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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하늘 길을 떠나는 내게
너희의 수군 거림은 들리지 않는다.
웹스터John Webster,《말피의 공작 부인 The Duchess of Malfi》4막
샤르트르 시대가 끝났으니, 와이번 칼리지를 간단히 와이번으로, 아니면 와이번 학생들이 부르는 대로 더 간단히 ‘콜Coll'이라고 부르겠다.
콜에 입학한 것은 내 외적인 삶의 영역에 일어난 가장 멋진 일이었다. 샤르트르에 다닐 때 우리는 콜의 그늘 아래 살았다. 우리는 종종 시합이나 운동경기, 골드베리 경주의 결승 도착 장면을 보기 위해 콜로 가곤 했다. 이렇게 기회가 있어 콜에 갈 때마다 우리는 현기증이 났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청년들의 무리와 그들의 눈부시게 세련된 분위기를 보고 어쩌다 난해한 대화 토막들을 주워듣다 보면, 사교계 입문을 한 해 앞둔 소녀가 유서 깊은 사교계‘시즌’을 맞이한 파크레인을 구경하는 심정이 되었다. 게다가 왕족들, 그 근사한 운동선수들과 감독학생들은 모두 세속적인 화려함과 권력과 영광을 한몸에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에 비하면 포고 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왕족 앞에 일개 학교 선생이 무슨 대단한 존재겠는가? 학교 전체는 이 살아 있는 신들을 경배하기 위한 거대한 신전이었고, 나는 누구보다 그들을 경배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소년이었다.
와이번 같은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왕족Blood'이 뭐냐고 물을 것이다. 여기에서 왕족은 학생 귀족을 가리킨다. 이 말이 낯선 독자들은, 이 귀족 계급이 바깥 세상에서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 두어야 한다. 집안이 좋거나 부자라고 해서 왕족이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와이번 칼리지 시절 우리 기숙사에 있던 유일한 귀족은 왕족이 되지 못했다. 반면에 내가 입학하기 전에 아주 수상쩍은 인물의 아들 하나가 왕족 언저리까지 이른 적이 있었다.
왕족의 반열에 오르려면 학교에 다닌 지 상당한 기간이 지나야 하다는 자격조건이 필요했다. 물론 오래 다녔다고 해서 다 왕족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입생은 확실히 대상에서 제외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자격은 뛰어난 운동 실력이다. 그 부분에서 뛰어난 학생은 자동적으로 왕족이 된다. 운동 실력이 좀 모자랄 때는 잘 생긴 외모와 개성이 한몫을 할 수 있다. 물론 옷차림도 도움이 되는데, 이때 옷차림은 학교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어야 한다. 현명한 후보생이라면 마땅히 올바른 복장을 하고, 올바른 속어를 쓰며, 올바른 것들을 찬미할 줄 알고, 올바른 농담에 웃을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바깥 세상에서처럼, 그 특권 계층의 언저리에 있는 자들은 아첨으로 그 계급에 기어 들어가려고 기를 쓴다.
내가 듣기로는 일종의 양두 체제로 움직이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대부분 지지하거나 최소한 용인하는 왕족 계급이, 교사들에게 임명받은 공식 지배 계급인 감독학생들과 대치한다는 것이다. 그런 학교의 선생들은 대개 최고학년에서 감독학생들을 임명함으로써 지식층intelligentsia의 권리를 주장하게 하려 든다. 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감독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왕족이었고, 따라서 꼭 특정 학년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1학년에서 바닥을 기는 열등생도 콜의 대장ㅡ우리는 ‘두목’이라고 불렀다ㅡ이 될 수 있었다(그러나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통치 계급이 있었고, 그 계급에 모든 권력과 특권과 명성이 집중되어 있었다. 어쨌든지 간에 저학년 학생들의 영웅적 숭배를 한몸에 받으며 어떤 체제하에서도 자신들의 기민함과 야망으로 성공해 내는 그들에게 교사들은 공적인 권력을 실어 주었다. 여러 특권들과 복장, 우선권, 위엄 등 학교생활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그들의 지위를 강조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알다시피 이렇게 되면 상당히 강력한 계급이 형성된다. 게다가 학교와 일상생활의 다른 점 하나가 이 계급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과두 체제로 통치되는 국가의 경우, 그 극소수의 지배층에 편입된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으며, 개중에는 사람들을 크게 선동할 만한 기질을 가진 인물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혁명을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 그러나 콜에서 가장 낮은 사회 계급을 구성하는 학생들은 너무 어렸고, 따라서 혁명을 꿈꾸기에는 너무 약했다. 중간 계급ㅡ종살이하는 하급생 신세는 면했지만 왕족은 되지 못한 학생들ㅡ만이 혁명의 주역이 될 만한 물리적인 힘과 인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왕족 계급에 오르겠다는 꿈이 싹트고 있었다. 따라서 반란을 일으켜ㅡ이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ㅡ자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권력을 무너뜨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쪽보다는, 기존 왕족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위험을 감수하는 쪽보다는, 기존 왕족들의 비위를 맞추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쪽을 더 선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왕족 승격의 희망을 버릴 때쯤이면, 이미 졸업이 눈앞에 다가와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와이번의 체제는 난공불락이 되었다.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대항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왕족들에게 반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숭배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콜에 들어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사립학교의 위계질서만큼 매력적인 모습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보여 주는 귀족 체제가 어디 있겠는가? 왕족들은 ‘그 앞에 엎드려 복종하고 싶다’는 마음, 즉 열 세 살 소년이 열아홉 살 소년에게 품는 자연스러운 존경심, 팬이 영화배우에게 느끼는 감정, 시골 아낙네가 공작 부인에게 느끼는 감정, 신참내기가 고참에게 느끼는 경외심, 조무래기가 경찰에게 느끼는 두려움 같은 것을 어린 신입생에게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누구든 학교에서 보낸 첫날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우리 기숙사는 배처럼 높고 좁게 생긴 석조건물이었다(건축적으로 볼 때 엉망이 아닌 단 하나의 건물이기도 했다). 우리가 주로 생활하던 층에는 직각으로 이어진 아주 어두운 석조 복도가 있었다. 복도에 딸린 문들을 열면 공부방ㅡ사방 약 6피트 정도의 네모난 방으로서, 두세 명의 학생들이 함께 썼다ㅡ이 나왔다. 예비학교에서 온전한 자기 공간을 가져 보지 못한 소년에게는 그 자체가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에드워드 시대에 살고 있던 터라(문화적으로)에드워드 식 거실의 혼잡한 양상을 가능한 한 그대로 흉내내서 공부방을 꾸몄다. 오로지 좁은 방을 채우겠다는 일념으로, 책장과 구석장, 자질구레한 물건들과 그림들을 꽉꽉 채워 놓았던 것이다.
같은 층에 좀더 큰 방이 두 개 더 있었는데, 하나는 올림푸스 신들의 회의장이라 할 만한 ‘감독학생실’이었고, 또 하나는 ‘신입생 공부방’이었다. 신입생 방은 전혀 공부방 같지 않았다. 공부방보다 넓고 어두웠으며 아무 장식이 없었다. 고정된 탁자 둘레에 움직일 수 없는 긴 의자들만 죽 둘려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열두어 명 풋내기들이 전부 이 방에 남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중 몇 명은 ‘진짜’공부방으로 갈 것이고, 나머지는 이 볼품없는 공간에 한 학기 정도 머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첫날 저녁에 맞이한 엄청난 주사위 게임이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운명이었다.
고정된 탁자 주변에 모여 있는 동안 우리는 대부분 조용히 앉아 있었고 어쩌다 말을 할 때도 속삭임으로 대신하곤 했는데, 그 사이사이 문이 잠깐씩 열리곤 했다. 그때마다 학생 한 명이 얼굴을 들이밀고 씨익 웃음을 지은 다음(우리를 보고 웃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 웃는 것이었다)사라졌다. 한번은 그 웃는 학생의 어깨 위로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더니 킬킬 웃으면서 “오호! 나는 너희들이 뭘 기다리는지 알지”라고 말했다. 나만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형이 선배로서 콜의 풍습을 미리 알려 준 덕분이었다. 들여다보고 웃은 녀석들 중에 왕족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어렸고 생김새에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다. 사실 그들은 현재 세도를 부리고 있거나 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기숙사 색시’들로, 우리 중 누가 자신들의 경쟁자 내지는 후계자가 될 것인지 가늠하고 있는 중이었다.
‘기숙사 색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먼저 ‘기숙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와이번의 모든 생활은 소위 ‘콜’과 ‘기숙사’라는 두 개의 구심점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신입생은 콜의 예비학생이 될 수도 있었고 단지 기숙사의 왕족이 될 수도 있었으며, 콜의 천민(즉 최하층민, 인기 없는 학생)이 될 수도 있었고 단지 기숙사의 천민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콜의 색시가 될 수도 있었고 단지 기숙사의 색시가 될 수도 있었다. ‘색시’란 예쁘장하고 여성스럽게 생긴 작은 소년을 일컫는 말로서, 이들은 한두 명의 선배, 대개는 왕족들의 애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의 경우 그렇다는 것으로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지배층은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편의시설들을 독점하고 있었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개방적이었다. 왕족들은 중간 계급 학생에게 이런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는 데 덧붙여 정절까지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층 계급 사이의 연애는 ‘주제넘은 짓’이 아니었다. 적어도 심각할 정도로 ‘주제넘은 짓’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든지 외투의 단추를 잠그지 않고 다니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우리 학교의 신들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색시의 존재는 학교생활을 통해 앞으로의 공공생활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색시는 노예와 달랐다. 그들의 애정을 얻으려면 강요할 것이 아니라 유혹해야 했다(거의 항상 그랬다). 그렇다고 꼭 매춘부 같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이 상급생과 맺는 관계는 애욕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주 감상적인 관계로서,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봉사료도 받지 않았다(실제 지폐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어른들의 사회에서 정부情婦들이 그러하듯이, 주변이 아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비공식적인 영향력도 행사했으며 인기와 특혜도 누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공공생활을 준비시켜 주는’역할을 했다. 아널드 런Arnold Lunn 이 쓴 《해로우 사람들Harrovians》을 보면, 해로우에서는 색시들이 정보원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는 그런 색시가 없었다. 내 친구 하나가 하급 색시와 공부방을 같이 썼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 친구는 색시의 애인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가끔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는 것(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말고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학교 체제의 가장 큰 약점은 무진장 지겹다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기숙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짐작하려면, 온 동네가 일주일 내내 연애 문제를 놓고 웅성거리며 킥킥거리고 끝나고 난 다음이면 연애 이야기가 점잖은 대화의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누가 누구와 “어떻게 되었고”누구의 애인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등, 누가 누구의 사진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언제 얼마나 자주 어쨌다는 등, 어느 날 밤에 어디에서 어쨌다는 등……. 이것이 이른바 ‘그리스 전통’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악습에 전혀 미혹되지 않았으며, 사실은 이런 일에 말려든다는 상상조차 하기가 힘들다. 물론 콜에서 조금만 더 오래 지냈다면, 다른 부분뿐 아니라 이 부분에서도 이 체제가 보장하는 바 ‘정상적인 학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나는 모든 것이 지겹기만 했다.
군대에서 보내는 첫 몇 날이 그렇듯이, 콜의 첫 몇 날은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친 듯 찾아다니는 일에 다 투자되었다. 나의 첫과제는 내가 속한 ‘클럽’을 찾는 것이었다. 클럽은 의무적인 운동경기를 치르기 위해 학생들에게 할당되는 집단이었다. 클럽은 기숙사 조직이 아닌 콜 조직에 속해 있었고, 따라서 내가 어디 속해 있는지 찾아보려면 ‘콜 게시판’에 걸린 명단을 보아야 했다. 일단은 게시판이 있는 장소를 찾고, 그 다음으로 나보다 더 잘난 학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500명이나 되는 명단을 훑어 내리는 동시에 10분 안에 해치워야 할 또 다른 일을 놓치지 않도록 한쪽 눈을 시계에 고정시켜야 했다. 나는 내 이름을 찾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나야 했고, 진땀을 흘리며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내일 또 어떻게 이름을 찾나, 이름을 못 찾으면 어떤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질까 전전긍긍했다(그런데 어떤 작가들은 왜 걱정 근심이 어른들의 전유물인 양 말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어른들이 보통 1년 동안 겪는 우환atra cura보다 학생이 보통 1주일 동안 겪는 우환이 더 많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근사한 일이 벌어졌다. 감독학생실 문가에 서 있던 프리블Fribble을 만난 것이다. 그는 단지 기숙사 왕족에 불과했고 그나마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엄청나게 대단해 보였다. 그는 마른 몸매에 웃기 잘하는 젊은이였다. 나는 그가 실제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루이스”하고 그가 소리질렀다.
“네가 어는 클럽인지 알고 있어, 나하고 같은 B6야.”
온통 절망에 빠졌다가 갑자기 의기양양해지는 그 아찔한 변화라니!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진 프리블의 자비와 선심! 군주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해도 그처럼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충실하게 B6게시판으로 가서 내 이름이 그날 오후 경기자 명단에 끼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내 이름은 늘 빠져 있었다. 운동경기라면 질색이었으니 그야말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타고난 손재주가 서툰 데다가 벨젠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내내 운동이라고는 한 것이 없었으므로, 다른 선수들을 만족시키기는커녕 나 자신이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운동실력조차 애당초 갖추지 못한 것이 내 실정이었다. 나는(상당수 학생들처럼)운동경기를 세금이나 치과 의사 같은 인생의 필요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두 주일 정도는 구름에 떠 다니는 기분으로 편히 지냈다.
날벼락은 그 후에 떨어졌다. 프리블이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다른 클럽에 속해 있었다. 내가 구경도 못해 본 게시판에 내 이름이 한 번 이상 올랐다. 나는 ‘클럽을 빼먹는’중차대한 죄를 저지른 셈이 되었고, 그 벌로 콜의 왕족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두목에게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 두목ㅡ빨강 머리, 여드름투성이의 ‘보리지Borage' 인간 ’포릿지Porridge'인가 하는 녀석ㅡ에게는 전혀 불만이 없다. 그에게는 매질을 하는 것이 매일의 일과 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큼은 꼭 밝혀야만 이 이야기의 요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나에게 처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러 온 밀사(두목보다 조금 지위가 낮은 왕족)가 내 죄의 가증스러움을 드러낸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넌 누구냐? 하찮기 짝이 없는 인간, 포릿지는 누구시냐? 이곳의 지존至尊.”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도 나는 이것이 요점에서 벗어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끌어낼 수 있는 훌륭한 교훈은 두 가지나 있었다. “이제 너는 스스로 정보를 알아볼 수 있는데도 남의 말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될 거다.”이것은 아주 유익한 교훈이다. 혹은 “왕족이라고 해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법 있냐?”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넌 누구냐? 하찮기 짝이 얺는 인간”이라는 것은 맞는 말일지는 몰라도 이 일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말이다. 이 말에는 내가 클럽을 빼먹은 것이 오만방자하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이런 말을 했는지 한없이 의심스럽다. 새로운 사회에 들어와 완전히 얼이 바진 풋내기가, 그것도 자기의 모든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 계급이 다스리는 사회에 들어온 풋내기가 ‘지존’의 코를 바뜨리기 위해 첫 주부터 작심을 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왜 어떤 시험관은 “이런 식의 답안을 내놓는 것은 문제 출제자를 우롱하는 짓”이라는 식으로 말할까? 그는 그 낙제 후보생이 정말로 자신을 우롱하려고 그런 답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또 다른 질문은 내가 겪은 이 작은 재난에서 프리블이 담당한 몫에 대한 것이다. 그의 거짓말은 나를 골탕먹이려는 장난질이었을까? 우리 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나에게 앙갚음을 한 것일까? 아니면(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쪽인 것 같다)우리 선조들이 ‘떠버리’라고 통칭했던 바 아무 생각 없이 입이 거의 저절로 움직여 하루 종일 참말이고 저짓말이고 떠들어대는 그런 치였기 때문일까? 프리블의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내가 처한 곤경을 본 이상 앞으로 나와 자기 죄를 고백해야 마땅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급수가 아주 낮은 왕족으로서 지위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프리블이 나보다 위에 있는 그만큼, 버릿지Burradge는 프리블 위에 있었다. 이런 처지에 앞으로 나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지위 향상이 우선되는 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짓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학교는 공공생활의 준비인 것이다.
와이번에 대해 공정히 말하려면, 프리블은 우리 기준에서 볼 때 왕족 계급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형은 자신이 학교에 다닐 때라면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서, 프리블은 신사도에 어긋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색시들의 사랑을 얻으려면 강요해서는 안 되고 유혹해야 한다는 말을 이미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리블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파슬리Parsley라는 학생을 괴롭히기 위해한 학기 내내 감독학생의 권위를 남용했다. 이것은 프리블에게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자잘한 규칙이 워낙 많아 하급생이라면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무슨 규칙이든 어기게 되어 있었으므로 감독학생은 자기가 찍은 학생을 거의 언제든지 적발할 수 있었던 반면, 하급생은 상급생에게 종속되어 있는 체제하에서 한순간도 자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파슬리는 아무리 급수가 낮은 왕족이라도 거절하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파슬 리가 정절이 있는 인간이어서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프리블을 거절한 것이라면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슬리 역시 “이발소 그림만큼 속된‘인간으로서, 형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잘나가던 색시였으나 내가 있었던 당시에는 한창때가 지난 퇴물이었다. 파슬리는 프리블에게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강압을 행사한 왕족은 프리블밖에 없었다.
전반적을 평가할 때, 그리고 그토록이나 특권을 누리고 싶어하고 아부받고 싶어하는 청소년기의 유혹을 고려할 때, 우리 학교 왕족 계급은 그리 나쁜 축에 속하지 않았다. 카운트Count는 친절 하기까지 했다. 젠체하는 광대에 불과한 패롯Parrot은 ‘길쭉이’로 불렸다. 스톱피쉬Stopfish는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도덕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하급생일 때 많은 상급생이 그를 색시로 삼고 싶어했지만(나도 전해 들은 말이다)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예쁘지만 쓸모가 없어. ‘그림의 떡’이지”라는 것이 와이번 학생들이 그에게 내린 평이었다.
가장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물은 아마 테니슨Tennyson일 것이다. 그가 좀도둑이라고 해서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실제로 산 것보다 많은 타이와 양말을 들고 오는 그를 보면서 오히려 재주가 좋다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가 제일 잘 쓰던 처벌 방식, 일명 ‘후려치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그가 선생님들에게 “단지 뺨을 한 때 때리려 했을 뿐”이라고 사실대로 진술한 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피해자의 왼쪽 귀와 관자놀이와 뺨이 문설주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하게 세워 놓고, 오른쪽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우리는 그가 ‘야드 크리켓’이라는 토너먼트 경기(드러내 놓고 강요했던 경기, 또는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를 기획해서 신청금을 거두어들이고는, 경기를 열지도 않고 돈을 돌려주지도 않은 일을 두고 몰래 쑥덕거렸다. 그러나 이것은 무선전신 시대에 일어난 일이고, 감독학생이 된다는 것은 역시 ‘공공생활의 준비’인 것이다.
또 왕족들은(테니슨까지도)술주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기 1년 전에는 선배 왕족들이 가끔 술에 절어서 대낮부터 기숙사 복도에 퍼져 있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어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기숙사가 엄격한 도덕 재무장 정신으로 충만해 있던 시절에 입학했다. 감독학생들은 내가 들어간 첫 주 내내 기숙사 도서관에서 그 점에 대해 연설을 거듭했다. 도덕 개혁가들이 타락한 학생을 적발할 시에는 우리 모두 얼차려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도 곁들여졌다. 테니슨은 이때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는 멋진 베이스 목청을 가지고 있어서 합창단에서 독창을 했다. 나는 그의 색시들 중에 한 명을 알고 지냈다.
그들 모두 편안히 잠들기를, 독을 품은 하급생들의 저주보다 더 지독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프레스와 솜므가 그들 대부분을 삼켜 버린 것이다. 좋은 시절이 이어졌을 때에는 그들 모두 행복했거만.
여드름투성이의 노회한 얼리지Ullage 에게 매을 맞은 것 자체는 전혀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다. 진짜 골칫거리는 프리블 덕분에 내가 유명인사, 즉 클럽을 빼먹는 위험한 새내기 녀석이 되어 버린 데 있었다. 적어도 나는 테니슨이 나를 표적으로 삼은 주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이에 비해 덩치가 컸고, 덩치 큰 촌뜨기는 선배들의 표적이 되게 마련이다. 또 나는 운동경기 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무엇보다 최악의 조건은 내 얼굴이었다. 나는 “그 표정 좀 걷어치워”라는 말을 듣는 부류의 사람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번 우리 삶에 정당함과 부당함이 뒤섞여 있는 경우에 부닥치게 된다. 물론 우쭐거리고 싶은 마음으로, 또는 기분이 나빠서 잘난 척하는 표정이나 공격적인 표정을 지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의도가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그 표정 좀 걷어치워”라는 들었던 때는 주로 내가 아주 비굴하게 굴 때였다. 내 선조 중에 자유민이 있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표정이 드러나기라도 했던 것일까?
이미 암시한 바대로, 상급생이 하급생을 종처럼 부리는 체제는 왕족들이 어떤 규칙도 거스르지 않고 하급생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하급생을 부리는 체제는 학교마다 다르다. 어떤 학교에서는 왕족들이 각자 자기 하급생을 두고 부린다. 대부분의 학교 이야기에서 흔히 묘사하는 체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관계는 때로ㅡ잘은 몰라도 아마 때로는 정말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ㅡ기사와 종자의 관계, 즉 한쪽에서 봉사하면 다른 쪽에서는 체면 유지와 보호라는 보상을 해 주는 상호 유익한 관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장점이 무엇이든 간에 와이번에서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우리 학교의 체제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노동시장처럼 비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도 콜은 공공생활을 준비시켜 주었다. 상급생 밑에 있는 소년들 전원은 일종의 노동자 대기소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왕족 전원의 공동재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족은 자신의 군사훈련단 복장을 솔질하거나 윤내고 싶을 때, 구두를 닦고 싶거나 공부방을 ‘정리’하고 싶을 때, 또는 차를 마시고 싶을 때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우리 전원이 달려갔고, 그는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학생에게 일을 맡겼다. 훈련단 복장 손질ㅡ이 일은 몇 시간씩 걸렸고, 그것을 끝내고 나면 자기 복장도 손질해야 했다ㅡ은 가장 하기 싫은 ‘부역’이었다. 구두 닦는 것 자체는 그리 성가신 일이 아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 그 일이 주어지느냐가 문제였다. 그 일은 장학금을 받아 높은 학년에 배정된 탓에 아무리 노력해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 나 같은 학생에게는 중요하기 짝이 없는 시간대에 부과되었다. 하루 수업을 무사히 감당하느냐 여부는 아침 식사 후부터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금쪽 같은 40분, 즉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함께 번역한 문단들을 흝어 보는 시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은 구두약 바르는 부역에서 벗어나야만 할 수 있었다. 물론 구두 한 켤레를 닦는 데 40분이 다 들었던 것은 아니다. 정작 시간을 잡아먹는 일은 다른 하급생들과 함께‘구두 창고’앞에 줄을 서서 솔과 구두약 얻을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지하실의 전체적인 외양과 어둠, 냄새, 손이 곱을 듯한 추위(거의 1년 내내 계속되었던)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그렇게 넉넉하던 시절에 하인도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학교에서는 구두와 장화를 닦는 공식적인 ‘구두닦이’를 두 명 고용하고 있었고,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모두(자기 구두와 왕족들의 구두를 매일 닦았던 우리 하급생들까지 모두)그 구두닦이들에게 팁을 주었다.
영국의 독자들아면 그 이유를 짐작하겠지만(다른 독자들은 다음 장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처럼 하급생을 부려먹는 제도를 점점 혐오하게 되었노라고 쓰려니 부끄럽고 쑥스럽다. 사립학교 제도를 진정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지쳤다”는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마차 끄는 말처럼,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어린애처럼(거의 그 정도로)지쳐 버렸다. 하급생 부려먹기 외에도 많은 것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나는 덩치가 컸지만 체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수업은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당시 나는 엄청난 치통을 않고 있어서, 아주 여러 날 밤을 욱신욱신한 고통에 시달렸다. 최전선 참호 안 말고는(거기서도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와이번에서 겪은 것 같은 통증과 지속적인 피곤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 그 무자비한 날들이여, 아침에 눈을 뜰 때의 공포여, 다시 취침 시간이 되기까지 한없이 펼쳐지던 사막 같은 시간이여! 또 상급생들에게 시달리지 않더라도 운동경기를 좋아하지 않는 소년은 학교에서 거의 자유시간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는 것은 단지 조금 관심 있는 일에서 전혀 관심 없는 일, 실수하면 더 가혹하게 처벌받는 일, 그런데도 관심 있는 척 가장해야 하는 일(이것이 가장 힘들었다)로 옮겨 가는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가장해야 하는 것, 내게는 너무나 지겨운 일인데도 끊임없이 관심 있는 척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나를 지치게 했던 것같다. 아무 사전준비도 없이 13주 동안 연속해서 열광적인 골프광들과 밤낮 생활해야 한다고ㅡ본인이 골프광이라면 낚시광이나 신지론자들, 복본위제론자,프랜시스 베이컨 신봉자, 혹은 자서전을 좋아하는 독일 대학생들 틈에 끼어 있다고ㅡ상상한다면, 게다가 그들 모두 권총을 차고 있어서 언제라도 대화에 흥미를 잃는 듯하면 곧바로 쏘아 버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내 학교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강심장 초우복Chowbok(《에레혼Erewhon》의 등장인물)조차 이런 운명 앞에서는 움찔하지 않았던가. 운동경기와 연애담이 유일한 화제였는데, 나는 둘 다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둘 다 관심 있는 척해야 했다.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로 잰 듯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인간ㅡ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인간ㅡ이 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남다른 학생은 혹독한 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보다 운동경기에서 뛰는 것을 더 좋아했으리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오산이다. 클럽 활동을 빼먹는 것은 많은 학생들에게 분명히 신나는 일이었다. 클럽 활동을 빼먹으려면 담당 선생님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그 단순 소박한 서명은 위조하기가 쉬웠다. 재주 있는 모사꾼은(나는 그런 모사꾼 중에 한 명을 알고 있었다)위조 서명 사업을 벌여 상당히 많은 용돈을 벌 수 있었다.
학생들이 운동경기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게 된 데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요인은 축구 리그전을 보러 가는 군중의 열광과 똑같은 종류의 순수한(실용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열광이었다. 직접 경기에서 뛰고 싶어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어도, 경기를 구경하면서 콜이나 기숙사 팀의 승리를 대리 경험하고 싶어 하는 학생은 많았다. 둘째로, 이 자연스러운 감정은 모든 왕족과 거의 모든 교사들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이런 문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따라서 열광의 감정이 있는 학생은 한껏 더 부풀려야 했고, 없는 학생은 억지로 꾸며 내야 했다. 크리켓 경기를 할 때면 하급 왕족들이 관중석을 순찰하면서 환호가 ‘해이해질’때마다 적발하여 처벌했다. 네로 황제가 노래할 때마다 듣는 이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론 왕족들이 즐기는 마음으로 오락 삼아 경기를 하는 데 그쳤다면 아마 왕족 계급 전체가 붕괴했을 것이다. 그들은 관객이 있어야 했고, 각광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서 셋째 요인이 등장한다. 아직 왕족은 되지 못했지만 운동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에게 운동경기는 본질적으로 ‘출세 수단moyen de parvenir'이었다. 클럽 활동은 나에게도 오락이 되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도 전혀 오락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테니스 클럽에 나가는 기분으로 운동장에 나간 것이 아니라 무대공포증에 걸린 소녀들이 오디션을 보러 나가듯이 운동장에 나갔다. 그들은 긴장과 초조, 눈부신 희망과 메스꺼운 공포에 시달렸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 첫 단에 발을 걸칠 수 있다는 통지를 받을 때까지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통지를 받아도 평화는 누릴 수 없었다. 계속 전진하지 않으면 곧 뒤처지기 때문이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그 당시, 조직적이고 강제적인 운동경기는 학교생활에서 놀이라는 요소를 거의 다 빼앗아 가 버렸다. 문자 그대로의 놀이 시간은 전혀 없었다. 경쟁은 너무 치열했고, 상급은 너무 번쩍거렸으며, ‘실패의 지옥’은 너무 가혹했다.
‘놀’수 있었던(운동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유일한 학생은 아일랜드 출신의 귀족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규칙에서 예의 취급을 받은 특별한 경우였다. 귀족이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길들일 수 없는 아일랜드인이자 천성이 무정부적인 친구여서 어떤 사회도 그에게 족쇄를 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첫 학기부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밤이면 인근 도시로 수상쩍은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여자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별 악의 없는 싸움질이나 저속한 삶, 모험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권총을 차고 다녔다. 내가 그 점을 잘 기억하는 것은, 그가 한 발만 장전한 채 갑자기 공부방으로 뛰어들어와 장전되지 않은 탄창 쪽만 발사하는(이것이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그가 발사 횟수를 얼마나 정확히 세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런 짓이(하급생 부려 먹기와는 달리)지각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거부하지 못할 종류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행동은 교사와 왕족 모두에 대한 도전으로서,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짓이었고 악의도 없는 짓이었다. 나는 그 총잡이 친구가 좋았다. 그런데 그도 프랑스에서 죽었다. 그 친구가 왕족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설사 왕족이 되었다 해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화려한 각광이나 사회적 성공에 개의치 않는 친구였다. 그는 그런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콜을 거쳐 갔다.
폽시Popsyㅡ누군가의 하녀였던 예쁘장한 빨강머리 아가씨ㅡ도 ‘놀이’의 한 요소로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폽시가 잡혀서 우리 기숙사로 끌려왔을 때(카운트가 주동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통 킬킬거리고 깍깍 소리를 지르느라 난리였다. 그애는 너무도 상식적인 처녀아이여서 왕족에게 ‘정절’을 바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만 잘 맞추면 그애를 꼬셔서 모종의 해부학 수업을 해 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거짓말이었을 수도 있다.
교사들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선생님 한 분은 다음 장에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사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교생활에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부모들에게(더구나 교장 선생님들에게)납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학생에게 일어나는 일에 교사들이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기숙사 선생님은 올곧은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를 아주 잘 먹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그는 학생들을 아주 신사적으로 대해 주었으며 캐묻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밤에 가끔씩 기숙사를 순찰했지만, 언제나 장화를 신고 쿵쿵 소리를 내고 다녔고 문 앞에서는 잔기침을 했다. 그는 첩자 노릇도 하지 않았고 흉을 깨뜨리지도 않았으며 정직했다. 우리는 그와 공생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 가면서 와이번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증오의 진짜 해악은 깨닫지 못했다. 나는 점점 더 현학적인 인간이 되어 갔다. 즉 지적으로 아는 척하는 사람 내지는 교양인(나쁜 의미에서)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자.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내가 지쳤다는(이것이야말로 와이번이 남긴 전체적인 인상이었다)말을 반복해야겠다. 자는 것만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누워 있는 것, 사람들의 소리에서 벗어나는 것, 더 이상 가장하지도, 얼굴을 찌푸리지도, 회피하지도, 살금살금 다니지도 않는 것, 그것만이 최고의 소원이었다. 아침이 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잠만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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