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해야 하는 이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전례독서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행위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자주 부딪치게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용서를 하거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처할 때가 정말 많은데요. 여러분이 최근에 그런 경험이 있다면 한 번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아야 할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용서’가 무엇일까요?
‘용서’의 뜻은, 국어사전을 보면,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이라고 나옵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그냥 덮어주는 행위가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행위에는 반드시 ‘정의’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잘못된 행동을 벌하지 않고 그냥 덮어주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지 묻는 것입니다. ‘권선징악’이란 말이 있듯이, 정의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응당한 벌을 요구합니다. 누군가 잘못을 범했는데, 그냥 덮어주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정말 험악한 일이 많이 발생합니다. 힘없는 여성을 성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끔찍한 일이 인터넷 여기저기서 계속 뜨고 있고, 또 최근에는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인해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이어 들려옵니다. 그 사연들을 들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분개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해 마땅한 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전에서는 악성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한 학부모에 대한 신상이 SNS를 통해 폭로되고, 그 학부모가 운영하는 음식점을 찾아가 항의하거나 별점 테러를 주고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잘못한 이들에게 벌을 주어 응징하겠다는 행동들입니다. 이렇듯 잘못한 행위에 대해 마땅한 벌을 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옳은 일입니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끈 이유도 그것입니다. 과거 학폭을 당한 주인공이 가해자들을 찾아가 복수하는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당한 만큼의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만인이 요구하는 정의일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구약의 율법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죄에 상응한 만큼의 벌로 보복한다는 ‘동태복수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한히, 완전히, 남김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보통 인간으로서는 지키기 힘든 요구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실까요? 주님은 왜 우리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를 바라실까요?
그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용서하라는 계명은 비단 우리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용서>라는 제목의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미움이나 나쁜 감정을 키워나간다면, 내 자신의 마음의 평화만 깨어질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를 용서한다면, 내 마음은 그 즉시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용서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달라이라마는 용서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민족적인 차원까지 끌어올려 티베트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억압과 만행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럴 때 진정으로 중국을 이기고 자치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달라이라마는 이러한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힌두교의 오래된 경전 <바가야드 기타>는 용서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을 보기를 원하면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을 보라. 영웅을 보기를 원하면 미움을 사랑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람을 보라.”
한편 현대에는 심리학이나 뇌과학 같은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용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심리학에서 용서를 말하는 이유는 용서해야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타인의 잘못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화와 분노가 늘 가슴속에 머물게 되고, 그러면 그것이 화병을 일으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나한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라이라마의 말과 다르지 않은데, 뇌과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뇌과학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타인의 잘못으로 생긴 상처를 진정으로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치유제이며, 긍정적인 삶과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알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갚아야 할 빚, 부채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왕에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의 빚은 일만 달란트입니다. 한편 그의 동료가 진 빚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그 돈의 액수는 얼마나 될까요?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오늘날 하루 일당으로 쳐서, (계산하기 편하게) 10만원이라고 한다면, 백 데나리온이면 천만 원입니다.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될까요?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계산하면 1달란트는 6억입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면 얼마입니까? 6조원입니다! 개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이번 주 초 인터넷에 경남은행에서 한 직원이 6년간 횡령한 돈이 1300억원대라는 기사가 떴는데요.) 목숨이 몇 개라도 갚을 수 없는 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이렇게 큰 액수를 말한 것은 일종의 과장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뜻은 우리가 먼저 받은 은혜가 이렇게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빚을 우리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냐라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것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통해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병은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며 은총이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응어리가 있다면, 푸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면,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할 때 우리의 상처는 진정한 치유와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다 용서한다면, 그러면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은 용서한 후에도 가릴 수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내 마음의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증오와 분노의 마음으로 가해자에게 벌을 주며 복수하려는 것은 모두가 망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한 후에라야 모두를 살리는 진정한 올바름, 정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잖은 사람이 다른 사람은 용서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여 불행하게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때, 나는 진정한 하느님의 용서받은 자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든 나 자신이든 용서할 필요가 있을 때, ‘예수 기도’가 참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죄 많은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모두에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