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1.07.06 03:00
“유치원 교실 내 CCTV 의무화법 즉시 통과시켜라.”
사진 /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열린 유치원 cctv 설치 촉구 기자회견에서 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이 설치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고운호 기자
5일 오후 2시 30분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참가자들은 ‘CCTV 설치 거부, 무엇이 두려운가’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같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공혜정 협회장은 “유치원 CCTV 의무 설치는 아동의 권리와 안전을 지켜주는 수단”이라고 했다. 유치원 CC(폐쇄회로)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대표 발의한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의 관련 블로그 글에는 현재 11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학부모들이 단 찬성 의견이 대부분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달 국민 1만4000명을 대상으로 한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 관련 조사에선 응답자 98%가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의료사고에 대한 증빙자료 수집’ ‘대리수술·성희롱 등 불법행위 감시’ 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환자 정보 유출’ ‘의료인 인권 침해’ 등 반대 목소리는 2%에 그쳤다.
사회 곳곳에 “CCTV를 설치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지난 4월 서울 한강공원에서 대학생 사망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가장 먼저 대안으로 거론된 것이 ‘CCTV 설치’였을 정도다. 여론이 들끓자 서울시는 연말까지 240여대를 추가 설치하기로 했다. 이 밖에도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장례식장 부의함 CCTV 설치 의무화해주세요” “장애인 특수학교에 CCTV 달아주세요” 등 CCTV 설치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실종, 절도, 아동 학대 등 문제의 근본 원인은 따로 있지만 일단 손쉬운 ‘감시’를 택하는 것이다. CCTV가 우리 사회의 ‘만능열쇠’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CCTV 설치론자’들은 낮은 비용에 효율적으로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CCTV라고 말한다. 2019년 상반기에만 CCTV를 통해 1만7079명의 범인을 붙잡았다는 통계(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실 자료)도 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CCTV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범죄를 포기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이런 의견이 대세로 자리 잡은 배경엔,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불신(不信)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월 한국행정연구원이 발표한 우리 국민의 타인에 대한 신뢰 수준은 4점 만점 중 1.9점에 그쳤다. 서로를 믿지 못하니 아예 모든 걸 기록해 증거로 남기자는 주장이 커지는 것이다. 사생활·인권침해, 정보 유출 우려 등의 논의는 뒷전이 됐다. 어린이집 보육교사 이모(26)씨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불편할 때도 있지만, 학부모가 의심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CCTV 설치에 찬성한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은 사회적 신뢰가 한마디로 바닥을 친 상황”이라며 “CCTV 설치 주장이 힘을 얻는 것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공동체 의식이 붕괴된 한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코로나 방역을 명분으로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추적, 신용카드 사용 내역 조회 등 정부가 워낙 많은 사생활을 침해하다 보니 시민들이 개인 정보 보호에 둔감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 시설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지만, 수술실 등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만의 독특한 양상”이라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시한 뒤 ‘나쁜 사람’을 찾아내 벌을 주고 싶어 하는 욕망과 분노가 반영된 것 같다”고 했다.
정보 보호 전문가들은 CCTV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결국 CCTV 설치 요구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자율 규제가 가능한지를 먼저 따져본 뒤, CCTV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김승주 고려대 교수도 “무조건 CCTV 설치 혹은 폐쇄를 주장하기보다는 개인 정보 보호라는 가치와 공적인 가치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한예나 기자, 김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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