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24:13~17
13.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설교>
기독교 신앙에서 크게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이루신다는 주권사상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로 자리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하는 것이 곧 믿음의 증거는 아닙니다. 대부분이 교회에서 시행되는 기독교 교육에 의한 학습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수용하는 신앙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에 의해 다윗은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욥도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제 삼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기도에 대해 신앙의 모본으로 여기며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생각일 뿐 현실에서의 우리는 늘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거부하며 산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인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과 같은 고난에 처해진다 해도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 왜 이렇게 합니까?’라는 불만, 반항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욥 23:2)는 탄식은 욥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의“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는 내용 또한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합니다.
제가 항상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실상을 봐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도 자기 부족을 채워주는 의미의 주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욥의 고난도 고난에 의한 불평과 원망도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는 현장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편을 들고 인간을 위해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가치가 없고 버림받아야 할 존재일 뿐임을 드러내는 심판의 의미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정당한 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고난이 있기 전까지의 자신의 삶의 행적과 신앙 활동들을 근거로 삼아 고통과 고난의 상황을 주신 하나님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욥 또한 그런 이유로 하나님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들은 욥의 상황을 하나님이 정당한 일로 주장합니다. 욥이 범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욥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 친구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14-17절에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죽이는 학대자나 범죄 하는 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밤에 합니다. 어두움이 자신들의 죄를 가려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죄가 드러나는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즉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72:4절의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12절에서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하나님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이유로 욥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라고 한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한탄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고난과 고통의 길에 있는 가난한 백성의 한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한탄이 우리의 한탄으로 나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한탄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가난함과 비참함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의 존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고 그로 인한 한탄도 당연히 없습니다.
욥의 말처럼 세상은 광명을 배반한 자로 가득합니다. 빛의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 증거는 빛이 세상에 왔음에도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싫어했습니다. 빛이 왔음에도 빛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드러난 것은 광명을 배반한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살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세상에 확인시키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보게 되면 오직 여과 없이 드러나는 죄성을 접하게 됩니다. 광명을 배반하고 어둠을 좋아하는 자기 본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죄로 인해 죽음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기의 현실에서 그 현실을 끊어버리고 생명으로 연결되게 한 위로부터 온 의의 능력이 광명을 배반한 우리를 빛의 세계에 있게 한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난입니다. 욥은 이 가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고난은 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욥이 겪는 고난을 정당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일도 정당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를 가난한 자 되게 하셔서 하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로 부요한 세계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신자가 겪는 상황으로 그의 신앙을 저울질 하거나 판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집니다.
엡 2장에 보면 우리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로 말합니다. 이처럼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죽음과 연결된 상태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약자를 핍박하고 무시하는 길로 갔던 것입니다. 악한 영이 여전히 세상에 활동함으로써 광명을 배반하고 빛을 미워하는 길로만 갑니다. 이러한 심판의 길에서 나의 의가 아닌 외부에서의 일방적인 의로 죽음이 아닌 생명에 연결된 거룩한 성도로 신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여전히 나의 의를 추구하는 본성이 있음을 깨달을 때마다 신자는 한탄과 함께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면서 신자로서의 부요와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우리에게 계시로 다가옵니다. 고난이 있기 전의 욥은 신앙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내 놓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라는 것이 드러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어 놓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임을 보게 하는 계시입니다. 이 계시 안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자에게 허락한 부요가 그리스도임을 배우기 바랍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