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사고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련 '체르노빌 원전 참사'. 지금부터 35년 전인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쯤 우크라이나(당시 소련연방내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첫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소련 당국은 이 사고를 쉬쉬하며 덮으려고 하는 바람에 더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르노빌 사고'는 인류 최악의 참사중 하나인 만큼, 지금까지 서방에선 다큐멘터리성 영화로 적잖게 다뤄졌다. 대부분이 소련당국에 의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원전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고, 참사의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고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로 제작됐다.
가장 최근에 화제를 모은 작품이 지난 2019년 미국 HBO에서 방영한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이다. 진실에 가장 근접한 '영상물'이었다는 평가.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 당국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러시아 영화 '체르노빌' 포스터
체르노빌 원전 사고 35주년을 맞아 오는 30일 국내에 개봉되는 러시아 영화 '체르노빌 1986'(원 제목은 체르노빌 Черно́быль) 은 지금까지 서방에서 제작된 영화와는 그 궤를 조금 달리한다. 사고 당사자의 눈으로 본 '원전 참사와 극복 과정'이다.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한 영웅적인 인간애를 담고 있다. 35년전 소비예트(소련) 체제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와 풍경, 삶과 남녀간의 사랑 방정식 등을 배경으로 깔았다.
당대 러시아의 최고 배우중 한명으로 꼽히는 다닐라 코즐로프스키가 메가폰을 들고(감독) 최악의 원전 폭발 사고에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영웅'들의 희로애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소방관 알렉세이 카르푸쉰(Алексей Карпушин)역을 맡았다. 한마디로 코즐로프스키 주연·감독의 재난 영화다.
영화속 소방관 알렉세이는 발레리, 보리스와 함께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해 실제로 방사능 오염수 속으로 뛰어든 실화속 주인공이다. 우크라이나에선 '체르노빌 영웅 3인방'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체르노빌 1986'은 10년만에 만난 여자친구와 행복한 삶을 꿈꾸는 평범한 한 소방관이 '영웅'이 되기까지 겪어야 하는 고뇌와 역경, 반전을 소비예트 시대의 일상 속에서 보여준다. 사고 당시의 충격적인 상황과 목숨을 건 용기 속에 피어나는 휴머니즘은 원전 재난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했다는 평이다. 그것은 감독의 연출 의도와 맞닿아 있다. 코즐로프스키 감독은 "그 엄청난 사건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떤 선택으로 이끌었으며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쁘리뺘치' (Припять, 체르노빌 원전에서 3km 떨어진 도시)에서 소방관 알렉세이가 옛 연인인 미용사 '올가'(옥사나 아킨쉬나 Оксана Акиньшина 분)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곧 수도 키예프로 전근을 갈 알렉세이는 올가와 그녀의 아들 '료샤'(Леша, 알렉세이의 애칭)를 데리고 키예프로 가 함께 사는 행복을 꿈꾼다.
마지막으로 '쁘리뺘치'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일상은, 이제는 사라진 소비예트 체제의 마지막 모습들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이 소련의 오랜 자동차 브랜드인 '쥐굴리'를 타고 다니고, 버스와 아이스크림, 미용실, 벤치 등 소련 시대의 풍물이 그대로 재현된다. 고려인 반체제 록스타 '빅토르 초이'가 이끈 그룹 '키노'의 카세트 데이프도 등장한다. 키노는 당시 최고의 인기그룹이었다.
주인공은 그룹 '키노' 테이프를 자동차 카세트에 끼워넣고
올가의 아들 '료샤'와 만나며
올가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데이트를 즐긴다
1980년대 후반 소비예트 시절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들. 위로부터 실내를 장식한 헐리우드 영화 포스터, 미용실 풍경, 도심 풍경들/유튜브 캡처
그리고 올가의 아들 '료샤'에게 준 소련의 고급 카메라 '로모'. 그들이 '로모 카메라'로 몰래 체르노빌 원전의 야경을 찍기로 한 날, 눈앞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다.
폭발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성 물질이 원전 지하에 고인 냉각수와 만날 경우, 끓어 오른 물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폭발을 일으키는 '2차 대폭발'이 예고된다.
'독배'를 피하기 위해 떠나던 알렉세이는 올가와 '료샤'의 앞날을 지켜주기 위해,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냉각수 속으로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알렉세이가 보여준 행동이나 두려움, 불안, 번뇌 등 감정 곡선은 솔직히 처음부터 '영웅'으로 부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끝내 참사 현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다. 진정한 영웅은 그렇게 탄생한다.
원전사고의 참상을 보여주는 영화 장면들/유튜브 캡처
재난 구호 장면들/유튜브 캡처
폭발 사고 현장의 방사능 수준을 측정하고
주인공은 목숨을 걸고 냉각수 수조 속으로 뛰어든다/유튜브 캡처
현지 언론에 의해 러시아에서 제작된 최초의 블록버스터 원전 재난 영화라는 평을 받은 '체르노빌 1986'은 비교적 큰 스케일과 높은 완성도로 폭발 사고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영화 촬영 18개월 전 세트를 제작하고, 1980년대 일상을 되살리기 위해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에서 '체르노빌 원전'으로 등장하는 건물은 현재 가동 중인 러시아 쿠르카토프 마을 '쿠르스크 원자력 발전소'라고 한다.
아쉬운 대목도 있다. 주인공은 오염된 냉각수의 밸브를 여는 데 1차 실패한 뒤 돌아와 다른 방법을 찾는다. 냉각수 속으로 들어간 그는 왜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고 멀정할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량의 방사능 노출조차도 치명적인데, 영화속 주인공은 방사능 오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전에 나선다.
'체르노빌 1986'은 코즐로프스키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다. 당초 지난해 10월 러시아 극장에 걸기로 했다가 신종 코로나(COVID 19) 사태로 지난 4월 15일 현지에서 개봉됐다. 코즐로프스키 감독은 2년 전 '축구 트레이너'의 삶을 다룬 '트레이너'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 영화 장면 사진은 유튜브 영상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