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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장 17-21절. 유대인들에게 전도하지 말고 이방인에게 가라
17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t happened when I returned to Jerusalem and was praying in the temple, that I fell into a trance,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Ἐγένετο δέ μοι, ὑποστρέψαντι εἰς Ἱερουσαλὴμ
it happened then to me, having returned to Jerusalem
직역하면 ‘그 후에 나에게--일이 일어났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란 뜻입니다.
’일어났는데‘(Ἐγένετο)은 부정과거로서(it happened)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가리키며, ’돌아와서‘(ὑποστρέψαντι)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returned) 과거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καὶ προσευχομένου μου ἐν τῷ ἱερῷ
and praying of me in the temple
직역하면 ‘내가 성전에서 기도할 때’란 뜻입니다.
‘기도할 때에’(προσευχομένου)는 현재분사로서(praying) 계속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황홀한 중에
γενέσθαι με ἐν ἐκστάσει
to fall I into trance
직역하면 ‘내가 황홀지경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빠졌다’(γενέσθ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fall) 황홀경에 빠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란 AD 32년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있은 다음에 AD 35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때를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1:17-19.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란 초대 교회가 아직 예루살렘 성전을 기도 장소로 사용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거지를 예수 믿게 하고 고쳐주었습니다.
이사야나 예수님도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6:7. 막 1:7).
3. <황홀한 중에>란 바울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 본 것을 말합니다.
이 때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 바울은 비두니아에서 동방으로 전도하려고 애를 썼는데, 이 때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기도할 때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서방인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기도하는 중에, 유대인들만 상대하고 살아왔는데, 환상 중에 하나님이 부정한 음식도 정하게 하셨다는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면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전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구스 나라의 재무장관에게 전도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지금 잘되고 있는 사마리아 전도에 힘쓰고 싶은데, 광야로 가라고 하시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스 내시를 전도함으로써 한 나라를 복음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사 55:9).
그러므로 아무리 전도나 목회같이 좋은 일을 하더라도, 내 생각을 따를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가야 하나님이 들어 쓰시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환상은 주로 기도하는 사람의 고정관념을 꺾고 하나님이 다른 길을 가라고 보여주실 때, 비상적으로 특별하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기도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환상만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급할 때 하나님께서 비상사태 때 보여주시는 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하나님이 일상적이지 않는 환상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겠습니까.
18절.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saw Him saying to me, 'Make haste, and get out of Jerusalem quickly, because they will not accept your testimony about Me.‘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καὶ ἰδεῖν αὐτὸν, λέγοντά μοι
and to see Him, saying to me
직역하면 ’그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말씀하시는’(λέγοντά)은 현재분사로서(saying)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가리키고, ‘보았다’(ἰδ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ee) 분명히 본 사실을 가리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Σπεῦσον καὶ ἔξελθε ἐν τάχει ἐξ Ἱερουσαλήμ,
make haste and go away with speed out of Jerusalem
직역하면 ‘서둘러라. 그리고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는 뜻입니다.
‘서둘러라’(Σπεῦσ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make haste) 어서 급히 서둘러라는 명령어이고, ‘나가라’(ἔξελθε)도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go away)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급히 서둘러서 어서 예루살렘을 떠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διότι οὐ παραδέξονταί σου μαρτυρίαν περὶ ἐμοῦ.
because not they will receive your testimony about Me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 대한 너의 증언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에서 동사(παραδέξονταί)는 미래형입니다(they will receive).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려고 3년간 아라비아에서 기도하고, 구약 성경을 복음적으로 정리하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급하면 주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실제로 이 때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28-30.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이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가이사랴에 데리고 가서 바울을 배에 태워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유대교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면 유대인들이 효과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의 판단이 맞을 것 같이 생각됩니다.
실상 바울도 지식적으로 유대인 전도가 자신이 있었고, 또 과거에 유대인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전도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 전도가 적격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듣지도 않고, 무조건 배신자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이 청중들에게 유대인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한 청중들도 처음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무조건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이려고만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을 부리며 듣지도 않고, 전도를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기회를 보면서 일단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다니면서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10:23).
그러나 이때 바울은 죄수로 잡혔기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19절.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said, 'Lord, they themselves understand that in one synagogue after another I used to imprison and beat those who believed in You.
내가 말하기를
κἀγὼ εἶπον
and I said
동사(εἶπον)는 부정과거로서( said) 단호하게 말씀드린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 내가-- 가두고
Κύριε, αὐτοὶ ἐπίστανται ὅτι ἐγὼ ἤμην φυλακίζων
Lord, they themselves know that I was being imprisoning
직역하면 ‘주여, 내가 가둔 것을 그들이 친히 알고 있습니다’는 뜻입니다.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가두고’(ἤμην φυλακίζων)에서 앞의 동사는 미완료과거로서(I was being) 계속된 동작을 가리키고, 뒤의 동사는 현재분사로서(imprisoning) 두 단어가 합하여 계속 가두고 있었던 것을 가리킵니다.
‘아나이다’(ἐπίστανται)가 한글번역에는 20절 끝에 번역되어 있는데, 현재형으로서(know) 그들 자신이 현재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καὶ δέρων κατὰ τὰς συναγωγὰς
and beating in each of those synagogues
직역하면 ‘그들의 각 회당에서 때리고’란 뜻입니다.
‘때리고’(δέρων)는 현재분사로서(beating) 앞의 미완료동사(ἤμην, was being)와 합하여 계속 때리고 있었던 모습을 가리킵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을
τοὺς πιστεύοντας ἐπὶ σέ·
those believing on You
직역하면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이란 뜻입니다.
‘믿는’(πιστεύοντας)은 현재분사로서(believing) 계속 믿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1. 주님이 바울에게 속히 예루살렘에서 떠나라고 하셨을 때,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부인하고, 주님이 말씀할 때 우리는 죽은 자와 같이 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대화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숭배 하는 백성들이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두 죽이고 모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했으나, 모세는 반대를 하고 하나님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척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 때 바울이 주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한 이유는 바울이 불신자일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기독교를 반대한 인물인데, 이런 바울이 예수 믿고 전향한 사실을 가지고 전도하면, 유대인들이 효과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모델케이스이기 때문에, 바울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라고 오해하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바울이 유대교를 배반한 반역자라면, 다메섹에 이끌고 간 군사를 되돌려서 예루살렘을 치고, 유대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감동 감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20절.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when the blood of Your witness Stephen was being shed, I also was standing by approving, and watching out for the coats of those who were slaying him.‘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καὶ ὅτε ἐξεχύννετο τὸ αἷμα Στεφάνου τοῦ μάρτυρός σου,
and when was being poured out the blood of Stephen the witness of You
직역하면 ‘당신의 증인 스데반의 피가 흘려지고 있을 때’란 뜻입니다.
‘흘릴 때에’에서 동사(ἐξεχύννετο)는 미완료과거 수동태로서(was being poured out) 계속 피가 흘려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καὶ αὐτὸς ἤμην ἐφεστὼς, καὶ συνευδοκῶν
and I myself was being having stood by, and consenting
직역하면 ‘내 자신이 계속 곁에 서서 찬성하고’란 뜻입니다.
‘내 자신’(αὐτὸς, I myself)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곁에 서서’(ἤμην ἐφεστὼς)에서 앞의 동사는 미완료과거이고(was being) 뒤의 동사는 완료분사로서(having stood by) 계속 곁에 서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찬성하고’( συνευδοκῶν)는 현재분사로서(consenting) 계속 잘한다고 찬성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καὶ φυλάσσων τὰ ἱμάτια τῶν ἀναιρούντων αὐτόν.
and watching over the garments of those killing him
직역하면 ‘그를 죽이는 자들의 옷들을 지키고 있는 것을’이란 뜻입니다.
‘그들도 아나이다’는 19절 초두에 나와 있습니다.
‘죽이는’(ἀναιρούντων)은 현재분사이로서(killing) 죽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지킨 줄’(φυλάσσων)은 현재분사로서(watching over) 앞의 미완료과거(ἤμην, was being)와 연결하여 계속 지키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9절과 20절에는 바울이 반기독교인으로 활동할 때, 기독교인들에게 가했던 3가지 악행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주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가둔 것은 모든 사회활동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가정생활도 못 하게 하고, 교회 가서 신앙생활도 못 하게 하고, 먹고 사는 일이나 가족부양이나 일가친척도 일체 못 만나게 하여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성도를 감옥에 가두고서 유대교인으로 전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때렸습니다.
즉 바울은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잡아다가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생활 중심지인 회당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폭행을 가했습니다.
당시에 매를 때리는 것은 보통 40에 하나 감한 태형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이 매를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회당에서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독교인들을 처형한 것은 다른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지 못 하게 하고, 혹시 이미 예수 믿은 사람도 무서워서 유대교로 다시 전향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종의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셋째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책임자 노릇을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주모자와 책임자 노릇을 한 사건은 사도행전 7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7:57-58.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이 때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의 최연소 공회원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살인자들의 옷을 지켰습니다.
21절.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He said to me, 'Go! For I will send you far away to the Gentiles.'“
나더러 또 이르시되
καὶ εἶπεν πρός με
and He said to me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동사(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떠나가라
Πορεύου,
go
‘떠나가라’(Πορεύου)는 현재 명령형으로서(go) ‘가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ὅτι ἐγὼ εἰς ἔθνη μακρὰν ἐξαποστελῶ σε.
for I to Gentiles far away I will send you
직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멀리 이방인들에게로 너를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내가’(ἐγὼ, I)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보내리라’(ἐξαποστελῶ)는 미래형입니다(I will send).
1. 바울이 자기 생각에는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멀리 이방인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유대인 전도는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이 책임 맡아서 행했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들은 이방인 전도에 적임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사도는 우선 이방인의 말을 하지 못했고, 또 이방인의 문화에 대한 학식도 없고, 그리고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일찍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차 2차 3차 이방인 전도를 통해서 놀랍게 이방인 전도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이방인의 도성으로 가는 곳마다 먼저 동족인 유대인에게 전도했습니다.
지금도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랑으로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족인 유대인들은 바울의 애끓는 전도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영원하고 참된 바울의 사랑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족이나 어떤 친척들은 아무리 전도해도 유대인들처럼 거부하고 대적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복음은 택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택한 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신 것을 보고, 성도님들도 자신의 감정 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동행하시므로 성공적인 삶이 되시고,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