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8월 10일 주일
[(녹) 연중 제19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여 인정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이 지녔던 것과 같은 믿음이 타오르게 하시어, 아버지의 시간을 깨어 기다리다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코헬렛의 저자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말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경계하라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시고,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8,6-9
해방의 날 6 밤이 저희 조상들에게는 벌써 예고되었으니
그들이 어떠한 맹세들을 믿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용기를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은 의인들의 구원과 원수들의 파멸을 기대하였습니다.
8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9 선인들의 거룩한 자녀들은 몰래 희생 제물을 바치고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법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법은 거룩한 이들이 모든 것을 다 같이,
성공도 위험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벌써 조상들의 찬미가들을 불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2-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믿음의 여정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극적인 결과를 보여 주지도 않지요. 그렇기에 믿음의 여정은 희망과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입니다.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벗어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인들의 여정, 다시 말하여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믿음으로 걸어온 해방과 구원의 여정을 간략히 그립니다. 제2독서는 히브리서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라는 명제로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야곱이 걸어온 길을 재조명합니다. 이를 통하여 구약의 성조들에게 믿음의 여정은 희망과 인내와 기다림의 여정이었음을 확인합니다.
복음은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결론으로, 루카 복음사가는 믿음의 여정을 희망과 인내와 기다림의 여정으로 설명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러내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희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믿음의 여정을 무엇으로 채워 가고 있나요? 희년의 여정이 다만 전대사와 은총을 받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희망하고 하느님 아드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세상을 하느님 뜻에 맞갖도록 채워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겪고 있는 고통에 침묵하고 무관심하거나,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려 무미건조하게 되어 세상 속에서 방향성을 잃어버린다면 믿음의 여정에 걸맞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쯤 계시나요, 여러분은?(김상우 바오로 신부)
반전과 감동의 인생 스토리,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의 신앙 여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는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측면이, 성인 성녀들의 출몰입니다. 때로 주님께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외면하고 계신 듯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넘어서고,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의 지평을 열어주는 성인 성녀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혼돈과 격동의 세월이었던 지난 세기 초반, 파란만장하면서도 숭고하고 위대한 삶을 살다 가신 신비스런 성녀(聖女)가 한분 계시는데, 독일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가르멜 수녀회 수도자였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1891~1942)입니다.
우리에게는 에디트 슈타인이란 이름이 더 친근합니다. 그녀는 제게 있어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 같습니다. 늦게나마 그녀의 생애와 영성을 접하게 된 것에 대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이름 뒤에 따라붙는 다양한 수식어들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특별하고 대단한 인물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철학자, 여성운동가, 가르멜회 수녀, 아우슈비츠 사랑의 순교자, 최초의 유대인 출신 성녀, 유럽대륙의 수호성녀. 그녀의 생애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에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영성이 긴 세월을 건너와서도 찬란히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평생토록 지니고 살았던 진리를 향한 강렬한 역동성이요, 적극성과 개방성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 자리에 멈추어 서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한 평생은 끊임없이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성숙시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보다 가치 있는 삶, 보다 해방되고 성숙한 삶, 보다 큰 진리와 자유를 찾아 떠난 부단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유대교 신자에서 무신론자로,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 신자로, 그리스도 신자에서 가르멜 수도자로, 가르멜 수도자에서 사랑의 순교자로 놀라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디트 슈타인은 적극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통해 새로운 세기 여성성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에서 탈피해서 여성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를 촉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도 사회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한 여성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세상과 인류를 위한 에디트 슈타인의 소리 소문 없는 업적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녀는 자신의 생애를 동족인 유대인들의 회개와 지상의 평화를 위하여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화해를 위한 제물로도 봉헌했습니다.
또한 에디트 슈타인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동료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철학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가치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모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열매 맺는 것임을 저항과 죽음을 통해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기도는 나만의 보물을 확인하는 시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밤에 잠을 자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함이란, 정말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스페인에서는 47층짜리 초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엘리베이터 설계를 빠뜨리는 황당한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17세기 스웨덴에서는, 국왕의 욕심 때문에 대포를 너무 많이 실은 군함이 출항하자마자 균형을 잃고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돈에 대한 집착이 엘리베이터의 필요성을 잊게 만들고, 과시욕과 교만이 배의 균형이라는 기본을 무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운전을 하다가 그만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길을 건너던 예쁜 유치원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한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즐거움에 마음을 빼앗겨 안전이라는 더 큰 가치를 놓친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정말 중요한 것을 잊게 만드는 것. 가톨릭 교회는 이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유혹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오늘 루카 복음은, 바로 이 ‘깨어 있지 못함’의 가장 큰 증거가 ‘나눌 줄 모르는 마음’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루카 12,33)
우리는 왜 나눔과 절제의 가치보다 순간적인 욕망의 가치를 더 크게 여길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의 것들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사제가 되기 전부터 강론을 써서 나누는 일을 저만의 자선으로 실천해 왔습니다. 하지만 첫 주임으로 사목하다 지쳐 교구청에 들어왔을 때, 몇 년간 그 나눔을 멈추었습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삶이 주는 안락함은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로서 깨어 있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다시 영성관으로 오면서, 강론을 쓰지 않는 제 모습이 점점 더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바로 그때, 이 말씀이 제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루카 12,45-46)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들어오자, 더 이상 강론을 나누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제로서 말씀을 나누겠다’는 결심이 제 안에 새로운 빛을 밝혔고, 그 빛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보물’입니다. 말씀이 나의 보물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런던의 거리에서 마약에 중독된 채 살아가던 노숙자, 제임스 보웬의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세상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그 자신도 스스로를 ‘쓸모없는 중독자’, ‘거리의 쓰레기’라 부르며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자신의 허름한 거처 복도에서 상처 입은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얼어붙었던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습니다. 그는 며칠을 굶어야 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고양이의 치료비를 냈고, ‘밥(Bob)’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쓸모없는 노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생명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이 바뀐 것입니다. ‘보호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밥도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밥을 어깨에 메고 버스킹을 하자,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가 아니라 ‘어깨에 고양이를 멘 특별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세상의 시선이 바뀌자, 그 자신도 스스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약을 끊기로 결심합니다. 지옥 같은 금단 증세가 찾아올 때마다, 그는 곁에서 조용히 온기를 나누어주는 밥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나는 밥의 보호자다.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무엇이 제임스를 다시 살게 했을까요? 그의 의지력이 강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노숙자’라는 낡은 정체성 안에 가두는 대신, ‘보호자’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새로운 ‘보물’, 밥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루카 12,34)
나의 보물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물고, 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나의 보물이 돈에 있다면 나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일 것이고, 나의 보물이 말씀과 나눔에 있다면 나는 하늘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다고 믿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보물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말씀과 성체입니다. 그리고 이 보물을 다시금 들여다보고, 그 가치를 되새기고, 더 깊이 끌어안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귀한 보물이 생긴 사람은 그 보물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남의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지 않습니까? 기도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기도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이 무엇인지 날마다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중력에 이끌려 다시 땅으로, 세속의 가치로 떨어지고 맙니다. 기도는 바로 그 마음을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 들어 올리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실 때마다, 하늘의 보물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거룩한 뜻을 내 마음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잠에서 깨어나, 기쁘게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트워스 신부님과 뉴욕엘 다녀왔습니다. 뉴욕의 신부님들과 저녁 식사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은 뉴욕의 신부님들을 처음 보았고, 저는 뉴욕의 신부님들과 5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으면서 신부님들과 많은 추억과 기억을 만들었습니다. 추억을 만들게 된 이유는 제가 사람을 좋아해서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코로나 팬데믹 3년을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함께 먹어본 사람’은 같은 고통과 아픔을 견디었기에 친밀해질 수 있듯이 우리는 3년 동안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신문홍보를 다닐 수 없었던 저는 시간이 있었고, 성당 문을 닫아야 했던 신부님들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집에 머물기가 무료했던 신부님들은 자연을 찾아 캠핑하러 다녔습니다. 우리는 캠핑 장비도 함께 마련했습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신부님의 소개로 자전거를 마련해서 함께 다녔습니다. 그렇게 3년을 함께 했던 신부님들은 성지순례도 함께 갔고, 여행도 함께 다녔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을 배려해서 이야기하였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다시금 우리의 추억과 기억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결국,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추억을 기록한 책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기억을 담은 복음입니다. 교회의 교리와 전통, 성사와 전례 모두 그 기억을 나누고 이어가는 행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원초적인 기억을 상기시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였고, 시험을 받을 때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그 믿음은 단순한 추상적 동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한 삶의 기억입니다. 저는 지금 달라스에서 새로운 신앙의 추억을 쌓고 있습니다. 작년 2월부터 7월까지 이어진 창고 공사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형제님들과 함께 땀 흘리며 작업했습니다. 공사 현장은 고되고 더웠지만, 그 안에서 저는 보물 같은 형제님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저는 본당에서 귀한 인연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그 형제님들은 사목 위원이 되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걷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 종식을 위한 걷기 대회를 제안했습니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하는 저는 제가 늘 다니던 공원 길을 소개했습니다.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걷기 대회가 있었고, 300명이 넘는 분이 함께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말씀 카드를 나누어 주었고, 반환점을 돌면서 확인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우리 신앙도 작은 실천 속에서 깊어지고, 그렇게 기억이 되어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교회의 원초적인 기억은 무엇일까요? 저는 성 목요일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억은 ‘성체성사’가 되었고 오늘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어떤 이가 깨어 있는 사람일까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입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기억하며 이웃과 나눌 때, 우리의 마음도 하늘에 닿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이 지녔던 것과 같은 믿음을 주시어,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지만, 늘 깨어 기다리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라우렌시오(Lawrence)
신분 : 부제, 순교자
활동연도 : +258년
같은이름 : 라우렌시우스, 라우렌티오, 라우렌티우스, 로렌스, 로렌조
로마(Roma)의 일곱 부제(차부제 포함) 중 한 명인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는 에스파냐의 우에스카(Huesca) 출신이며,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교황 성 식스투스 2세(Sixtus II, 8월 7일)의 부제였고, 식스투스 교황이 사형을 받게 되자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교황은 그 역시 3일 안으로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예언하자, 라우렌티우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교회의 소유물들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로마의 집정관이 그의 이런 행위를 알고는 교회의 보물들을 모두 황제에게 바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그는 모든 보물을 모으려면 3일 정도가 소요된다는 말을 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보물들을 맹인과 절름발이, 고아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분개한 집정관은 그를 체포하여 온갖 고문으로 괴롭히다가 석쇠 위에 눕히고는 구워 죽였다. 시인 프루덴티우스(Prudentius)에 의하면 그의 죽음과 표양이 로마의 회개를 가져왔고, 로마에서 이교의 종말을 고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석쇠이다.
성녀 아스테리아 (Asteria)
신분: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베르가모(Bergamo)
활동연도: +307년
다소 출처가 불분명한 “성녀 아스테리아의 전기”에 의하면, 성녀 아스테리아는 성녀 그라타(Grata, 5월 1일)의 결혼하지 않은 자매였다.
그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베르가모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했다.
이들 두 명의 자매 성녀들은 모두 테반 군단의 군인 순교자인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8월 26일)의 유해를 매장한 일과 관련해서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