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경찰의 통한(痛恨)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자산공원에 있는 경찰충혼비를 둘러본 날은 일기는 화창했으나 경내는 고즈넉했다. 워낙에 외진 곳에 위치한 탓에 들리는 사람이 없기고 했지만 이날은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상임위를 통과한 날이어서 그리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충혼비 앞에 선 나는 잠시 머리를 숙인 후 비석 뒤로 돌아가서 새겨진 영령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수십 번 보아서 눈에 읽은 주인공들. 이름을 확인하자 영령들이 뇌리를 스치면서 말을 걸어왔다. ‘우리에게 더는 욕된 짓을 막아 달라.' 우려섞인 음성으로 뜻을 전했다.
이를 두고 모르는 사람은 어디 말이나 되느냐고 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며 받아들였다. 실제로 살아 계신다면 그러하지 않겠는가. ‘여순사건 특법법’의 내용이 무엇인가. 말이 좋아 진상규명이고 명예회복이지 핵심요구는 위령탑을 세워서 거기에다 반란에 가담하고 경찰관을 학살한 자들까지 함께 이름을 새겨 기리자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에는 보상금을 받아 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의도가 읽히기에 거기에 담길 내용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익들에게 무참히 학살 당해 모셔진 영령들이 우려를 표한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영령들의 이름을 바라 볼 면목이 없었다.
1948. 10.19 여수경찰은 14연대 반란군과 지방 좌익에게 유린 당했다. 그들이 점령한 기간의 여수는 암흑세상이 되었다. 점령한 7일 동안 여수경찰관은 지옥같은 그들의 세상에서 72명이 몰살 당하고 경찰가족 또한 성인과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100여명이 죽어갔다. 영문도 모르고 당한 피비릿내나는 학살극이었다.
여수경찰은 통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아니, 여수경찰은 하나의 조직이니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 소속해있는 경찰관과 그 가족이 속절없이 당한 것이다.
당시 여수경찰의 정원은 150명 정도였다. 이들 중 30여명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나 출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희생된 72명의 숫자는 정원의 절반이 훨씬 넘는다. 세상에 이러한 참화와 비극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여수경찰을 거쳐 간 전직, 그리고 현직 경찰관은 조직에 몸담고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 실상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것 까지를 감안하여 내가 충혼비 후면에서 새겨진 명단을 확인할 때 뇌리에 스친 영상도 그런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예전 여수경찰서에서 근무한 어느 전직에게 질문을 던진 바가 있다. 반란시에 여수 경찰관이 누구에 의해 죽어갔는지 아느냐고 물으니 “14연대 반란군이지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실망했다. 이런 무지함이라니.
해서 나는 곧바로 직원교양자료용으로 ‘ 반란치하 9일간의 여수경찰수난사’를 집필했다. 경우회장의 부탁도 있었지만,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직원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발간하여 배포한 책자는 1000부. 그리했음에도 여전히 그 실상을 모르는 직원들이 많다. 실망을 넘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래가지고 무슨 경찰정신이며, 호국경찰을 말 할수 있겠는가. 어찌 생각하면 그 일은 시간도 오래 지나고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현재의 문제인 것이다. 지급 바로 그 73년 전의 일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는 있는 것이다.
이번 국회 상임위 통과를 계기로 본회에 회부될 것이며 그렇게 되는 추진 주체들의 의도대로 일련의 사업들이 지체 없이 착수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보다 먼저 전에 내가 질문하여 실망을 했던 것부터 바로 잡을 필요성을 느낀다.
진실이 가려진 것은 무엇보다도 여순반란사건이 국사편찬위원회로 부터 명칭이 변경된데 부터 있다. 종전에 써온 '여순반란사건'이라는 것이 '여순사건'으로 바뀌다 보니 반란주체가 모호해진 것이다. 하지만, 반란은 14연대 군인만이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초기부터 지방 좌익 30여명이 적극 가담하였으며 경찰관 학살 14연대 군인뿐 아리라 지방 남로당원과 이에 부화뇌동한 학생과 민간인이 저질었던 것이다.
반란군의 경찰관 학살은 주로 경찰관서 공격시에 자행되었다. 그들은 봉산파출소 입초 1명, 충무파출소 입소 1명(김기연순경), 중앙파출소 입초자를 포함 직원 3명, 경찰서 입초자 3명을 사살했다.
그 이외에는 보안서장이 된 민간인 유목윤, 그리고 일명 유달산 호랑이라 불리며 OB암살단장으로 악명을 떨친 서종현이 주도했다. 그들 극렬 좌익은 수하들이 경찰관을 잡아들이면 처단에 앞장섰다. 그 일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서종현이 유치장에 나타나서 보인 행동이다. 그가 유치장에 나타나 "총살! 총살 !"하니 총을 든 학생들이 겨누어 난사를 했다. 이는 김석환.임종명 제씨들이 공저로 펴낸 '여순사건'에 기술한 것이다. ( 전남일보 p86)
이 사실을 직원들은 캄캄하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당시 해남서에서 근무하다 휴가중 붙잡힌 배병태 순경은 민간인 학교 후배 조종훈이 살려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하늘을 찔렀다. 다섯살과 세 살먹은 자식을 키우던 정운자순경은 집에서 끌려나와 목에 쇠사슬이 묶인 상태로 구타당하다가 총에 맞아 죽어갔고, 24세의 국말례순경은 몸이 갈가벗겨진 채 음부에 총질을 당해 죽어갔다.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분명이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일부 사회단체에서 끊임없이 경찰을 악의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들은 분명이 타격목표를 경찰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이를 가리고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반란을 주도한 지창수가 한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 여수경찰이 부대로 쳐들어오고 있다. 그들을 쓸어 버리자.”
이만 하면 의도는 명백히 드러난 것이 아닌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경찰을 먼저 제압함으로써 반란을 용이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민단체나 그쪽 편을 드는 민간인들은 궤변을 늘어 놓는다. 살해 대상이 된 당시 경찰관은 일제 시대부터 근무하던 친일경찰이었으며 백성의 고혈을 빤 악질들이었다고 프레임을 씌운다.
얼마나 여수경찰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모욕한 것인가. 그 대표적인 것이 전에 김아무개란 사람이 “사찰계 직원이 남의 부인을 탐한 나머지 그 집 장농에다가 좌익문서를 넣어서 죄를 뒤집어 씌워 남편을 끌고 갔다”고 한 것이다.
그는 주작부언(做作浮言)의 허무맹랑한 글을 써서 어느 신문사에 투고, 상금을 받기도 했다. 나중 경우회에서 불러서 따지니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이 떠돌아서 썼노라고 말해서 경찰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는 기시감이 드는 대목이다. 소설 태백산맥에 보면 염상구라는 우익이 좌익의 처인 외서댁을 강간을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짓고 비난하는 데는 이만한 수법이 없는 것이다.
좌익문건 운운한 것도 그걸 노린 것이다. 나는 내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좌익편향이나, 그런류의 글에서 좌익이 같은 좌익의 누구를 겁간했다는 글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지만, 앞으로가 문제이다. 화합차원이라며 비문에 당시 경찰관을 죽인 자들의 명단을 넣으려고 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희생자 명단을 훑어보는 동안 우울한 표정의 선배들의 영상이 잠시 스친 것은 그러한 것을 우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반항 한번 하지 않는 가운데 죽어갔으니 똑똑히 그것을 기억하라고 일러주는 표정은 아니었을까.그렇게 통한의 감정이 들어서 인지 돌아서는 발걸음이 뻘속에 내딛는 발목처럼 질척이며 무거웠다. (2021)
첫댓글 14연대 반란과 이에 편승한 좌익세력의 발호와 살륙행위는 여순사건특별법과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싶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시 순직한 경찰관들에 대한 진실이 호도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한편으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고도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한 한도 있습니다 소위 손가락총도 엄연한 역사지요 그런 면에서 늦었지만 진실규명을 통한 명예회복과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에 대한 명예회복은 당연히 해주어야 하겠지만, 당시 반란에 가담한 좌익들의 발호도 끔찍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수경찰은 총한방 쏘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자체경비를 하거나, 숨어있는 상태에게 끌여나와 죽어갔는데, 이런 경찰관들의 죽음에 대하여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 친일파 경찰이라 죽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은 자들이라 죽었다는등 매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연대 반란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제주출동을 빙자한 것이지만 이미 검거위기에 몰려서 선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며, 여수를 장악하기 위해서 무고한 경찰을 타격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봉기운운하는 것은 좌익분자를 감싸는 편향된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