비지로 귀환하였다. 아마도 폭도는 이 대소탕을 당하자 승선(乘船)하고 황해도 방면으로 도주한 것 같다.
이상 외에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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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가평분견대(加平分遣隊)
4월12일
가평(加平) 남방 20리
약 30
사 4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
22일
연천(漣川) 서방 20리
약 50
사 12

연천수비대(漣川守備隊)
23일
연천(漣川) 동북 20리 법화동(法化洞)
약 15
사 12

마석우리(磨石隅里)수비대 하사 이하 7명
5월17일
마석우리(磨石隅里) 서북 30리
약 300
사상 10

경성(京城)경찰서 경부 이하 6명
22일
포천(抱川) 남방 30리 지점
약 100
사 3

이천(利川)수비대 하사 이하 5명
6월 9일
이천(利川) 서남 약 30리 백암장(白岩場)
약 20
사 2

김포(金浦)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4명
9일
김포(金浦) 남방 약 40리 지점
약 16
사 3

풍덕분견대(豊德分遣隊)
20일
강화(江華) 서북 20리 반 산이포(山伊浦)
약 30
사 7

포천(抱川)수비대 장교 이하 22명
21일
포천(抱川) 남방 20리 지점
약 70
사 15

풍덕분견소(豊德分遣所)
25일
풍덕(豊德) 동남 약 30리 지점
약 50
사 3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27일
광주(廣州) 남방 20리 지점
약 80
사 13
수괴 이헌찬(李憲贊)이 인솔
개성수비대(開城守備隊) 하사 이하 16명, 일한 순사 6명
30일
풍덕(豊德) 동남 약 30리 지점
약 18
사 7
적성수비대(積城守備隊) 장교 이하 31명
7월 4일
후평리(後坪里) 동북 약 20리
약 40
사상 13

광주수비대(廣州守備隊)
4일
양근(楊根) 서방 50리 지점
약 18
사 7

문산 헌병분견대(汶山憲兵分遣隊)
16일
교강(交江) 북방 임진강안
약 40
사상 13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
29일
포천군내(抱川郡內)
약 20
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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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헌병분견소
8월 4일
강화도(江華島) 서방 미점도
약 80
사 14

마전(麻田)헌병분견소
16일
마전(麻田) 동북 약 20리 지점
약 20
사 3

통진(通津)헌병파견소
29일
통진(通津) 북방 약 20리 반 지점
약 30
사 3

삭녕수비대(朔寧守備隊)
9월18일
삭녕(朔寧) 동남 약 30리 지점
약 60
사 9

고양(高陽)헌병분견소
20일
고양(高陽) 서방 20리 지점
약 20
사 3

마전(麻田)헌병분견소
10월15일
마전(麻田) 서북 약 30리 지점
약 20
사 5

문산(汶山)헌병분견소
16일
문산(汶山) 동방 약 50리 지점
약 30
사 8

양합리(兩合里)헌병분견소
11월 8일
양합리(兩合里) 북방 약 20리 지점
약 25
사 2

문산(汶山)헌병분견소
10일
문산(汶山) 동방 약 50리 지점
약 30
사 3

마전(麻田)헌병분견소
15일
마전(麻田) 서북 약 30리 지점
약 20
사 5

포천(抱川)헌병분견소
12월 4일
포천(抱川) 동남 약 20리 지점
약 80
사 6

적성(積城)헌병분견소
4일
양주(楊州) 군내
약 30
사 3

지포(芝浦)헌병분견소
5일
지포(芝浦) 서남 약 20리 지점
약 30
사 5

적성(積城)헌병분견소
16일
포천(抱川) 군내
약 30
사 5

마전(麻田)헌병분견소
16일
마전(麻田) 서북 약 40리 지점
약 40
사 13

2. 황해도에 있어서의 토벌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폭도는 4월 이후 점차 그 세력을 증가하여 주로 철도선 이서의 지역 일대에 발호하였는데, 수괴 민효식(閔孝植)의 일파는 태탄(苔灘)·장연(長淵)·송화(松禾)·은율(殷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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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허덕천(許德天)의 일파는 옹진(瓮津)·마산(馬山)·강령(康翎) 지방에서 폭위를 떨치고 있었다. 또 일부는 배천(白川)·평산(平山)·기린장(麒麟場)·청석두(靑石頭)·신원(新院)·신천(信川)에서 해주(海州)·청단(靑丹) 및 연안(延安)에 걸치는 지방을 횡행하고, 철도선 이동(以東)에 있어서는 강원도·경기도에서 침입한 약간의 폭도가 곡산(谷山) 외 신계(新溪)·시변리(市邊里) 부근에 은현 출몰하여 겁탈을 자행하였다. 그래서 비교적 짜임새 있게 배치된 수비대·헌병·경찰이 누차 준열한 토벌 검거를 실시한 결과, 그 집단은 대개 이산하였다. 하지만 황해도 고유의 초적과 악수, 관헌의 눈을 피하여 도처에 은현, 약탈을 자행하므로 그것을 영구히 근절시키지는 못하였다.
다음에 4월에서 연말에 이르는 동안 황해도 폭도 토벌 개황을 표시한다.
[황해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장연수비대(長淵守備隊)
4월 4일
장연 서북방 부근
약 70
사 3

해주(海州)수비대의 장교 이하 12명
4일
해주(海州) 서방 40리 지점
약 35
사 2

해주수비대의 장교 이하 12명
5일
태탄(苔灘) 동방 부근
약 40
사상 2

시변리(市邊里)헌병분견소
12일
시변리(市邊里)
약 300
사 4

개성수비대(開城守備隊)
13일
신계(新溪) 남방
약 50
사 4

곡산분견대(谷山分遣隊)
13일
곡산(谷山) 동북 약 70리 지점
약 50
사 10

신계분견대(新溪分遣隊)
19일
신계(新溪) 동북 약 60리 지점
약 14
사 4

장연수비대(長淵守備隊)
25일
태탄(苔灘) 북방 부근
약 100
사 5

재령(載寧)헌병분견소
27일
은파(銀波) 서방 부근
약 150
사 1

양덕수비대(陽德守備隊)
28일
양덕(陽德) 서남 약 60리 지점
약 80
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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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開城)수비대의 장교 이하 20명
5월15일
평산(平山) 동방 30리 지점
약 20
사 12


문화(文化)수비대 장교 이하 6명
16일
송화(松禾) 동방 약 40리 지점
약 30
사 12


은율(殷栗)헌병분견대
17일
은율(殷栗) 부근
약 20
사 2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18일
청단(靑丹) 서방
약 30
사 3

재령(載寧)헌병분견소
22일
재령(載寧) 부근
약 20
사 6

재령헌병분견소
24일
송화(松禾) 부근
약 20
사 3

옹진(瓮津)헌병분견소
26일
옹진(瓮津) 서방 해안
약 40
사 7

평산(平山)헌병분견소
29일
평산(平山) 부근
약 50
사 5

재령(載寧)헌병분견소
30일
신천(信川) 부근
약 10
사 4

태탄(苔灘)헌병분견소
6월 1일
장연(長淵) 부근
약 30
사 4

재령(載寧)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10명
2일
재령(載寧) 부근
약 60
사 2


해주수비대
5일
달마산(達摩山) 부근
약 30
사 4

신계(新溪)수비대 장교 이하 17명
5일
곡산(谷山) 서북 30리 지점
약 15
사 3


곡산분견대(谷山分遣隊)
6일
문성장(文城場) 동북 약 60리 지점
약 60
사 14


신계(新溪)수비대 하사 이하 12명
10일
신계(新溪) 북방 약 40리 지점
약 15
사 3


신원(新院)헌병분견대
23일
재령(載寧) 동남 약 10리 지점
약 20
사 4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29일
해주(海州) 부근
약 40
사 12

재령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10명
7월 5일
해주(海州) 서북 약 30리 지점
약 18
사 3


해주경찰서(海州警察署)
9일
해주(海州) 읍내
약 30
사 5

신원(新院)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3명
11일
해주(海州) 동남 70리 지점
약 20
사 3


- 751 -
수안(遂安)헌병분견대
22일
수안(遂安) 북방 약 50리 지점
약 15
사 1

탁영대(濯纓臺)헌병분견소
30일
탁영대(濯纓臺) 남방 약 20리 지점
약 20
사 4

신계(新溪)헌병분견소
8월 3일
신계(新溪) 읍내
약 20
사 4

곡산(谷山) 서북 일송정(一松亭) 정지 척후
7일
일송정(一松亭)
약 60
사 16

곡산(谷山)헌병분견대
9일
곡산(谷山) 서북 약 90리 지점
약 25
사 1

풍천(豊川)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9명
17일
풍천(豊川) 서방 해안
약 10
사 3

온정원분견대(溫井院分遣隊)
22일
온정원(溫井院) 북방 20리 지점
약 40
사 5

수안(遂安)순사주재소
24일
수안(遂安) 읍내
약 16
사 2

신계(新溪)헌병분견소
9월 3일
신계(新溪) 남방 약 40리 지점
약 16
사 2

신계(新溪)헌병분견소
8일
신계 동북 약 60리
약 20
사 4

신계헌병분견소
14일
이천(伊川) 읍내
약 20
사 4

신계수비대(新溪守備隊)
20일
신계(新溪) 서방 부근
약 15
사 4

신계수비대
20일
성천(成川) 동남 약 100리
약 10
사 5

해주(海州)·마산(馬山)헌병분견소
10월3일
연안(延安) 읍내
약 20
사 2

기린장(麒麟場)헌병분견소
6일
탁영대(濯纓臺) 부근
약 100
사 1

재령(載寧)헌병분견소
10일
재령(載寧) 부근
약 10
사 3

개성(開城)헌병분견소
12일
구화장(九化場) 북방 30리 지점
약 80
사 4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16일
해주(海州) 읍내
약 40
사 3

토산(兎山)헌병분견소
30일
토산(兎山) 남방 약 10리 지점
약 20
사 1

강령(康翎)헌병분견대
11월2일
강령(康翎) 부근
약 30
사1

- 752 -
청병(靑丙)·마산(馬山)·옹진(瓮津)헌병분견소
3일
청단(靑丹) 북방 약 60리 지점
약 50
사 3

청단(靑丹)헌병분견소
20일
청단(靑丹) 서남 약 20리 지점
약 20
사 4

곡산(谷山)헌병분견소
25일
곡산(谷山) 읍내
약 10
사 5

신원(新院)헌병분견소
12월3일
신원(新院) 서남 약 20리 지점
약 20
사 5

연안(延安)헌병분견소
4일
배천(白川) 읍내
약 45
사 2

시변리(市邊里)헌병분견소
4일
금천(金川) 읍내
약 60
사 2

청단(靑丹)헌병분견소
8일
청단(靑丹) 서방 약 30리 지점
약 15
사 2

온정원(溫井院)헌병분견소
10일
온정원(溫井院) 동방 약 10리 반
약 200
사 3

시변리(市邊里)헌병분견소
12일
시변리(市邊里) 서북 40리
약 30
사 6

평산(平山)지방 헌병연합수사대
27일
온정원(溫井院) 서북 약 20리
약 240
사 12

3. 강원도에 있어서의 토벌
강원도의 폭도는 본년 2월 하순 수괴 민긍호(閔肯鎬)가 제거된 이후 다소 정온상태로 돌아가기는 하였으나, 은현 출몰이 지극히 교묘한 수괴 이강년(李康䄵)은 금강산(金剛山) 부근 혹은 인제(麟蹄)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그 부근을 약탈하였다. 김화(金化)·금성(金城) 부근은 경기도에서 압박당한 폭도들의 도피처가 되고, 동해안선의 삼척(三陟)·울진(蔚珍) 부근에는 초적중 비교적 세력이 우세한 자가 횡행하여 전도에 걸쳐 폭도의 기세가 아직 완전히 꺾이지는 않고 있었다.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는 4월 14일부터 24일에 걸쳐 통구현리(通口縣里)·화천(化川)·북창(北倉)·금강산(金剛山) 남부 부근을 토벌하여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폭도 약 2백을 구축하고 그 수10을 사살하였다.
인제수비대(麟蹄守備隊)는 4월 30일 인제를 떠나 엄밀한 수색 검거를 한 결과
- 753 -
5월 4일 수괴 이강년(李康䄵)·이준명(李準明)·정원팔(鄭元八) 등 이하 2백 60명이 창암점(窓岩店) 남방 약 20리 지점에 있는 오세암(五歲庵)에 있는 것을 탐문하고 기습, 그50을 사살하고 기타는 궤주시켰다. 그 후 이강년(李康䄵)은 소수의 수병(手兵)만을 이끌고 제천(堤川) 방면으로 나아가고 기타 대부분의 부하들은 귀순하게 되었다.
6월 26일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는 동지 부근에서 수괴 김원식(金元植)을 죽이고, 또 7월 3일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는 학곡(鶴谷)에서 수괴 최천유(崔千有)를 포박하였으므로 그들 부하는 대개 사산(四散)하여 정업(正業)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상 말한 외 4월부터 12월에 이르는 동안 있었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지포수비대(芝浦守備隊)
4월 1일
지포(芝浦) 남방 약 20리 지점
약 50
사 5

김화(金化)수비대의 하사 이하 10명
2일
포천(抱川) 동북방 30리 지점
약 150
사 10

횡성수비대(橫城守備隊)
2일
홍천(洪川) 동남 약 10리 지점
약 200
사 60

횡성수비대
3일
횡성(橫城) 서북 약 50리 지점
약 140
사 16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3일
문막(文幕) 서방10리반
19
사 16

평강수비대(平康守備隊)
4일
기산리(箕山里) 북방
약 30
사 3

회양수비대(淮陽守備隊)
5일
회현(灰峴) 부근
약 50
사 12

회양수비대
7일
화천(化川) 서북 10리
15
사 5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7일
이천(伊川) 동북 산지
약 20
사상 16

- 754 -
지평수비대(砥平守備隊)
16일
홍천(洪川) 북방 10리 지점
약 100
사상 12

횡성(橫城)·안흥(安興)·원주(原州)수비대에서 파견된 연락원
19일

원주(原州) 동북 학곡(鶴谷)
약 150
사 17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22일
철령(鐵嶺)의 서방 50리 지점
약 30
사 3

회양수비대(淮陽守備隊)
24일
고산역(高山驛) 동방 50리 지점
약 30
사 4

평창수비대(平昌守備隊)
27일
평창(平昌) 동북방 50리 지점
약 100
사상 42

회양(淮陽)수비대의 척후 장교 이하 12명
30일
회양(淮陽)의 동방 30리 지점
약 200
사 40

장전점수비대(長箭店守備隊)
30일
통천(通川) 동남 약 30리 반
약 150
사 3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
5월 1일
김화(金化) 북방 30리 반 지점
15
사 3

장전점수비대(長箭店守備隊)
1일
통천(通川) 동남 약 50리 지점
약 300
사 50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2일
이천(伊川) 동북 약 70리 지점
약 400
사상130

인제수비대(麟蹄守備隊)
5일
창암점(窓岩店) 동북 50리
약 250
사 42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5일
고산(高山) 서방 130리 지점
약 70
사 20

평창(平昌)수비대 하사 이하 3명
8일
대화(大和) 북방 10리 지점
약 20
사 5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
9일
도계(道溪) 남방 30리 지점
약 500
사 60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
9일
삼척(三陟) 남방 50리 지점
약 400
사 40

이천수비대(伊川守備隊)
10일
백년산(百年山) 부근
약 30
사 30

이천(伊川)수비대의 척후 하사 이하 4명
11일
이천(伊川) 동북 20리 지점
17
사 3

- 755 -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11일
원주(原州) 서북방
14
사 5

횡성(橫城)분견대 하사 이하 9명
11일
횡성(橫城) 서방 하창봉(下昌峰)
약 70
사 13

진부(珍富)수비대 하사 이하 9명
12일
정선(旌善) 동방 50리 임계(臨溪)
14
사 32

이천(伊川)순사주재소의 순사 2명
13일
이천(伊川) 부근
약 20
사 2

홍천(洪川)분견대 장교 이하 17명, 헌병 5명
14일
홍천(洪川) 동북 마현(馬峴)
14
사 3

평강(平康)헌병분견소
19일
평강(平康) 서북 약 90리 지점
약 20
사 15

보병 제50연대 제2대대에서 파견된 토벌대
21일
가려주(佳麗州) 부근
약 50
사 8

춘천수비대(春川守備隊)·춘천(春川)경찰대
22일
춘천(春川)
약 20
사 4

춘천(春川)수비대 하사 이하 5명
23일
춘천(春川) 동북 약 50리 지점
약 30
사 4

보병 제50연대 제2대대에서 파견한 토벌대
25일
고산(高山) 서북 약 60리 지점
약 50
사 3

강릉수비대(江陵守備隊)
26일
강릉(江陵) 동남 약 70리 지점
약 80
사 19

간성(杆城)순사주재소
28일
간성(杆城) 부근
18
사 2

장전점(長箭店)수비대 하사 이하 6명
30일
장전점(長箭店) 서방 약 30리
약 20
사 2

철원(鐵原)헌병분견소
31일
연천(漣川) 북방
약 50
사 10

대구(大邱) 경찰서장 이하 10명
31일
울진(蔚珍)
약 120
사 12
신돌석(申乭石)이 인솔
강릉(江陵)수비대 하사 이하 6명
6월 1일
삼척(三陟) 서남 90리 지점
약 50
사 21

삼척(三陟)수비대 장교 이하 28명
5일
울진(蔚珍) 서방 50리 지점
약 70
사 27

울진수비대(蔚珍守備隊)
5일
울진(蔚珍) 서남 50리 지점
약 70
사 30

- 756 -
정선분견대(旌善分遣隊)
7일
정선(旌善) 서남 몰운(沒雲)
약 120
사 41

금성(金城)수비대 장교 이하 11명
9일
회현(灰峴) 동방 약 10리 지점
약 30
사 5

신림분견대(神林分遣隊)
16일
신림(神林)
약 100
사 27

양양분견대(襄陽分遣隊)
22일
양양(襄陽) 서북 30리 지점
약 40
사 3

철원(鐵原)수비대 하사 이하 12명
25일
철원(鐵原) 남방 심원사(深源寺)
약 20
사 5

영월수비대(寧越守備隊)
26일
영월(寧越) 동방 90리
약 100
사 13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28일
원주(原州) 동방 운교택(雲橋澤)
약 80
사 20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28일
봉복사(鳳腹寺) 남방 10리 지점
약 50
사 5

원주수비대(原州守備隊)
7월 1일
신림(神林) 서남 약 10리 지점
약 100
사 15

인제(麟蹄)수비대 하사 이하 11명
1일
인제(麟蹄) 동남방 조동(鳥洞)
약 50
사 5

양양수비대(襄陽守備隊)
4일
양양(襄陽) 서남 약 40리 지점
13
사 10

이천수비대(利川守備隊)
8일
이천(利川) 북방 40리 지점
25
사 4

원주(原州) 서남 문막(文幕)분견대
17일
문막(文幕) 동남 약 10리 지점
약 60
사 18

영해(寧海)순사주재소
24일
평해(平海)
45
사 2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
8월 1일
포천(抱川) 동북 약 40리
약 60
사 7

서벽리수비대(西碧里守備隊)
12일
영월(寧越) 동북 약 40리 지점
약 40
사 7

학곡분견대(鶴谷分遣隊)
13일
학곡(鶴谷) 서북 30리 지점
15
사 5

서벽리수비대(西碧里守備隊)
16일
영월(寧越) 동방 70리 지점
약 150
사 22

- 757 -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9월 1일
금성(金城) 서북 약 80리 지점
약 100
사 10

금성헌병분견대(金城憲兵分遣隊)
1일
금성(金城) 동북 약 80리 지점
약 50
사 6

회양분견소(淮陽分遣所)
3일
금성(金城) 서북 80리 지점
약 20
사 2

울진수비대(蔚珍守備隊)
5일
울진(蔚珍) 서남 100리 지점
약 30
사 5

양양(襄陽)헌병분견소
25일
양양(襄陽) 서방 약 50리 지점
약 30
사 9

대화(大和)헌병분견소
10월 2일
대화(大和) 서남 50리 지점
25
사 4

평동(平洞)헌병분견소
11월 8일
제천(堤川) 서북 약 10리 지점
약 20
사 5

옥동(玉洞)헌병분견소
23일
옥동(玉洞) 서남 약 40리 지점
35
사 3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
30일
김화(金化) 남방 약 10리
15
사 3

인제(麟蹄)수비대 장교 이하 18명
12월6일
인제(麟蹄) 남방 30리 지점
15
사 3

횡성(橫城)헌병분견소
7일
횡성(橫城) 북방 10리 지점
약 20
사 6

황지리(黃池里)헌병분견소
7일
울진(蔚珍)
12
사 6

가려주(佳麗州)헌병분견소
8일
이천(伊川)
23
사 4

4. 충청남북 양도에 있어서의 토벌
충청북도의 폭도는 4월 이후 끊임없는 수비대·헌병·경찰의 토벌로 인하여 점차 정온하여졌으나, 5월 강원도 인제(麟蹄) 부근에서 격파된 이강년(李康䄵)은 수병 약간을 이끌고 제천(堤川) 부근으로 와서 잠복하고 우민(愚民)을 선동하여 경상북도에 걸쳐 적세가 재연(再燃)될 기세에 있었다. 이 제천 부근은 작 40년래 이강년(李康䄵)의 세력권내로서 원주(原州)에 있는 민긍호(閔肯鎬)와 서로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 758 -
충주(忠州)수비구 사령관 교본대좌(橋本大佐)는 부하를 독려, 예의 토벌 검거함과 동시에 지방민을 회유하여 적의 상태를 탐지하는 데 노력했다.
6월 하순 충주(忠州) 수비대장 석등소좌(石藤少佐)는 이강년(李康䄵)의 집단이 제천(堤川)·영춘(永春)·영월(寧越)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충주(忠州)·제천(堤川)의 수비대로 하여금 토벌을 시켰다. 그 결과 제천(堤川)수비대장 귀도소위(貴島少尉) 이하 29명은 7월 1일 이강년(李康䄵)이 부하 약 70을 인솔하고 청풍(淸風) 동북방 약 10리 거리에 있는 금수산 부근에 있음을 알고, 다음 2일 새벽 그것을 공격하여 그 10명을 사살하고 이강년(李康䄵)에게는 부상을 입혀 생포하였다. 그 후 그의 무리는 대개 분산하여 죽령(竹嶺)을 넘어 일월산(日月山)으로 도망쳤다.
충청남도의 폭도는 계통 없는 소집단의 적도(賊徒)에 지나지 않으나 공주(公州)에서 정산(定山)·청양(靑陽)·유구(維鳩) 부근에 비교적 출몰이 빈번하였고, 또 서천(舒川)·비인(庇仁)·남포(藍浦)·보령(保寧)·안면도(安眠島) 부근에는 때때로 해적적 약탈을 하는 무뢰한이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이상 설명한 외에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동안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남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시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청주(淸州)수비대의 변장대
4월 20일
충청북도
청주 동남 약 40리반 지점
약 30
사상 16

청주(淸州)수비대 연락병 2명
21일

충청북도
청주(淸州) 동남 40리 지점
약 100
사상 17

음성(陰城)수비대 하사 이하 6명
21일

충청북도
진천(鎭川) 서북방 약 10리 지점
약 10
사상 7

보은(報恩)수비대 하사 이하 9명
22일

충청북도
보은(報恩) 서북 약 40리 지점
약 50
사 20

- 759 -
영춘(永春)수비대 병졸 4명
30일
충청북도
영춘(永春) 서방 20리 반 지점
약 60
사 6

보은(報恩)수비대 장교 이하 9명
5월 3일
충청북도
보은(報恩) 동북 약 40리 지점
약 20
사 9

충주(忠州)수비대 장교 이하 8명
4일
충청북도
청풍(淸風) 서남 10리 지점
25
사 6

단양(丹陽)수비대 하사 이하 11명
8일
충청북도
단양(丹陽) 북방 약 50리 지점
약 40
사 7

보은(報恩)수비대 하사 이하 7명
22일
충청북도
보은(報恩) 북방 청천장(淸川場)
약 400
사 8

남포(藍浦)헌병분견소 헌병 3명
28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약 60
사 3

청양(靑陽)헌병분견소 헌병 6명
29일
충청남도
청양(靑陽) 동북 30리
약 80
사 4

청양(靑陽)헌병분견소 헌병 3명
6월 8일
충청남도
보령(保寧)
약 60
사 2

면천(沔川)헌병분견소 헌병 6명
13일
충청남도
당진(唐津)
약 50
사 3

서천(舒川)순사주재소 일한 순사 5명
13일
충청남도
서천(舒川)
약 60
사 3

문경(聞慶)수비대
14일
충청북도
괴산(槐山) 남방 20리 반 지점
약 60
사 15

미원(米院) 분견대장 이하 7명
17일
충청남도
문의(文義) 동북약10리
약 20
사 4

강경수비대(江景守備隊)
18일
충청남도
강경(江景)
약 40
사 13

남포(藍浦)헌병분견소
20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동방약30리
약 100
사 14

면천(沔川)헌병분견소 헌병 6명
27일
충청북도
면천(沔川) 동북 40리
약 50
사 12

홍산수비대(鴻山守備隊)
7월 2일
충청남도
해미(海美)
약 20
사 3

수안보(水安堡)분견대 병졸 5명
24일
충청남도
수안보(水安堡) 서남 약 20리
약 10
사 3

정산(定山)헌병분견소
25일
충청남도
정산(定山) 남방 10리
약 30
사 2

청양(靑陽)헌병분견소
8월 1일
충청남도
청양(靑陽)
약 30
사 3

유구(維鳩)헌병분견소
5일
충청남도
공주(公州)
약 20
사 2

남포(藍浦)헌병분견소
15일
충청남도 안면도(安眠島)
약 60
사 7

- 760 -
홍주(洪州)헌병분견소
15일
충청남도
안면도(安眠島) 북단
35
사 21

부여(扶餘)헌병분견소
25일
충청남도
부여(扶餘) 서북 약 30리 반 지점
37
사 3

청양(靑陽)헌병분견소
9월 1일
충청남도
음성(陰城) 서방 약 30리 지점
약 20
사 2

홍주(洪州)헌병분견소
1일
충청남도
태안(泰安) 서북 약 50리 지점
약 30
사 8

음성(陰城)수비대장 이하 22명
10일
충청북도
음성(陰城) 서남 약 20리 반 지점
약 40
사 2

음성(陰城)헌병분견소
10일
충청북도
음성(陰城) 남방 약 30리 반 지점
약 40
사 2

음성수비대(陰城守備隊)
11일
충청북도
음성(陰城) 남방 약 30리 반 지점
약 30
사 4

홍주(洪州)경찰서 순사4명
11일
충청남도
해미(海美)
18
사 4

음성수비대(陰城守備隊)
12일
충청북도
음성(陰城) 남방 약 20리 지점
약 20
사 2

남포(藍浦)헌병분견소
14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남방 약 30리 지점
약 40
사상 29

남포(藍浦)헌병분견소 헌병 7명
20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남방 약 50리 지점
약 70
사 19

남포(藍浦)헌병분견소 헌병 7명
23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약 40
사 4

청양(靑陽)헌병분견소 헌병 2명
28일
충청남도
청양(靑陽) 동북 약 20리 지점
약 60
사 5

임천(林川)헌병분견소 헌병 4명
10월 3일
충청남도
임천(林川) 남방 약 20리 지점
약 40
사 6

충주(忠州)수비대 상등병 이하 5명
12일
충청북도
단양(丹陽) 서남 약 20리 지점
25
사 7

단양(丹陽)헌병분견소 헌병 5명
13일
충청북도
단양(丹陽) 서남 약 50리 지점
약 30
사 7

임천(林川)헌병분견소
16일
임천 동방 50리 지점
약 20
사 2

청양(靑陽)헌병분견소
24일
충청남도
청양(靑陽)
약 100
사 17

- 761 -
홍산(鴻山)헌병분견소
26일
충청남도
한산(韓山) 북방 약 20리
약 70
사 9

임천(林川)헌병분견소
26일
임천(林川) 서방 약 10리 반
약 30
사 4

정산(定山)헌병분견소
30일
충청남도
정산(定山) 서남 20리
약 50
사 9

당진(唐津)헌병분견소
11월1일
충청남도
당진(唐津) 서방 약 50리
약 30
사 12

단양(丹陽)헌병분견소
5일
충청북도
단양(丹陽) 동방 약 50리
17
사 6

남포(藍浦)헌병분견소
21일
충청남도
남포(藍浦) 동북 약 40리
15
사 3

5. 경상북도에 있어서의 토벌
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폭도는 안동(安東)·상주(尙州)·문경(聞慶) 등 각 수비대의 압박으로 소백산(小白山)·일월산(日月山)의 산곡험요(山谷嶮要)로 은신 소굴을 구축하고 때때로 부근 촌락을 약탈하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상순 강원도 인제(麟蹄) 부근에서 내려온 이강년(李康䄵)의 무리가 일월산 부근을 배회하면서 은근히 무뢰한(無賴漢)들을 규합하자 서벽리(西碧里)·순흥(順興) 부근에 숨어 있던 수괴 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顯)·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敦泰)·백남규(白南奎)·정연철(鄭蓮哲) 등이 서로 응하여 봉기, 일시 적세는 극히 강렬하였다.
안동(安東)이남지구에 있어서는 적괴 최성집(崔成執)·이사옥(李四玉)·서주일(徐周一)·이만파(伊萬波) 등이 있어 각 150 내지 50의 부하로 의성(義城)·안덕(安德)·포항(浦項) 등에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적도는 경주(慶州)·영천(永川)·의흥(義興)·청송(靑松) 등 각 수비대와 한국 순사대의 토벌로 인하여 4월 하순경에는 거의 전멸되고 말았다.
5월 16일 영천(榮川) 수비대장은 정찰을 위하여 하사 4명과 순사 6명을 서벽리(西碧里)로 파견하였다. 이 정찰대는 17일 오전 4시 서벽리 동방 약 10리 지점인 곡지(谷地)에서 우세한 폭도의 일단과 조우하여 거의 포위되어 탄약이 떨어지자 하사 이하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잔여는 가까스로 퇴각하였다. 이 폭도는 수괴 변학기(邊鶴基)가 지휘하는 집단으로 그 수 천(千)이라
- 762 -
호언하며 18일 대거 내성(乃城)으로 습격하여 왔다.
내성(乃城) 헌병분견소장인 전도헌병소위(田島憲兵少尉)는 헌병·경관을 독려, 방전(防戰) 6시간에 걸쳐 그 20을 사살하고 겨우 내성 서북 1천 5백m 지점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폭도는 의연 그곳에 머물러 대오를 정돈하고 재차 내습하려는 기세가 보였다. 헌병대장은 병력이 미약하여 출격을 못하고 오후 10시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에서 청목소위(靑木少尉) 이하 47명의 응원군이 내성(乃城)에 도착하고, 또 영천(榮川)·함창(咸昌)수비대에서 급파한 토벌대도 그와 전후하여 도착하였으므로 전도헌병소위(田鳥憲兵少尉)는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19일 오전 1시부터 각대 호응하여 폭도를 공격 그를 사살하고 서벽리(西碧里) 방면으로 구축하였다.
재대전(在大田) 보병 제47연대장 생전목(生田目) 대좌는 각 수비대에 훈령하여 소백산록(小白山麓) 방면의 폭도를 토벌시키고, 또 제3대대의 일부를 영월(寧越)에서 봉화 방면으로 진출시켜 그 지방 부근의 토벌을 맡겼다.
영춘(永春)·영월(寧越)·영천(榮川)의 각 수비대는 장교 이하 20 내지 40명으로 편성된 토벌대를 파견하여 5월 20일에서 22일에 걸쳐 일월산(日月山) 및 소백산(小白山) 남록으로 행동을 시킨 결과 폭도는 10수개의 집단으로 분산하여 인적이 드문 산곡(山谷)으로 들어가고 혹은 고직령(古直嶺)을 넘어 황지리(黃池里) 방향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우리 토벌대가 각 수비지로 귀환하자 아직 10일도 지나지 않아 폭도는 재차 서벽리(西碧里)·현동(縣洞)·재산(才山)·일월산(日月山) 부근에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등 모기 파리 떼같이 완전 섬멸이 곤란하였다.
이에 있어 생전목(生田目) 대좌는 안동(安東)·예안(禮安)·적성(赤城) 부근을 순시하여 친히 각 수비대를 독려하여 6월 상순에서 하순에 걸쳐 준엄한 소탕을 시켰고, 또 일월산(日月山)·소백산(小白山) 부근 곡지(谷地)에는 비교적 농밀하게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6월 4일 예안(禮安)수비대장 하야중위(河野中尉) 이하 20명은 재산(才山) 서방 약 20리 거리에 있는 중신동(中新洞)에서 수괴 이강년(李康䄵)이 인솔하는 폭도 약 7백과 조우 그를 공격 중 폭도는 일부 진지를 점령한 다음
- 763 -
포격을 가장한 폭성을 내어 토벌대의 사기 저하를 꾀하고, 대부분은 양익(兩翼)에서 포위하려는 형세를 보여 그 태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70여를 유기하고 영양(英陽) 방향으로 패퇴하고, 그 후 이강년(李康䄵)은 충청북도 제천(堤川) 방향으로 이동하여 7월 2일 제천수비대에 의하여 생포되었다.
이상 말한 외에 4월부터 12월에 이르는 동안에 있어서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영양(英陽)수비대 하사 이하 6명
4월 1일
경상북도
영양(英陽) 동북 30리 반 지점
약 20
사 7

성주(星州)수비대장 이하 7명
3일
경상북도
지례(知禮) 동남 약 40리 지점
약 30
사 13

경주(慶州)수비대 하사 이하 14명
3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서남 약 40리 지점
약 100
사상 66

경주(慶州)수비대 하사 이하 14명
4일
경상북도
마일동(馬日洞) 부근
약 50
사 24

경주(慶州)수비대 상등병 이하 7명
10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동방 약 50리 지점
약 50
사상 39

경주(慶州)수비대 장교 이하 7명
10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동남 약 40리 지점
약 20
사상 13

경주(慶州)수비대 장교 이하 7명
10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동북방
약 10
사 3

경주(慶州)수비대 장교 이하 13명
13일
경상북도
영천(永川) 동북 약 40리 지점
약 30
사 3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
14일
경상북도
영천(永川) 북방 80리 지점
약 80
사상 19

문경(聞慶)수비대의 변장 토벌대
16일
경상북도
문경(聞慶) 서북방 수회장(水回場)
약 80
사 17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
17일
경상북도
청송(靑松)
약 40
사 18

- 764 -
경주(慶州)수비대 특무 조장 이하 13명
17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서남방 옥산(玉山)
약 50
사상 31

군위(軍威)수비대 하사 이하 10명
26일
경상북도
청송(靑松) 서남 약 60리 지점
약 80
사상 15

청송(靑松)분견대 하사 이하 4명
29일
경상북도
청송(靑松) 동방 약 30리 지점
62
사상 35

지례분견대(地禮分遣隊)
30일
경상북도
지례(知禮) 서방 50리 반 지점
약 70
사상 36

의성(義城)순사주재소
5월 4일
경상북도
안동(安東)
약 20
사 5

영해(寧海)헌병분견소 장교 이하 15명
9일
경상북도
울진(蔚珍) 서북방 약 40리 지점
약 80
사 3

봉화(奉化)헌병분견대
21일
경상북도
봉화(奉化)
약 160
사 8

진실(眞實)수비대 병졸 3명
6월 4일
경상북도
진실(眞實) 서방 20리 반
약 60
사 6

예안수비대(禮安守備隊)
7일
경상북도
예안(禮安) 동북 약 40리 지점
약 50
사 8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7일
경상북도
봉화(奉化) 동방 약 70리 지점
약 700
사 20

예천(醴泉) 및 영천(榮川)수비대
7일
경상북도
서벽리(西碧里) 북방 30리 지점
약 150
사 48

지례수비대(知禮守備隊)
8일
경상북도
영동(永同) 동남 약 30리 지점
약 50
사 12

봉화토벌대(奉化討伐隊)
10일
경상북도
봉화(奉化) 동방 약 10리 지점
약 30
사 6

예천수비대(醴泉守備隊)
14일
경상북도
적성(赤城) 부근
약 30
사 2

자인수비대(慈仁守備隊)
16일
경상북도
자인(慈仁) 동방 50리 지점
약 30
사 5

안동(安東)수비대 하사 이하 8명, 경관 3명
17일
경상북도
안동(安東)
약 20
사 14

서벽리(西碧里)수비대
19일
경상북도
서벽리(西碧里) 동북 약 50리
약 50
사 35

서벽리(西碧里)수비대
20일
경상북도
서벽리(西碧里) 동북
약 100
사 15

- 765 -


약 70리



이전(梨田)분견대 병졸 3명
20일
경상북도
청송(靑松) 남방
약 60
사 15

천변리분견대(川邊里分遣隊)
22일
경상북도
안동(安東) 남방 20리 반 지점
약 30
사 4

오전수비대(梧田守備隊)
26일
경상북도
소백산(小白山) 마이령(馬耳嶺) 서방 40리 지점
25
사 15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26일
경상북도
순흥(順興) 남방 30리 반 지점
25
사 5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27일
경상북도
소백산중(小白山中)
약 10
사 5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29일
경상북도
영천(榮川) 북방 상천(上川) 부근
약 30
사 5

서벽리(西碧里)수비대 장교 이하 12명
7월 1일
경상북도
소백산중(小白山中)
약 20
사 2

진보(眞寶)수비대 하사 이하 9명
11일
경상북도
진보(眞寶) 동방 50리 지점
약 70
사 8

청송수비대(靑松守備隊)
11일
경상북도
청송(靑松) 동북 약 30리 반 지점
약 30
사 12

순흥(順興)수비대 및 순사 4명
15일
경상북도
순흥(順興) 북방 30리
약 40
사 13

영해(寧海)헌병분견소
19일
경상북도
영해(寧海)
약 60
사 3

예안(禮安)수비대 상등병 이하 11명
21일
경상북도
영양(英陽)
약 30
사 12

성주(星州)수비대 병졸5명
24일
경상북도
성주(星州) 서남 약 40리
약 10
사 8

영해(寧海)헌병분견소
25일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 부근
약 70
사 9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
8월 5일
경상북도
경주(慶州) 동북방 약 90리
13
사 3

예안(禮安)수비대 하사 이하 9명
8일
경상북도
예안(禮安)동북 약 20리 반 지점
약 30
사 5

예안(禮安)수비대 하사 이하 9명
8일
경상북도
예안(禮安) 서방 약 40리 지점
약 40
사 8

안동(安東)헌병분견소
19일
경상북도
진보(眞寶) 동방 40리 지점
약 40
사 3

- 766 -
서벽리(西碧里)수비대 상등병 이하 8명
21일
경상북도
영월(寧越) 동북방 약 40리 지점
15
사 3

풍기(豊基)헌병분견소
9월 8일
경상북도
풍기(豊基) 서북 약 30리 지점
약 10
사 2

영천(永川)헌병분견소
18일
경상북도
영천(永川)
15
사 2

신녕(新寧)헌병분견소
11월22일
경상북도
신녕(新寧) 남방 약 30리 지점
약 20
사 2

6. 경상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경상남도 지리산(智異山)은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과 같이 폭도의 소굴지(巢窟地)로서 전년 이래 누차의 토벌을 가하였으나 심산유곡에서 교묘하게 우리 감시선을 벗어나 잠익(潜匿)하면서 음(陰)으로 향촌에 출동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리산 중 인적(人迹)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방책(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영구지책(永久之策)을 강구하고 있었으나, 6월 21일 함양수비대(咸陽守備隊)는 심한 곤란을 무릅쓰고 드디어 그 근거지를 발견하여 총기 탄약을 노획하고 기타는 전부 소각하여 버렸다. 그 후부터 폭도는 거의 사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경상남도 전역으로 꺼지고 일부는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8월 30일 덕산수비대(德山守備隊)에서 수괴 유명국(柳明國)을 포박하고, 10월 5일 진주수비대(晋州守備隊)에서는 손마생(孫馬生) 이하 3명을 생포하고, 또 9월 이후 진주수비구 사령관은 지리산록의 수비 배치를 농후하게 하여 재차 동 산중에 폭도의 도입(逃入)을 예방하는 등 처치를 취하였으므로 점차 적염(賊焰)은 소침(消沈)하게 되었다.
이상 서술한 외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767 -
[경상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치로(治爐)분견대
4월 1일
경상남도
몽석동(夢石洞) 동북방 약 10리
약 30
사상 7

함양(咸陽)수비대 장교 이하 21명
4일
경상남도
함양(咸陽) 서방
약 30
사 9

함양(咸陽)수비대 장교 이하 18명
7일
경상남도
거창(居昌) 북방 50리 매학동(梅鶴洞)
약 120
사 9

진주(晋州)수비대 상등병 이하 6명
9일
경상남도
삼가(三嘉) 서북 40리 천황치(天皇峙)
약 40
사상 16

치로(治爐)분견대 상등병 이하 4명
11일
경상남도
치로(治爐) 서방 약 40리 지점
약 30
사상 12

함양수비대(咸陽守備隊)
27일
경상남도
무풍장(茂豊場) 동방 10리 지점
약 140
사 37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5월 1일
경상남도
하동(河洞) 서북방 약 40리 지점
약 100
사상 60

함양(咸陽)수비대 장교 이하 15명
7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서북 약 30리 지점
약 50
사 2

울산(蔚山)수비대 하사 이하 15명, 순사 3명
9일
경상남도
울산(蔚山) 동북 90리 지점
약 50
사 11

진주(晋州)수비대 장교 이하 20명
11일
경상남도
진주(晋州) 서북방 약 90리 지점
약 10
사 4

합천(陜川)수비대 하사 이하 5명, 순사 1명
12일
경상남도
합천(陜川) 서방 약 40리 지점
약 10
사 4

진주수비대(晋州守備隊)
12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북방 약 10리 반 지점
약 10
사 4

함양(咸陽)수비대 동 주재소 순사
13일
경상남도
함양(咸陽) 남방 약 50리 지점
약 60
사 8

진주(晋州)수비대 장교 이하 16명
15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부근
약 30
사 11

진주(晋州)수비대 장교 이하 16명
19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동방 20리 지점
약 40
사 15

함양(咸陽)주재소 순사 5명
20일
경상남도
함양(咸陽)
약 30
사 5

- 768 -
울산(蔚山)수비대 하사 이하 5명
22일
경상남도
울산(蔚山)
약 10
사 3

하동(河東)수비대 하사 이하 8명
22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동북방 삼기(三岐)
약 10
사 4

거창수비대(居昌守備隊)
25일
경상남도
무풍장(茂豊場) 부근
약 100
사 76

산청(山淸)분견대 상등병 이하 5명
6월 1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동북 약 30리 지점
약 20
사 5

하동(河東)수비대 하사 이하 7명
5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동북 약 50리 월횡(月橫)
약 80
사 51

의령분견대(宜寧分遣隊)
7일
경상남도
의령(宜寧) 북방 약 30리 지점
약 30
사 12

신급(新及)수비대 하사 이하 5명
11일
경상남도
신급(新及) 서남 약 30리 지점
약 20
사 6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
11일
경상남도
입석(立石) 부근
약 80
사 3

산청(山淸)분견대 하사 이하 6명
16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남방 10리 지점
약 40
사 5

덕산분견대(德山分遣隊)
20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서북 20리 반 지점
15
사 4

부산수비대(釜山守備隊)
22일
경상남도
양산(梁山) 서북 20리 반 지점
약 40
사 14

어외장(於外場)분견대 하사 이하 6명
27일
경상남도
어외장(於外場) 동남 약 40리
약 60
사 7

어외장(於外場)분견대
7월 6일
경상남도
어외장(於外場) 서북 40리
약 40
사 3

하동(河東)수비대 장교 이하 7명
10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동북 청수동(淸水洞)
약 40
사 13

화개(花開)분견대 상등병 이하 7명
17일
경상남도
삼가(三嘉) 서북 약 20리 지점
약 30
사 9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18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북방 약 40리 회신(回信)
약 30
사 9

삼가(三嘉)분견대 상등병 이하 5명
20일
경상남도
삼가(三嘉) 서북 약 20리 지점
약 30
사 11

- 769 -
거창(居昌)수비대 상등병 이하 3명
22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동북 약 40리 지점
약 80
사 19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28일
경상남도
삼기(三岐) 동방 약 10리 지점
약 20
사 7

합천(陜川)수비대 상등병 이하 8명, 헌병 3명
29일
경상남도
합천(陜川) 서방 약 40리 지점
18
사 14

거창수비대(居昌守備隊)
30일
경상남도
거창(居昌) 서북방 80리 지점
약 60
사 21

삼가(三嘉)분견대 상등병 이하 6명
30일
경상남도
삼가(三嘉) 서방 약 20리 구평(龜坪)
약 20
사 8

덕산(德山)분견대 상등병 이하 5명
8월 1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서방 10리 반
약 20
사 5

거창(居昌)수비대 하사 이하 7명
2일
경상남도
무풍장(茂豊場) 서방 약 10리 지점
약 50
사 17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6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북방 약 60리 지점
약 30
사 3

함양(咸陽)수비대 상등병 이하 5명
10일
경상남도
함양(咸陽) 동북방 20리 지점
약 20
사 7

진주(晋州)수비대장 이하 10명
19일
경상남도
진주(晋州) 북방 약 40리 지점
25
사 8

산청수비대(山淸守備隊)
21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서남 30리 지점
약 50
사 13

덕산(德山)수비대 장교 이하 10명
23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남방 30리 지점
약 30
사 4

치로(治爐)분견대 하사 이하 5명
26일
경상남도
고령(高靈) 서북방 30리 반 지점
약 20
사 15

하동(河東)수비대 상등병 이하 11명
28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서남 10리 반
약 30
사 6

산청(山淸)분견대 하사 이하 6명 순사 11명
29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서남 대원사(大源寺)
약 50
사 12

덕산(德山)수비대장 이하 10명
30일
경상남도
덕산(德山) 서북 약 20리
약 30
사 16

화개(花開)분견대 하사 이하 5명
9월14일
경상남도
쌍쌍사(双雙寺) 북방 10리 지점
약 30
사 7

- 770 -
고현장(古縣場)분견대
15일
경상남도
고현장(古縣場) 북방 약 20리
14
사 10

함양수비대(咸陽守備隊)
20일
경상남도
신평(新坪)
약 20
사 6

입석수비대(立石守備隊)
23일
경상남도
의신(義信)
15
사 10

원전(院田)분견대 상등병 이하 6명
24일
경상남도
원전(院田) 서북방 약 20리 반 지점
15
사 3

하동(河東)수비대 장교 이하 6명 및 순사 2명
10월 5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동북 40리 안양(安養)
12
사 6

하동수비대(河東守備隊)
8일
경상남도
하동(河東) 서방 약 40리 지점
약 10
사 4

의령수비대(宜寧守備隊)
25일
경상남도
의령(宜寧) 서방 약 30리 지점
약 50
사 5

김천(金泉)헌병분견대
11월19일
경상남도
김천(金泉) 서북 약 40리 지점
약 30
사 5

산청수비대(山淸守備隊)
12월27일
경상남도
산청(山淸) 서북 40리 지점
약 20
사 2

7. 전라 남북 양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년 2월 초순부터 3월에 걸쳐 국지토벌대(菊池討伐隊)가 광주(光州) 부근을 소탕하여 수괴 김용구(金容球) 이하 2백여 명을 사살하였으므로 일시 정온상태를 유지하였으나, 적염(賊焰)은 곧 재연하여 전라양도 일대에 걸쳐 소요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폭도들의 행동은 극히 교묘하여 백주에는 양민(良民)을 가장하고 공공연히 군청 소재지를 배회하면서 관서의 동정을 정찰하고, 만약 호기(好機)를 잡으면 곧 자객적(刺客的) 행동을 감행, 총기·탄약·재화를 약탈하고 혹은 허(虛)를 틈타 저격 내습을 하는 등 그 은현 출몰을 미리 헤아릴 수가 없었다.
또 순사 주재소는 거의 전부가 습격을 당하였고, 양민을 위협하여 조세(租稅)를 횡령하고, 재류 일본인 및 그 사역(使役)하에 있는 조선인은 대개 폭도의 독수(毒手)에 목숨을 잃어 다년간의 사업 경영을 포기하고 그 근거지로
- 771 -
퇴각하여야 하게끔 되었으므로 농업에 번성하였던 전라 양도는 이제야 바야흐로 황무지화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던 그 고장의 본토인인 양민도 폭도의 위압에 눌려 그에 가담하여 교통의 방해가 빈번하였으므로, 첩보의 소통이 방해되어 군대의 행동도 극히 곤란을 느껴 일야(日夜) 그 소탕에 노력을 하였으나 그 효과는 현저하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만부득한 일이었다.
폭도는 2월 이후 화승총(火繩銃)의 개조에 고심하여 4월 초순경에는 거의 그 대부분을 뇌관식(雷管式)으로 개조하였다.
4월 6일 폭도 약1백 명이 영광(靈光) 동남 약 30리 반 거리에 있는 매답(梅畓)으로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얻은 영광수비대는 다음 7일 기병 하사 이하 14기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 그 43을 사살하고 잔여를 궤주시켰다.
4월 18일 적괴 이학사(李學士)는 부하 약 1백여 명을 이끌고 임실분견초(任實分遣哨)를 급습하였다. 초병은 극력 방전하여 이를 갈담(葛潭) 방향으로 격퇴하였다.
급보를 받은 진안수비대(鎭安守備隊)에서 파견한 하사 이하 10명은 주야겸행, 이학사(李學士)를 추격하여 21일 임실(任實) 동북 약 30리 지점인 산곡(山谷)에서 이학사(李學士) 이하 약 80의 적단(賊團)과 충돌, 그 23명을 사살하고 기타를 사산시켰다.
광주(光州) 부근에서 도량(跳梁)하고 있던 적괴 김태원(金泰元)은 이대국(李大局)·최봉선(崔奉仙)·심덕원(沈德元)·조만길(曺萬吉)·김치면(金致面) 등의 부장을 거느리고 그 부하의 수 약 8백에 달하며, 장성(長城)·나주(羅州)·영암(靈岩)에 걸친 횡폭 이를 데 없으며 그 기세가 맹렬하였다.
이에 있어 광주수비대 기병 제1중대장 덕영대위는 광주순사대와 협력하여 4월 중순 장성(長城)·월평(月坪)·비아장(飛鴉場)·서창(西倉)·나주(羅州)·사천장(沙川場) 등에 분견대를 파견하여 예의 김태원(金泰元)의 포박에 힘쓴 결과 드디어 4월 25일 광주(光州) 서방 약 40리 지점인 박산(朴山)에서 김태원(金泰元) 이하 2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그 부하였던 최(崔)·심(沈)의 무리는 각처로 흩어져 도리어 소란
- 772 -
지역을 확대하였다.
적괴 이학사(李學士)는 임실(任實) 동방 약 40리 지점인 팔공산(八公山) 부근을 근거지로 삼고, 이미 임실을 습격하여 크게 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진안(鎭安)·장수(長水) 등 각군(各郡)에 출몰하여 우리 우편인(郵便人)·체송인(遞送人) 또는 연락병 등에게 해를 끼치는 수가 빈번하였으므로, 우리 토벌 기관은 전심전력 이학사(李學士) 포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돌연히 나타났다가 홀연 자취를 감추어 용이하게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학사(李學士)는 각처에 게시하여 말하기를,
“왜노(倭奴)는 우리 삼천리 강역에 대해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주고 있다. 이학사(李學士)는 목숨을 걸고 의기(義旗)를 들어 왜노를 구축하겠다. 한인 순사 및 통역은 이때 의병에게 귀순하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
고 큰소리를 치면서 점차 남하하여 동복(同福)·복내장(福內場) 부근에 이르러 순천(順天)·보성(寶城) 부근의 심남일(沈南一)·강무경(姜武京)·이동옥(李東玉)·안진사(安進士) 및 나주(羅州) 부근에 있는 전해산(全海山)과 서로 호응하여 소요를 극하였으나, 우리 토벌대의 엄밀한 검거와 민첩한 소탕으로 인하여 폭도의 대부분은 남방 연해 및 도서로 도망쳐 동 지방 일대에 있는 우리 어민(漁民)이 그 참해(慘害)를 입게 되었다.
이상 외에 4월부터 12월에 이르는 동안에 있었던 전라남북도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광주(光州)수비대 장교 이하 15명
4월 4일
전라남도
광주(光州) 동남 약 30리 지점
약 40
사 10

광주(光州)수비대 상등병 이하 6명
14일
전라남도
곡성(谷城) 부근
약 40
사 5

광주(光州)수비대 기병장교 이하 10기, 보병 하사 이하 5명
18일
전라남도
약수정(藥水亭) 동북 20리 지점
약 70
사 12

광주(光州)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10기
22일
전라남도
함평(咸平) 동북 20리 반 지점
약 40
사 16

- 773 -
광주(光州)수비대 기병 장교 이하 23기
28일
전라남도
고창(高敞) 남방 30리 지점
약 120
사 17

광주(光州)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6기
30일
전라남도
순창(淳昌) 서남 석현(石峴)
약 120
사 11

광주(光州)수비기병 하사 이하 6기
5월 1일
전라남도
능주(綾州) 서남 약 20리 지점
55
사 7

동복(同福)헌병분견소 헌병 6명
6일
전라남도 동복(同福) 서방 약 20리
약 30
사 2

광주(光州)수비기병 하사 이하 5기
11일
전라남도
남원(南原) 동북 40리
약 30
사 17

학교(鶴橋)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10명
15일
전라남도
나주(羅州)
약 80
사 8

광주(光州)수비기병 하사 이하 6기 순사 10명
19일
전라남도
동복(同福) 동남 약 30리 지점
약 100
사 29

광주(光州)경찰서 순사 5명
26일
전라남도
옥과(玉果) 남방 20리 지점
약 20
사 5

순천(順天)경찰분서 순사 8명
29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59
사 6

동복(同福)헌병분견소 헌병 6명
6월 2일
전라남도
곡성(谷城)
약 70
사 12

고창(高敞)분견대 기병 10기
3일
전라남도
무장(茂長) 동방 10리 지점
약 50
사 5

무장(茂長)분견대 하사 이하 5명
3일
전라남도
무장(茂長) 서북방 20리 지점
약 70
사 9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10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서북 50리 지점
약 40
사 14

광천점(廣川店)분견대 하사 이하 6명, 순사 5명
11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서북 50리 지점
약 60
사 21

광천점(廣川店)분견대 하사 이하 6명, 순사 5명
12일
전라남도
광천점(廣川店) 동남 약 10리 지점
약 60
사 16

남평(南平)헌병분견소
12일
전라남도
광주(光州) 부근
약 30
사 3

보성(寶城) 및 낙안(樂安) 헌병분견소
14일
전라남도
보성(寶城) 동방 30리 지점
약 60
사 5

함평(咸平)헌병분견소
14일
전라남도
무안(務安)
약 60
사 8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22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약 40
사 14

- 774 -
동복(同福)헌병분견소
23일
전라남도
동복(同福) 부근
약 50
사 16

영암(靈巖)수비기병 상등병 이하 6기
28일
전라남도
영암(靈巖) 동방 20리 반 지점
약 100
사 20

담양(潭陽)분견대 하사 이하 6명
7월 9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북방 10리 지점
약 50
사 11

광주(光州)기병장교 이하 12명
9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동북 40리 지점
약 30
사 7

동복(同福)헌병분견소
9일
전라남도
동복(同福)
약 40
사 14

나주(羅州)헌병분견소 헌병 3명
13일
전라남도
함평(咸平)
약 60
사 11

장성(長城)헌병분견소
15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동북 약 10리반 지점
약 20
사 3

동장성(長城)헌병분견소
17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동북 약 20리 지점
15
사 3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18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서북 약 40리 반 지점
약 20
사 3

낙안(樂安)헌병분견대
18일
전라남도
낙안(樂安) 동방 약 40리 지점
약 20
사 5

남평(南平)헌병분견소 헌병 4명
20일
전라남도
남평(南平)
약 70
사 7

남평(南平)헌병분견소 헌병 8명
25일
전라남도
남평(南平)
약 100
사 7

광주(光州)기병대 상등병 이하 6기
29일
전라남도
순창(淳昌) 서방 40리 지점
약 200
사 5

영암(靈岩) 및 광주(光州) 기병중대
8월 5일
전라남도
복내장(福內場)
65
사 11

영광(靈光)수비대 상등병 이하 6기
11일
전라남도
영광(靈光) 동남 약 30리 지점
약 10
사 5

학교(鶴橋) 정지 척후
15일
전라남도
무안(務安) 서북 20리 지점
약 20
사 5

광주(光州) 제2순사대
15일
전라남도
순천(順天)
약 20
사 4

담양(潭陽)분견대 하사 이하 5명
18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동방 10리 반 지점
약 40
사 7

담양(潭陽)헌병분견소
18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동북 약 20리 지점
약 30
사 3

- 775 -
담양수비대(潭陽守備隊)
18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약 30
사 4

복내장(福內場) 정지 척후 기병 하사 7기
24일
전라남도
복내장(福內場) 동방 20리 지점
약 80
사 23

한동(閑洞)분견대 및 복내장(福內場) 정지 척후
24일
전라남도
복내장(福內場) 동방 20리 지점
약 170
사 24
수괴 이학사(李學士) 인솔
영암(靈岩)수비대 하사 이하 15명
27일
전라남도
영암(靈岩) 동북 30리 지점
약 100
사 10

영암(靈岩)수비대 하사 이하 9명
28일
전라남도
영암(靈岩) 동방 20리 반 지점
약 150
사 10

영암수비대(靈岩守備隊)
9월 1일
전라남도
영암(靈岩) 동방 20리 지점
약 50
사 5

광양(光陽) 및 순천(順天) 헌병분견소 헌병 16명
5일
전라남도
광양(光陽) 동북 약 50리 지점
약 20
사 12

순천경찰서(順川警察署)
5일
전라남도
광양(光陽)
약 60
사 12

영암수비대(靈岩守備隊)
12일
전라남도
영암(靈岩) 동북 40리 지점
약 40
사 4

광주(光州)수비대 상등병 이하 3명
22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북방 40리 지점
15
사 6

옥과(玉果)분견대 하사 이상 4명
22일
전라남도
옥과(玉果) 동남 약 20리 지점
24
사 8

광주제2순사대(光州第二巡査隊)
26일
전라남도
장흥(長興) 부근
약 100
사 5

영암(靈岩)수비대 기병 17기
10월 4일
전라남도
영암(靈岩) 남방 약 30리 지점
약 30
사 4

구례(求禮)수비대 하사 이하 14기
7일
전라남도
구례(求禮) 서남 40리 지점
약 40
사 22

순창(淳昌)수비대 장교 이하 10명
14일
전라남도
복내장(福內場) 부근
15
사 5

순창(淳昌)수비대 장교 이하 10명
15일
전라남도
장흥(長興) 동방 40리 지점
15
사 9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22일
전라남도
나주(羅州) 북방 40리 지점
약 270
사 13

헌병토벌대 하사 이하 10명, 보조원 16명
23일
전라남도
함평(咸平)
약 250
사 11

- 776 -
광주(光州)수비대 하사 이하 7명, 순사 4명
26일
전라남도
광주(光州) 동북 10리 지점
약 20
사 5

광주(光州)수비대 기병 하사 이상 6기
26일
전라남도
순창(淳昌) 서북 30리 지점
약 30
사 10

광주(光州)헌병분견소 헌병 3명, 보조원 7명
11월19일
전라남도
광주(光州) 서방 약 20리 지점
약 50
사 3

능주(綾州)주재소 순사 5명
22일
전라남도
능주(綾州) 남방 10리 반 지점
약 170
사 28

광주(光州)수비대 특무조장 이하 15명
23일
전라남도
광주(光州) 북방 약 30리 지점
약 300
사 10

곡성(谷城)헌병분견소 헌병 2명, 보조원 4명
24일
전라남도
곡성(谷城) 동남 약 60리 지점
약 40
사 5

광주(光州)토벌대 장교 이하 21명
25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북방 10리 지점
약 100
사 15

능주(綾州)헌병분견소
26일
전라남도
이양장(梨陽場)
약 150
사 5

담양(潭陽)헌병분견소
12월 9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동방 10리 반 지점
약 30
사 4

해남(海南)순사주재소
18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북방 약 30리 지점
약 80
사 3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18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서남 약 20리 지점
약 200
사 12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하사 이하 20명
18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약 200
사 11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하사 이하 17명
21일
전라남도
나주(羅州) 서북 약 40리 지점
약 50
사 2

영암(靈岩)수비대 상등병 이하 11명
25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서남 약 20리 지점
약 40
사 9

담양헌병분견소(潭陽憲兵分遣所)
29일
전라남도
담양(潭陽) 서남 약 20리 지점
약 30
사 3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29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서방 10리 반 지점
약 50
사 23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30일
전라남도
장흥(長興) 남방 20리 반 지점
12
사 8

- 777 -
[전라북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파견(派遣) 기병 제1중대
4월 2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동남 약 50리
약 30
사 7

진안(鎭安)수비대 하사 이하 10명
11일
전라북도 진안(鎭安) 동남 약 50리
약 280
사 18

진안(鎭安)수비대 장교 이하 21명
13일
전라북도
무주(茂朱) 남방 약 30리 반
65
사상 57

군산(群山)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8명
17일
전라북도
군산(群山) 북방 서천(舒川)
약 50
사 10

전주(全州)수비대 기병 장교 이하 16기
19일
전라북도
갈담(葛潭) 북방 30리 지점
약 30
사 3

전주(全州)수비대 기병 장교 이하 16기
24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서북방 30리 지점
35
사 2

함열(咸悅) 기병 연락초
25일
전라북도
함열(咸悅) 동남 20리 지점
25
사 7

고부(古阜) 수비 기병중대 장교 이하 10기
5월 8일
전라북도
정읍(井邑) 동방 10리 지점
약 40
사 9

고부(古阜) 수비 기병중대 장교 이하 10기
8일
전라북도
정읍(井邑) 동남 30리 지점
약 50
사 13

전주(全州) 수비 기병중대 하사 이하 9기
8일
전라북도
정읍(井邑) 동방 10리 지점
약 50
사 20

군산(群山) 기병대장 이하 11기
10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서북 40리 지점
약 50
사 8

순창(淳昌)분견대 하사 이하 7명
13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동남 약 30리 지점
약 20
사 9

천원(川原)헌병분견소
13일
전라북도
천원(川原)
약 200
사 3

경주(慶州) 및 청주(淸州) 수비대
16일
전라북도
무풍장(茂豊場) 북방 부근
약 30
사 16

전주(全州)기병중대 하사 이하 10기
16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동방 30리 지점
16
사 11

고부(古阜)수비기병중대 하사 이하 7기
18일
전라북도
무장(茂長) 동남 20리 지점
약 20
사 5

- 778 -
용담(龍潭)분견대 하사 이하 8명
28일
전라북도
용담(龍潭) 동남 10리
약 30
사 5

파견기병 제3중대 하사 이하 7기
28일
전라북도
갈담(葛潭) 서방 20리 지점
약 50
사 13

구례(求禮)분견대장 이하 7명
28일
전라북도
구례(求禮) 동남방 10리 반 지점
15
사 3

순창(淳昌)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5기
6월 1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남방 10리반
약 20
사 9

순창(淳昌)수비대 장교 이하 13명
1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서방 약수정(藥水亭) 동방 약 10리
약 40
사 8

파견기병 제3중대 장교 이하 24기
7일
전라북도
함평(咸平) 남방 약 10리
약 30
사 10

전주(全州)수비기병대 15기
7일
전라북도
함평(咸平) 동방 약 10리 반
약 30
사 10

기병 제2중대 하사 이하 6기
10일
전라북도
무장(茂長) 서북 20리
약 20
사 7

구례(求禮)수비대 하사 이하 4명, 순사 4명
14일
전라북도
곡성(谷城) 동방 10리 지점
약 30
사 9

고부(古阜)수비대 기병 장교 이하 16기
16일
전라남도
무장(茂長) 서남 10리 지점
약 100
사 80

갈담(葛潭)분견대 하사 이하 6명, 순사 9명
24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동북 30리
약 20
사 6

장수(長水)수비대 병졸 6명
7월 3일
전라북도
장수(長水) 동남 20리 지점
약 50
사 5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7일
전라북도
구례(求禮) 서남 약 50리 지점
약 30
사 4

구례(求禮)주재소 순사 2명
8일
전라북도
구례(求禮)
약 20
사 5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9일
전라북도
남원(南原) 남방 약 30리 지점
약 20
사 5

고부(古阜)기병수비대
13일
전라북도
영광(靈光) 동남 40리 지점
약 50
사 50

장수수비대(長水守備隊)
15일
전라북도
장수(長水) 동방 10리 반 지점
약 40
사 15

고부(古阜)수비기병대 하사 이하 6기
17일
전라북도
흥덕(興德) 서방 20리 지점
약 20
사 9

- 779 -
고부(古阜)수비기병대 하사 이하 18기
18일
전라북도
부안(扶安) 서남 20리 반 지점
15
사 5

용담(龍潭)분견대장 이하 6명
22일
전라북도
용담(龍潭) 동방 약 20리 지점
약 50
사 8

전주(全州) 동방 적천리(笛川里)분견대
22일
전라북도
진안(鎭安) 서방 50리 지점
약 30
사 13

전주(全州)수비대 하사 이하 8명
29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동남 60리 지점
약 30
사 14

낙안(樂安)헌병분견소
29일
전라북도
보성(寶城)
약 30
사 8

운봉(雲峰)분견대 상등병 이하 7명
8월 3일
전라북도
운봉(雲峰) 동북 약 20리 반 지점
15
사 10

고부(古阜)수비대 하사 이하 5명
7일
전라북도
무장(茂長) 동방 10리 지점
약 30
사 30

고부(古阜)경찰서 순사 6명
8일
전라북도
고부(古阜)
약 20
사 5

임실(任實)수비대 상등병 이하 4명
9일
전라북도
임실(任實) 동방 30리 지점
15
사 9

전주수비기병중대 하사 이하 7명
9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남방 30리 지점
약 20
사 6

순창수비대(淳昌守備隊)
14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서방 40리 지점
15
사 5

임실(任實)분견대 하사 이하 7명
18일
전라북도
임실(任實) 서방 50리 지점
약 50
사 22

고부(古阜)수비대 하사 이하 4명
30일
전라북도
고부(古阜) 동방 20리 반 지점
17
사 4

갈담(葛潭)분견대 하사 이하 6명
9월 1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북방 30리 반 지점
약 40
사 15

무풍장수비대(茂豊場守備隊)
6일
전라북도
무풍장(茂豊場) 서북방 60리
약 20
사 6

전주수비대(全州守備隊)
11일
전라북도 태인(泰仁) 동남 20리 반
약 30
사 24

고부(古阜)수비대 기병 12기
12일
전라북도
고부(古阜)
약 20
사 4

전주(全州)수비대 하사 이하 6명
18일
전라북도
정읍(井邑) 동남방 약 30리 지점
약 20
사 11

- 780 -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19일
전라북도
백운산(白雲山) 서북 10리 지점
약 30
사 11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20일
전라북도
개동(開洞) 동남 약 20리 지점
약 90
사 36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21일
전라북도
영광(靈光) 동방 약 60리 지점
약 30
사 5

파견기병대 상등병 이하 3기
22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15
사 4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26일
전라북도
고창(高敞) 동남 10리 반 지점
약 30
사 5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28일
전라북도
영광(靈光) 동북 10리 지점
14
사 6

동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29일
전라북도
장성(長城) 서방 20리 지점
약 70
사 13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30일
전라북도
고창(高敞) 남방 10리 반 지점
약 40
사 5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10월 1일
전라북도
나산(羅山) 북방 부근
15
사 13

순창(淳昌)수비대 상등병 이하 5명, 헌병·순사 6명
4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북방 30리 지점
약 70
사 43

고부(古阜)수비대 기병 장교 이하 10기
4일
전라북도
고창(高敞) 남방 약 20리 지점
약 20
사 4

고부(古阜)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9기
12일
전라북도
고창(高敞) 동남 10리 반
19
사 8

고창분견대(高敞分遣隊)
15일
전라북도
흥덕(興德) 동남 20리 반 지점
약 60
사 7

남원(南原)수비대 하사 이하 6명
16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북방 20리 지점
약 80
사 13

남원(南原)수비대 하사 이하 6명
17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북방 30리 지점
15
사 5

고부(古阜)수비대 기병 하사 이하 4기
20일
전라북도 고부(古阜) 서방 40리 반
약 80
사 37

정읍(井邑)수비대 하사 이하 5명
31일
전라북도
정읍(井邑) 서방 약 10리 지점
약 30
사 6

순창(淳昌)수비대 하사 이하 7명, 헌병·순사 12명
12월26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서북 60리 지점
약 200
사 14

- 781 -
진안(鎭安)수비대 하사 이하 10명
27일
전라북도
진안(鎭安) 동북 40리 지점
약 50
사 11

순창(淳昌)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9명
12월 2일
전라북도
순창(淳昌)
약 20
사 7

장수(長水)헌병분견소 헌병·순사 7명
7일
전라북도
장수(長水) 북방 약 40리 지점
약 60
사 12

진안(鎭安)수비대 하사 이하 7명
7일
전라북도
진안(鎭安) 서남 약 30리 지점
32
사 7

임실(任實)헌병분견소 7명
20일
전라북도
임실(任實) 부근
34
사 3

8. 평안남북도에 있어서의 토벌
3월 하순 갑산(甲山)에 있던 폭도의 대부분은 그 수괴 차도선(車道善)을 따라 귀순 혹은 해산을 하였다. 그러나 그 부하로 있던 양혁진(梁嚇鎭)은 장진(長津)으로 도망치고, 한영준(韓永俊)은 삼수(三水)에 이르러 재차 동지를 규합하여 4월 6일 같이 후창(厚昌)으로 침입, 양민을 협박하여 금품 양식을 약탈하고 사냥꾼을 강제로 징집하여 같은 도당으로 삼아 그 수 4백이라 칭하며, 4월 10일 후주고읍(厚州古邑)을 습격하였다.
이 보고에 접한 강계(江界) 수비 보병 제51연대 제10중대는 산전중위(山田中尉)가 인솔하는 하사 이하 32명을 파견하였다.
산전토벌대(山田討伐隊)는 4월 13일 후창(厚昌)에 도착하여 약 4백의 폭도가 부산동(富山洞)을 근거로 삼아 곧 후창을 습격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14일 하산령(河山嶺)을 넘어 부산동(富山洞)으로 전진 중, 부산동 서방 10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폭도와 조우, 곧 그것을 격퇴하고 오후 1시 하산포(河山浦)에 도달하자 약 4백의 폭도가 하산포(河山浦) 남방 일대의 고지선(高地線)에 의거 교묘하게 암석을 이용하여 사격하는 것과 충돌하여 토벌대는 곧 응원 공격을 하였다. 오후 4시 30분까지 완강하게 대항하던 폭도는 이 때 비로소 퇴각을 개시하므로, 그를 맹렬히 추격하여 그 50을 사살하고 후주고읍(厚州古邑) 방향으로 궤주시켰다.
토벌대는 그날 밤 부산동(富山洞)에서 숙영하고, 다음 15일에도 계속 추격을
- 782 -
속행하여 죽하리(竹下里)에서 양(梁)이 인솔하는 폭도 약30이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과 만나 무난히 그것을 격퇴시키고 17일 강계(江界)를 향하여 귀도에 올랐다.
이 밖에 평안북도에서 2,3의 적단(賊團)이 배회 출몰하였으나 특기할 만한 것이 못되고, 평안남도에서는 대동강(大同江) 유역 이남, 즉 함경남도·황해도와 접하는 경계에서 비교적 빈번한 적의 활동이 있었으나, 이 역시 그 집단이 10 내지 30에 불과하였다.
양도(兩道)에 있어서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평안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강계(江界)수비대 하사 이하 10명, 헌병 10명
4월27일
평안북도
평남진(平南鎭)
약 300
사 9

창성수비대(昌城守備隊)
5월 5일
평안북도
삭주(朔州)
약 30
사상 6

강계경찰서(江界警察署)
6월12일
평안북도
용림면(龍林面) 부근
약 40
사 13

회목동(檜木洞)헌병분견소
19일
평안북도
초산(楚山)
18
사 4

회목동(檜木洞)헌병분견소
7월28일
평안북도
회목동(檜木洞) 부근
44
사 4

희천수비대(熙川守備隊)
8월 8일
평안북도
희천(熙川) 동북방 약 60리
약 20
사 9

유원진분견대(柔院鎭分遣隊)
15일
평안북도
평남진(平南鎭) 서남 20리 반
15
사 2

입석참(立石站)헌병분견소
28일
평안북도
강계(江界)
약 20
사 4

행천리(杏川里)헌병분견소
28일
평안북도
행천리(杏川里) 서남 40리
약 10
사 1

위원(渭原)헌병분견소
9월 9일
평안북도
위원(渭原) 남방 140리 지점
약 20
사 4

위원(渭原)헌병분견소 헌병 6
10월10일
평안북도
위원(渭原) 동남 약 140리 지점
약 20
사 1

유원진(柔院鎭)헌병분견소
11월 6일
평안북도
유원진(柔院鎭) 동북 약 50리
약 10
사 2

- 783 -
희천(熙川)수비대 중위 이하 7명
7일
평안북도
유원진(柔院鎭) 동북 20리
14
사 2

신흥리(新興里)헌병분견소
7일
평안북도
신흥리(新興里)동방 약 60리
약 20
사 5

유원진(柔院鎭)헌병분견소
7일
평안북도
유원진(柔院鎭) 동북 산중
약 10
사 1

[평안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맹산수비대(孟山守備隊)
4월 6일
평안남도
양덕(陽德) 남방 40리 지점
약 40
사 4

성천 수비대(成川守備隊)
6일
평안남도 성천(成川) 동북 약60리
약 20
사 10

삼등수비대(三登守備隊)
5월 1일
평안남도
삼등(三登) 동방 약 20리
45
사 16

성천(成川)수비대 및 경찰서
1일
평안남도
성천(成川) 북방 기창(岐倉)
약 30
사상 11

헌병토벌대(憲兵討伐隊)
10일
평안남도
영원군(寧遠郡) 북창(北倉)
약 270
사 5

성천수비대(成川守備隊)
10일
평안남도
동창(東倉) 동북 20리
약 50
사 10

순천(順天)순사주재소
27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약 40
사 4

별창분견대(別倉分遣隊)
31일
평안남도
논석(論石)
약 40
사 21

성천수비대(成川守備隊)
6월 1일
평안남도
상리(上里)
약 50
사 10

맹산수비대(孟山守備隊)
12일
평안남도
원정동(遠井洞) 부근
약 30
사 2

상원(祥原)순사주재소
13일
평안남도
상원(祥原)
약 30
사 6

상원수비대(祥原守備隊)
13일
평안남도
중화(中和) 동북 약 40리
28
사 6

삼등수비대(三登守備隊)
16일
평안남도
삼등(三登)
약 70
사 2

덕천수비대(德川守備隊)
27일
평안남도
덕천(德川) 서남 40리
13
사 3

영원수비대(寧遠守備隊)
7월13일
평안남도
영원(寧遠) 서북방 80리
18
사 5

- 784 -
창평분견대(倉坪分遣隊)
23일
평안남도
창평(倉坪) 동남 20리
15
사상 6

성천수비대(成川守備隊)
27일
평안남도
성천(成川) 동남 고해동(古海洞) 부근
약 60
사 4

성천경찰서(成川警察署)
8월 1일
평안남도
성천(成川)
약 20
사 2

맹산수비대(孟山守備隊)
3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남방 40리
약 40
사 10

양덕수비대(陽德守備隊)
25일
평안남도
오류동(五柳洞) 서방
약 20
사 3

맹산(孟山)헌병분견소
31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남 60리
약 10
사 4

맹산분견대(孟山分遣隊)
31일
평안남도
영원(寧遠) 동남 40리
8
사 4

맹산경찰서(孟山警察署)
9월 1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13
사 4

성천경찰서(成川警察署)
4일
평안남도
성천(成川)
36
사 2

삼등(三登)헌병분견소
4일
평안남도
삼등(三登) 북방 40리
약 40
사 2

덕실동(德實洞)헌병분견소
10월 1일
평안남도
영원(寧遠)
약 60
사 8

덕실동(德實洞)헌병분견소
2일
평안남도
영원(寧遠)
약 30
사 3

삼등(三登)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4일
평안남도
삼등(三登)
35
사 7

맹산(孟山)헌병분견소
6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방 약 40리
58
사 3

동맹산(孟山)헌병분견소
9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11
사 4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소
10일
평안남도
약수동(藥水洞) 동방 80리
약 60
사 7

화창(化倉)헌병분견소
12일
평안남도
화창(化倉)
약 60
사 2

맹산(孟山)헌병분견소
14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방 90리
약 30
사 5

영원(寧遠)헌병분견소
19일
평안남도
영원 동남 약 140리
약 70
사 7

맹산(孟山)헌병분견소
24일
평안남도
양덕(陽德)
약 30
사 1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소
25일
평안남도
약수동(藥水洞) 동방 90리
약 50
사 2

성천수비대(成川守備隊)
30일
평안남도
성천 동남방 약 110리
약 40
사 6

- 785 -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소
31일
평안남도
약수동(藥水洞) 동남 약 70리
약 50
사 9

맹산(孟山)헌병분견소
31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남방 40리
약 10
사 4

개천(价川)헌병분견소
11월 1일
평안남도
북창(北倉) 동남 50리
16
사 2

사창(社倉)헌병분견소 하사 이하 7명
6일
평안남도
영원(寧遠)
약 60
사 7

영원(寧遠)헌병분견소
9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방 약 60리
약 10
사 3

영원(寧遠)헌병분견소
11일
평안남도
맹산(孟山) 동방 80리
약 50
사 7

성천(成川)헌병분견소
13일
평안남도
성천 동남 약 90리
15
사 1

약수동헌병분견소
16일
평안남도
약수동(藥水洞) 동방 약 120리
약 50
사 4

영원(寧遠)헌병분견소
12월 3일
평안남도
정평(定平)
약 30
사 3

9. 함경남도에 있어서의 토벌
3월 상순 수괴 차도선(車道善)이 귀순한 이래 적세(賊勢)는 비교적 감소되었다고는 하지만 홍범도(洪範圖) 일파의 도당이 있어 출몰 약탈을 자행하고, 또 차도선(車道善)의 부하로서 일단 귀순을 하였다가 재차 폭도의 무리에 가담하여 양민을 위협 선동하는 자가 있었다.
한편 차도선(車道善)은 귀순 후 갑산헌병분견소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는데, 5월 7일 기회를 틈타 도주하여 이리사(二里社)를 거쳐 황수원(黃水院)에 이르러 부랑도배들을 모아 홍범도(洪範圖) 일파와 서로 호응하여 폭동을 일삼았다. 이에 적세(賊勢)는 재연상태가 되었으나, 곧 수비대 헌병에게 진압되고 홍범도는 노령 방면으로 도망치고, 차도선(車道善)은 청국령으로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적세는 점차 그 불길이 약하여지기 시작하였다.
4월 하순 홍범도(洪範圖)의 도당은 갑산(甲山) 북방 부근에 출몰하고 그 일부는 삼수 부근에서 배회하는 것을 탐지한 북청수비구 사령관 장곡천중좌(長谷川中佐)는 그 부속 제3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경시(警視) 김원흥(金元興) 이하 11명을 파견하여 먼저 홍범도(洪範圖)에게 귀순을 권고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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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였다.
김경시(金警視)는 5월 1일 북청(北靑)을 출발하여 황수원(黃水院)·신풍리(新豊里)를 거쳐 전진, 4일 창평리(倉坪里)에서 그곳 서북 약30리 지점에 있는 도하리(都下里)에 약3백의 폭도가 집단하여 있음을 탐문하고, 부하6명을 인솔하고 귀순 권고를 목적으로 도하리(都下里)로 향하였으나, 도리어 홍범도 일파의 간악한 함정에 빠져 참살되고, 잔원 5명도 역시 운명을 같이 하였다.
귀순 권고의 목적은 도리어 그들로 하여금 기세만을 올리게 하였으므로 장곡천중좌(長谷川中佐)는 5월 19일에 청지대위(靑峙大尉) 이하 45명을, 21일에는 편강중위(片岡中尉) 이하 45명을 북청(北靑) 출발, 후치령(厚峙嶺)을 거쳐 신풍리(新豊里)로 보내고, 또 삼목소좌(三木少佐)에게 보병 하사 이하 10명을 기병 장교 이하 12기 그리고 사도포병대(蓑島砲兵隊)를 인솔시켜 23일 북청(北靑) 출발 후치령(厚峙嶺)을 거쳐 신풍리(新豊里)로 보내고, 동일 궁내중위(宮內中尉) 이하 45명을 통파령(通坡嶺)을 거쳐 신풍리(新豊里)로 보내 각대는 일단 신풍리(新豊里)에 집합하여 삼목소좌(三木少佐)의 지휘를 받게 하고, 따로 암전중위(岩田中尉) 이하 30명을 이원(利原)·단천(端川) 방면으로 파견하여 삼목소좌(三木少佐)가 지휘하는 토벌대와 서로 책응하게 하였다.
각대는 5월 하순부터 진뢰적 활동을 속행하여 장파(長坡)·금창(金昌)·갑산(甲山)·혜산진(惠山鎭)·장항리(獐項里) 방면에서 홍범도가 인솔하는 폭도를 포위하고 공격한 결과 폭도의 대집단은 점차 분쇄되고 홍범도는 수병 약간을 이끌고 장진(長津) 방향으로 궤주하고, 7월 잠행하여 노령(露領) 추풍(秋豊 ; 니코라스크 부근의 한인 부락)으로 유랑, 42년 동지에서 다시 폭도를 규합하여 거사하려 하였으나 드디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도선(車道善)은 갑산(甲山)헌병분대에서 탈출한 후 황수원(黃水院)에 이르러 토민을 불러 모아 폭동을 일으켰으나, 홍범도가 노령(露領)으로 떠나자 그 부하들도 각기 이산하여 따르는 자 겨우 20~30명에 지나지 않아 다시 전일의 치성(熾盛)을 이루지 못하고 대안(對岸)인 청령(淸領)으로 도망치게
- 787 -
되어 함경남도는 다시 정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상 말한 외에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동안의 토벌 개황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함경남도 및 그 부근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원산수비대(元山守備隊)
4월 8일
함경남도
마전동(馬轉洞)
약 250
사 13

고원분견대(高原分遣隊)
20일
함경남도
고원(高原) 남방 50리
약 30
사 16

고원분견대(高原分遣隊)
5월12일
함경남도
고원(高原)
약 300
사 30

장진분견대(長津分遣隊)
16일
함경남도
상평리(上坪里) 남산 고개
약 500
사 11
홍범도 인솔
신창헌병분견소(新昌憲兵分遣所)
17일
함경남도
신창 북방 약 30리
약 150
사 5

영흥(永興)경찰서 순사5명
25일
함경남도
영흥 서방 약 20리
약 100
사 5

영흥분견대(永興分遣隊)
25일
함경남도
영흥 서방 약 20리
약 100
사 7

삼수(三水)헌병분견대
25일
함경남도
갑산(甲山)
약 30
사 4

함흥수비대(咸興守備隊)
6월 2일
함경남도
함흥(咸興) 동북 부전령(赴戰領)
약 70
사 19
홍범도의 부하였던 자
신풍리수비대(新豊里守備隊)
8일
함경남도
장항리(獐項里) 서북 40리
약 70
사 4

고원분견대(高原分遣隊)
9일
함경남도
고원 서방 약 40리
약 80
사 5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 보병 하사 이하 15명 기병 하사 이하 12기
10일
함경남도
북청(北靑) 북방 금창(金昌) 부근
약 200
사 16

북청(北靑)수비대 보병 장교 이하 30명
10일
함경남도
북청(北靑) 북방 금창(金昌) 부근
약 150
사 9

고원분견대(高原分遣隊)
11일
함경남도
고원(高原) 서방 약 40리 반
약 200
사 37

함흥수비대(咸興守備隊)
12일
함경남도
영흥 서북 70리
약 250
사 30

고원(高原)분견대 졸 5명
12일
함경남도
고원(高原) 서북 약 20리 반
약 100
사 2

- 788 -
영흥(永興)경찰서 순사 2명
16일

함경남도 영흥(永興) 동남 약 30리
19
사 2

영흥(永興)분견대 하사 이하 5명
17일

함경남도
영흥(永興) 동북 10리
약 20
사 2

고원수비대(高原守備隊)
25일

함경남도
문천(文川)
약 150
사 3

보병 제50연대 제10중대
7월 11일


함경남도
함흥(咸興) 북방 약 120리
약 50
사 15

고원(高原)헌병분견소
11일

함경남도
고원(高原)
약 40
사 29

삼수(三水)수비대 장교 이하 16명
14일

함경남도
삼수(三水) 서방
약 30
사 3

함흥기병대(咸興騎兵隊)
20일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방 약 70리
약 50
사 5

함흥기병대(咸興騎兵隊)
21일

함경남도
북청(北靑)
약 300
사 20

성진(城津)수비대 장교 이하 10명
23일


함경남도
단천(端川) 서방 쌍상리(双上里)
약 70
사 28

북청(北靑)수비대 상등병 이하 5명
8월 2일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방 약 50리
약 40
사 4

원산(元山)헌병분견대
8일

함경남도
문천(文川)
약 10
사 3

북청(北靑)수비대 하사 이하 11명
13일


함경남도
북청(北靑) 서방 통팔령(通八嶺)
약 40
사 12

운산동(雲山洞)수비대
15일


함경남도
운산동(雲山洞) 동방 산지
약 40
사 6

창평분견대(倉平分遣隊)
15일


함경남도
입석리(立石里) 동방 약 30리
약 30
사 8

황수원(黃水院)분견초 하사 이하 10명
19일


함경남도
황수원(黃水院) 서방 약 50리
약 40
사 2
차도선의 인솔
갑산(甲山)헌병분견소
22일


함경남도
장흥리(長興里) 남방 약 30리
12
사 2

함흥수비대(咸興守備隊)
27일

함경남도
동흥리(東興里) 부근
약 60
사 12

창평(倉坪)헌병분견대
29일

함경남도
창평(倉坪) 북방 30리
약 50
사 10

함흥(咸興)기병연대 장교 이하 13기
9월 3일


함경남도
신풍리(新豊里) 동남 10리
약 30
사 9

동(同) 하사 이하 7기
9일


함경남도
신풍리(新豊里) 동남 40리 반
약 90
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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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
11일
함경남도 북청(北靑) 서방 약 10리
약 50
사 4

함흥(咸興)수비대 장교 이하 13명
20일
함경남도
천평리(天坪里)
약 60
사 6

결물리(袂物里)헌병분견소
28일
함경남도
장진(長津)
약 50
사 4

홍원(洪原)분견초 하사 이하 5명
29일
함경남도
홍원(洪原) 서남 50리
약 40
사 4

성진수비대(城津守備隊)
10월 7일
함경남도
길주(吉州) 동남 20리
약 40
사 5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소
10일
함경남도
영흥(永興)
약 60
사 7

함흥기병대(咸興騎兵隊)
12일
함경남도
영흥 서남방 산지
약 80
사 5

경성(鏡城)헌병분견소
15일
함경남도
경성(鏡城) 서남 20리
약 50
사 3

함흥수비대(咸興守備隊)
21일
함경남도
함흥 동북 약 130리
약 80
사 6
차도선이 인솔
10. 함경북도에 있어서의 토벌
명치(明治) 37~38년 전쟁 당시 친로파였던 배일한인(排日韓人)의 두목 이범윤(李範允)이란 자 있어 북관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무산(茂山)·회령(會寧)·종성(鍾城)·경원(慶源) 등 각 지방에서 총기 약 3백을 징집하여 사격대라는 것을 조직하고 스스로 대장(隊長)이 되어 우리 북한군(北韓軍)의 행동을 방해하였으나, 평화 극복과 함께 노령 연추(煙秋) 부근으로 잠입하여 버렸다. 대저 도문강(圖們江)에서 포염(浦鹽) 부근에 이르는 사이에는 한인(韓人)의 이주자가 극히 많아 정치상 실각자로서 동 지방으로 망명한 자 역시 적지 않았으므로, 이 범윤은 이들 망명자의 수모(首謀)가 되어 이 주민을 선동하여 배일적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운동비의 모집, 무기의 매수에 분주하고 기회를 보아 북한 지방으로 침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월 6일 약 1백명의 폭도는 고읍(古邑) 동남 약 20리 지점인 증산(甑山)에서 도문강을 건너 고읍(古邑) 서방 산지로 침입하여 왔다.
이 보고에 접한 경흥(慶興)수비대는 상등병 이하 4명의 척후를 파견하였다. 척후대는 고읍(古邑) 남방에서 폭도의 손에 의하여 전원이 참살당하였으므로 동부수비구 사령관 환정소장(丸井少將)은 회령(會寧)·웅기(雄基)·경흥(慶興) 등 각 수비대에게 서로 책응하여 적을 포위 전멸케 하도록 명령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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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행동을 개시하기 전인 7월 10일 오전 5시 폭도 약 2백이 신아산(新阿山) 분견대를 습격하여 왔다. 폭도는 극히 표한한 동작으로 분견대를 포위하여 동대 하사 9명은 분전 2시간 만에 탄약이 다하여 부득이 포위의 일각을 돌파하고 경흥수비대 소재지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행방불명이 된 하사 5, 전사 1명을 냈다.
청진수비대(淸津守備隊)에서 파견된 장교 이하 70명은 11일 오전 기선으로 웅기(雄基)에 상륙하여 그곳 수비대와 함께 증산(甑山) 부근의 폭도에 대항하고, 또 회령(會寧) 보병 제49연대 제9중대는 동일 회령(會寧)을 떠나 신아산(新阿山)으로 향하였다.
각 토벌대는 일야(日夜) 열렬한 노력으로써 극력 폭도를 수색하였으나, 폭도는 은현 출몰이 극히 민첩하여 드디어 그 척영(隻影)도 보지 못하였으므로 환정소장(丸井少將)은 다시 용당(龍堂)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도하점(渡河點)에 병력을 증가하여 폭도가 도문강 좌안으로 탈출하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재 경성(鏡城) 삼원중좌(三原中佐)에게 전기 방면의 토벌 지휘를 시키기 위하여 7월 16일 회령으로 출발시켰다.
폭도는 그 후 우리 토벌대의 엄밀한 수색에 대하여 삼삼오오 변장을 하고 갑산(甲山)·삼수(三水) 방향으로 도피하여 재차 일대 활동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수순(數旬)에 걸친 주밀한 경계 수색 결과 폭도는 진퇴가 막혀 드디어 해산하여 무기를 버리고 대안으로 탈출한 듯하여, 그 후 수비대는 더욱 강안 경비를 엄하게 하여 내선(內線)의 보안 유지에 힘쓴 결과 심한 소요 없이 경과하였다. 이상 외 소충돌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무산(茂山)수비대 장교 이하 38명
4월 22일
농사동(農事洞)
약 100
사 40

명천수비대(明川守備隊)
9월 3일
명천(明川)
약 200
사 13

명천(明川)부근토벌대
9월 19일
칠반동(七班洞) 부근
약 50
사 3

무산헌병분견소(茂山憲兵分遣所)
12월23일
무산(茂山) 남방 약 50리 지점
약 100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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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명치 42,43,44년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제1장 명치 42년 [서기 1909년]에 있어서의 토벌
1. 폭도 개황
전년 6,7월 이래 적세는 크게 위축되었으나, 본년으로 들어와서도 아직 전혀 그것을 일소해 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의연 산간 벽읍(僻邑)으로 출몰하여 우리 토벌대의 이목을 피해 가며 약탈을 계속하였고, 또 입으로는 애국을 빙자하고 배일을 고취하여 시정(施政)을 방해하는 자 있었으나, 역시 그 흔적을 전혀 끊어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임진강 하간(河干) 지방 즉 황해 동남부 및 경기 서북부 일대, 소백산 지방 즉 강원도·충청북도 및 경상북도의 경계 부근, 그리고 섬진강 이서 지방 즉 전라북도
서남부 및 전라남도 일원에 있어서는 그 출몰이 빈번하였고, 그 집단 역시 1백 내지 수백을 헤아리는 자 있었으나, 그밖의 다른 지방은 거의 진정으로 돌아가 폭도의 세력은 이상 3지방에 국한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전년 7월 이후 본년 6월에 이르는 1개년 동안은 매달 충돌한 폭도의 총수 시종 3천 전후로서 적세는 거의 고정된 경황을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연월을 경과함에 따라 더욱더 교묘함을 극하였다. 또한 그들의 첩보 근무 및 경계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그 행동도 더욱더 민첩하여,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는 듯한 태도로 나올 때도 있어, 그 세력에 때로 소장(消長)이 있다 하여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니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이 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게 되었다.
따라서 42년 추계(秋季), 남한에 실시한 대토벌에는 40년 이래 효력이 미소하였던 대토벌 방식을 고쳐 교반적(攪拌的)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즉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일국지(一局地) 안에서 수색을 실행하여 전후좌우로 왕복을 계속하고, 또 기병적(奇兵的)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경비선 및 소수부대로써 연안 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을 농밀하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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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이 토벌 방법은 의외로 효과를 거두어 폭위를 떨치던 거괴(巨魁) 심남일(沈南一)·안계홍(安桂洪)·강무경(姜武京)·임창모(林昌模) 이하 20여 명을 포박 또는 사살하고 기타 8백 명을 포획하였다. 그러자 자수 투항하는 자도 뒤를 이어 동년 10월 말에는 폭도의 최대 소굴이었던 섬진강(蟾津江) 이서(以西)의 지구 전라남북도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토민 역시 일제히 우리 은위(恩威)에 굴복하여 그 후 거의 평정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하여 동년 12월에는 전국에 있어서의 충돌 폭도의 총수는 현저하게 줄어 실로 3백 명에 미달하게 되었다.
2. 경기도 및 황해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년 초 임진강 하간지방(河干地方)에 있던 폭도는 작년 말부터 점차 증가되는 추세를 나타내어, 적은 것은 수십 명, 많은 것은 2백 명 내외의 집단이 되어 양주(楊州)·포천(抱川)·영평(永平)·연천(漣川)·삭녕(朔寧)·금천(金川)·배천(白川)·연안(延安)을 연결하는 선내(線內) 및 해상 도서에 걸쳐 배회 출몰하면서 매번 토벌대의 예봉을 피하였다. 그들은 또한 과약(寡弱)한 호위병·헌병 등에 대하여 공세적 동작을 취하고, 또 악랄한 수단으로써 재화 강탈, 양민 납치 등 폭행을 극하여 그 지방의 민심은 흉흉했었다.
경기·황해·강원 지방에 걸쳐 가장 성망이 높고 또 오래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수괴 이은찬(李殷賛)은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부흥사면(富興寺面)의 유생(儒生)으로서 천성이 영리하고 또 재기(才氣)가 있어 언제나 정의를 표방하여 교묘하게 민심을 수람하였다.
때마침 본년 1월 한황(韓皇)의 국내 순행(巡幸)이 있자, 이은찬(李殷賛)은 일본인 관리가 황제를 기만하여 일본으로 납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목숨을 걸고 그 행차를 저지하겠다고 호언하였다. 그는 민의(民意)를 받아들여 양식·군자금 같은 것도 직접 세민(細民)에게 요구하지 않고 각 면·동장 등에게 통고하여 일반에게서 징수하게 하고, 구입품에 대한 대금 지불 등도 한번도 그 기일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또 군표와 유사한 증표(證票)를 발행하여, 그것으로 물자와 바꾸어 후일 반드시 통화와 교환하는 등 극력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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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에 부심하였기 때문에 완미한 농민들은 그것을 환대하여 토벌대에게 그들의 행동을 밝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보초가 되어 폭도 소재지의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의 행동을 통고하는 등 음으로 다대한 편의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이은찬(李殷賛)과 행동을 같이 하였던 윤인순(尹仁淳) 및 정용대(鄭容大)는 그 성행(性行)이 아주 달라 언제나 화적적(火賊的) 만행을 자행하였으므로, 본년 3월 이은찬이 용산(龍山)에서 포박되자 민심은 곧 이배(離背)되어 폭도의 위세는 급속히 쇠하여졌다.
1월 중순 온정원(溫井院) 부근의 폭도는 수비대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여 연안(延安)·청단(靑丹)역 중간 지구에서 점차 남방 연안 도서로 도피하는 형적이 있었으므로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는 상등병 이하 헌병·순사·통역 등 18명으로 된 토벌대를 연평도(延坪島)로 파견하였다.
이 토벌대는 1월 17일 연평도에 상륙하여 연안 선박을 한 곳으로 집결하고 전망초(展望哨)를 배치하여 해상 교통을 경계하고 있었다.
19일 밤 폭도 약간은 2척의 배를 타고 증산도(甑山島) 방향에서 연평도 북부로 상륙하려고 하였다. 토벌대는 곧 이를 공격하여 그 수괴 이근수(李根守) 이하 46명을 사살하였으나 적선 1척은 증산도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북한산(北漢山)헌병파견소 및 고양헌병분견소 상등병 이하 6명은 적정 정찰을 위하여 2월 27일 양주군(楊州郡) 석적면(石積面) 행동리(杏洞里)에 도달하였을 때 그곳에서 폭도의 전망초를 발견하였다. 때마침 양주(楊州) 주재 헌병·경관 연합대 및 축산리(杻山里)헌병분견소원과 우연히 만나 합동 공격을 실시하였다.
이미 약 2백의 폭도는 석우리(石隅里) 북방 고지상에 산재하여 맹렬한 저항을 하였으나 교전 약 1시간에 그 수10을 사살하고 잔여를 궤주시켰다.
이 폭도의 수괴는 이은찬(李殷賛)으로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容大)가 인솔하는 1백여 명과 부근 주민을 합친 총수 3백으로 크게 기하는 바 있었으나, 토벌대에 의하여 붕괴되어 부하를 해산하고 재거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3월 11일 이은찬(李殷賛)은 용산 정거장에서 동지 경찰관에게 포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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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한 외에 양주(楊州) 부근에는 수괴 강기차(姜基車) 일군이 있고, 파주(坡州)·교하(交河) 지방에는 정용대(鄭容大)의 일군이 마전(麻田)·장단(長湍) 및 황해도 지방에는 연기우(延起羽)의 일군이 있어 모두들 부하 20~30명을 거느리고, 또 탁영대(濯纓臺)·온정원(溫井院) 지방에는 50~60명의 부하를 거느린 이진룡(李鎭龍) 일파가 있어 모두들 교묘하게 토벌망을 피하여 출몰 약탈을 일삼아 양민을 도탄에서 헤매게 하였으나 연말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평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 밖에 1개년 동안 소충돌한 사건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고양(高陽)헌병분견소
1월 31일
고양(高陽) 동방 20리
12
사 1

포천·영평(抱川永平)헌병 분견소
2월 5일
포천(抱川) 부근
약 170
사 3

마전(麻田)헌병분견소
7일
마전(麻田) 북방 30리
2
사 2

적성(積城)헌병분견소
3월 9일
적성(積城) 남방 약 30리
약 80
사 5

마석우리(磨石隅里)헌병분견소
11일
양주(楊州) 부근
약 20
사 2

적성(積城)헌병분견소
12일
적성(積城) 동남 화산리(華山里)
약 10
사 3

구화장(九化場)헌병분견소
13일
구화장(九化場) 서북 약 20리
약 50
사 3

삭녕수비대(朔 寧守備隊)
17일
양주(楊州) 부근 40리
16
사 3
수괴 윤인순(尹仁淳)을 사살
적성(積城)헌병분견소
20일
파평산(坡平山) 북단
11
사 4

문산(汶山)헌병분견소
24일
웅담리(熊潭里)
7
사 4

삭령(朔寧)헌병분견소
25일
삭녕(朔寧) 동북 약 30리
약 30
사 6

문산(汶山)헌병분견소
4월 5일
문산(汶山) 동방 30리 파평산(坡平山)
약 40
사 5

포천(抱川)헌병분견소
20일
포천(抱川) 동북 20리반
15
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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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抱川)수비대
5월 11일
포천(抱川) 서방 20리반
약 30
사 2

삭녕(朔寧)수비대
6월 9일
삭녕(朔寧) 서방 약 50리
약 15
사 1
수괴 하 상태(河相泰) 를 생포 호송중 혀를 깨물어 자살하다
고안(高安)헌병분견소
8월 6일
퇴계원(退溪院) 동방 10리
19
사 1
양합리(兩合里)헌병분견소
21일
양합리(兩合里) 동방 20리
32
사 3
마석우리(磨石隅里)헌병 분견소
9월 18일
마석우리(磨石隅里) 동남 약 50리
26
사 2

양주(楊州)헌병분견소
11월11일
축산리(杻山里) 남방 10리
13
사 1

고안(高安)헌병분견소
12월18일
고안(高安) 서북 20리
15
사 4

마전(麻田)헌병분견소
23일
구화장(九化場) 북방 약 10리
5
사상 3

개성경찰서(開城警察署)
28일
개성(開城) 대흥사(大興寺)
19
사상 2

[황해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태탄(苔灘)헌병분견소
1월 14일
태탄(苔灘) 부근
37
사 3

평산(平山)·온정리(溫井里) 부근 토벌대
18일
19일
평산(平山) 및 온정원(溫井院) 부근
약 80
사 15

곡산(谷山)헌병분견소
22일
곡산 동방 약 40리
9
사 2

온정원(溫井院)헌병분견소
2월 13일
온정원(溫井院) 서방 약 10리
5
사 2

황주수비대(黃州守備隊)
16일
온정원(溫井院) 서남 20리
약 30
사 7

백천동(白川洞)헌병분견소
17일
백천동(白川洞) 북방 30리 반
약 40
사 3

곡산(谷山)헌병분견소
3월 28일
곡산(谷山) 동방 약 70리
약 35
사 5

- 796 -
곡산헌병분견소
7월 31일
곡산(谷山) 북방 약 30리
7
사 3

탁영대(濯纓臺)헌병분견소
8월 17일
탁영대(濯纓臺) 서북방 20리
약 30
사 1

배천(白川)헌병분견소
12월23일
배천(白川) 동방 10리
37
사상 3

3. 강원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도에 있는 폭도는 전년 그 주되는 수괴를 잃었기 때문에 거의 질식상태가 되어 대개는 정업에 종사하고, 오직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초적야도(草賊野盜)의 무리와 화기(火器)를 들고 소재 양민을 괴롭히는 자 약간 있었으나 그 행동에 대하여 특기할 것은 없고 대개 다음 표와 같다.
[강원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안흥(安興)헌병분견소
1월 20일
안흥 동남 약 120리
약 50
사 8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
2월 5일
금성(金城) 동방 약 120리
15
사 4

금성수비대
19일
금성 동방 약 40리
약 40
사 6

정선(旌善)헌병분견소
3월 7일
정선 동남 약 70리
27
사 3

인제수비대(麟蹄守備隊)
4월 5일
인제(麟蹄) 서북 약 110리
약 20
사 5

회양(淮陽)헌병분견소
22일
회양 서남 약 40리
약 50
사 5

북창(北倉)헌병분견소
22일
북창(北倉) 서북 약 60리 반
37
사 4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
23일
영평(永平) 동방 약 30리
약 40
사 5

정선(旌善)·이림리(泥林里) 헌병분견소
7월 2일
정선 동방 약 90리
15
사 6

진부(珍富)헌병분견소
8월 11일
진부 서남 약 60리
약 40
사 6

평해(平海)헌병분견소
12월21일
평해 서남 30리
약 10
사상 7

평강(平康)헌병분견소
30일
평강 동북 약 60리
12
사 3

- 797 -
4. 충청남·북 양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도의 폭도도 강원도 방면과 같아 대개 진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원 진위대(鎭衛隊) 상등병으로서 한봉서(韓鳳瑞)라는 자는 다소 기략(機略)이 있는 자로서 부하 20~30명을 거느리고 30년식 보기병총(步騎兵銃)과 탄약 약간을 가지고 일찌기 청안군(淸安郡) 세교(細橋)에서 우편물을 탈취하여 1만원을 얻어 부락민에게 산포하여 신용을 얻은 다음 우편물 약탈과 재산가의 습격을 일삼아 왔으나, 교묘하게 토벌망을 벗어나 근근 여명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연말경에 경상북도 북부지방으로 침입했다. 기타는 다음 표와 같다.
[충청남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태안(泰安)헌병분견소
1월 16일
태안(泰安) 서방10리 반
5
사 3

연산(連山)헌병분견소
1월 31일
연산(連山) 남방 30리
약 10
사상 6

보은(報恩)헌병분견소
2월 27일
보은(報恩)
약 10
사 1

단양(丹陽)순사주재소
3월 13일
단양(丹陽)
약 40
사상 3

단양(丹陽)헌병분견소
3월 15일
단양(丹陽) 남방 약 60리
약 50
사 5

음성(陰城)헌병분견소
4월 12일
음성(陰城) 동북 약3 0리
약 20
사 4

청풍(淸風)헌병분견소
4월 24일
청풍(淸風) 동남 약30리 반
8
사 4

남포(藍浦)헌병분견소
4월 29일
남포(藍浦) 동남 약 40리
약 20
사 5

당진(唐津)순사주재소
5월 15일
당진(唐津)
약 20
사상 5

청양(靑陽)헌병분견소
5월 17일
청양(靑陽) 동북 약 10리 반
약 20
사 5

청풍(淸風)헌병분견소
5월 25일
청풍(淸風)
약 100
사 6

보은(報恩)헌병분견소
7월 5일
보은(報恩) 동북 약 40리
11
사 5

- 798 -
5. 경상남북 양도에 있어서의 토벌
본도의 폭도도 그 강대한 집단은 이미 전년에 토벌되어, 이제는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폭도는 그 종적을 감추고 재물의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초적(草賊)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행동이 극히 악랄하여 양민을 괴롭히고 교통을 저해시키고 물자의 집산을 방해하여 농상업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주었다. 그 개황은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순흥(順興)헌병분견소
3월 7일
순흥 동방 약 40리
약 50
사 6

내성(乃城)헌병분견소
9일
순흥 동북 약 40리
약 40
사 3

순흥(順興)·영천(榮川)헌병분견소
24일
순흥 동북 약 40리
15
사 2

순흥·영천헌병분견소
25일
영월(寧越)
약 50
사 8

순흥·영천헌병분견소
27일
순흥 북방 약 40리
약 100
사 11

내성(乃城)·영천(榮川)헌병분견소
4월 16일
영월(寧越)
5
사 4

안동(安東)헌병분견소
20일
순흥 동북 20리 반
15
사 4

안동헌병분견소
21일
순흥 동북 20리 반
약 100
사 15

안동헌병분견소
21일
순흥 동북 60리
약 50
사 5

안동헌병분견소
22일
순흥(順興) 동북 80리
약 50
사 4

안동헌병분견소
22일
순흥(順興) 서북 80리
25
사 4

재산수비대(才山守備隊)
5월 10일
재산(才山) 동북 약 20리
약 50
사상 27

재산수비대
18일
재산(才山) 북방 약 40리
약 50
사 5

영천(榮川)헌병분견소
6월 2일
봉화(奉化) 북방 80리
약 80
사 6

순흥(順興)헌병 분견소
7일
순흥(順興) 동북 30리 반
약 60
사 3

- 799 -
영천(榮川)헌병분견소
7일
순흥(順興) 동남 30리 반
약 120
사 8

봉화수비대(奉化守備隊)
9일
봉화(奉化)
약 130
사 17

내성(乃城)헌병분견소
18일
내성(乃城) 동북 약 40리 반
약 40
사 5

영양(英陽)헌병분견소
8월 11일
영양(英陽) 동북 약30리
약 80
사 6

영천수비대(榮川守備隊)
11월18일
영천(榮川)
7
사 7

청송(靑松)헌병분견대
12월18일
청송(靑松) 남방 80리
약 10
사 4

영해(寧海)헌병분견대
23일
영해(寧海) 서방 50리
14
사 2

[경상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장소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하동(河東)헌병분견소
1월 19일
하동(河東) 동북 30리
약 20
사 2

안의(安義)헌병분견소
2월 11일
안의(安義) 서방 약 30리
약 50
사 3

합천(陜川)헌병분견소
3월 13일
합천(陜川) 서남방 약 20리 반
약 50
사 4

합천헌병분견소
14일
합천(陜川) 서방 약 20리 반
약 30
사 6

거창(居昌)수비대
4월 13일
웅양(熊陽) 동방 약 20리 반
약 10
사 3

거창수비대
25일
거창(居昌) 서남 약 40리
24
사 9

함양(咸陽)수비대
5월 8일
장계(長溪) 동북 약 20리
약 130
사 13
수괴 박춘실(朴春實) 생포
의령(宜寧)수비대
8월 7일
의령(宜寧) 동북 약 10리
약 10
사 9
- 800 -
6. 전라남북 양도에 있어서의 토벌
전라남북 양도는 전년부터 계속 소란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남도에서 더욱 심하였다. 지금 그 주된 폭도의 행동을 약술하면 가장 횡포를 극하였던 수괴 전해산(全海山)은 영광군(靈光郡) 불갑산(佛甲山) 부근을 근거로 영광·함평·장성·고창 및 무장(茂長) 각 지방을 횡행하였는데, 토벌대가 출동하면 곧 부하를 해산하고 북도로 도피하였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남하하는 것이 상투수단이었다.
그러나 6월 중순 불갑산(佛甲山) 부근에서 수비대에게 대타격을 받아 그 태반이 궤멸된 이후로는 일시 세력이 쇠하여졌다.
심남일(沈南一)은 1월 이후 주간에는 산중에 은신하였다가 야간에만 행동을 하여 일시 그 종적을 감추었었으나, 4월 상순부터 2백 50명의 부하를 규합하여 남평(南平)·영암(靈岩) 및 보성(寶城) 등 각군에 걸쳐 출몰하였다.
또 전기 2명과 백중한 세력이 있는 조경환(曺京煥)과 박민홍(朴民洪)은 다같이 나주(羅州)·함평(咸平) 부근을 배회하였으나 조경환(曺京煥)은 1월 중순 운수동(云水洞)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되고, 기타 강무경(姜武京)·안계홍(安桂洪) 및 임창모(林昌模)는 영암(靈岩)·장흥(長興)·보성(寶城) 및 복내장(福內場) 지방에 웅거하고, 이학사(李學士)와 정성현(鄭聖鉉)은 임실(任實)·순창(淳昌)·남원(南原) 지방에서 활동하고, 김경삼(金京三)·최사영(崔士永)은 태인(泰仁)·임실(任責)·장수(長水) 일대의 지방에서, 이원오(李元五)·문태서(文太西)는 전주 북서부 익산(益山)·함열(咸悅)·임피(臨陂) 및 김제(金堤) 지방에서, 양윤숙(楊允淑)·신보현(申補玄)은 정읍(井邑)·장성(長城)·순창(淳昌) 지방에, 그리고 고부(古阜) 부근에는 박춘화(朴春化)·이성화(李成化)가 있어 수백 내지 수10의 부하를 이끌고 전라 양도 각지에 출몰하였다.
그리고 이상 여러 폭도 중 강대한 자는 백주에 횡행하며 약탈·살인·방화 등 모든 횡포를 자행하였다.
오직 심남일(沈南一)·강무경(姜武京)·안계홍(安桂洪)·임창모(林昌模) 등은 다소 그 양상이 달라 엄하게 부하를 다루어 만행을 금하고 민심을 수람하는
- 801 -
데 힘써 그 세력을 지속시키고, 나아가서는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을 실패시켜 열국의 간섭을 빚어내어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고 하였다.
전라도의 토민은 처음부터 시국에 어둡고 오직 임진란의 옛 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 그들은 최근의 무력을 모를 뿐 아니라 본도의 폭도가 아직 창궐하기 전인 40년 가을에 본도 서부 지방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임시 파견 기병대가 그 경비 구역이 광대함에 비하여 병력이 적어 동분서주 극력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소기의 토벌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도리어 그들에게 경모(輕侮)를 당하고 있던 중, 본년 5월 교대 귀환 준비 등으로 토벌 행동이 여의치 못한 틈을 타 적세를 강대하게 만든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본년 6월에 새로 복무한 임시 한국 파견대는 점차 폭도의 정체를 알게 되어, 신예(新銳)의 의기로써 토벌 수색에 노력하여 누차 폭도의 대집단을 격파하였으나, 의연 소수의 집단으로 나뉘어 은현(隱現) 출몰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도변소장(渡邊少將)은 일대 규모의 토벌을 계획하여, 9월 1일부터 약 2개월에 걸쳐 토벌 행동을 실시하여 거의 전도의 폭도를 일소하여 버릴 수 있었다. 이하 본도에서의 토벌 행동의 주된 것을 약술하겠다.
5월 초순 전라북도 문성(文城) 부근을 폭도 수백이 횡행한다는 보고를 얻은 함양 수비대장 조사대위(鳥飼大尉)는 부하 30명을 이끌고 5월 6일 장계(長溪)에 도착, 특무조장(特務曹長) 이하 12명을 무풍장(茂豊場)·무주(茂朱) 이북 지구에서 용담(龍潭) 방향으로 파견하고, 또 상등병 이하 5명으로 된 3패의 척후에게 그 중간 지구를 수색시키면서 장계(長溪)에서 서로 만나도록 출발시켰다.
8일 오후 제3 척후는 문성(文城) 동북 약 20리 산중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있는 수백의 폭도를 공격하여 그 13을 사살하고 또 다른 척후는 동지 서북 산중에서 수괴 박춘실(朴春實)을 생포하고 기타 부대는 아무 소득없이 9일 장계(長溪)로 귀환하였다.
5월 12일 전라남도 능주(綾州)수비대에서 남방 오산(梧山) 방면으로 파견한 상등병 이하 4명은 능주(綾州) 남방 약 50리 지점에 있는 웅치(熊峙)에서
- 802 -
아연 심남일(沈南一)이 인솔하는 약 1백 50의 폭도와 조우, 3면에서 일제 사격을 하여, 선행하던 한 병졸은 몸에 수탄을 맞고 즉사, 다른 3명은 도로 서측 고지에 의거 교전 4시간 만에 그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탄약이 다하여 할 수 없이 이양장(梨陽場)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 증원대를 얻어 폭도를 수색하였으나 헛일이었다.
6월 중순 수괴 전해산(全海山)이 인솔하는 폭도가 나산(羅山) 북방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 나주 수비대장 중야대위(中野大尉)는 길촌중위(吉村中尉)·고상소위(高桑少尉)에게 각 하사 이하 30명을 인솔시켜 그 지방의 토벌을 명하였다.
양소대는 6월 17일 출발, 불갑산(佛甲山)을 목표로 고상소대(高桑小隊)는 그 북방지구를, 길촌소대(吉村小隊)는 그 남방지구를 수색하였으나 소득없이 길촌소대는 19일 나산(羅山)으로 귀착하고, 고상소대는 동일 용천사(龍泉寺)에 도착하였다. 그때 동지 서북 10리 거리에 있는 산중에 폭도 약 1백 30이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얻어, 오후 5시 그를 공격하여 거의 궤멸상태에 빠뜨렸으며, 영광(靈光) 수비대장 촌뢰중위(村瀨中尉)도 역시 하사 이하 22명을 인솔하고 폭도의 배후에서 공격에 참가하여 수괴 전해산(全海山)을 놓치기는 하였으나 유기 시체가 73이나 되었다.
7월 9일 야반 해남 수비대장 길원대위(吉原大尉)는 해남 남방 약 30리 지점에 있는 대둔사(大芚寺)에 폭도 약 1백 50이 숙영하고 있음을 알고 즉시 하사 이하 30명, 헌병·순사 7명을 인솔하고 출발, 오전 4시 대둔사에 도착, 사원을 포위 공격하여 그 24를 사살하고 10명을 생포하고 잔여는 궤주시켰다.
8월 하순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 도변소장(渡邊少將)은 전라 양도에 대하여 임시파견대(보병 2연대) 및 제6사단 공병 1소대로써 토벌대로 하고, 헌병·경찰관은 적의(適宜) 이에 협력하기로 하고, 9월 1일부터 약 40일간의 예정으로써 토벌 행동을 개시하였다.
토벌대는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 경비부대로써 포위선을 형성하여 소요 지점을 수비시키고, 행동부대로써 포위선 내의 토벌·수색 및
- 803 -
검거에 종사시켰다.
연안의 경비는 해군에서 한국 서해안 경비를 위하여 특별히 파견된 제11정대(艇隊) 및 전라남북 양도 지방 경무관에 배속시킨 석유 발동기 기정 10척 및 수비대에 배속시킨 소증기선 및 매환(梅丸)으로 하였다.
토벌지구는 하동(河東)·구례(求禮)·갈담(葛潭)·태인(泰仁)·부안(扶安)을 연결하는 선의 서남방 전라 양도로 하고, 이 구역을 다시 3기(三期)로 구분하여 상기의 선에서 보성(寶城)·능주(綾州)·영광(靈光)을 연결하는 선에 이르는 지역을 제1기로 하고, 그 서남 해안선에 이르는 지역을 제2기로 하고, 연안 도서를 제3기로 하였다.
파견 보병 제1·제2연대는 8월 하순 각기 준비를 갖추고 포위선상에 집중하여 9월 1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즉 제1연대는 오수역(獒樹驛)·건천(乾天)·나주(羅州) 및 영산강(榮山江)을 연접하는 선에서 서북 지구로, 제2연대는 그 동남 지구에서 각 대대별로 분담 지구를 정하고, 각 대대는 다시 각 중대별로 분담 지구를 배당하여 토벌 검거에 종사하였다.
9월 하순 장차 제2기 지구를 경과하려고 할 무렵까지도 폭도의 수괴는 아직 우리 손에 잡히지 않아 도망쳐 버린 자가 적지 않다고 판단한 도변소장(渡邊少將)은 예정을 변경하여 제3기 토벌 지구에 대하여는 그것을 소수 부대에게, 맡기고 다시 제1·2기 토벌 지구에 대하여 엄밀한 수색 검거를 반복하기로 결심하고, 9월 25일 각 연대장·대대장을 영산포(榮山浦)로 소집하여 제2차 토벌 계획을 책정하였다.
제2차 토벌 행동은 제2기 종료 후 곧 개시하고 제1·제2기 지구에 있어서는 10월 25일까지 연안 제도서에 있어서는 10월 10일까지 종료할 예정으로 보병 제1연대 제3대대는 제2기 토벌 종료 후 육로로 그 수비지 경상북도 안동으로 귀환하면서 무안(務安)·나산(羅山)·사창(社倉)·만세(萬世)·정읍(井邑)·태인(泰仁)을 연접하는 선 이서(以西) 지구의 토벌을 하기로 하였다.
보병 제1연대 제2대대는 부안(扶安)·태인(泰仁)·갈담(葛潭)·만세(萬世)·영광(靈光)을 연결한 권내를, 동연대 제3·제4중대는 서연안 도서를 토벌하였다.
- 804 -
보병 제2연대장은 그 대(隊) 및 보병 제1연대 제1·제2중대를 지휘하여 전항에 속하지 않는 제1·제2기 지구의 토벌을 반복하여 예정한 행동이 끝나면 따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평상시의 수비 근무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제2차 토벌에 있어서는 다시 수색 검거 방법을 엄밀하게 실시하였다. 즉 각 중대는 장교·준사관(準士官) 또는 하사를 장으로 한 수구대(數區隊)로 구분하여 경비선 내에 전후 좌우 각 방면으로 행동하고, 촌락의 수색 검거에 있어서는 먼저 그 촌락의 외위(外圍)를 포위하 듯 경계병을 배치하고, 면동장(面洞長)을 초치하여 미리 조사하여 둔 남자 명부 또는 민적(民籍) 등에 의하여 남자를 대조점호(對照點呼)하여 의심스러운 자는 체포하고 또는 면·동장 이하 각인(各人)을 곳을 달리하여 심문, 그 결과에 의하여 폭도를 포박하는 등의 방법을 취하였다.
또 수색은 극히 엄밀하게 실행하여 준령 심곡에 이르기까지 척후 혹은 부대를 파견하고 특히 신중한 고려를 하여 주간에 수색한 동일 촌락을 야간에 돌연 재수색을 하여 폭도가 우리 행동을 엿보지 못하게 하도록 불규칙한 행동을 실시하였다.
기타 변장대(變裝隊)의 기공(奇功), 밀정의 공적이 극히 커서 그 얻은 정황에 따라 그 후 폭도의 귀순 등에 공헌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전라 양도에 있는 지방 관헌은 극히 열성적인 원조를 하여 도로의 개수, 물자의 조달, 숙영지 준비 등 군대 행동에 다대한 편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관찰사 이하 각 지방을 순시하여 군수 이하를 독려하고, 또 친히 인민을 설유하여 폭도 진정에 극력 협조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괴 심남일(沈南一)·안계홍(安桂洪)·임창모(林昌模)·강무경(姜武京)·김경구(金京久) 이하 2천여 명을 사상 또는 포획하고 혹은 자수 투항시켜 적세는 크게 쇠약하여져, 그 후 자수자가 속출하여 다년 소란을 극하였던 전라남북 양도는 비로소 깨끗하게 청소되어 인민은 마음 놓고 산업 발달에 힘쓰게 되었다.
기타 신 화폐의 유통을 원만하게 하고 도로 교량의 수리를 하는 등 지방
- 805 -
발전에 호영향을 주었다.
[전라북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
1월 16일
오수역(獒樹驛) 북방 약 20리
약 30
사 7

임실(任實)헌병분견대
29일
임실 동방 약 30리
약 20
사 3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
3월 3일
곡성 동남 20리
약 50
사 2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3일
학구정(鶴口亭) 부근
약 30
사 8

무주(茂朱)헌병분견대
10일
안의(安義) 부근
38
사 2

태인(泰仁)헌병분견소
15일
태인 남방 약 30리
약 30
사 4

고부(古阜)수비대
19일
장성(長城) 북방 약 30리
약 70
사 12

전주수비대(全州守備隊)
22일
태인(泰仁) 동남 약 40리
약 30
사 13

천원(川原)헌병분견소
25일
고창(高敞) 동북 10리
약 150
사 7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
28일
석실장(石實場) 부근
약 20
사 13

구례수비대(求禮守備隊)
4월 2일
순천(順天) 서북 약10리 반
약 100
사 43
포 2문 노획
정읍수비대(井邑守備隊)
5일
사창(社倉) 동북 10리
약 100
사 30

전주(全州)·익산(益山) 양 헌병분견소
11일
전주(全州) 동북 약 50리
약 30
사 3

순창수비대(淳昌守備隊)
11일
순창(淳昌) 동북 약 30리
15
사 3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
14일
동계리(桐溪里) 서남 약 30리
약 40
사 6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15일
고부(古阜) 동북 약20리 반
약 20
사 7

고부수비대
19일
창포(菖蒲) 동북 약 20리
약 100
사 8

전주수비대(全州守備隊)
20일
오수역(獒樹驛) 동북 40리
5
사상 3

- 806 -
군산(群山) 정지 척후
5월 1일
태인(泰仁) 서북 약 20리
70
사 10

남원수비대(南原守備隊)
5일
갈담(葛潭) 북방 약 40리
약 20
사 8

군산(群山)헌병분견소
9일
고부(古阜) 동북 20리
약 60
사 4

태인(泰仁)헌병분견소
19일
태인(泰仁) 서방 약 20리
약 20
사상 6

월성리(月城里)헌병파견소
29일
월성(月城) 서방 약 20리
약 20
사 5

고창(高敞)헌병분견소
6월 1일
고창(高敞) 서남 약 20리
약 70
사 8

고부수비대(古阜守備隊)
7일
고부(古阜) 부근
약 50
사 21

태인(泰仁)헌병분견소
19일
태인(泰仁) 동방 약40리 반
약 20
사 6

김제(金堤)헌병분견소
11월 1일
김제(金堤) 서남방 약 10리 반
12
사상 6

피로리(避老里)헌병파견소
12월11일
피로리(避老里) 남방 40리
약 10
사 3

[전라남도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영암수비대(靈岩守備隊)
1월 17일
남창(南倉) 부근
약 20
사 2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19일

고막원(古幕院) 동남 10리
15
사 3

영광수비대(靈光守備隊)
23일
영광(靈光) 동방 40리 반
약 60
사 9

곡성수비대(谷城守備隊)
2월 2일
곡성(谷城) 남방 약 50리 반
12
사 5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6일
영산포(榮山浦) 서남 약 20리
약 100
사 11

무장(茂長)헌병분견소
8일
무장(茂長) 부근
약 50
사 11

영암수비대(靈岩守備隊)
10일
영암 남방 약 반 리
15
사 5

영산포(榮山浦)헌병분대
13일
흥양(興陽) 부근
15
사 3

- 807 -
광양(光陽)헌병분견소
21일

광양(光陽) 동남 약 20리 반
약 20
사 9

영광수비대(靈光守備隊)
24일
영광 동남 20리 반
약 10
사 2

나주경찰서(羅州警察署)
26일
남평(南平) 부근
약 250
사 8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26일
남평(南平) 부근
약 250
사 22
수괴 박 민홍(朴民洪) 사살
영암수비대(靈岩守備隊)
27일
영암 동북 약 30리
약 40
사 20
법성포(法聖浦)헌병분견소
27일
법성포(法聖浦) 동북 약 20리 반
약 130
사 5
월평수비대(月坪守備隊)
3월 4일
월평(月坪) 동방 20리
약 10
사 4

영광수비대(靈光守備隊)
6일
영광 서방 10리 반
약 60
사 15

영광수비대
6일
영광 서방 10리 반
약 60
사 17

벌교(筏橋)헌병분견소
7일
벌교(筏橋) 남방 약 20리
약 50
사 2

흥양수비대(興陽守備隊)
7일
흥양(興陽) 북방 50리
약 50
사 5

영광(靈光)헌병분견소
8일
영광(靈光) 서남 약 20리
약 50
사 5

광주(光州)헌병분견소
9일
광주(光州) 북방 약 30리
약 50
사 1

영광(靈光)헌병분견소
11일
영광(靈光) 동북 20리
약 80
사 8

동복(同福)헌병분견소
11일
동복(同福) 서방 약 20리
약 20
사 2

광주(光州)수비대
13일
광주(光州) 북방 20리
약 50
사 5

남평(南平)헌병분견소
13일
남평(南平) 서북 약 10리
약 60
사 5

옥과(玉果)헌병분견소
14일
동복(同福) 부근
75
사 10

광천점(廣川店)헌병분견소
20일
광천(廣川) 남방 20리
약 50
사 3

영광(靈光) 부근 수색대
20일
영광(靈光) 동방 약 20리 반
약 50
사 5

곡성수비대(谷城守備隊)
20일
곡성(谷城) 동남 약 40리
약 40
사 4

- 808 -
쌍암장(双岩場) 정지척후
24일
순천(順天) 서북 약 10리 반
약 100
사 42

창평(昌平)헌병분견소
28일
창평(昌平) 부근
약 20
사 3

월평리수비대(月坪里守備隊)
29일
함평(咸平) 부근
약 50
사 6

영광(靈光)헌병분견소
4월 5일
전라남도 영광(靈光) 북방 10리 반
약 100
사상 2

해남수비대(海南守備隊)
6일
우수영(右水營) 동남 약 30리
17
사 17
장성(長城)헌병분견소
6일
장성(長城) 서북 약30리
약 40
사 6
고막원(古幕院)헌병분견소
18일
고막원(古幕院) 남방 약 10리
약 80
사 7

장성(長城)헌병분견소
19일
장성(長城) 북방 약 10리
약 50
사 7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20일
쌍암장(双岩場)
약 100
사 10

영광(靈光)헌병분견소
20일
영광(靈光) 부근
약 40
사 7

강진(康津)헌병분견소
29일
월정장(月亭場) 북방 30리
약 150
사 5

능주(綾州)헌병분견소
5월 1일
능주(綾州) 서방 약10리
15
사상 4

병영(兵營)헌병분견소
12일
병영(兵營) 동북 30리
약 150
사상17

담양(潭陽)헌병분견소
17일
담양(潭陽) 동남 약20리
35
사 23

광주(光州)헌병토벌대
19일
광주(光州) 서방 약20리
약 50
사 15

사가점(四街店)헌병파견소
20일
무장(茂長) 부근
약 40
사 5

신평(新坪)헌병파견소
20일
장성(長城) 서북 약30리
약 40
사 5

사창(社倉)헌병파견소
20일
사창 북방 약 10리 반
약 60
사 6

완도(莞島)수비대
20일
완도(莞島) 북단 부근
약 80
사 8

당진(唐津)헌병분견소
22일
보암장(寶岩場) 서남 10리 반
약 130
사 15

사가점(四街店)헌병파견소
25일
사가점(四街店) 동북 약 10리
약 80
사 6

- 809 -
장흥(長興)헌병분견소
6월 1일
장흥(長興) 남방 30리
약 70
사 2

동창(東倉)헌병분견소
1일
동창(東倉) 서남 약 10리 반
약 50
사 5

반남장(潘南場)헌병파견소
11일
반남장 (潘南場) 동남 10리
약 60
사 7

사창(社倉)헌병파견소
15일
사창(社倉) 동남 20리
약 70
사 8

광천점(廣川店)헌병분견소
15일
곡성(谷城)
약 80
사 15
광천점헌병분견소
20일
광천점(廣川店) 동남 10리 반
약 70
사 12
신평리(新坪里)헌병파견소
24일
흥덕(興德) 부근
약 60
사 6

유둔장(油屯場)헌병파견소
25일
유둔장(油屯場) 서남 약 10리
약 60
사 8

독천장(犢川場)헌병파견소
27일
독천(犢川) 남방 20리
약 80
사 5

영광(靈光)헌병분견소
1일
영광(靈光) 서북 20리
약 40
사 5

쌍암장(雙岩場)헌병파견소
1일
쌍암장(双岩場) 서남 10리 반
약 70
사 26

사창(社倉)헌병분견소
2일
사창(社倉) 서방 약 10리
약 60
사 5

삼거리(三巨里)헌병파견소
4일
나주(羅州) 서북방 약 50리
약 50
사 5

흥양수비대(興陽守備隊)
8일
흥양(興陽) 동방 약 30리
약 120
사 20

해남수비대(海南守備隊)
9일
해남(海南) 남방 대둔사(大芚寺)
약 70
사 24

원촌(院村)헌병분견소
18일
원촌(院村) 북방 약 20리
35
사 5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20일
동복(同福) 남방 10리 반
약 200
사상 40

흥양수비대(興陽守備隊)
25일
흥양(興陽) 서남 거금도(巨金島) 부근
약 70
사 6

석보장(石寶場)헌병파견소
25일
석보장(石寶場) 부근
약 60
사 9

사가도(四街道)헌병파견소
26일
사가도(四街道) 남방 약 10리 반
약 30
사 7

- 810 -
장흥(長興)헌병분견소
8월 3일
월정장(月亭場) 동북 약 30리
약 30
사 5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4일
보성(寶城) 부근
약 70
사상29

보성수비대(寶城守備隊)
12일
보성(寶城) 서남 약 30리
12
사 5

무장(茂長)헌병분견소
26일
무장(茂長) 서북 약 20리
약 50
사 7

여수수비대(麗水守備隊)
9월 3일
여수(麗水) 북방 40리
12
사 8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3일
광주(光州) 동남 80리
5
사 4
나주수비대(羅州守備隊)
21일
조성원(鳥城院) 동방 10리
약 50
사 9

능주수비대(綾州守備隊)
24일
목포(木浦) 유남(柳南) 10리 반
5
사 5

임곡(任谷)헌병분견소
26일
나주(羅州) 동북 약 50리
약 80
사상25

무주수비대(茂朱守備隊)
26일
함평(咸平) 부근
8
사 8

서창(西倉)헌병파견소
26일
서창(西倉) 서남 약 10리 반
약 40
사 4

순천경찰서(順天警察署)
28일
순천(順天) 남방 30리반
약 30
사상14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10월 8일
여수(麗水) 부근
약 30
사 9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
13일
복내장(福內場) 북방 10리
8
사 6

비아장(飛鴉場)헌병파견소
11월 1일
비아장(飛鴉場) 서방 약 10리
약 30
사 5

순천수비대(順天守備隊)
17일
여수(麗水) 서북방 약 30리
15
사 5

7. 북부 지방에 있어서의 토벌
평안남북 양도에 있어서는 다소 초적(草賊)의 출몰이 있었으나 그 목적은 금전 약탈을 주로 하고 정치적 근거로 움직이는 자는 없어 대략 정온상태를 유지하였다.
함경남북도에 있어서는 평안도와의 경계 산지에서 약간 불온한 기색이 있었으나
- 811 -
전부 미연에 제압을 당하여 아무런 소요도 일으키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대안 노·청영내(露淸領內)에는 배일선인(排日鮮人)의 이주자(移住者)가 적지 않았다. 그 수괴 방덕형(方德亨)이란 자는 1월 상순 무산(茂山)·삼수(三水)부근에서 거사를 하려고 부하 약 50명을 인솔하고 간도(間島)에서 무산(茂山)으로 침입하였으나, 헌병에게 구축당한 후 청령(淸領)에서 청국병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일부는 1월 24일 두도구(頭道溝)헌병분견소원에게 체포되고, 기타는 노(露)·청(淸) 영내로 망명하였다.
작년 이래 노령(露領)에서 빈번하게 대언장어(大言壯語), 이주 선민(鮮民)에게 배일주의를 고취하고 있던 이범윤(李範允)·이범진(李範晋)기타 수괴도 그 기세가 날로 실추되고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의 무리도 그리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그들의 일파로서 전 한국 통감 공작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얼삔(哈爾賓)에서 살해한 안중근(安重根)이 있어 그것을 동기로 다소 준동하려는 징후가 있었으나 결국은 무사하게 경과하였다. 이제 북부 지방에서의 폭도 토벌 개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평안·함경 지방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돌 지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 요
성천(成川)헌병분견대
1월 14일
성천(成川) 남방 약 60리
5
사 3

강동(江東)헌병분견대
18일
강동(江東) 서방 약 60리
6
사 1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대
28일
장진(長津) 부근
24
사 9

약수동헌병분견대
29일
장진(長津) 부근
14
사 3

무산(茂山)헌병분견소
1월 31일
무산(茂山) 동남 60리
4
사 2

사창(社倉)헌병분견소
2월 8일
정평(定平) 부근
35
사 8

약수동(藥水洞)헌병분견소
3월 22일
정평(定平) 부근
13
사 7

삼등(三登)헌병분견소
4월 26일
삼등(三登) 서북 약 30리
30
사 6

- 812 -
고산(高山)헌병분견소
5월 6일
고산(高山) 서남 약 80리
70
사 5

은산(殷山)헌병분견소
5월 14일
은산(殷山) 서남 약 60리
5
사 1

오류동(五柳洞)헌병분견소
7월 15일
오류동(五柳洞) 부근
5
사 1

마전동(馬轉洞)헌병분견소
9월 1일
마전동(馬轉洞) 동남 약 20리
20
사 2

창평(倉坪)헌병분견소
18일
창평 남방 약 100리
17
사 1

안변(安邊)헌병분견소
27일
안변(安邊) 동남 약 30리
40
사 1

고산(高山)헌병분견소
10월 6일
고산(高山) 서방 40리
30
사 2

제2장 명치 43년 [서기 1910년]에 있어서의 토벌
1. 폭도 개황
전년 가을 말경부터 섬진강(蟾津江) 이서에 실시한 남한 대토벌에 의하여 전라남북 양도에 있는 폭도의 대소굴은 거의 소탕되었고, 기타 지방도 대략 정온상태로 들어갔으나, 오직 경상북도 소백산(小白山) 지방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해주군(海州郡) 지방에는 아직도 수명 내지 20~30명의 집단을 이룬 적(賊)이 때때로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아 민심은 아직도 편안치 못하였다.
그리고 소백산 지방은 전년 10월에 토벌을 실시하였으나 아직 평정(平定)되지 못하여, 본년 재차 그 지방에 소탕작전을 벌여 약간의 수괴를 생포하고, 또 관헌과 지방 주민 사이에 의사가 소통되었으므로 폭도들의 기세는 점차 쇠하여지게 되었다.
당년(當年) 새롭게 시장세(市場稅)소요사건이란 것이 있었다.
원래 조선인은 다년 탐관오리의 억압주구(抑壓誅求)를 당하여 온 결과 조세란 국가 유용의 경비로 쓰인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침 42년 4월에 공포(公布)된 지방비법(地方費法)에 의하여 동년 10월부터 각 지방청에서 시장(市場)에 대하여 시장세를 과하게 되어 재무감독국(財務監督局)
- 813 -
및 재무서(財務署)가 이의 징수를 개시하게 되었다. 그들 조선인은 이 납세로써 관인(官人)들이 사복(私腹)을 채우는 것이라 오신(誤信)하고 혹은 수금액 전부를 일본으로 송치한다는 유언(流言)에 선동되어 도처에서 시장세에 대한 불평이 만만하였는데, 그 반항적 태도는 평안북도에서 특히 심하였다.
즉 본년 1월 20일 안주(安州)에서 상인들이 시장세 납부에 응하지 않고 백 수십 명이 모여 재무서를 포위하고 투석하여 창호를 파괴하는 등 폭행을 감행하였다. 또 1월 29일에는 순천(順川)에서 5백여 명이 재무서를 습격하고 관아(官衙)에 방화하고 재무 주사·우편 취급소장 이하 일본인 8명을 살륙하는 사건이 있었다.
기타 평양(平壞)·선천(宣川)·박천(博川)·영변(寧邊)·덕천(德川)·개천(价川)·성천(成川)·숙천(肅川) 및 용암포(龍岩浦) 등 대시장은 전부가 불온한 형세를 보여 헌병·경찰관을 증파하고 일시 수비대를 파견하는 등 조처를 하여 폭발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본년 제국정부(帝國政府)는 한국의 정황을 참작하여 일한합병(日韓合倂)의 묘의(廟議)을 결하자 주차 군사령관은 병합 결행에 즈음하여 다소의 소요를 예기하고 6월 중순부터 지방 폭도 토벌을 실시하고, 또 수비대 배치를 변경하여 만일의 사태에 응하여 취하여야 할 처치에 관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8월 22일 병합조약은 무사히 조인을 끝내어 29일 그 조약을 공중에게 발표하였으나 조금도 민심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평온하게 경과하였다.
2. 경상북도에 있어서의 토벌
43년 초두에 있어서 소백산 부근의 폭도는 수차에 걸쳐 우리 토벌에 의하여 심하게 그 기세가 꺾이었으나, 아직도 최성천(崔聖天)·한명만(韓明萬)·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敬泰)·윤국범(尹國範)의 무리는 각기 부하 10 내지 20을 이끌고 우리 수비망을 벗어나 활약을 하였다. 본년 4월 최성천(崔聖天)·한명선(韓明善)의 2수괴를 체포하였으나, 그 나머지를 뿌리 뽑지 못하였으므로 그들 잔적(殘賊)을 체포할 목적으로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 814 -
걸쳐 임시 파견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의 전부와 헌병·경찰관의 일부로써 안동(安東)·예천(醴泉)·영춘(永春)·봉화(奉化)의 다각형 지역을 향하여 연합 토벌을 실시하였다.
그 방법은 대략 전년 전라남북도에서 실시한 토벌 요령에 준하여 수괴의 검거에 노력하였다.
그간 도장관(道長官) 및 경무부장은 관내를 순시하여 토벌의 본지(本旨)를 주민에게 알리고 군수 등을 독려한 결과 토벌대는 다대한 편의를 얻어 수괴 김상태(金相泰)·정경태(鄭敬泰)는 놓쳤으나, 윤국범(尹國範)·문성조(文成助)를 포획하고, 또 지방 주민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적도 소재의 밀고 및 자수자를 증가시키고, 또 적도의 잠복을 곤란하게 하여 그 피해를 크게 감소 시켜 장래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었다.
3. 황해도에 있어서의 토벌
황해도는 43년에 이르러서도 아직 폭도의 횡포가 적지 않았다. 물론 그 세력이 왕년 같이 크지는 못하였으나 수비대와 경무기관의 눈을 피하여 양민에게 해독을 끼치는 자가 있었다.
그 수괴의 주된 자로서는 이진용(李鎭龍)·김정안(金貞安) 및 한정만(韓貞滿)으로서 그 근거를 인적이 없는 심산에 두고 때때로 평지로 나와 흉포를 자행하였다.
이에 있어 주차군 사령관은 제2사단장에게 명하여 43년 11월 하순에서 다음해 4월 중순에 이르는 약 4개월 동안에 그 지방에 대하여 대토벌을 시행시켰다.
제2사단장은 보병 제29연대장에게 그 연대와 제65연대의 2연대에서 보병 7중대와 기병·공병 약간을 지휘시켜 개성(開城)·남천점(南川店) 이서, 서흥(瑞興)·재령(載寧)·해주(海州)·탁영대(濯纓臺)·연안(延安) 및 배천(白川)의 다각형내 지역으로 향하여 토벌을 실시하여 수괴는 잡지 못하였으나, 폭도 190명을 잡고 다수의 총기 잡품을 몰수하여 장래 다시 출몰할 폭도의 수를 감소시켜 지방 민심에 절대적인 호영향을 주게 되었다.
- 815 -
[명치 43년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황표]
토벌을 위하여 파견된 부대(병력)
충돌월일
충 돌 지 점
폭도 수
폭도의 손상
적요
지포헌병분견소(芝浦憲兵分遣所)
1월 18일
후평리(後坪里) 동방 20리
12
사 2

문산(汶山)헌병분견소
25일
문산(汶山) 남방 20리
12
사 1

김화수비대(金化守備隊)
28일
연천(漣川) 남방 30리
30
사 1

김화수비대
29일
영평(永平) 남방 20리
30
사 2
수괴 연기우(延起羽) 인솔
양주(楊州)헌병분견소
29일
양주(楊州) 서방 20리
13
사 1

헌병연합수색대(憲兵聯合搜索隊)
2월 26일
포천(抱川)
17
사 2

의정부(議政府)헌병분견소
5월 15일
의정부(議政府) 부근
15
사 1

신원(新院)헌병분견소
2월 1일
해주(海州) 부근
24
사 2

누산(漏山)헌병분견소
18일
평산(平山) 부근
27
사상 6

평산(平山)헌병분견소
4월 24일
평산(平山) 누천(漏川) 간
20
사상 2

금천(金川) 및 온정원(溫井院)헌병분견소
5월 7일
탁영대(濯纓臺) 동북 30리
20
사 2

해주수비대(海州守備隊)
6월 12일
해주(海州) 부근
43
사 2
수괴 한정만(韓貞滿) 인솔
덕우장대(德隅場垈)헌병 분견소
10월28일
덕우(德隅) 장대(場垈) 서방 약 10리
16
사 1

온정원(溫井院)헌병분견소
11월10일
온정원(溫井院) 동남 10리
20
사 1

울진(蔚珍)헌병분견소
1월 23일
울진(蔚珍) 부근
20
사 2

평강(平康)헌병분견소
24일
평강(平康) 부근
15
사 1

평강헌병분견소
4월 10일
고산역(高山驛) 남방 20리 반
39
사 1

- 816 -
토성(土城)헌병분견소
8월 10일
토성(土城) 동북 30리
13
사 1

청하(淸河)헌병분견소
1월 21일
청하(淸河)
12
사 3

풍기수비대(豊基守備隊)
2월 28일
풍기(豊基) 부근
40
사 4

재산수비대(才山守備隊)
3월 1일
일월산(日月山) 남록
11
사상 3

순흥수비대(順興守備隊)
6일
순흥(順興) 부근
21
사상 2

순흥수비대
6일
순흥(順興) 부근
25
사상 4

예천(禮泉)헌병분견소
6월 26일
예천(禮泉) 동방 40리
12
사 1

풍산역(豊山驛)헌병분견대
8월 27일
풍산역(豊山驛) 서방 약 30리
27
사 2

안동수비대(安東守備隊)
9월 29일
안동 서방 약 30리
10
사상 5

영양(英陽)헌병분견소
11월14일
영해 서북 약40리
10
사상 7

금산(錦山)헌병분견소
1월 10일
금산(錦山) 동방 20리
15
사 2

삼등(三登)헌병분견소
4월 9일
삼등(三登) 동방 약 30리
17
사 2

고원(高原)헌병분견소
8월 7일
양덕(陽德) 부근
20
사 1

북창(北倉)헌병분견소
9일
덕천 동남 약 110리
20
사상 3

삼등(三登)헌병분견소
28일
삼등 서북 약 30리
12
사 1

신계점(新溪店)헌병분견소
2월 21일
안변(安邊) 부근
20
사 3

무산(茂山) 및 보천보(普天堡)헌병분견소
3월 9일
허항령(虛項嶺) 동북 약 40리
30
사 2

원산(元山)수비대 장교 이하 22명
8월 27일
마전동(馬轉洞) 서남 약 50리
29
사상 3

제3장 명치 44년 [서기 1911년]에 있어서의 토벌
일한합병이 되어 국가 만세의 기초뿐 아니라 인심도 더욱 정온하여지고 민중이 순종함을 양지(諒知)하여 백반의 시정(施政)이 적의하게 시행되어, 13도의 창생은 천양무궁(天壤無窮)의 헤택을 입고 치평(治平)의 경사를 보게 되어,
- 817 -
이를 왕년에 있었던 정강(政綱)의 문란, 폭도 초적의 백주 횡행활보하던 때와 비하면 실로 격세의 감이 있었다.
그러나 적년(積年)의 악폐의 뿌리가 아직도 잔존되어 있는 것이 있었으니, 즉 황해도에 있는 폭도가 그것이다. 대저 황해도는 화적(火賊)의 소굴지로서 명치 40년말 경기도 삭녕 부근에 있던 적괴(賊魁) 허위(許蔿)·이인영(李寅榮)의 무리가 양으로는 창의(倡義)를 내세워 향리의 민심을 선동하자 인접한 금천(金川)·연안(廷安) 부근의 흉도들은 바람을 타고 약탈을 자행하므로 누차 토벌에 의하여 거의 정온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완미하고 우둔한 무리가 있어 전년 말에 해주(海州)·평산(平山) 부근을 소탕하였으나 본년으로 들어와서도 계속 출몰 약탈을 감행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자가 있었다.
특히 해주(海州)와 평산(平山) 지방에는 수괴 한정만(韓貞滿)과 김정안(金貞安)의 일당, 수안(遂安)·곡산(谷山) 지방에는 채응언(蔡應彦)이란 자 있어 같이 은현 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있어 군사령관은 제2사단장에게 명하여 일대 토벌을 실시하였다. 제2사단장은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에 이르는 약4순에 걸쳐 보병 제3여단장 중촌소장(中村少將)에게 보병 16중대, 기병 2중대 및 약 80명의 헌병·경찰관을 지휘시켜 소탕 구역을 2구역으로 나누어 흥수원(興水院)·율리(栗里)·대수구(大水口)·곡산(谷山)·시변리(市邊里)·금천(金川)·신막(新幕)에 걸치는 권내를 동부 지구로 하고, 그 서남 개성(開城)·금천(金川)·신막(新幕)·봉산(鳳山)·재령(載寧)·신천(信川)·태탄(苔灘)에 걸치는 권내를 서부 지구로 하여, 동부 지구에 있어서는 보병 5중대를 중요 지점에 배치하고 각중대는 그 고정 배치된 담임 지역내의 수색을 엄하게 하는 소탕 수단을 취하게 하였다.
서부 지구에 있어서는 다른 11중대를 우선 담당 지구 외곽 선상 요점에 병렬 배치하고, 각 중대마다 담임 수색 지대를 정하여 1일 내지 3일마다 전진하여 축차 수색망을 내선으로 수축시키면서 행동하되, 주요 지구의 수색은
- 818 -
수차례 이를 반복, 주야를 가리지 않고 수색 경계를 엄하게 하여 폭도의 탈출을 예방하면서 소탕 지구내로 압박하였다. 그 결과 폭도 2백 50명을 체포하였으나 수괴는 그만 잡지 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이것은 황해도 지방의 양반 유생 중 그 완명(頑冥)하기 짝이 없는 자가 있어 아직도 배일사상을 가지고 음으로 폭도를 비호한 형적이 있고, 또 일반 인민도 흉도의 악랄한 보복 수단을 겁내어 그 소재 등에 관하여 조금도 토벌대에게 통고를 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이렇게 하여 토벌대의 주밀한 수색 동작도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그후 한층 농후한 수비 배치를 하고, 또 경무기관과 협력하여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끊임없이 수색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흉도 출동의 여지가 없게 되어 각지는 점차 평온으로 돌아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일반 인민도 점차 각성하고 그 구폐를 고쳐 우리 수비대에 의뢰하는 태도가 생기고, 지방행정의 선도와 아울러 치평(冶平)으로 진전하였고, 그 후 3~5의 적도가 간혹 출몰하지 않은 바 아니나 여기서 완전히 폭도의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제4장 조선 국경 외 배일 선인의 일반 동정
병합 문제의 해결이 끝나 대세는 스스로 정하여져 정강(政綱)이 혁신되고 서민은 그 업에 안심하고 수비대·경무기관 등 경비가 완전무결하여 비도(匪徒)의 준동을 허용치 않았다.
때때로 하나 둘 완미 고루한 무리로 우국(憂國)을 창도(唱導)하는 자 있었으나 이에 부화뇌동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무리들은 앞을 다투어 국경 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 잔류하여 국외의 수괴와 다소 기맥을 통하는 자 없지 않았으나, 시종 관헌에게 그 행동을 감시 받고 있었으므로 그저 산곡(山谷)에 숨어 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황해도의 폭도 수괴 김정안·한정만·채응언 등이 그것이다.
기타 야소교회 보호 아래 숨어 은근히 배일사상을 품고 있는 자 적지 않아 전일의 총독 암살 사건 등의 수모자의 교사에 응하여 다수의 흉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견실한 사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일시적인
- 819 -
선동에 따라 뇌동한 데 지나지 않았다.
국경 외에 있어서 선인(鮮人)의 이주 범위는 극히 넓어 접경인 노·청영토내(露淸領土內)에 가장 많아 그 수 대략 30만이고 기타 만주(滿洲)·상해(上海)·하와이·미국(美國) 등에 배일적 위험사상을 품고있는 유력자들이 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청 영토내로 이주한 선민(鮮民)의 대다수는 배일사상과는 추호도 관계없이 그저 생활만에 쫓기어 비교적 비옥한 대안지방(對岸地方)으로 이주한 자가 대다수였다. 그중 약간 유력한 선인(鮮人) 등은 외국보호통치권안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삼아 공공연히 결사 단체를 조직, 언론 문필로 일반 무지한 인민을 선동하고, 의연금을 모집하여 총기 탄약을 구입하며, 교사(校舍)·교회당을 건축하여 교육·권업(勸業)·무기의 연습을 하고 때로는 폭동 암살을 모의하고 혹은 격렬한 언론을 공개하여 여론의 동정을 환기하려고 노력 하고 있었다. 또 제3국의 원조를 얻으려 책동하여 국권의 회복, 한국의 재흥을 행동 목표로 정하고 시세(時世)와 분투하고 있는 점은 반드시 만연한 공상이라고 그저 보아 넘길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것의 발단은 41년 7월 상순 노령에 있는 수괴 이범윤(李範允)의 일파 약 2백이 고읍(古邑) 부근에서 도문강(圖們江)을 건너 우리 신아산(新阿山)분견대를 습격하여 북관산(北關山) 지방을 소요케 하였고, 42년 1월 하순에는 수괴 방덕형(方德亨)이 약 50명을 이끌고 무상으로 침입하였다가 헌병대에게 구축당 하고, 44년 3월 중순에는 홍범도(洪範圖)의 부장(部將) 박영신(朴永信)이 인솔하는 약 24~25명의 일단이 세천동(細川洞)부근에서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기타 41년 3월 하순 미국에서 일어난 전 한국정부 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씨의 암살 및 42년 10월 하순 하얼삔에서 이등(伊藤) 공작의 암살 등은 모두 국경외 망명자의 소위로서 그 일부에 있는 배일정신은 아직도 노고(宇固)하여 경시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 도배들은 상시 상호간의 질시반목(嫉視反目)이 계속되어 일괄된 대규모적 행동을 감행 못하고 매년 도문강 결빙기(結氷期)에 대거 조선 내로 침입하겠다는 큰소리는 치지만 도저히 그 실행은 불가능하였다.
- 820 -
그러나 그들이 언제나 그런 망상을 가지고 시기를 노리며 음으로 양으로 우리 시정(施政)에 방해를 시도하려는 점에 대하여는 주의하여야 할 사정으로, 특히 유사지제(有事之際)에는 일층 고려를 요하여야 한다.
재외 배일 선인중 저명한 수괴는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 ; 崔德憲이라고도 한다)·엄인섭(嚴仁燮)·이위종(李瑋鐘)·김기룡(金起龍)·김서윤(金瑞允)·홍범도(洪範圖)·유인석(柳麟錫)·이범진(李範晋)·이상설(李相卨)·차도선(車道善) 등으로서 기타 지명(知名)의 소수괴 1백여 명을 헤아린다.
결사의 주된 자는 국민회(國民會)·권업회(勸業會) 등으로, 그 목적은 교육실업을 진흥시키는데 있다고 하지만, 그 실은 국권 회복을 기도하는데 있는 것 같다. 기타 이해관계에서 동지 약간명이 모인 작은 단결도 다수 있었으나 그들은 이가 있으면 합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명무실이 되어 그 존폐는 언제나 불명하였다.
국민회는 재외 조선인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것으로 그 본부를 상항(桑港)에 두고 기타 지방에 지부를 두었다.
권업회는 노청(露淸) 양 영토내에 있는 선민(鮮民)을 통합시키려는 것으로서 그 본부를 포염(浦鹽)에 두었다.
이 2회(會) 는 이미 그 이해 문제로 서로 반목 중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조선 고래의 폐습으로서 이기(利己)에 기울고 당파로 치우쳐 협동하여 일을 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 821 -
부표〔附表〕
[부표 제1]
명치 40년 8월 군대 해산 후 존치한 육군 편제표
부대호(部隊號) 정원
시종무관부(侍從武官府) 9
동궁무관부(東宮武官府) 6
친왕부무관(親王附武官) 1
군부(軍部) 44
무관학교(武官學校) 41
근위보병대대(近衛步兵大隊) 644
근위기병대(近衛騎兵隊) 92
- 822 -
[부표 제2]
자(自) 명치 39년
폭도 토벌 피아 손상 유별표
지(至) 명치 44년
구 분
아 손 해
폭도의 손상
전 사
전 상
살 륙
연차
월차
수비대
헌병
경찰
소계
수비대
헌병
경찰
소계
수비대
헌병
경찰
소계
39년
1












2












3












4












5


3
3
1

1
2
82


82
6












7












8












9












10












11












12












계


3
3
1

1
2
82


82
40년
1












2












3












4












5












6












7












8
12


12
25


25
198


198
9
6


6
11


11
639


639
10
3


3
9


9
454


454
11
5


5
7
1

8
990
7
12
1009
12
2
1

3
7
2
1
10
1299
4
24
1327
계
28
1

29
59
3
1
63
3580
11
36
3627
41년
1
5


5
25


25
1155
7

1162

2
3


3
15


15
828


828
- 823 -

3
3


3
24

4
28
1937

27
1964
4
4


4
8


8
1065
10
17
1092
5
6

12
18
18
3
3
24
1017
241
60
1318
6
5
2
2
9
10
4
1
15
1042
223
81
1346
7
8
2

10
8
1

9
938
255
32
1255
8
10
2

11
11
2
1
14
756
176
31
963
9
1
2
1
4
6
3
4
13
348
187
12
547
10
1
2

3
8
4

12
240
381
2
623
11
2
1

3
1
2

3
45
134
1
170
12
1
1

2
2
2

4
64
254
6
1224
계
49
11
15
75
136
21
13
170
9435
1858
269
2562
42년
1

3
1
4
1
1

2
87
168
5
260
2
1


1
3
2

5
62
95

157
3

1
2
3
2
1
1
4
132
188
5
325
4
1
3

4
3
4

7
178
228
1
407
5
3
2

5
2
2

4
74
179
4
257
6

1

1

2

2
44
276
4
324
7
2
2

4

2

2
54
173
1
228
8
1


1
1
1

2
48
103

151
9
2


2
1


1
34
60

94
10





1

1
28
63

91
11








19
22

41
12









39

39
계
10
12
2
25
13
16

30
670
1594
20
2374
43년
1








10
15

25
2







1

14

14
3








1
35
1
37
4








4
2

15
5









5

5
6

4

4

2

2
1
6

6
7





2

2
2
4
1
7
8








3
2

5
9









3

3
10








1
1

2
11





1

1

5

5
12












계

4

4
1
5

6
22
101
2
125
- 824 -
44년
1





2

2

2

2
2









1

1
3





2

2

2
2
4
4









1

1
5





1

1




6





1

1

1

1
7












8












9












10












11












12












계





6

6

7
2
9
누계
87
28
21
136
210
49
16
277
13879
3571
329
17779
[폭도의 손상]
구분
부 상
포 로
노 획 품
연차
월차
수비대
헌병
경찰
소계
수비대
헌병
경찰
소계
총
도(刀)
창
계
39년
1












2












3












4












5




145


145
717
71
574
1362
6












7












8












9












10












11












12












계




145


145
717
71
574
1362
41년
1












2












3












4












5












- 825 -
40년
6












7












8
89


89
3


3
17
3

20
9
70


70
6


6
72
1

73
10
147


147
10


10
171
1

172
11
297
30

327
28

3
31
284


284
12
859


859
70
1
18
89
691
2

693
계
1462
30

1592
117
1
21
139
1235
7

1242
41년
1
548
10

556
87
6

93
48
4

52
2
256


256
47


47
181
5
1
187
3
406

15
421
101
5
3
109
489
7
45
541
4
326


326
75

11
86
420
9
1
430
5
88
7
2
97
79
36
31
146
290


290
6
27
7
2
36
122
47
38
207
678
2
1
681
7
3
9
1
13
239
67
130
436
1125


1115
8

10

10
55
40
29
124
716
4
1
721
9
1
2

3
14
20
1
35
330
14
3
347
10




10
15
1
26
463
22
7
492
11




12
11
3
26
138
1

139
12
1


1
45
35
2
82
213
17

230
계
1654
45
20
1719
886
282
249
1417
5081
85
59
5225
42년
1

4

4
20
9
5
34
183
74

257
2
4


4
26
14

40
127
11
1
139
3
8
15

23
13
11
2
26
154
26
3
183
4
7
3

10
24
12
4
40
202
20
4
226
5
24
30
4
58
12
15
5
32
167
21
2
190
6




9
12
1
22

14
1
15
7
54
173
1
228

25
2
27
229
21
3
253
8
28
16

44
19
8

27
124
14
1
139
9
7
23

30
15
9

24
75
14
2
91
10

6

6
18
13

31
66
10
1
77
11
2
10
6
18
2
13
4
19
29
2

31
12
2
8

10
1
6

7
36
18

54
계
136
288
2
435
159
147
23
329
1392
245
18
1652

1

6
2
8

5
5
10
30
7
1
38
2

3

3

6

6
19
2

21
3
1
6
1
8
1
6

7
18
2

20
4

8

8

1

1
9


9
- 826 -
43년
5

2

2

5

5
1


1
6

3

3

3

3
12
2

14
7


2
2

1

1
3
1

4
8
1
6

7

1

1
10
2

12
9
3


3

5

5
8
3

11
10
3
3

6
2
5

7
3
1

4
11

4

4

2

2
3


3
12












계
8
41
5
54
3
40
5
48
116
20
1
137
44년
1

2

2





1

1
2

2

2








3

2

2

2

6
5


5
4





6

1
1


1
5





1

2




6





2

2
4


4
7












8












9












10












11












12




50


50




계

6

6
50


61
10
1

11
누 계
3260
410
36
3706
1360
470
298
2139
8551
429
651
9731
[부표 제3]
자(自) 명치 40년, 지(至) 명치 44년 폭도 충돌 회수 및 충돌 폭도수 구분표
구분
충돌 회수
충돌 폭도수
연차
월차
수비대
헌병
경찰관
계
수비대
헌병
경찰관
계
40년
8
28

1
29
5,615

400
6,015
9
56

1
57
7,787

200
7,987
10
52


52
5,212


5,212
11
88
4
1
93
14,015
800
300
15,115
12
83
6
3
92
9,242
345
200
9,787
계
307
10
6
323
41,871
1,145
1,100
44,116
- 827 -
41년
1
120
3

123
8,859
148

9,007
2
85
2
2
89
5,727
60
147
5,934
3
113

3
116
6,066

400
6,466
4
131
1
1
133
7,536
25
20
7,581
5
89
42
21
162
7,427
3,280
687
11,394
6
128
39
5
172
6,635
906
153
7,697
7
128
31
3
162
3,130
647
156
3,933
8
78
32
7
117
2,683
890
106
3,679
9
51
35
4
90
1,887
1,101
153
3,141
10
44
58
2
104
1,727
2,458
30
4,215
11
22
62
4
88
1,005
1,617
188
2,810
12
17
70
8
95
736
3,042
197
3,975
계
1,016
375
60
1,451
53,418
14,174
2,237
69,832
42년
1
18
51
4
73
915
1,756
180
2,851
2
17
45
4
66
713
1,968
660
3,341
3
33
70
8
111
983
2,054
134
3,171
4
29
66
6
101
1,136
2,088
62
2,286
5
38
62
5
105
1,498
2,041
48
3,582
6
20
115
2
137
578
2,390
49
3,017
7
26
49
3
78
818
1,418
47
2,284
8
24
45

69
775
884

1,679
9
20
46

66
242
836

1,078
10
14
26

40
176
482

658
11
33


33
567


567
12
19


19
269


269
계
291
575
32
898
8,665
15,918
1,180
25,763
43년
1
3
17
2
22
67
187
33
287
2
1
13

14
3
192

195
3
2
16
1
19
21
188
4
213
4
1
20

21
10
316

326
5

12

12

136

136
6
1
16

17
3
226

229
7
2
4
1
7
51
17
8
76
8
3
7
1
11
42
155
23
220
9
1
4
1
6
29
38
4
71
10
3
5

8
20
40

60
11

6
1
7

61
4
65
12
2
1

3
6
7

13
- 828 -

계
19
121
7
147
252
1,563
76
1,892
44년
1
1
8

9
8
49

57
2

8

8

42

57
3
1
5
1
7
25
21
3
49
4

3

3

25

25
5

3

3

26

26
6
3
1

3
12
5

17
계
4
28
1
33
45
168
3
216
누계
1,637
1,109
106
2,852
104,251
32,968
4,596
141,815
- 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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