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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겸전 다양성의 사상가 추사
글/학담스님
1. 이끄는 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건강한 상식인으로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식의 앎은 아는 것만 지키려는 한계가 있다. 이 땅 근대의 여명기 호남 땅을 중심으로 교류했던 다산(茶山) 추사(秋史) 초의(草衣)와 같은 분들에 대한 우리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초의선사 그러면 다도(茶道)의 대가, 추사선생은 추사체를 완성해 세상에 전한 천하명필과 같은 이해가 그 것이다.
초의 선사는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사회 끝 무렵 대흥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중흥성격의 경전주석불교 선교진흥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선교율(禪敎律)을 모두 겸비한 대종장(大宗匠)이었다. 최근 초의를 말하는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주로 초의를 다승(茶僧)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초의선사의 수행과 사상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 또한 추사연구자가 아닌 출가 승려로서 자료 면에서는 추사에 대한 상식의 이해를 크게 넘지 못한다. 그러나 필자는 다양성이 함께 공존하는 역사현실에서 소통의 사상가로서 추사를 같이 생각해봄으로써 오늘날 다른 것을 인정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상적 일방주의. 정치적 지역적 패권주의가 넘쳐나는 한국사회에 소통(疏通)과 화쟁(和諍)을 말해 보고자 한다.
화쟁은 다툼을 화해시킨다는 뜻으로 원효불교의 주요한 뜻이다. 불교의 세계관으로 보면 세계속의 갖가지 사물들은 각기 고립된 장속에 닫혀있지 않고 자기부정의 공한 개방성(空性)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 열려있고 걸림없이 소통되어 있다. 이를 화엄학은 ‘사물과 사물이 서로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라고 말한다
현실에서의 다툼은 이러한 삶의 진실에 눈감고 존재를 서로 고립된 것으로 보는 그릇된 견해. 자기 사고 자기가 본 것을 절대화하고 자기생각만이 옳다는 주장이 그 다툼의 뿌리가 된다.
자기 사고 주어진 지식의 상대성 무상성을 통찰할 때만 다양성의 상대적 가치들을 함께 거둘 수 있는 지혜가 나올 수 있으며 사람사이 서로 다른 견해의 맞부딪침 사람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킬 수 있다.
코끼리를 만져본 눈먼 사람들의 말을 예로 들어보자. 다리를 만진 자가 코끼리는 기둥 같다고 하고 배를 만진 자가 벽과 같다고 말하며 꼬리를 만진 자가 밧줄 같다고 말할 때 그 사고와 주장의 상대성을 살피지 않으면 세 주장의 다툼은 녹여 하나로 만들 수 없다.
대통으로 하늘을 볼 때 대통의 하늘이 하늘 아닌 것이 아니지만 대통의 하늘만을 하늘이라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원래 원효(元曉)는 불교가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보편철학이었을 때 교리논쟁의 화해를 위해 화쟁이라는 말을 썼다. 곧 동아시아 종파불교의 교리 논쟁속에서 연기로 있음(緣起有)을 가르치는 종파와 연기이므로 공함(緣起空)을 가르치는 종파의 주장이 가르침의 형식은 서로 모순되지만 그 가르침이 돌아가는 뜻은 중도(中道)로서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화쟁(和諍)을 말했다. 원효는 교리논쟁의 화쟁을 통해 전쟁하는 역사를 화쟁하고자 하였다.
지금 추사를 말하는 자리에서 왜 원효의 화쟁과 소통을 말하는가. 성리학(性理學)의 철학적 일방주의가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불교경전을 주석하고 초의선사 백파화상의 선학논쟁에 함께하고 스님들과 교류한 추사의 행적을 원효의 화쟁정신을 이땅 근대의 여명기에 실천한 사상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차별성을 지닌 다양한 것들의 개방과 대화를 가르치는 화쟁의 정신 소통의 정신이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사상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금 동서갈등 남북분단 사회에서도 추사와 같은 소통의 사상가 그 개방의 철학이 절실하다.
2. 추사(秋史)시대 지식인 사회의 몇 가지 동향
추사선생에게는 천하명필이라는 이름과 함께 통유(通儒)라는 칭호가 따라 다닌다. 통유란 유가의 학문에 통한 분이라는 뜻이다.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유학에 통달한 분이 불학에도 통달했다는 것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의 철학적 일당독재가 관철되어 왔던 조선사회에서 왜란과 호란 이전 같았으면 추사의 행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사약을 받든가 적어도 귀양살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추사시대는 도교와 불교에 대한 사상탄압은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있었으니 그에는 개혁군주 정조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동학과 서학에 대한 탄압은 이미 그 시대에 잉태되고 있었다.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의 저서 ‘기독교와 세계종교’에서 모든 고등종교로서 세계종교에는 자기철학을 스스로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고등종교의 교리와 인류역사 위대한 철학 안에는 모두 인간구원을 말하고 해탈을 가르치고 도덕을 말한다. 그러나 자기철학이 스스로를 넘어서는 지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언어에 갇혀 자기 언어를 교조화하거나 종교와 철학이 정치 지배 권력과 만날 때 자비(慈)와 어질음(仁)을 말하는 철학과 종교가 다른 신념체계에 따르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칼이 될 수 있다.
신유학으로서 성리학이 쓰는 성리(性理) 체용(體用)의 개념은 불교철학의 화엄학(華嚴學)과 천태학(天台學)등의 범주에서 빌려온 것이다. 태극 음양 오행설등이 원시유학에서부터 내려온 개념이지만 기존사상을 불교철학의 개념을 빌려 재구성해 자기 철학을 정비한데는 북송이 오랑캐나라 금에 멸망한 뒤 남송 지식인들의 이(夷)에 대한 배타와 적개심, 우리는 이(夷)와 다른 중화(中華)의 나라라는 의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오랑캐나라 학문인 불교가 말하는 형이상학과 우주적 세계관이 우리 중화에도 이미 있었다는 한족지식인들의 배타주의적 자긍심이 함께하고 있다. 성리학은 불교에 의해 격의(格義)된 유학이지만 유학은 성리(性理)를 불교와 다르게 절대주의화 하였다. 추사 당시는 유학 내부에서 이런 성리학에 대한 비판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을 채택했던 조선지배권력은 불교에 의해 격의된 유학으로 불교승려를 팔천(八賤)으로 전락시키고 도가와 불가를 모두 이단으로 배우지 못하게 했으며 중국 명조(明朝)에 유학의 새로운 해석학으로 자리 잡은 양명학(陽明學)을 불교의 심학(心學)인 선(禪)과 같은 것이라 하여 사문난적을 몰았다.
조선과 청의 전쟁인 병자 정묘 호란시 화이(華夷)의 세계관에 충실히 따르며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로 인식했던 성리학자들이 명에 대한 의리를 주장하며 주전파가 되고, 양명학자 최 명길이 홀로 외로이 주화를 표방하며 청군의 진격을 벽제관에서 멈춰 세웠던 과거 역사의 기록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살펴 볼 일이다.
추사시기 조선사회를 지배해 왔던 이러한 성리학 유일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개혁적 지식인들의 자연적인 흐름이었으리라 본다. 우리가 실학(實學)이라 부르는 신진 지식인들의 사상운동은 관념적 형이상학에 흐른 성리학으로부터 원시유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에 돌아가는 유학내부 반성운동의 성격을 띈다. 그들에게 새로운 시대 흐름에 대응하는 것은 원시유학에 돌아가는 것과 하나인 것으로 이해된 것 같다.
정 다산(丁茶山)은 성리학적 이념으로 불교를 배척했던 성리학파의 입장을 다시 뒤집어 성리학이 불교이기 때문에 반대하고 선진유학(先秦儒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정 다산에게 배웠던 추사는 실학을 수용하면서 양명심학 선학(禪學)에 뿌리를 두고 도불(道佛)을 넘나들고 불교계와 교류하며 당대 선학의 최고봉 초의와 백파의 선학논쟁에 참가하고 불교계의 일에 널리 동참하였다.
한편 불교계는 환성지안선사(喚惺志安禪師)가 금산사에서 천사백여 명의 승도에게 화엄경을 강설하다 역적모의로 몰려 제주도로 유배가 처형된 뒤 침체기를 걷다가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금강경화엄경주석불교 대중강설이 새롭게 일어나던 때였다. 그 중심에 초의 선사가 있다. 이런 시기 초의와 추사의 교류를 어찌 작은 일이라고 하겠는가.
일제강점기 삼일독립선언시 만해 한용운 선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용성선사(龍城禪師)의 저술에 귀원정종(歸源正宗)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억불숭유시기 불교에 대한 정주학의 비판과 20세기 초 밀려들어오는 서구종교의 배타주의에 대해 불교를 변론하기 위해 저술하였다고 그 서문에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한문저술인데 그 안에 불교의 출가제도를 비판하며 ‘불교는 인륜(人倫)을 저버린 종교가 아닌가’하는 물음이 나온다.
그에 대해 용성선사는 불교는 출가 재가를 아우르는 종교라고 답변하며 자기 자신의 출가동기도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는 금강경의 한 구절에 감동하여 출가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재가(在家)로서 도를 깨쳐 눈 밝은 사람(明眼人)을 들면서 신라 때 윤필거사(尹弼居士) 부설거사(浮雪居士)를 들고 조선조에서는 양명학자 이 건창(李建昌), 천태선학자(天台禪學者)로 술몽쇄언(述夢瑣言)을 지은 월창거사(月窓居士) 김 대현(金大鉉), 그리고 추사(秋史) 김 정희 세 분을 들었다.
용성은 민족운동가이자 경허선사와 더불어 한국불교 선맥의 대종을 반분한 선사이다. 그는 또 조선조 환성지안선사 이후 끊어진 대승보살계맥을 다시 계승한 분인데 그 계승의 뿌리가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은(大隱) 금담(錦潭 초의(草衣) 범해(梵海)의 대승계 중흥의 전통을 이었다고 말한다. 용성이 선율(禪律) 양면에서 초의의 계승을 말하고, 추사를 재가로서 눈 밝은 사람이라 크게 인정했으니 이 말을 어찌 가볍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또 선미 넘치는 몇 수 게송이 불유겸전 추사의 진면목을 다 보여주고 있는데 어찌 여러 말을 끌어들일 것이 있겠는가.
온 바닷물을 다 맛보지 않아도 한 방울이 짠 줄 알면 바닷물이 다 짠 것이며, 가마솥의 고기 맛은 한 점을 맛보면 그 고기 맛을 다 아는 것이다.
3. 추사의 불학과 불교계와의 교류
바위 아래 끝없이 솟구치는 샘물이
널리 산 가운데 벗들에게 베풀어주니
제각기 한 표주박을 지니고 와서
모두 다 온 달을 얻어서 가네
無窮岩下泉 普供山中侶
各持一瓢來 總得全月去
나는 출가승려로서 추사학의 전문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자료에 의거해 추사의 불학과 선학을 폭넓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과 소회,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 추사의 불학을 개략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위 시는 추사의 시이다. 내가 광주에서 중학교 다닐 때 당시 조선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던 이 영무선생의 관음사 불교 강의 때 이 게송을 들었다. 쉬운 한문의 시로 선미(禪味)가 넘치는 이 시를 어릴 때 듣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참선을 종(宗)으로 하는 소납의 뇌리에 추사의 시가 단순한 음풍농월의 글이 아니라 선게(禪偈)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흔히 추사의 차에 관한 글로 알려진 다음 짧은 시귀도 마찬가지이다
고요히 앉아 있는 곳
반쯤 마신 차에
향은 처음과 같고
묘하게 쓰는 때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
靜坐處 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짧지만 절창의 노래이다. 그리고 이 시는 성(性)과 이(理)를 만물의 존재에 근거가 되는 것(所以然)으로 설명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만물의 있음이 실로 있음 아닌 것(有而非有)으로 성품을 말하고, 사물이 인연 따라 변하되 실로 변하지 않음(隨緣不變)으로 성품을 말하고 바탕(體)을 말하는 불교의 세계관을 체득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통유(通儒)지만, 불교인으로서 나는 그를 유명불행(儒名佛行)의 사상가라 말하고 싶다.
이제 학계의 연구성과를 근거로 추사의 불교와의 교류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본고의 정리는 주로 최 완수 선생 번역의 추사집(秋史集)에 따른 것이다.
1815년 초의선사 추사를 찾아가 만나다.
1817년 추사 경주 무장사에 가 석비를 살피다.
1818년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짓고 쓰다.
해남 대둔사 천불전 천불상을 봉안하다.
1824년 창림사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증하다.
1828년 양주 회암사 지공 무학 두 대사의 비를 중건하다.
1830년 이장욱으로부터 불상을 받다.
1831년 추사 초의에게 편지를 보내다.
1835년 추사 대둔산 일지암으로 초의선사를 찾아가다.
1837년 초의 추사와 만나 그림으로 대화하다.
1838년 초의의 소개로 소치 추사를 찾아가 배우다.
1841년 추사 일로향실(一爐香室)의 편액을 초의선사에
게 보이다.
1843년 초의 추사의 적거 제주로 찾아가 반년을 같이
머물다.
추사 백파와 선학을 토론하다.
1846년 추사 화암사(華巖寺) 상량문 짓다.
1855년 화엄종주 백파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律師大機大用之碑)의 글과 비음(碑陰)을 짓다.
백파상찬병서(白坡像贊幷序)를 짓다.
1856년 봉은사 판전(版殿)의 편액을 쓰고 한달 뒤 추사
세상을 뜨다.
이 밖에 추사의 불교관계글로는 다음 문헌이 남아 있다
인도 지역에 관한 고찰(天竺考)
야보도천선사송 금강경 후기(題川頌金剛經後)
불설사십이장경 뒤에 쓴 글(題佛說四十二章經後)
위에 나타난 추사의 불교관련 행적에서 가장 특기할 일은 첫쩨 가야산 해인사가 장경각만 남고 다 타버렸을 때 추사의 부친이 거액의 사재를 시주해 복원불사를 주도하여 절 중수를 마친 뒤, 추사가 직접 중수기(重修記)를 짓고 쓴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 사상적인 일로는 당대 최고봉의 선학자 선운사의 백파긍선(白坡亘璇)과 대둔사의 초의의순(草衣意恂)의 선학논쟁에 함께한 일이다. 백파긍선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는 것이 그것을 나타낸다.
두 종장 모두 역사적 시각과 문헌비판의 안목까지 갖추어 논쟁하기에는 시대적 자료적 제약이 있었으므로 선학논쟁에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라는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선(禪)을 보는 안목에는 그 깊이와 넓이에 차별이 없지 않다.
선에는 본분사(本分事) 그대로의 실상의 뜻과 중생의 망(妄)을 돌이켜 참(眞)에 나아가는 방편의 뜻이 같이 있다. 모습에 모습이 없고 중생의 망상이 본래 공한 실상에서 보면 선은 선이라 할 것도 없지만, 중생을 해탈의 언덕에 이끄는 방편에서 보면 선은 선 아니라 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백파가 선(禪)을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 격외선(格外禪) 의리선(義理禪)으로 나누는 것은 선이 갖는 방편의 뜻을 실체화한 것으로 중국불교 종파선(宗派禪)의 법통주의와 선교(禪敎)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교판(敎判)을 교조화한 것이다.
백파가 보인 선의 구분은 중국 및 동아시아불교의 종파주의 국가주의의 성격을 살피지 않으면 그 진상을 알기 어렵다. 중국은 남북조 분열의 시기로부터 수당(隋唐)통일 왕조가 되면서 수당불학시대(隋唐佛學時代)라고 이야기 될 만큼 불교가 국가통합의 중심이념이 되었다.
당조이전에는 국가불교와 선종의 주도권이 천태(天台)에 있었다. 당조에 들어 국가권력은 기존 삼론(三論) 천태를 대체해 선(禪)과 화엄(華嚴)의 유심불교(唯心佛敎)를 중심이념으로 내세움으로 화엄종의 종사와 선종의 선사들이 국사가 되었다.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는 데 하택선사가 공헌함으로 현종은 하택선사에게 선종7조의 칭호를 바치고 하택은 천태가의 출신이지만 육대전의설(六代傳衣說) 로 달마를 비조로 하는 선종의 법통을 주장하게 된다. 하택까지는 여래선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의 이름이었지만 현종 사후 황제들은 하택의 법통을 부정해야할 정치적 필요성을 안게 됨으로 이제 최상승선의 이름은 조사선이 된다.
조사선은 경전의 근거 없이도 중국조사들의 깨침과 그 분들의 오도의 기연만으로 불교의 법통을 세울 수 있다는 중국불교의 자신감과 국가권력의 요구가 만들어낸 선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조사선풍에서는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는 선은 시대의 조류속에서 의리선(義理禪)으로 비판된다. 의리선으로 가장 혹독하게 비판된 선사는 하택신회선사이다. 그는 ‘달마로부터 육조 까지 가사와 바루를 전했다(六代傳依)’는 설화를 만들어 달마선종의 법통을 세운 분이지만 조사선의 가풍이 세워지면서 선종 오종(五宗)의 법통 밖으로 내쳐진다. 그리고 알음알이종사(知解宗師)라는 선사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게 된다.
이처럼 선종의 법통과 여래선 조사선등의 이름이 황제권력과 국가불교의 유착관계에서 나온 것을 살피지 못하고 그 이름에 상응한 고유한 선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선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초의선사는 선교(禪敎) 이분법적 교판을 인정하지 않고 선(禪)을 달마법통주의에 갇힌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의리선을 그냥 비판하지 않고 뜻과 이치를 세워서 뜻을 잊고 말을 잊어 깨달음에 나아가게 하는 것을 교육 방법론으로 크게 인정했다.
추사에게도 경전을 보도록 탁마했으며 그 스스로도 천태의 마하지관을 열람하였다. 추사와 초의 사이 오고간 편지 글에 대승법문(大乘法門) 지관(止觀) 삼관(三觀)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초의와 추사 사이에 공유된 불교관이 조사선 일변도의 불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법안(法眼) 김 민영선생이 동국대에서 자신이 소장한 불전을 전시하는 모임에 가서 초의선사가 마하지관을 학습한 기록물을 보고 깜작 놀란 일이 있다. 그는 조선조 억불의 시기 달마선의 법통주의가 지배하는 풍토에서 월창거사 김 대현을 이어 천태법문을 선종 안에 다시 가져온 분이다.
불교에서 공(空)은 있음(有)이 있음 아님을 공이라 하고 거짓이름은 공이 공 아님을 거짓이름(假名) 이라 한다. 공을 들면 거짓이름과 중도가 공 아님이 없고 거짓이름을 들면 공과 중도가 거짓이름 아님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서 죽임(殺)을 말해도 살림(活)을 안고 있는 죽임이고 살림을 말해도 죽임을 안고 있는 살림이다. 백파가 조사선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의 구절에 대해 살림의 구절, 죽임의 구절, 살림과 죽임을 같이 보이는 구절(殺活齊示)로 나누는 것도 그가 실참해서 법의 눈을 뜬 것 같지는 않다.
추사는 백파와 추사의 논쟁에서 초의에 손을 들어주고 실참실오(實叅實悟)의 선사로도 초의를 크게 인정했다. 추사는 초의에게 편지를 보내며 늘 선(禪)이라는 글자를 붙여 ‘선사는 펼쳐 보십시요(禪展)’ ‘초의선방(草衣禪房)’ ‘초의선실(草衣禪室)’이라 썼지만 백파의 비명에는 선사라는 말을 쓰지 않고 화엄종사(華嚴宗師) 대율사(大律師)라 함에서도 알 수 있다.
추사는 때로 초의에게 따끔한 경책의 시를 보내기도 하지만 초의에게 조사공안(祖師公案) 법문이나 경전의 뜻에 막힌 것이 있으면 정중하게 묻고 배웠으며 동년배의 초의선사를 때로 존자(尊者)라는 가장 높은 칭호로 불렀다. 그리고 백파긍선에 대해서도 논쟁의 문답에는 날카롭게 비판하되 문손들이 그 비명을 청할 때는 흔쾌히 승낙하고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종사로 그를 기려주었다.
백파와 초의의 선학논쟁은 조선조 끝 무렵 불교가 억불의 장막을 헤치고 자신의 사상적 정체성을 당대 사회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다. 추사가 그 논쟁의 한복판에 같이 했다는 것은 그가 사대부로서 유(儒)이되 푸른 산의 선류이자 도인(靑山道人)임을 나타낸다.
4. 추사의 몇 편의 선미(禪味)가 있는 시(詩)
추사는 유년기에서부터 만년 임종에 이르기 까지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어 왔지만 특히 적거생활 등 정치적 시련기에 스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스님들이 방문하여 생활상의 도움을 줌으로써 그 고난의 시기를 좀 더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제주 유배생활 중에는 초의와 가까운 대둔사 스님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된 듯하다. 스님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벗은 초의선사지만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끔 초의의 법형되는 호의선사(縞衣禪師)의 이름도 많이 등장한다.
이제 추사의 선미가 넘치는 몇 편의 시를 살핌으로써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최고의 경지를 성취한 불유겸전 통유로서의 그의 삶을 조망하기로 한다.
1) 초의에게 주다
任爾傍參笑百場 了無碍處卽吾鄕
依人山鳥空暄寂 款客溪雲自煖凉
最是一床無別夢 詎能同味有他腸
雜花鋪上休葛藤 恐把摩訶說長短
그대가 옆에서 보다 실컷 웃어 재낄 수 있겠지만
걸림 없는 곳을 바로 알면 곧 바로 내 고향이라네.
곁에 사람 산새도 부질없이 떠들다가 이내 고요하고
나그네 반기는 개울과 구름도 절로 더워졌다 서늘하네.
모두다 한 평상에 누워 있음이라 다른 꿈이 없으니
어찌 같은 맛에 달리 느끼는 다른 창자 있게 할 건가.
섞인 꽃 늘어진 곳에서 뒤얽힌 생각을 쉬어야하니
큰 법의 왕을 가지고 길다 짧다 말할까 두렵네.
우주의 온갖 것은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으며, 생겼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생기며, 추위 더위가 엇바뀌고 사물이 오고 간다. 그러나 오되 옴이 없고 가되 감이 없으며 나되 남이 없고 사라지되 사라짐이 없다. 티끌 수 만물이 시끄러운 것 같지만 모두 공한 진리의 평상에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짐이라 다른 꿈이 없다. 그러므로 만물이 있되 공한 줄 알면 만법이 서로 걸림 없는 진리의 평상 내 고향 땅에 돌아 갈 수 있다
이 추사의 시는 다음 옛 선사의 시를 다시 노래해 초의께 공감과 인정을 구한 것이다.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皂白 隨處現靑黃
크나큰 법의 왕이여
짧음도 없고 긺도 없네
본래 검지 않고 희지 않지만
곳을 따라 푸르고 노란 빛 나타내네
2) 신헌에게 보냄
紫燕飛來繞畵梁 深談實相語瑯瑯
千言萬語無人會 又逐流鶯過別檣
자줏빛 제비 날아 와 그림 그린 대들보 맴돌며
깊이 실상을 말하는 그 소리 곱게 울리네
천 마디 만 마디 그 말을 아는 사람 없어
또 꾀꼬리 따라 날아 다른 담장 넘어 가네
이 시는 추사가 신헌에게 소치를 소개하며 보냈다는 시로서 가장 불교적 감성이 넘치는 시이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만법의 연기의 진실 밖에 진리는 따로 없다.
그러므로 사물의 있는 모습에 집착해도 진리를 볼 수 없고 모습 밖에 따로 구해도 진리를 등지게 된다. 이 뜻을 옛 선사들은 ‘사물에 접할 때 곧 참됨이다(觸事而眞)’고 말하기도 하고 천태선사는 ‘한 빛깔 한 냄새도 중도실상 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고 말한다. 제비 지저귀는 소리 밖에 실상이 없다. 그러나 ‘저 재비소리 아는 이 없다’는 데 착안점이 있으니 들리는바 재비 소리에 실로 들을 것이 있다하면 실상을 등지게 된다는 뜻이다.
추사의 시에 학담도 한마디 붙이리라.
山鳥喃喃談實相 花花草草顯祖意
是法住法世間常 東去西來都莫言
산새는 재잘거리며 실상을 말하고
우거진 꽃과 풀은 조사의 뜻 나타내네
세간의 이 법 법 자리에 머물러 항상하니
동으로 가고 서에서 옴 모두 말하지 말라
3) 관음사에서 혼허에게 줌
卓午山頭戴笠行 姓湯人忽喜歡迎
遊方昔入菩提界 詩偈今聞瀑布聲
銀地三觀由願力 天龍一指繼燈明
燒猪燒筍追前夢 江上秋風渺渺情
솟구쳐 얽힌 산머리에 삿갓 쓰고 걸으니
시승 탕씨 같은 분이 홀연 기쁘게 맞이하네
여러 곳 노닐다가 옛날 보디의 땅에 들어서
지은 게송 지금 들으니 폭포소리 같아라
깨끗한 곳 세 살핌은 원의 힘 말미암으니
구지선사 한 손가락 잘라 깨우쳐 준 법문에
중도의 뜻 깨달아서 법의 등불 이었도다
돼지 굽고 죽순 굽던 지난 앞의 꿈을 쫓으니
강위 가을바람처럼 그 뜻은 아득하고 아득해라
혼허는 아마 추사가 제주 적거생활 때 한라산 첫머리에 있던 관음사(觀音寺)에 들렀다 만난 스님으로 아주 시를 잘 지었던 스님인 것 같다.
추사의 이 시는 혼허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 혼허의 오도(悟道)의 체험을 다시 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출가 전 여러 곳을 유랑하며 정신적 방황을 겪은 듯하다. 그는 출가해서 천태의 공가중 삼관(三觀)을 공부하다 구지선사가 어린이 손가락 자른 법문에서 깨쳐 추사에게 말하니 추사가 그 일을 시로 쓴 것이다.
지금 만물의 있음이 있음 아닌 줄 살피면 공관(空觀)이고 공이 공 아님을 살피면 가관(假觀)이며 공과 거짓 있음이 평등한줄 살피면 중도관(中道觀)이다. 그러나 생각 일으켜 사물을 살피면 선의 살핌(禪觀)이 아니니 지금 한 생각이 날 때 만법은 생각인 만범이므로 생각을 돌이켜 생각에 생각 없되(無念) 생각 없음도 없음(無無念)을 깨달으면 이것이 삼관의 공부다. 혼허가 천태지관으로 선을 닦으니 오랜 생 원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지는 천룡선사의 제자로 자신의 선을 천룡선이라 말했다. 그는 누가 도를 물으면 언제나 한 손가락(一指)을 세워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어린이가 구지선사를 흉내내 누가 도를 물으면 선사처럼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어떤 이가 와서 선사께 말했다. ‘저 어린이도 도를 잘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구지선사가 어린이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인가.’
어린이가 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칼로 잘라 버렸다. 어린이가 아픔을 못 이기고 소리치며 달려 나가자 선사가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도인가’. 아이가 평소 버릇처럼 손가락을 세우다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보고 홀연히 깨쳤다.
위 시는 구지의 이야기에서 삼관을 깨친 혼허의 오도를 노래한 것이다.
위 시에 학담도 한 노래를 붙이리라.
游方迷路一遠客 出家發願修三觀
俱脂一指出兩邊 江上風月依舊明
여러 곳 다니며 길 헤매던 먼 길 나그네
출가하여 큰 원을 내 세 살핌 닦았네
구지의 한 손가락에서 있고 없음 벗어남이여
강 위의 바람과 달은 옛 그대로 밝도다
4) 난초그림에 붙임
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난초 스무 해토록 그리지 않았음이여
어쩌다 성품의 하늘 베껴 내었네
문을 닫고 찾고 찾으며 또 찾는 곳
이것이 유마거사 둘이 아닌 선이로다
참으로 바로 풀기 어려운 시이다. 그러나 산승은 이 시를 선(禪)적 화론(畵論)의 정수를 표현한 것으로 본다. 이 시에서 유마거사의 ‘둘이 아닌 선(不二禪)’이란 유마경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의 이야기를 받은 것이다. 불이법문품에서 서른 두 보디사트바들(三十二菩薩)이 유마거사의 병 문안차 와서 둘이 아닌 법문을 설하니 어떤 보살은 생각과 생각없음이 둘 아님을 설하고 어떤 보살은 물질과 공이 둘 아님을 설하고 어떤 이는 모습과 모습없음이 둘이 아님을 설하고 어떤 이는 함과 함이 없음이 둘 아님을 설했다. 문수보살이 말로 말과 말없음이 둘 아님을 설하자 유마 곧 비말라키르티거사(淨命居士)는 잠자코 말하지 않음으로 둘 아닌 법문을 보였다는 것이 유마 불이선(不二禪)의 경전적 근거이다.
이 시의 뜻을 이해하려면 물질을 없애고 공(空)이 아니고 생각을 끊고 생각없음(無念)이 아니고 말을 끊고 말없음이 아닌 연기론의 세계관을 살펴야한다. 위의 시에서 찾고 또 찾는다는 말이 무엇일까. 저 모습의 세계에서 모습을 근거해주는 제1원인을 찾고 찾아서 그 밑 뿌리가 없는 줄 아는 것이 시에서 찾고 찾음의 뜻이다. 안으로 주체의 마음도 그 온 곳을 찾아도 그 일어난 첫 모습이 없음(念無初相)을 아는 것이 찾음의 뜻이다.
만법에 뿌리가 되는 바탕이 없으므로 만법은 불꽃처럼 다시 일어 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화엄학은 사의할 수 없는 연기의 세계 곧 부사의법계(不思議法界)라 한다.
이제 다시 추사의 시를 살펴보자. 찾고 찾음이란 스무해 그림 그렸으나 그림 그린 자취 찾을 수 없음을 말한다. ‘성품 가운데 하늘’이란 땅과 마주하는 하늘이 아니라 하늘땅이 공한 진여를 성품의 하늘이라 한 것이니 하늘이 아니되 하늘 아님도 아니고 땅이 아니되 땅 아님도 아닌 천지의 실상을 성품의 하늘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의 첫 구절을 20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고 풀면 추사의 뜻과는 십만팔천리다.
추사는 이십년간 난초와 글을 쓰고 그리기를 셀 수 없이 하였다. 파지를 지금 같으면 몇트럭을 실어 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난초를 치다 이십년간 실로 한 장의 난초그림 그린 것 없는 뜻을 알아차리고 그리되 그림 없이 난초를 치게 되니 이것이 성품 가운데 하늘(性中天)을 그려냄이고 유마거사 ‘둘이 아닌 선의 문(不二禪門)’에 들어선 것이다. 둘이 아닌 선은 지금 20년 그려온 그림에 실로 그림이 없음을 알아 홀연히 실로 그림이 없이 성품의 하늘 자체인 한 폭의 난초그림을 그린 그 자리이다
참고로 내가 20여 년 전 수채화가 강 연균 화백의 전시회에 갔다가 도록을 선물 받고 쓴 축하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所描景無住 畵也亦無得
此處如是描 眞景水彩畵
그리는바 경치는 머묾이 없고
그림도 또한 실로 얻음 없어라
이 얻음 없는 곳에서 이 같이 본떠
참된 경치를 물과 물감으로 그려 내네
5) 초의에게 보냄
眼前白喫趙州茶 手裏牢拈梵志華
喝後耳聞飮箇漸 春風何處不山家
눈앞에서 분명히 조주의 차를 마시면서도
손에는 브라마나 집착의 꽃 굳게 잡고 있네
악 외침 뒤 귀로 듣고 이 차 차츰 마시게 되면
봄바람 어느 곳이 푸른 산 고요한 집이 아니리
이 시는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시로서 차에 관한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조주선사의 ‘차마시고 가라(喫茶去)’는 공안(公案)과 세존이 꽃을 들고 온 브라마나(黑氏梵志)에게 ‘놓아라(放下着)’ 고 말씀한 공안의 뜻을 노래하여 초의선사에게 보인 게송이다.
조주선사는 도량에 오래 머물렀다가는 사람이나 지금 있는 사람이나 뒤에 오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똑 같이 ‘차 마시고 가라’고 했다.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은 중생이 늘 하는 일이다. 그러나 ‘왜 마셔야하고 차 먹는 일이 무엇인가’인가 묻고 ‘이 차 맛이 어디서 오는가’를 물으면 그야말로 은산철벽(銀山鐵壁) 앞에 서는 일이다.
차 마시고 밥 먹음이여 ! 먹고 마시는 나와, 한 잔의 차 한 덩이 밥에 같고 다른 모습이 없어야 먹고 마실 수 있음인가, 그렇다면 조주의 차 마시라함은 일상의 일 가운데서 겁 밖의 소식(劫外消息)을 보라함인가.
세존께 어느 날 두 손에 꽃을 든 브라마나가 찾아 왔다. 세존이 그에게 ‘놓아라’라고 하시니 브라마나가 한 손의 꽃을 놓았다. 또 ‘놓아라’ 하시니 다른 손의 꽃을 놓았다. 세존이 또 ‘놓아라’하니 브라마나가 물었다. 두 손의 꽃을 다 놓았는데 무엇을 놓아라 하십니까.
그러자 세존이 말씀했다. ‘그대의 여섯 아는 뿌리(六根)와 밖의 여섯 티끌경계(六境)와 가운데 여섯 앎(六識)을 한꺼번에 놓아버리라. 그러면 그 곳이 그대가 나고 죽음을 마친 곳이다’
말씀 아래 브라마나가 깨달았다.
추사의 시에 돌아가 살펴보자. 지금 우리는 눈앞에서 분명히 조주가 권한 맑은 차(趙州淸茶)를 마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차 마시는 나와 차와 차맛의 있는 모습에 가려 조주가 권한 그 차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두 손 모습의 꽃은 내려 놓았으나 집착의 꽃 쥐고 있는 브라마나와 같다, 악(喝) 외치는 선사의 꾸중을 듣고서야 비로소 조주의 방에 들어가 조주의 차를 마실 수 있으니 그 때 홍진만장 티끌세상 그 어느 곳인들 고요한 법의 도량이 아니겠는가.
이 시 또한 조주의 차 마시라함의 공안을 노래해, 차를 보내 준 초의께 감사와 법의 기쁨 함께 즐기는 뜻을 보인 것이다
추사의 시에 학담 또한 한 노래를 붙인다.
喫茶去兮是何事 劫外劫內一時收
淸平一曲恒茶飯 後來衆生門庭主
차 마시고 가라함이여 이 무슨 일인가
겁 안과 겁 밖을 한 때에 거두네
맑고 평탄한 가락 늘 차와 밥 먹음이니
뒤에 올 중생이 곧 법의 뜰 주인이네
5. 열린 사회를 위해 다시 추사를 생각한다
차별성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사상적 일방주의, 특정집단의 패권주의 패거리문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앞 시대의 문화적 성취에 대한 창조적 계승과 사회구성원의 통합과 소통은 어느 시기나 우리들의 주된 과제가 되고 관심이 되어야한다.
조선사에서 우리에게 닥친 미증유 국제전쟁의 참화는 조선지배권력의 성리학적 일방주의, 숭명 사대에 갇힌 외교정책의 편협성과 무관하지 않다. 동학 서학에 대한 참혹한 탄압과 국권상실의 치욕도 자기 주체를 지키면서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의 유연성결여, 맞부딪히는 문명의 힘을 조화하고 조정할 수 있는 자기역량의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 할 수 있다.
추사는 시서화에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유(儒)이지만 불사(佛事)에 동참하고 불문(佛門)에 드나들며 불행(佛行)을 같이 했다. 당시 대둔사에서는 12대종사 13강사가 나와 경전대중강설 주석서발간이 이어지고, 대은 금담 초의 범해로 전승되는 보살계맥 중흥등 불교부흥운동이 벌어졌고 강진 해남등에 다산 추사가 머물며 불문과 교류하면서 근세문예부흥의 움직임이 호남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역사의 고난과 시련의 때 가장 상처받았던 땅에서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희망의 싹이 돋아난 것이다.
추사는 초의 호의등과 교류했을 뿐만 아니라 선율병운(禪律幷運)을 주장했던 대둔사의 대은등 스님들의 요청으로 율(律)의 조사상을 그렸다하니 아마도 자장 진표의 진영일 것이다. 또 백파와의 논쟁에서 초의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백파의 비문을 지어 화엄종사로서 백파를 크게 현창하였다. 당시 종파선의 임제 법통주의에 갇혀 법맥타령이나 하고 오도송 전법게나 말하던 조선조 말엽 불교의 풍토에서 그 누구나 보일 수 없었던 선교율(禪敎律) 회통의 불교관을 추사가 몸으로 보인 것이다.
통유로서 불교를 본질에 까지 실천(實踐躬行)한 추사의 행리는 원찰(願刹)을 가졌던 집안내력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아마 장성해서 청나라에 들어가 북경에서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류한 것이 아마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청나라는 불교국가이지만 유교를 보호육성하고 서학(西學) 곧 천주교를 매개로한 서양문물도 폭 넓게 받아들였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지배권력의 중심이었지만 만몽장한(滿蒙藏漢) 연합정권의 성격을 띈 체제이다. 황제는 누루하치의 직계 만주족이었지만 황후는 몽고족까지 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정신적 지도는 티베트의 라마들이 담당했다. 얼마 전 까지 중국 자금성의 정전에는 한자 만주어 티베트어 세 문자가 Tm여 있었으며 천단(天壇)은 한자 만주어 티베트어 몽고어 네 문자로 표기되어있었으나 지난 북경 올림픽 이후 모두 한자로만 표기되었다.
이런 청나라에 가서 추사는 큰 문화적 충격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리학이 내세우는 화이(華夷)의 세계관 그 허구성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추사의 북경에서의 체험이 그의 국제주의적 시각과 사상의 개방성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추사가 우리 역사 속에서 전형으로 삼았던 유학자가 조선성리학자가 아니었으리라 본다. 지금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조선의 현인은 열여덟 현인인데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조의 안향 정몽주 그리고 나머지 열 네분이 조선성리학자이다.
조선 유학의 비조는 설총이다. 원효께서는 요석궁의 인연으로 얻은 혈육 설총을 불문이 아니고 유가의 길을 걷게 하여 이 땅 유학의 비조가 되게 하였으니 여기에 원효의 위대성이 있다.
그 시대 속에서 백성의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의 철학으로서 유학을 세우는 것이 붓다의 자비정신의 실천이라 본 것이다. 설총은 스승 원효의 뜻을 받들어 이두를 집대성해 육경을 이두로 가르쳐 국민 교육의 길을 열고 향가를 지어 백성을 계몽하였다. 최 치원 또한 불유선(佛儒仙) 삼가에서 모두 현인으로 받드는 분으로 화엄종 현수법장 의상대사의 전기를 짓고 나말여초 격동기에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선사들의 비문(四山碑)을 짓는등 사상적으로 고려건국에 일조하였다.
유학자로서 추사의 행리는 설총 최 치원의 개방적 유학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떤 철학이 자기본질에서 이탈할 때 그 뿌리에 돌아가 비본질화된 말페를 반성하는 것이 반성적 성찰의 한 모습이다. 추사의 행보를 보면 조선성리학자들의 닫힌 성리학 절대주의를 조선유학의 비조인 설총 최치원의 개방적 유학을 통해 해소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유학자들도 조정암 이퇴계 이율곡을 공(公)으로 부르면서도 설총을 홍유후(弘儒侯)로 최치원을 문창후(文昌侯)로 부르므로 두 분이 조선유학의 뿌리임을 말하고 있다. 뿌리에 돌아가는 것과 새 시대에 대응하는 것은 결코 두 길이 아니다.
유일주의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 시각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유일주의와 유일주의의 충돌은 상극과 갈등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지금 이 땅의 역사는 분단의 족쇄에 갇힌 체 우리 삶의 터전은 동서 문명과 종교의 대결장이 되고 있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힘의 충돌장이 되고 있다. 다시 원효의 화쟁정신이 아니면 상극의 힘을 상생의 새 힘으로 바꿀 수 없고 추사가 보여준 개방과 소통의 사상이 아니면 새로운 미래 하나됨의 평화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화쟁과 소통이 이 시대 역사를 고민하는 우리 모두, 우리 민족이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야할 시대의 현성공안(現成公案), 더불어 사는 대중의 집단적 화두(話頭)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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