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743]白賁无咎(백비무구)
白賁无咎(백비무구)
賁=꾸밀 비, 클 분, 성낼 분, 땅 이름 륙.
주역강해(講解) - 효사(爻辭) - 6
上九는 白賁면 无咎리라.
(상구) (백비) (무구)
象曰白賁无咎는 上得志也라.
(상왈백비무구) (상득지야)
●상구는 희게 빛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상에 가로되, '백비무구' 는 위에서 뜻을 얻음이라.
★뜻풀이
산화비괘 아래로 부터 여섯번째 효에 대한 풀이이다.
상구는 賁괘의 끝에 있는 강양한 군자이다.
꾸밈이 극에 이르니 극즉반(極則反)하여 본래의 소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구가 국사(國師)의 位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소박한 모습으로 실질을
숭상하며 살아가게 하였으니,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뜻을 얻은 것이다.
①모든 물건의 질은 乾의 색인 白과, 坤의 색인 黑에서 나왔으니, 백과
흑이 만물의 본바탕 색인데, 이제 '白賁' 가 되어 본래의 색을 얻었으니
허물이 없게 되는 것이다.
②비괘는 각 효사마다 '賁' 자가 들어있다. 이것은 비괘가 음양의 상비관계로
잘 꾸며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을 덜거나 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웃과 더불어 꾸미는 것이다.
즉 초구와 육사만이 정응이므로 바르게 만나는 것이고, 나머지는 이웃끼리
꾸미는 것이다.
[출처] 3.주역상경30괘 - 22.산화비(山火賁) - 11|작성자 수석
산화[山火] 비괘(賁卦)
象曰 山下有火
백비무구(白賁無咎) =하얗게 꾸미면 허물이 없다 =꾸미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 흴 백 꾸밀 비 없을 무 허물 구
요즘은 주류가 기본은 멀리한 채 외면의 화려함만 강조한다. 주역 64괘 중 산화 비괘는 수식과 화려한 치장보다 순순한 본질을 더욱 강조한다.
아무 수식과 치장을 하지 않은 순수한 백비가 수식하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순백의 꾸밈도 역시 순수한 수식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수식이 본질을 이기고, 꾸밈이 원칙을 능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화려한 수식의 경쟁에서 벗어나 기본과 본질에 충실한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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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이윤지(감이당)
山火賁(산화비)
賁, 亨, 小利有攸往.
비괘는 형통하니,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약간 이롭다.
初九, 賁其趾, 舍車而徒.
초구효, 발을 꾸밈이니, 수레를 버리고 걷는다.
六二, 賁其須.
육이효, 수염을 꾸민다.
九三, 賁如, 濡如, 永貞吉.
구삼효, 꾸미는 것이 윤택하니, 오래도록 유지하고 올바르게 하면 길하다.
六四, 賁如, 皤如, 白馬翰如, 匪寇, 婚媾.
육사효, 꾸미는 것이 소박하며 백마를 타고 나는 듯이 달려가니
도적이 아니면 혼인할 짝이다.
六五, 賁于丘園, 束帛戔戔, 吝, 終吉.
언덕 위의 사냥터에서 꾸미는 것이니, 묶은 비단을 재단하여
늘어놓은 듯이 하면 부끄럽지만 결국에는 길하다.
上九, 白賁, 无咎.
상구효, 꾸미는 것을 질박하게 해야 허물이 없다.
연구실에서 하는 공부에는 텍스트를 읽고, 자신이 읽고 사유한 바를 글로 써서 그 글을 도반들과 나누는 과정이 필수다. 처음 연구실에 왔을 때 글을 쓰고 발표를 하며 코멘트를 해주는 이 과정을 보고 무척 놀랐었다.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가르치시고 공부해온 선생님들의 학인들의 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비판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누군가는 농담으로 ‘즉문즉욕’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직접 겪어보니 이러한 단도직입적인 코멘트는 순간 마음이 저릿하게 아프지만 궁극적인 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하고 고마운 조언이었다.
여러 도반과 함께 공부를 해나가면서 그렇게, 나의 글에 대한 스승과 도반들의 코멘트를 듣고, 나 또한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며 코멘트를 해주는 것이 중요한 공부의 일상이 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도반이 지나가는 말로 “윤지샘은 항상 좋게만 말씀해주시잖아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나름대로 성실히 코멘트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게 좋은 말로만 들렸을까? 생각해보니 내게는 책을 읽고 한편의 글을 써온다는 것은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고 그래서 가능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격려와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있었다. 도반은 이런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을 텐데, 나는 이 문제를 달리 더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갔다. 결국 나중에 이런 태도로 코멘트를 한다는 것에 크게 혼쭐이 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공부의 장에서 글이란 모름지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누군가의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는 건 어떤 것이겠는가. 그건 상대의 글이 좋게 바뀌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글이 바뀌기를 바란다는 건 글쓰기로 사유를 전환해 그가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니 코멘트는 글로 드러난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이자 상대가 스스로 보지 못한 문제의 지점을 비추어 주며 이걸 좀 보라고 알려주는 소통의 제스추어이다. 그러니 우리는 코멘트라는 특별한 형식을 통해 마치 마음의 조명을 비추듯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조명을 비추고 빛을 비추면 그 대상이 밝게 드러나 보인다. 이렇게 빛을 비추어 상대를 밝고 환하게 하는 관계가 주역의 산화비 괘에도 나온다. 산화비의 괘상은 불과 문명을 상징하는 리괘가 아래에 있고, 산을 상징하는 간괘가 위에 있어 밝은 빛이 아래서 산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다. 도심에서 문화재나 건축물에 조명을 드리울 때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걸 볼 수 있는 데 이렇게 하면 대상이 은은하고 아름답게 돋보인다. 문명의 빛이 산 아래쪽에서 위를 비추며 퍼지는 비괘처럼 말이다. 문명의 빛을 상징하는 하체의 리괘는 예를 의미하기도 하니 비괘는 예의로써 관계를 비춘다는 의미도 된다. 예의란 사람들이 모일 때 그 관계를 적절한 방식으로 꾸미는 것이다. 산화비괘의 비(賁)가 꾸미고 장식한다는 의미인 것도 그런 맥락이다. 사실 어떤 것을 잘 꾸미고 예의를 갖추는 것은 빛으로 밝게 비추듯 본질의 내용과 효용성이 더욱 잘 드러나도록 한다. 그런 면에서 글에 대한 코멘트도 상대와 소통하며 섬세한 지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관계에 대한 꾸밈이자 예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코멘트가 되는가? 이 문제는 비괘의 핵심인 꾸밈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비괘는 여러 방식의 꾸밈에 관해 얘기하는데 그중에서도 초구는 자신과 상대를 위하는 진실한 꾸밈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초구는 양효로써 양의 자리에 있어 강한 자이지만 낮은 자리에 위치해 스스로 절도를 지키며 수양하고 다스리는 자다. 그래서 수레를 탈 수 있어도 사양하고 자신의 두 발로 걷는다. (賁其趾, 舍車而徒) 수레란 요즘으로 치면 고급 세단이니 수레를 탄다는 건 뽐낼 수 있고 편하고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다. 반면에 걷는다는 건 소박하게 자신의 두 발로 가는 것이다. 양효인 초구는 가까이 있는 육이와 비(比)의 관계에 있고 멀리 육사와는 응(應)의 관계에 있는데 초구가 가까이 있는 육이와 어울리는 것은 손쉬운 수레를 타는 것이고 멀리 있는 육사에게로 가는 것은 힘들어도 두 발로 걷는 것이다. 언젠가 학기 말 에세이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같은 조원이었던 도반의 글에 대해 코멘트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도반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글의 구성과 문제의식에서부터 끙끙대고 있었는데, 수정을 거쳐 발표한 그의 글은 여전히 많이 부족했지만, 이전의 거친 초고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 나아진 편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아졌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코멘트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코멘트를 하는 나를 보고 스승님께서는 크게 혼을 내셨다. 글을 수정하느라 애쓴 도반에게 격려를 해주고 싶었던 것인데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이었을까? 도반에게 좋은 말을 하던 내 마음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엔 그런 코멘트를 함으로써 그에게 잘 보이고 싶고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렇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는 코스프레도. 그런데 그런 가벼운 격려와 위로로 상대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겠다는 건 길을 가는데 수레에 올라타 그럴듯하게 자신을 내세우며 쉬운 방식으로 관계를 꾸미겠다는 마음이다.
공부의 장에서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한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성찰하며 성장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성찰이란 자신의 오랜 습을 되돌아보고 붙들고 있던 전제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에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상대에게 그렇게 코멘트를 해준다는 것은 관계에 어렵게 발을 내딛는 것과도 같다. 상대가 어떤 관점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생각하고 이해해보려는 것은 그 관계를 깊이 있고 진지하게 꾸미려는 시도다. 수레를 마다하고 자신의 발을 꾸미는 초구는 칭찬이나 격려로 관계를 꾸미지 않는다. 초구는 오히려 그런 피상적인 꾸밈을 버림으로써 소박하고 진실하게 관계를 꾸민다. 초구의 상전은 ‘수레를 버리고 걷는 것이 의리상 수레를 탈 수 없기 때문’ (舍車而徒 義弗乘也)이라고 했다. 도반에게 코멘트를 주는 것의 의리(義)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당시 나의 가벼운 코멘트는 수레에 얼른 올라타는 것과 다름없었다. 수레를 버린 게 아니라 의리를 버린 셈이니 혼이 날 만도 했다. 반면 상대가 자신을 성찰하기를 바라는 깊은 마음의 코멘트는 비록 날 선 비판처럼 거칠어 보일지 몰라도 진지하게 그 관계를 꾸미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누군가의 글에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줄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자신을 비추어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충고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수레를 타듯이 나를 내세우는 허세와 피상적 관계를 지향하려는지, 아니면 소박하더라도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를 향해 발로 걷고 있는지가 보인다. 산화비괘의 초구는 글을 나누고 코멘트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도반이 서로를 어떻게 꾸며주는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몸소 걸으며 보여주는 듯하다.
출처: https://bookdramang.com/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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