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의 능력이 흐르게 하라
고린도전서 15:19~22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여름이 되면 하늘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쉽게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호수나 개울의 표면에 산란하게 되면 알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여기서 부화한 애벌레는 무려 3여 년의 시간을 거쳐 20~30회 탈피하여 비로소 날갯짓하며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툰 비행 솜씨로 군무를 지어 날아다니다가 거미줄에 걸리기도 하고 개구리에게 잡아먹히기도 하면서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하루살이가 있습니다.
사람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아무 목표와 의미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인류 전체의 87%에 이른다고 합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닌 내 인생의 뚜렷한 푯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것에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도 신앙이 현재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더욱 관심을 두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현재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 같으면서 언제를 현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바로 이 순간이라고 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로 지나고 미래로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쉼 없이 빨려 들어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미래에 될 것에 관심을 지니고 준비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른 믿음 생활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지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은 시간의 흐름이 아닌 영원한 세계입니다. 영원이란 영어로 Eternal 또는 Immortal이라고 하는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것들이 현재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지된 것도 아니며,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에 매여 있을 때 보다 더욱 활기차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5:19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현재 잡은 것은 모두 과거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힘쓰고 애써 성취한 것을 영원토록 간직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을 잃어버릴 때가 올 때 그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한평생 이러려고 몸부림치며 살았나?” 하는 회한이 온 마음을 사로잡아 극심한 괴로움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고 영원한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이런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는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며 희망의 말씀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와 더불어 부활의 능력이 흐르게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기 전 마음에 뜻을 정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릴 때 그분의 세심한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로고스이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성품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시고 ‘여호와’란 이름도 함께 알리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은 영원불멸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속성이 예수님께 담겨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 있기에 죽었던 자들도 살려낼 수 있는 권능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나타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도 완전히 파괴된 이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선지자입니다. 이런 에스겔을 하나님이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면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십니다. 이 ‘인자’는 사람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담’인데, 이 단어는 흙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아다마’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흙으로 창조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육체로 지음을 받았기에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고 뼈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 뼈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뼈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겔 37:4에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시라고 말씀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하였더니 요 11:44에서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 아무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하였습니다.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이 예수님 안에 담겨 있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부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성령과 늘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영원부터 영원히 존재하는 분으로 예수님은 그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였습니다. 성령님은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에는 언제나 성령이 함께하셨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이기게 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는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사망의 권세를 지니고 세상에서 많은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해 왔습니다. 그런 마귀를 이기게 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함께 이 땅에서 사역하셨고 성령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분의 육체는 죽어서 세마포에 싸여 돌무덤에 안치되었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성령은 살리는 영으로 더는 무덤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기록대로 죽은 자 가운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죽음을 이기신 것이요 마귀의 일을 멸하신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부활하실 수 있는 이유는 천사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들어가신 돌무덤은 커다란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마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무덤이 가져다주는 상징은 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었습니다. 이 돌을 치운 장본인이 바로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돌만 옮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졌을 때 입었던 세마포를 벗겨내기도 하였습니다.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고 했습니다. 개역성경에서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하였고, 쉬운 말 성경에서는 “또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도 잘 개어져, 그 삼베 자락 옆에 놓여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개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개어 놓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면서 세마포에서 몸이 먼저 벗어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은 머리의 수건은 예수님 스스로 벗겨내고 이를 받아서 천사들이 개어 놓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나셨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몸에 걸맞은 하늘에 속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이 옷을 준비한 것이 바로 천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기 위하여 세마포를 챙겼고 수건마저 개어 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조자가 되었고, 부활의 확증을 나타내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조화로 이뤄지셨습니다. 어떤 존재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성도에게 확증으로 나타났고 소망으로 주어졌습니다.
네 번째는 부활의 능력이 흐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but now)' 이 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가 말하는 것은 앞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고전15:21,22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육체의 유전자를 타고 죄가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 왔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 죄 아래 신음하며 죽음의 허무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생명의 말씀을 전하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전하신 후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계셨던 성령을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담겨 있고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요소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내 것이 되어 어떤 상황 어떤 여건에서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태움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깊은 바다 한가운데 던져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에 홀로 버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공중에서 내 몸이 산산이 조각이 나더라도 내 안에 담긴 말씀과 성령 그리고 천사가 보호하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부활의 증거가 차고 넘치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요 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벗어난 흔적인 세마포를 남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므로 증거를 남겨야 하는데 옛것에 담긴 것을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옛 습관과 고집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기울어졌던 것들을 떨쳐 버려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늘에 속한 분으로 세상에 잠시 머물러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부활 영이 내 안에 있으므로 하늘에 속한 자로 잠시 있다가 하나님 나라에 갈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땅에 육체로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이 부활의 능력을 흐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속하여 근심하고 염려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의 마땅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로 있을 때 합당한 것이지 하늘에 있는 부활의 영을 힘입어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돌이키고자 하는 의지적인 표현입니다. 순간마다 찾아오는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