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과즙, 황도 복숭아
조치원 전통시장에 왔다. 장날이 아닌데도 감자, 마늘, 양파 등 밭작물이 나올 때라서인지 시장은 풍성하고 왁자지껄하다. 감자와 양파를 사고 자주 가는 과일가게에 들렀다. 가게 안쪽에서 만삭으로 보이는 임산부가 복숭아 가격을 놓고 흥정하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제법 굵은 황도가 여덟 개 들어있었다. 세상에, 유월 초에 황도가 나오다니. 사장님은 놀라워하는 나에게 하우스에서 키운 복숭아라 출하량이 적고 가격도 비싸다고 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빈손으로 나갔던 임산부가 다시 돌아왔다.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한참 복숭아를 보더니 반 상자만 사겠다고 했다. 나는 얼른 나머지 반 상자의 셈을 치르고 가게 밖으로 임산부를 따라 나가 복숭아를 건넸다. 그녀는 바로 받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사십 년 전 한여름, 만삭의 나에게도 공짜로 복숭아를 먹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며, 다시 복숭아 봉지를 건네고는 부디 순산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 복숭아 과수원을 하던 이장님이 내게 해 준 말씀이었다.
딸아이는 사십 년 전 8월 31일에 태어났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여름이라서 옷이 얇아 만삭의 배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불러온 내 배를 가리키며 ‘공해’라고 농담을 했다. 나는 위로 두 살 터울인 아들을 시어머님께 맡기고 시골 면사무소에 근무했다. 시내버스를 한번 갈아타고도 버스에서 내려 삼십 여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이지만 무거운 몸으로 걷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출근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아 숨을 물아 쉬며 정신없이 걷는데, ‘김 양’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가에 있는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따던 이장님이 커다란 복숭아 한 개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복숭아 껍질을 벗기며 먹고 가라고 했다. 보기만 해도 과즙이 흐를 것 같이 잘 익은 황도였다.
오랜 입덧이 가시면서 밥을 먹고 돌아서면 또 배가 고팠던 터라, 염치를 차릴 겨를이 없었다. 껍질이 벗겨진 말랑말랑한 복숭아를 크게 한 잎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적시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정신없이 복숭아를 먹어치우는 동안 이장님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띠고 계속 껍질을 벗겨주었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복숭아 세 개를 먹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장님은 당신 딸도 임신했을 때 복숭아를 한자리에서 열 개씩 먹었다며, 검정 비닐봉지에 복숭아 세 개를 따로 넣어주셨다. 이후로 복숭아를 따는 날이면 이장님은 미리 봉지에 담아놓은 복숭아를 건네며 순산하기를 빌어주셨다. 오후 3시쯤 되면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당직실에 들어가 복숭아 한 개를 먹고 나면, 툭툭 발길질하던 배 안의 아이도 순해졌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때는 토요일에 반나절을 근무했다. 퇴근 후 허기를 참고 버스를 타려고 걷고 있는데 이장님 과수원에서 한참 복숭아를 따고 있었다. 복숭아를 먹고 가라고 붙드는 이장님을 따라 그늘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장 사모님 혼자서 복숭아 봉지를 벗겨 품질을 선별하고 있었다. 만삭의 나는 어머님이 화나셨을까 봐 마음을 졸이면서도 해가 기울도록 복숭아 고르는 작업을 도왔다. 이장님은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정류장에서 복숭아가 가득 담긴 자루를 버스에 올려주셨다.
시댁은 대문 밖이 바로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복숭아 자루를 머리에 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님은 큰아이를 등에 업고 대청마루에 서 계셨다. 자루를 받아주시려니 하고 내가 머리를 내밀자 어머님은 복숭아 자루를 안마당으로 밀치셨다. 어설피 묶였던 자루의 끈이 풀리고 복숭아가 ‘떼구루루’ 안마당에 굴렀다.
어머님은 등에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데리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한참을 황망하게 서 있다가 얼굴에 눈물범벅이 되었던 큰아이를 생각했다. 소쿠리에 덜 뭉개진 복숭아를 주워 담아, 깨끗이 씻은 후 안방에 들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밥솥에 불을 때는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부른 배를 다독였다.
어머님의 돌발행동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남편에게도 입을 떼지 못했다. 어머님은 평소에도 내가 퇴근 후 버스를 놓쳐서 집에 늦게 오면 버럭 화를 내곤 하셨다. 토요일 오후에는 무엇인가 할 일이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만삭의 며느리가 머리에 이고 온 복숭아를 그렇게 팽개칠 수 있단 말인가? 급한 성격에 분을 참지 못한 어머님도 속으로는 어지간히 미안하셨던 것 같다. 명절에 온 큰 시누이에게 당신 며느리의 무던함을 자랑하는 것을 방에서 아이를 재우다가 들었다.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딸이 태어났다. 어머님은 하루 여섯 차례 소고기를 듬뿍 넣어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나는 어머님께서 주시는 미역국을 국물도 남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출산하고 열흘쯤 지나니 나도 아기도 복숭아처럼 뽀얗게 피어났다. 그때 배 안에서 복숭아를 받아먹고 태어난 아기가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사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일은 내 안에서 자주 들썩거렸다. 어머님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런 모욕적인 처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 일은 물컹한 복숭아처럼 여리던 나에게 예방 주사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사십 년 가까이 공직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으나 어느덧 천도복숭아처럼 속까지 단단해진 나는 큰 탈 없이 헤쳐나갈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그때 어머님의 나이가 되어 사돈과 교대로 손주들을 돌보고 있다. 아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예쁘지만, 딸과 사위의 퇴근이 늦어지면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 고단하다. 어머님은 손자를 돌보며 밭농사까지 지었으니 그 고단함이 어떠했을까를 이제야 되짚어본다.
요즈음은 배부른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다. 양손으로 복숭아 봉지를 들고 환하게 웃어준 그녀가 멀어지고 있다. 잘 익은 황도의 껍질을 벗겨주시던 이장님처럼 내 마음도 그녀가 복숭아를 맛있게 먹고 부디 순산하기를 빌어준다. 올해도 뜨거운 태양에 제대로 익은 황도가 풍년이기를, 그래서 딸과 손녀와 함께 마음껏 달콤한 과즙에 빠져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