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간재집 > 艮齋先生文集後編續卷之六 > 記 > 田愚
永護齋記
湖北人上墳。不問遠祖。亦哭。人之一身。推其所自。必有本。雖是遠祖。畢竟我是佗血脉。苟念及此。自不能無追感之情。是爲晦菴夫子之言。而寔追遠反本之至情也。每一諷誦。使人油然有孝愛之心也。礪山郡東天壺山下。有宋氏始祖墓閣。曰永護齋。齋嘗經鬱攸灾。旣而移立沙洞。最後。後孫奎燮。議于諸族。復建于舊址。功未就而身死。鍾文繼而修飾之。遣從子性浩。求余記。余聞宋氏自麗氏來。王后將相節烈名碩。前後相望。蔚然爲東方名閥。而龜峯泉谷尤著焉。凡士子之立心行己。上而追踵前修。下而垂範來裔。求以無忝乎所生也。見今天理不明。人心都死。有子不養親。孫不祀先。而謂之敎學者。仁人君子。惻然思有以救之。而力有不及。則退而明義理。懋德行。以基一陽之復也。敬請宋氏。益篤反本之誠。益修追遠之禮。於以使世之遺親忘先背明向闇者。得以棄其汙浴。而偕之大道焉。則是齋也。豈徒宋氏一門之所係已哉。抑將爲四方慕效矣。惡可不勉乎哉。若夫雲林泉石之勝。今雖不論。亦將擅名于世矣。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4
호북 사람들이 조상 묘를 찾아가면, 먼 조상이라도 막론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사람의 일생을 되짚어보면, 반드시 근본이 있다. 비록 먼 조상일지라도 결국 나는 그들의 혈맥에서 비롯되었으니, 이 점을 생각하면 감정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회암 부자(朱子)의 말이며, 실로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을 돌이켜보는 지극한 정서이다. 매번 이를 읊조리면 사람들로 하여금 효성과 사랑의 마음이 절로 생기게 한다.
여산군 동쪽 천호산 아래에 송씨 시조의 묘각이 있는데, 이를 '영호재'라고 한다. 재는 한때 화재를 겪었고, 이후 사동으로 옮겼다. 나중에 후손인 송규섭이 여러 족속들과 상의하여 이를 옛 터로 다시 짓기로 하였으나, 공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송종문이 이를 이어 수리하고, 조카 송성호를 시켜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듣기에 송씨는 본래 고려말로 부터 왕후, 재상, 절의와 충절을 지닌 명망 있는 인물들이 전후로 줄지어 나왔으며, 동방의 명문 가문으로 우뚝 섰다. 그 중에서도 龜峯과 泉谷은 특히 유명하다. 모든 선비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 윗사람을 본받아 따르고, 아랫사람에게는 모범을 보여 그 출신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을 추구한다.
요즘 세상엔 천리가 밝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죽어가며,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고, 손자가 선조를 기리지 않으면서도 이를 가르침이라 여기는 상황이다. 어진 사람과 군자는 이를 애타게 여기며 구원할 방도를 생각하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니 물러나 도의와 이치를 밝히고 덕행을 진작시켜 양기를 회복할 기초를 다지려 한다.
송씨에게 간절히 청하노니, 근본을 돌이키는 정성을 더욱 두텁게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예를 더욱 수양하여, 세상에 남은 부모를 잊고 선조를 잊으며 밝음을 버리고 어둠을 향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더러움을 버리고 큰 도로 나아가게 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 재각이 어찌 송씨 일문만의 관계일 뿐이겠는가? 널리 사방에서 본받을 것이다.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름과 숲, 샘과 돌의 아름다움은 지금은 논하지 않더라도, 또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다.
전우[ 田愚 ] 1841 ~ 1922
전우(최용신 작)
조선 말기~근대기의 문신이며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 · 추담(秋潭) · 간재(艮齋) · 고옹(蠱翁) · 양하왕인(陽下尫人), 초명은 경륜(慶倫) · 경길(慶佶),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전녹생(田祿生)의 16대손이고, 부친은 전재성(田在聖)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어 사대부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854년 부친을 따라 서울 정동 · 삼청동 · 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다. 이 때부터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하여 임헌회가 죽을 때까지 아산 · 전의 · 연기 · 진천 · 상주 · 문천 등지로 따라가 살면서 학문을 연마하여 윤치중(尹致中) · 서정순(徐廷淳) 등과 함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후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계승하여 이(理)는 무위(無爲)임을 주장하고 실제상의 작용은 모두 기(氣)가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이의 명덕지시본심(明德只是本心)을 이어받아 심즉기(心卽氣) · 명덕시기설(明德是氣說)을 주장했다. 또한 이이의 심위기주(心爲氣主)를 확대하여 심본성(心本性) · 심학성(心學性)을 주장하고 성존심비(性尊心卑) · 성사심제(性師心弟) 등 새로운 성리학 용어를 많이 제창했다. 특히 '미발기질체청설(未發氣質體淸說)'을 창안했는데, 이는 스승 임헌회가 몸담았던 낙론계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렇듯이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 최후의 유학자로서 추앙받는다. 그러나 처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고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런 비판에 대해 『추담별집(秋潭別集)』에서 국치에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학문을 이루어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했고, 국권을 회복한다고 외세와 손을 잡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이라는 논지로 반박했다.
관직은 1882년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 감역 ·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 강원도도사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 ·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해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소(疏)를 올려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는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갔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안자편(顔子篇)』, 『오현수언(五賢粹言)』, 『연원정종(淵源正宗)』 등 60여 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계화도 계양사(繼陽祠) · 의령 의산사(宜山祠) · 고창용암사(龍巖祠) · 정읍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 『간재사고(艮齋私稿)』, 『추담별집(秋潭別集)』 등이 있다.
글씨를 잘 썼다. 초서에 있어서는 당나라의 손과정(孫過庭)이 쓴 《서보(書譜)》의 서풍을 따랐으며 골기가 있는 강건한 필체를 구사하였다. 강한 필획에 기개높은 학자로서의 면모와 문기가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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