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시간이 흐르며 기억도 흐릿해진다.
혹시 이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삼각산 곳곳에서 기도하던
1970 · 80년대를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삶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순수한 믿음이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고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고생하며 기도하거나 애쓰고 노력하는
희생적인 신앙생활, 기도생활도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하여 개인기도, 가족기도, 중보기도 등이
예전에 비해 훨씬 적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옛날에 기도하러 쉽게 올라갔던 삼각산,
북한산, 청계산을 비롯한 인근 도처 많은 곳에
있던 기도원들이 강제 폐쇄된 까닭도 있지만...
방배동 성민교회의 담임이시며 유명한 부흥사로서
한 시대를 이끌어가신 교계 지도자 신현균 목사님.
1997년 12월에 성 목회사역을 은퇴 마무리하셨다.
목사님의 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92년은 정점 집회였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조직하고 개최함으로써
전무후무한 기독교 대성회를 역사에 길이 남도록 하였다.
어쨌든 민족복음화를 위해 국내외 집회를 바쁘게
다니시면서도... 1997년의 은퇴를 앞두신 시점에서
그 몇년 전부터는 마음의 소원을 가끔 내비치셨다.
바로 장세각 목사님이 계신 삼각산 민족제단에 올라가서
은퇴후의 사역에 대한 새 비전도 다짐하시며 장목사님과
함께 시간을 갖으시겠다는 계획이셨다. 드디어 눈내린
미끄러운 길을 미리 정한 날짜에 힘들게 오르셨지만...
정작 정상에 오르셔서는 오기를 잘했다고 말씀하셨다.
기도 열정이 불타올랐던 70 · 80년대에 삼각산 제일 높은
봉우리인 능력봉(보현봉)과 그 밑에 있는 통일봉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 응답받는 장소였다.
개성출신이신 장세각 목사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명을 느껴 강화도 목회사역을 사임하시고,
홀연히 삼각산으로 올라가서 ‘민족제단’ 이름의 기도원을
세우셨다. 그곳에는 금식 기도하는 굴이 하나 있었으며,
지붕 역할을 하는 바위 모습이 한반도 모양이라
‘민족굴’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하였다.
목사님은 초창기에 풀뿌리도 캐 먹고, 도토리를
따먹으며 일상의 기도를 온전히 드렸으며,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발견하고 천막 기도원을 운영하셨다.
신현균 목사님은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삼천리 방방곡곡
면면촌촌 도도서서(三千里 坊坊曲曲 面面村村 島島嶼嶼)를
다니셨다. 반면에 장세각 목사님은 민족제단을 설립하여 수많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에게 끊임없이 꺼지지 않는 제단의 불을
제공하셨다. 두 분이 각기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신
것이다. 친구로서 목회동역자로서 황해도 출신의 고향을
떠난 동병상련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아가신 두 분!
서로 믿고 따르며 또 서슴없이 조언해주는 우정 관계는
매우 아름답고 귀중했으며 후대인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첫댓글 1985년인가 보현봉 한번 넘어가는 산행이 있었는데 그런 내력이 있었군요...
그런데 바위벽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 표시한거 몇군데 보았는데 좀 혐오스러운 느낌을 받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