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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싸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본것 같은 사람이라 찾아봤더니
ncck에서 김조광수 초청 강연회 할때, 2층 강연실에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서있던 사람 기억하시나요?
ncck 인권 사무국장이였습니다. 한신대 출신이네요,
이 인터뷰를 보시면 동성애에 관한 ncck의 입장을 분명히 아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2015년에 발간한 책자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이 정말 어이없이 인상적이네요.
4월 말에도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런 일이 ncck의 지지나 동조없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내용을 읽어보니까
이런 곳에 인터뷰가 올라올꺼라는 예상을 하고 있네요.^^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올려봅니다.
정말 kncc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는 2016년 4월에 올라왔는데
사진들은 더러 지난 것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본 내용은 동성애 싸이트에서 퍼온 것임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물꼬기 7호] 함께걷는사람들: "만나면 변한다" NCCK 인권센터 박정범 목사님 인터뷰 (1부)
2016.04.13. 17:51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2014년 축제를 방해한 혐오세력을 상대로 소송을 했으나 기각되어 소송비용 108만원을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소송비용을 모금하고 이런 사태를 알리기 위해 작년 겨울 "사랑으로 혐오를 갚으리라~108명의 의인을 기다립니다"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때 종교계에서 성소수자의 동등한 인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신 분들이 계신데 그 중 한 분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의 박정범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박정범 목사님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직업병으로 숨진 희생자 추모기도회,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을 위한 오체투지 등 한국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비정규직의 고통과 분노에 함께 동참하고 목소리를 내고 계시며,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함께 마음을 써주시는 박정범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나눕니다.
묻는이: 신다애, 모리 (차세기연 웹진팀)
답한이: 박정범 목사 (NCCK 인권센터)
Q1. 함께 걷기 시작한 이유와 과정
신다애: 목사님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박정범: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 했고요,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을 했습니다. 2013년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요. 그전에 2010년까지는 평범한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목회를 그만 두려고 했었어요. 그때는 좀 목회가 싫어져서 대학원만 졸업하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로 2010년 5월부터 서울제일교회라는 교회를 알게 되고,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라는 단체에 간사로 일을 하게 됐어요. 2013년 5월부터 NCCK 인권센터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목사입니다.
모리: 목회가 싫어지셨던 이유가 궁금해요.
박정범: 약간 보수적인 신앙의 분위기도 그렇고, 우선 교회 내에서 목사, 전도사 간의 경쟁관계가 목회가 싫어졌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신도 수나 교회 프로그램으로 서로 경쟁하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지는 것이 앞으로 계속 목회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어요.
신다애: NCCK 인권센터로 오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박정범: 인권센터에 실무자가 필요했던 시기에 마치 저도 새로운 활동을 시작해야 할 상황과 겹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아직도 조금 민망한 부분은 인권에 대해서 큰 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하지 못했던 부분이에요.
교회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사회선교활동에 지원자가 많이 없기도 하구요. 그래서 처음엔 우연한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권센터 실무자로 내가 잘 하고 있나?’ 하는 민망함이 항상 있어요.
신다애: 그럼 학교에서 특별히 민중신학을 전공하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신가요?
박정범: 예. 전 학교 다닐 때까진 진짜 보수적인 아웃사이더였고요. 학회도 찬양 중창단 활동을 했었어요. 그래서 제 동기들이나 친구들이 지금 저를 보면 ‘왜 쟤가? 저기에?’ 이런 반응이 많죠.
신다애: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해요.
박정범: 가장 큰 계기라고 하면 아무래도 작년 퀴어문화축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전까지는 그냥 나쁘게 얘기하면 ‘침묵해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소수자분들이 인권 침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못해보고 살았어요. ‘모르게 잘 살고 계시나 보다’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퀴어문화축제에서 보수 개신교에서 너무 격렬하게 반대를 하니까.. 그때 마음 속에 ‘아 이거 뭐라도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신다애: 그 전에는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박정범: 저는 정말 가장 회색적인 사람들 중 한 명,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었을 거예요. 근데 참 이상하게도 대학원 때에 꽤 많은 퀴어영화들을 봤어요. 퀴어 영화에 대해 발표하는 수업도 있었고, 또 알음알음 기숙사에서 아는 형들이나 동생들이랑 모여서 퀴어 영화 보고 같이 대화하는 모임도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거나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모리: 그런 모임이 있었다는게 되게 신기하네요.
신다애: 그러니까요. 지금도 많지 않거든요.
모리: 어떤 영화였어요?
박정범: 브로크백 마운틴, 숏버스, 친구사이.. 뭐 이런 영화들을 봤죠.
모리: 좋은 영화를 많이 보셨네요.
신다애: 작년 퀴어문화축제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셨다고 하셨는데요, 그 때 종교인들이 모여 퀴어문화축제를 지지하고 혐오세력을 막기 위해 진행한 ‘범종교 평화의 인간띠 잇기’라는 행사도 했는데,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해요.
박정범: 일단 NCCK 인권센터가 참여하지 못한 건 좀 아쉬웠어요. 참여 요청이 들어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인권센터가 9개 교단이 모인 교단 협의체이다보니 참여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권침해사례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내부적으로 퀴어문화축제에서 노출하는 참여자들에 대해서 ‘굳이 저렇게 표현해야 되나?’ 이런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그때는 우선 내부적으로 성소수자 관련 사안을 연구하자고 했어요. 개인적으로 당시에 인간띠 잇기 행사나 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좀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구요.
인간띠 잇기 행사나 퀴어문화축제에서 나타난 일방적인 반대 분위기를 보면서 저희도 빨리 내부적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 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님을 초청하여 내부 간담회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모리: 어떤 간담회였나요?
박정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여성위원회, 인권센터의 위원들께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상황 이런 걸 많이 낯설어 하셨기 때문에 임태훈 소장님을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본 거죠. 임태훈 소장님이 “나는 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성소수자와 종교와의 관계, 그리고 외국 나갔더니 이러이러한 사례들이 있더라, 이런 것들을 얘기해주셨는데, 우선 많은 분들의 마음이 열렸던 거 같아요. ‘같은 사람이구나, 뭔가 특별하진 않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뭔가 해볼 수 있겠다, 앞에 나가서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교회 내에 의식 변화를 위한 활동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때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공개적으로 이렇게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다애: NCCK에서 ‘우리들의 차이에 직면하다’라는 책이 나왔잖아요.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박정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임태훈 소장님과의 간담회가 끝나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회의를 했어요. 한국교회는 너무 생소한 일이고 갑자기 불어닥쳤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저희가 지금 단계에서 신학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찬성한다 반대한다 이런 걸 낸다고 될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싸움을 붙이지 말자, 사실 싸울 일이 아니거든요. 그보다 NCCK가 그냥 알리는 작업을 하면 되지 않을까? 유럽이나 미국 교회에서도 싸워 온 역사가 있고, 그때 교회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고 그것을 또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우리가 계속 알려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자료를 찾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건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위치를 봤을 때 너무 앞선 자료를 주는 것보다 이 책의 수준 정도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소수자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할 때 서양 교회에서 성소수자 교인들에 대한 문제가 처음 터진 후 거친 일련의 과정과 그걸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다룬 책이거든요.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Q2. 함께 걷다 보니 마주하는 것들
신다애: 그동안 노동인권이나 다른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계시다가 작년 퀴어문화축제 후속 행사에서 공개적으로 성소수자 지지발언을 해주셨고, 그 후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입장이 다른 기독교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어요.
박정범: “NCCK 인권센터 박정범 목사가 발언을 했고, 후원금을 냈다. 의인증을 받아왔다.” 그렇게 기사가 막 뜨고 그랬어요. 그래서 공격을 받았는데,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에게 연락이 온 게 아니라 NCCK쪽으로 항의 전화를 하셔서 실제로는 저는 전화를 한통도 안 받았어요. 그분들이 저를 찾으러 막 쫓아 온 날도 있었는데 그날 외근이 있어서 사무실에 없어서 다른 분이 대신 받으셨죠. 사실은 저도 항의를 받았다는 걸 기사를 보고 알았어요. 아는 후배가 텔레그램으로 기사 링크를 하나 보내줘서 클릭을 했는데 ‘응? 내 이름이 있네? 언제 항의방문을 했지?’ 이렇게. 다행스럽게 NCCK 사무국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성소수자들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있겠지만 혐오자는 없어서 그런 분들이 왔을 때 별 영향은 없었어요. 그리고 워낙 NCCK는 공격을 자주 받아요. 이런저런 이유로.
신다애: 그런데 혐오하는 사람은 없어도 쉬쉬했으면 하는 사람은 있을 것 같아요. 박정범 목사님께 “조금 더 자제를 해라” 이런 말을 한 분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NCCK내에 계신분들을 포함해서, 목사님이 만나시는 주변의 기독인들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받으셨는지 궁금해요.
박정범: 사실 저도 그렇고 NCCK도 그렇고 자체 검열을 합니다. 무슨 행사를 하기 전에 ‘이건 어느 선까지 가야될까? 누가 맡아야 될까?’ 이런 것들을 미리 논의해요. 그리고 아무래도 비성소수자 지지자로서 갖는 두려움도 있는 것 같아요. 목사들이 특히나 그런 두려움을 많이 갖는 것 같고요. 임보라 목사님이나 자캐오 신부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꿋꿋이 지지의사를 밝히시잖아요. 오늘 차세기연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도 “이제 낙인찍히는 거 아니야?” “완전히 지지하는 목사로 낙인찍힌다” 이런 말 하는 분들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퀴어문화축제 때 동성애 반대한다면서 북치고 발레하고 하던 그 사람들이 너무 싫어가지고,.. 왜 저렇게까지 해야 될까? 그런 생각이 너무도 많이 들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저를 공격할 때 더 잘 대응하려고 더 공부하게 되는 게 있어요.
모리: 공부를 하시면서 목사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적은 없으신가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기 자신도 새롭게 이해하게 되잖아요.
박정범: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면서 엄밀히 보면 ‘나도 양성애자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씩 해요. 저는 친구들한테 질투를 많이 느껴봤거든요. 동성 친구인데, ‘왜 나 말고 다른 친구랑 더 친하지?’ 하면서요. 누구나 다 양성애자 기질은 있을 수 있겠다, 그 생각은 들더라고요. 특히 양성애자가 더 쉽다 다가왔던 게, 저 같은 경우는 여성성이 강해요. 어렸을 때부터 누나가 6명이 있었어요. 시골이었고 누나가 6명이었기 때문에 여성적으로 자랐어요. 공기놀이하면서 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여성적인 남성으로서 겪는 무언의 폭력들이 있어요. “남자가 왜 공기놀이를 해?”, “남자가 왜 고무줄놀이를 해?”, “남잔데 왜 여자애들이랑 더 친해?” 그런 게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초등학교 4학년 이후부터는 제가 네 안의 여성성을 막 밀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모리: 그렇게 안 하려고.
박정범: 네. 공기놀이를 막 피하려고 하고, 남자애들이랑 윽박지르고. ‘어떻게 하면 여성적인 것들을 안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저는 막 뛰어다니고 때리고 하는 게 너무도 싫었어요. ‘저 비생산적인 걸 왜 하냐, 나는 좀 쉬고 싶은데, 왜 때리고 도망가고 땀 뻘뻘 흘리고 들어와서 자고..’ 그게 너무 싫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런 내 욕구를 이해를 못 하니까 원하지도 않는 걸 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던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해가 되더라고요.
모리: 성소수자들이 어릴 때 느끼는 것도 거의 비슷해요. 저도 누나가 두 명인데, 작은 누나가 저보다 한 살 많아서 같이 자랐어요. 집에서 항상 누나랑 바비 인형을 갖고 놀고, 여장하고 놀고, 애들한테 항상 여자 같다고 놀림 받고. 계속 놀림을 받고 사람들한테 너는 왜 그렇게 여자같냐는 말을 들으니까 저도 제 여성성을 없애려는 노력을 엄청 했어요. 그래서 점점 여성스럽지 않게 되고, 놀림도 받지 않게 됐는데 나중에 뭐 한참 지나서 스물 다섯 쯤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나한테 엄청 폭력적인 거였구나.’ 세상에 맞추려고 내 본연의 모습을 다 깎아낸 거잖아요.
박정범: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어머니가 노란색 셔츠를 사주셨는데 엄청 울었어요. 4학년 때가 경계였나 봐요. “나 남잔데 왜 노란색 셔츠를 사갖고 왔냐” 저는 그때 여성성이 싫어져서 애들한테 놀림도 당하고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벗어나고 싶은데, 어머니가 너무 예쁘다고 사갖고 오셨는데 저는 그게 폭발해서 엄청 울었던 거죠. “나 노란색 안 입는다. 검은색이나 회색이나 파란색으로 바꿔 와라.” 이랬던 기억이 나요. 비슷해요. 누나들이랑 있을 때 누나들 머리 빗겨주고 놀아요. 나는 보고 배운 게 그거니깐 학교 가서 여자애들 머리 빗겨주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너 뭐하냐’란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죠. 초등학교 1학년 때도 그게 막 느껴져요. ‘쟨 뭐하는 거야.’ 처음엔 ‘왜 난 굉장히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데?’ 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아 이게 아닌 거구나’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그 후론 운동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서 내 안의 여성적인 면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 같아요.
모리: 가끔 밤에 길가다보면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술 먹으면 서로 손잡고 걸어가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은 술을 먹어야만 자기 친구 손을 잡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사실 그게 얼마나 슬픈 일이에요? 내 친한 친구인데, 손을 좀 잡을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못 잡고 있는 거잖아요. ‘남자끼린 손 잡으면 안되’, ‘남자는 그러는거 아니야’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그게 동성애 혐오랑 다르지 않거든요. 동성애 혐오가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에게 안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박정범 목사님 인터뷰 2부는 차세기연웹진 <물꼬기> 8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박정범 목사님은...
한신대학교와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2010년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의 간사로 사회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2013년에 NCCK 인권센터 사무국장 일을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正凡의 뜻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현재 바르게 살고 있진 않지만 평범하게는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첫댓글 마귀에 깨임에 빠진 불쌍한 자들입니다. 저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